은퇴, 새로운 시작
이향원(감이당)
이기적인 큰 언니
은퇴 이야기를 시작하자니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왜 교직에 들어오게 되었나 되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자니 남다른 집안 환경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이었고,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내내 딸들만 무려 여덟 명을 두었고, 막내로 태어난 남동생은 첫째인 내가 대학에 들어간 스무 살 때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우리 집은 가난하니 공부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다. 나는 그리 희생적인 큰 언니가 아니었다. 엄마가 그때는 귀했던 바나나를 사서 나에게만 주면 그걸 동생들 몰래 혼자만 먹는 이기적인 큰 언니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희생과 봉사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그런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항상 둘째에게 밀렸다.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고 똑똑하며 키가 크고 예쁘기까지 한 동생을 늘 시기하고 질투했다. 어쨌든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동생이 많으니 교대에 가라.”는 말을 듣고 별생각 없이 교대에 가게 되었다. 당시 교대는 본고사 없이 학력고사로만 갈 수 있는 2년제 대학이었다. 나는 80학번이다. 본 고사인 논술 없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편리함도 좋았다. 그렇게 해서 자유를 찾아 대전 집을 떠나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로 와서 친척 집을 전전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 2년 뒤에 둘째 동생이 올라왔고 3년 뒤에는 셋째마저 서울로 올라와 함께 자취하며 살게 되었다. 교대가 2년제라 학력 콤플렉스가 생겨 교직에 있으면서 야간 대학 불문과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는데 동생들이 줄줄이 올라와 내 앞길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허무맹랑하게도 불문과를 나와 파리로 유학 가는 꿈도 꾸고 있는 터였는데 환경은 나를 받쳐주지 않는 것이었다. 더구나 둘째 동생은 의대를 들어가서 뒷바라지까지 해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괴로움을 피해 결혼으로 도망쳤다. 더구나 아이까지 덜컥 임신하여 허황한 내 꿈은 사라지고 별수 없이 야간대도 그만두어야 했고. 집안 살림과 육아, 교사 생활에 전념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 결혼 생활은 우울했다. 시어른들과 같이 살아야 했고, 은행원이었던 남편은 도박에 빠져 하루가 멀다 하며 외박을 일삼고 돈 한 푼 갖다주지 않았다. 이기적인 내가 전적으로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해야 하니 억울함과 그에 대한 원망이 점점 커져만 갔다.
전투적인 교사
그렇게 생활하다가 전교조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82년도에 교사로 첫 임용을 받았는데 당시는 정말 교장의 전횡이 심했다. 어떤 정도냐면 수업을 하는 중에 교장이 갑자기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내 수업을 빼앗아 자기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집중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는 서슴없이 바보, 천치라며 윽박질렀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고 있으면 아이들 뛰는 보폭이 틀렸다고 아이들을 불러 세워 보폭에 맞추어 다시 뛰게 했다. 여자 교장이었는데 운동장 조회를 하면서도 줄이 틀리거나 딴짓을 하면 그 아이들을 불러 따귀를 때리며 훈시했다. 80년대 비민주적인 나라 상황과 더불어 학교도 참으로 살벌한 시절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보는 신문값이며, 우윳값을 교사가 걷게 했다. 그 걷어 놓았던 돈을 잃어버려 채워 놓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도 교장은 우리 반의 신문값이며 저축, 우윳값 실적이 적다고 나를 교장실로 불러 교육철학이 부족한 교사라고 나무랐다.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교장의 전횡에 이를 갈며 교사 노조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곤 했다.
그러던 중 두 번째 학교에서 대학 때 보았던 선배가 전근을 왔다. 직원회 석상에서 일어나 발언도 하며 학교 민주화를 위해 애쓰는 그 선배가 너무 멋있었다. 그해가 89년도였다. 전교조가 창립된 것이다. 교사 노조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온 나는 당연히 전교조에 가입했다. 그리곤 그 선배보다 더 전투적인 교사가 되었다. 아이를 데리고 집회와 시위에도 참여했다. 어느새 나도 교직원 회의 석상에서 발언도 하고 학교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열혈 투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때는 직원회의 석상에서 교장의 면 전에 유인물을 던지고 교무실 문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출석부를 없애는 투쟁에서는 그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학교로 전근 가야 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 학교를 떠나지 않겠다고 교감과 몸싸움을 벌이며 버티고 맞서기도 했다. 이기적인 큰 언니는 이제는 교사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전투적인 교사가 되어 있었다.
무얼 위해 그리 싸웠을까? 생각하면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쌓인 불만을 학교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감추고 무조건 ‘묻지 마’ 투쟁에 퍼부으며 살아왔던 것 같다. 조직에서 뭔가 시행하라는 오더가 떨어지면 아무 생각 없이 그걸 성취하기 위해 달려 나가는 무지막지한 교사였다. 그러나 아이들하고는 잘 지냈다. 지금도 아이들의 웃음소리, 천진난만한 행동들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동료 교사들은 당연히 그렇게 과격하고 거친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교사들을 잘 설득하지도 못했고. 그들에게 어떤 명분만을 내세워 함께 하기를 강요한, 어찌 보면 교장과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권력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교장이 둘이라고 늘 공공연히 얘기들 했었다. 선생님들에게는 자기들에게 간섭하고, 괴롭히는 또 다른 교장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10년 넘게 활동하다 보니 조직상황도 보이기 시작했다. 조직에서 여교사의 처지는 가정에서처럼 불평등했다. 여성 조합원의 숫자가 더 많은데도 위로 올라갈수록 남성 간부가 더 많고. 우리는 늘 그들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꼴이 되었다. 그러한 불평등에 맞서 나는 또 조직 내에서도 성평등을 내세우며 조직 민주화 운동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전교조 내에서도 그에 맞서 싸우는 과격한 투사가 된 것이다. 나는 어느새 어디서나 싸우는 싸움닭이 되어 있었다. 그런 싸움닭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가정생활을 견디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남편과 대판 싸운 어느 날 새벽 전교조 활동에서 만나 친하게 지내던 후배네 집으로 도망쳤다. 15살 된 아이도 놔두고……. 전투적인 교사의 이면에는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늘 내재하고 있었다.
심 봤다!
그 후배와의 생활도 편하진 않았다. 내가 이혼하자 후배는 교직을 그만두고 친구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3년 후 건강과 재정상의 이유로 무일푼으로 돌아왔다. 이후 전적으로 내가 경제생활을 책임져야 했다. 사실 전 남편과 살 당시 집 주인이 전세금 삼백만 원을 올려 달라고 했고. 그걸 나에게 해결하라는 시어머니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남편과 싸우다 집을 나왔는데. 나중에 후배와의 생활을 돌아보며 계산해보니 그녀에게 들어간 돈이 거의 3억이었다. 삼백만 원을 안 내려다 그 100배의 돈이 날아간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녀와 그렇게 13년을 함께 살았다. 고통을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쳐봤자 항상 더 큰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나는 또 그렇게 우울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8년 어느 날 우연히 아산(나는 서울 교사 생활에서 아산으로 내려와 서울로 출, 퇴근하는 생활을 7년 동안 했다)의 어느 작은 도서관에서 고미숙 선생님의 『아직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게 되었다. 눈이 크게 떠지는 것 같았다. 나의 삶에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오, 유레카! 심 봤다! 아, 이런 삶도 있구나. 나도 사실 후배랑 살게 되었을 때는 좋은 공동체를 꿈꾸었던 건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날부터 닥치는 대로 고미숙 선생님 책을 찾아 읽었다. 그것은 너무 신선한 희망을 선사하는 세계였다. 특히 같이 밥을 먹고 공부하는 그 공동체가 너무 부럽고 나도 거기에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런 꿈을 꾸며 책만 읽고 살다가 당시 남산 밑 골목에 있는 ≪수유-너머≫에도 공부하러 좀 다녔었다(『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저자 이만교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학교 근무를 마치고 저녁에 거기에 갔다 아산으로 돌아오는 일은 너무 피곤하고 힘들었다. 우선은 책만 읽는 일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어(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보건 선생님이 소개했다) 어렵사리 그 후배와 헤어지게 됐다. 그렇게 해서 생활이 좀 안정되자 2018년에 드디어 감이당에 보무(步武)도 당당(堂堂)하게 공부하러 가게 되었다. 그때 ‘아, 이제야 이곳에 오게 됐구나’ 하며 감이당에 들어설 때의 그 뿌듯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감이당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 백수가 돼서 공부하며 살라는 말이었다. 처음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 됐다. 공부하는 공동체를 그렇게 꿈꾸어 왔으면서도, 평생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기에 익숙해진 나는 당장 학교를 그만두고 ‘공부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뜻 학교를 그만두는 게 영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에 영원히 있을 순 없고 언젠가는 퇴직을 반드시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면 백수가 될 것이고 그때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공부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그렇게 꿈꾸고 원하던 공부하는 길에 들어섰지만 글쓰기를 하면서 충만한(?) 자의식이 깨질 때는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게다가 오랜 시간 쌓아온 습속(강한 경쟁의식과 과격하고 거친 투쟁 방식) 때문에 좌충우돌 도반들과의 마찰도 있어 힘든 시간이었으나 나는 여러모로 공부해서 살 수 있었다.
공부해서 살았다
그렇게 감이당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어느덧 나도 백수를 꿈꾸게 되었다. 심지어 언젠가 백수가 될 터인데 하루라도 빨리 백수가 되어 그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퇴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원하는 백수가 당장 될 수 없었다.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됐다. 내가 서울에서 근무하다 아산에 있는 학교에 온 게 2014년이었는데. 그해 4월 16일, 우리가 절대 잊지 못하는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내내 울고만 다니던 중에 서울 전교조의 한 모임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지고 퇴진하라는 내용을 청와대 게시판에 올리게 되었다. 이후 나는 ‘국가공무원법 정치 행위 금지’와 ‘공무 외 집단행위 금지’ 의무를 어겼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 다니게 되었다. 이 꼬리표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파면되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떼어내지 못했다. 결국 명퇴하려면 벌금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법원에 그 일로 찾아가게 되면 법원 직원도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잘 해결이 되어서 명예롭게 퇴직할 수 있을 거라며 나의 퇴직을 말리곤 했다. 근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백 오십 만원 벌금형을 받은 전과자로 명퇴하게 되었다.
또, 아산 학교로 온 지 5년 기한이 돼서 다른 학교로 전근 가게 되었는데, 이 학교는 삼성 직원의 자제들이 많았다(아산에는 삼성 SDI 공장이 있다). 학부모 민원이 서울 못지않았다. 이전 학교는 그나마 목가적으로 지냈었는데(나중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커졌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아니, 서울에서는 변두리 학교만 전전해서 잘 몰랐었는데 오히려 서울에서 근무하던 학교보다 학부모 입김이 더 센 것 같았다. 아이의 물건이 없어졌다고 한 학부모가 아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달라고 학교에 온 게 일곱 번이 넘었다. 나이 들어서 딸 같은 나이의 학부모들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학교 폭력 사건이 터졌다. 이런 일은 내 교직 경력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남학생인데 친구를 성추행한 것이다. 가해, 피해 학생을 따로 격리시키는 일부터 교장과 부딪쳐야 했고. 가해 학생의 아버지는 계속 찾아와 아이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다.
결국 아이는 학교 폭력 위원회 회의를 거쳐 전학 가게 되었다. 그런 과정의 일을 겪는데 혈압이 높아지고 소화도 안 되면서 설사를 계속하니 몸이 점점 힘들어졌다. 도저히 견딜 상태가 아니었다. 감이당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늘 백수를 꿈꿔 왔는데 이제 정말 학교를 떠날 때가 됐나 싶었다. 그렇게 대통령을 고발했다는 것에 대한 괘씸죄에 걸려 오랫동안 버티다가 벌금을 내고. 건강 문제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 결국은 명퇴를 신청하게 됐다. 학교장은 좋아하고(싸움닭인 내가 떠나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들은 아쉬워하기도 했지만(그 학교에서는 1년 동안이라 그런지 선생님들과 그래도 잘 지냈다) 나는 정말 아무런 미련 없이 후련하게 학교를 떠났다. 그랬건만 막상 아침에 집을 나서는 일이 없어지자 좀 이상하고 서운했다. 산책하다가 망연자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랫동안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책을 이해하기 위해 기를 쓰다 보면 외로움이나 우울함은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15살 때 집에 두고 나온 아이는 커서 나에게 찾아와 복수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스물세 살쯤 되었을 때 연락이 안 돼 아이에게서 온 편지 봉투에 적혀 있는 서울 주소를 보고 찾아가게 되었다. 당시 아이는 사채를 쓰고 갚지 못해 몹시 피폐해져 있었다. 사채를 갚아주고 그 애를 아산 집에 데려와 같이 살았지만 그해 말 아이는 다시 사채를 쓰고 서울로 가버렸다. 아이는 당시 후배와의 생활에서는 전적으로 생활비를 감당하는 엄마에게 불만을 가득 품고 그렇게 떠났다. 5년 후 딸 아이는 저보다 어린 웬 남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결혼하고 나서 서울에서 하던 일을 접고 중국으로 사위와 함께 가더니 또 몇 년 만에 돌아와 내가 사는 집 근처에서 살았다. 여러모로 일자리를 알아봐 주고 도움을 줬으나 딸과 사위는 다시 또 서울로 가버렸다. 그동안 남친에게 빌리고 내가 저축한 돈을 털어 딸에게 준 게 2억이 넘었다. 나는 퇴직금을 털어 그 빚을 갚았다. 후배와 딸에게 들어간 돈이 거의 5억이 넘어가는 셈이었다.
나중엔 딸과 사위가 전세 사기까지 일으켜 그 빚을 갚아달라고 딸의 친구 등 여러 명이 합세해서 아산 집에 찾아왔다. 그 중엔 조직의 ‘어깨’ 같은 사람도 있었다. 딸 친구의 거짓말에 속아 집까지 팔아서 갚아주려고 했으나 남친과 감이당 도반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어져 있을 때 나는 오로지 공부해서 살 수 있었다. 학교 폭력 사건으로 어려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려움으로 번뇌의 밤이 지속되고 속이 부대껴 잘 먹지도 못하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고 숙제를 하다 보면 그런 일들은 아스라이 사라져 공부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었다.
엄마의 일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엄마의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살게 되면서 그 부유한 환경을 부러워하고 욕심만 키워서 살아왔던 것 같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엄마의 살림살이를 감당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내 남에게 빚을 져서 살아왔다. 그 여러 식구가 푸짐하게 올라온 밥상을 두고 맛있는 음식을 허겁지겁 먹던 생각이 난다. 가난한 집 밥상에 아주 큰 갈치나 꽃게가 들어간 찌개가 여러 번 올라왔다. 엄마는 음식 솜씨도 좋았다. 그러나 그 풍성한 음식을 먹는 거나 우리 식구가 별 탈 없이 생활하는 거에는 엄마가 꾸어온 빚이 잔뜩 들어간 거였고. 그 빚잔치는 나중에 아버지 연금의 반이 날아갈 정도로 큰 것이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엄마의 빚을 지는 생활은 계속됐다. 엄마는 조울증 판정을 받았고. 치매까지 겹쳐 최근에는 노인네가 경찰까지 오고 가시다가(마트의 물건까지 훔치게 되었다) 결국에는 그렇게 가시기 싫어하던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의 힘든 시간도 공부하며 다 견디고 넘어갈 수 있었다. 정말 공부를 해서야 살 수 있는 나날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기
명퇴하고는 사실 서울로 가서 감이당 근처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늘 꿈꾸던 함께 밥을 먹고 공부를 하는 공동체를 실현하고 싶던 것이다. 남친은 극구 반대했다. 자신은 여기 아산을 못 떠난다는 것이다. 전 부인과 사별한 남친은 모든 추억이 묻어있는 이곳을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라도 가야 했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고(그는 힘든 일을 겪는 내내 내 곁을 지켜준 사람이다), 퇴행성 관절염이 와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는 남친을 보면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는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걸 감행해왔다. 동생들을 놔두고 결혼으로 도망쳤고, 아이도 놔두고 더 안락한 환경이라고 생각한 곳으로 늘 도망쳐 살아왔다. 그리고 후배와의 생활도 힘들어지자 또 이 사람에게로 도망쳐 살아온 것 아닌가. 그렇게 난 지금, 여기의 불행을 탓하며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늘 꿈꾸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어리석게 살아왔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접하고 있는 티벳의 성자 미라래빠는 말한다.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대의 잘못, 똑바로 볼지어다!”(『미라래빠의 십만송 1』, 가르마 첸치창, 이정섭 옮김, 시공사, 91쪽) 그렇다. 내가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다는 건 내가 잘못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늘 외부의 다른 곳에 눈을 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버리고 고통에 직면하지 않으려고 지금, 여기를 떠나 더 안락하다고 생각하는 환경으로 도망치는 삶을 살아온 나. 미라래빠는 “눈앞에 나타난 모든 세계가 마음 자체”(같은 책, 116쪽)라고 한다. 내 마음이 모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천국도 지옥도 만든다. 그동안 늘 괴로웠다고 생각한 것은 다 내가 만든 환상이라는 것 아닌가. 이 환상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은퇴 후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그건 여전히 직장에 다니는 것처럼 어떤 스펙을 쌓고 경쟁하는 도상에 있지 않았나 싶다. 이제는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았는데도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기를 쓰고 그러다 보면 이루지 못한 성과에 대해서 결핍감을 느끼고 불만이 쌓이는 생활을 반복한 건 아닌지 싶다. 그러니까 나는 은퇴를 했어도 정말로 은퇴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그 욕심으로 살아간다면 그건 제대로 된 은퇴가 아니다.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방향을 틀어 거기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이 시작됐어야 하는데 은퇴 후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 삶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고수하며 진부했던 것 같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은퇴를 하고 싶다. 이제는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로운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기적인 큰 언니, 전투적인 교사에서도 벗어나 정말 온전히 공부하는 백수로 살고 싶다.
불교에서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대 자유라고 한다. 그 길을 향해 다시금 신발 끈을 매고 제대로 된 공부 수행의 길을 가고 싶다. 그래서 또 걸려 넘어지더라도 언제든 다시 일어나 그 비우는 길을 향해 가고 싶다. 그건 더 이상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사유하고 숙고하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이전의 내 진부한 삶에서 은퇴하는, 진정한 삶일 것이다. 그 길을 향해 오늘도 공부하며 무심히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여기 아산에 감이당 같은 공동체를 꾸리고 싶다. 우선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에서 공부를 함께 하자는 공고문을 붙여봐야겠다. 이렇게 나의 은퇴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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