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요석의 엘도라도
1. 검고 빛나는 보석
지난 회에서 바다로 나간 사람들이 고래만 보고 노를 잡지는 않았을 것임을 생각했다. 신석기의 선사인들에게 바다란 자연과의 깊은 합일감을 주는 곳이면서 지식을 확장하고 지혜를 배양하는 무대였다. 한편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으니 바로 교류다.
석기 시대를 공부하면서 떠났던 첫 번째 답사지 공주 석장리(전기 구석기 유적지)에서부터 신석기 동해안 유적이 있는 양양의 오산리, 남해안의 부산 동삼동, 서해안의 시흥 오이도 선사 유적 박물관, 심지어 창녕의 비봉리 패총 유적지에서까지 시기도 다르고 풍경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석재가 전시되어 있었다. 바로 흑요석(黑曜石; Obsidian)이다. 흑요석은 규산이 풍부한 유리질의 화산암이다. 로마 저술가 G. 플리니우스가 그의 저서(자연지(自然誌)) 속에서 옛날 로마사람 오브시디우스가 에티오피아에서 발견한 유리질 화산암이 아마 이런 암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라고 한다(『바다를 건넌 선사인들-흑요석의 길, 석장리 박물관 특별기획전(2019~2020) 도록)』, 14쪽).
흑요석은 화산이 분출하고 마그마가 지표나 지하 얕은 곳까지 올라와서 차가운 공기를 만나 식고 굳은 암석이다. 마그마가 튀어 나가 식은 것이므로 분출암이라고 하는데,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 화산 돔 가장자리나 용암이 지표를 흐를 때 공기와 접촉하는 부분에서 혹은 물과 마주친 부분에서 형성되기도 한다. 원자가 순서대로 배열될 수 없을 정도로 마그마가 빨리 냉각된 것이기 때문에 흑요석은 광물 입자가 매우 작다. 그래서 결정질 혹은 유리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색은 검은색이 대표적이지만, 갈색, 녹색, 심지어 붉거나 주황 혹은 노란색, 더 심하게는 푸른 색을 띈 것도 있다. 때때로 그런 색들이 섞여 있는 광물로 발견되기도 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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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은 최근에 지질 활동이 활발한 곳 즉 화산 지역에서 발견된다. 유리질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광물이 결정학적으로는 불안정해서 수백만 년 이상 된 흑요석은 풍화 등의 변화를 견딜 수 없다. 이런 점이 흑요석의 제작에는 아주 큰 장점이 된다. 잘 부서지기 때문에 제작자가 원하는 대로 깰 수가 있고, 깨지는 면이 만드는 날카로움도 극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흑요석은 인류에게 금방 중요한 도구로 각광받았던 모양이다. 현대의 선사 도구 재연 실험에서도 드러나는데 흑요석은 오늘날 수술실에서 사용하는 집도 도구보다도 더 날카로워 짐승의 가죽을 벗기거나 힘줄을 자르는 데도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을 정도다.
2. 흑요석의 흥망성쇠
문제는 이렇게 유용한 암석이 화산 지역에서만 나온다는 점이다. 그런데 공주 석장리 근처에는 화산이 없다. 부산 오산리, 동삼동, 오이도 어디에도 화산이 없다. 한반도의 화산은 백두산에 있다. 그럼 백두산의 흑요석이 무슨 수로 공주 석장리에서까지 발견되었나? 공주 석장리 유적은 호모 에렉투스의 터이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호모 에렉투스가 백두산을 거쳐 남하하면서 가지고 와서 대를 이어 물려주었던 것일까?
흑요석은 생성 장소에 따라 다양한 주변 물질과 융합된 채로 발견되어서 정밀하게 분석하면 그 출산지를 알 수 있다. 석장리 발굴에 힘쓰셨던 손보기 선생님은 흑요석의 출처를 찾기 위한 당신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셨다.
돌감의 연구는 석기를 만들기 위해서 돌을 어디서 가져왔나를 밝히고, 그 돌의 떼임새를 밝히는데 필요하다. 실림터 언저리에서 나는 돌감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돌감은 원래 나는 곳을 찾아내야 한다. 석기로서 규장암, 흑요석, 옥수들이 더러 발굴되는데, 이들이 온 곳을 찾으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흑요석은 일부가 백두산에서 온 것으로 나타났다. 흑요석 돌감에 감마선으로 열을 가한 다음, 그 성분을 방사화하여 분석하면 미량 원소인 스트로튬(St), 바륨(Ba), 지르코늄(Zr) 등의 원소를 통해서 처음 폭발한 곳을 가려낼 수 있다.(손보기,「머리글」,『석장리 선사유적』(동아출판사, 1993); 『바다를 건넌 선사인들-흑요석의 길, 석장리 박물관 특별기획전(2019~2020) 도록)』, 22쪽의 재인용)
공주 석장리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직선 거리로 600km 떨어진 백두산이 고향이라고 한다. 전남 장흥의 신북 유적에서 출토된 흑요석 석기는 일본 규슈(佐賀県) 고시다케(佐賀 腰岳 黑曜石原産地)가 고향이다(링크) 일본의 또 다른 흑요석 산지로는 홋카이도의 시라타키(白滝)가 있다. 시라타키 흑요석은 질이 좋고 크기도 크고, 양도 일본 열도 최대다. 후기구석기 시대에 한반도의 서해는 완전히 평야였다. 후기구석기 대한해협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서, 지금의 사할린 지역이 홋카이도와 붙어 있으면서 일본 열도가 길게 하나의 땅으로 연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점에서 마치 지브롤터 해엽이 지중해의 입구가 되는 것처럼 하나의 내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남해안의 입장에서 보면 백두산보다 규슈가 지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더 나아가 해석하면 문화적으로 가까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를 건넌 선사인들-흑요석의 길, 석장리 박물관 특별기획전(2019~2020) 도록)』은 백두산, 시라타키, 고시다케 그리고 일본 본토 중앙부의 나가노 신슈(信州)를 중심으로 한 흑요석 유적의 분포도를 지도 그림으로 보이고 있는데, 광역 흑요석 석기 문화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경관의 차이, 그리고 기술의 확산 차원에서 생각하면 한국 문화, 일본 문화를 따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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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한반도 최대 빙하기 즉 후기구석기 해안선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기구석기시대는 약 4만 년 전에 시작되는 최후 빙기를 말한다. 2만 5천 년 전을 전후하는 후기구석기 중엽에는 지구 전체가 가장 추운 시기를 맞았다. 이 최종 빙기, 최한랭기에 인류는 두 가지 위기와 직면했다. 하나는 대형 동물의 절멸이고 다른 하나는 해안선의 후퇴다. 기후가 다시 온난해지고 해안선이 새롭게 올라오는 신석기 전기까지 인류는 극도의 기후변화를 맞아 생존 기술을 개발해야 했다. 흑요석과 같은 날카로운 도구에 대한 필요가 이 시기에 극대로 올라왔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주된 의견이다. 특히 짐승의 사냥과 옷가지의 마련에서 흑요석은 확실히 쓸모가 있었을 것이다. 흑요석의 날카로운 면은 고기를 자르고 가죽을 벗기기에 유용해 보인다.
흑요석은 인류의 최애 석기로 남았을까? 신석기 시대 따뜻해진 기후에 맞추어 경작이 차차 시작되면 흑요석의 중요도는 줄어든다. 둔하고 질퍽하면서도 다양한 광물이 뒤섞여 있는 흙을 일구기에는 너무 날카롭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설 연휴에 창녕 비봉리 패총 유적지를 다녀왔다. 창녕은 지금 경상남도 내륙인데 신석기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이어서 다양한 패류를 캘 수 있었다. 이 창녕에서 한반도 최고(最古), 남아 있는 목선으로는 전 세계 최고(最古)라고 알려져 있는 8000년 전의 배와 노가 나왔다. 심지어 두 구에서 각기 다른 뱃조각이 나오기까지 했다. 목선이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지역에 뻘이 형성되어 있었던 데다가 조개 껍데기에서 비와 함께 유출되는 다량의 석회 성분 덕분이었다. 이 비봉리에서도 아주 작은 흑요석 편이 발견되었다. 그것도 규슈산으로 말이다.
비봉리에서는 다양한 탄화 곡식과 다양한 농기구 파편도 발견되었다. 이 농기구들을 보면 전부 아래가 뭉툭하다. 주먹도끼에서부터 흑요석에 이르는 도구의 날카로움은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토기들 사이에서 보니 비봉리의 흑요석은 더 작다. 이처럼 작아진 흑요석은 숲의 동물들과 맺는 관계가 달라졌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흑요석의 자리를 대신한 것이 비봉리의 호미, 뒤지개, 돌괭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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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광역 문화의 네트워크
흑요석을 보고 있으면 고도의 기술력을 갖고자 바다를 건넌 선사인들이 떠오른다. 공주 석장리나 기타 지역에서 발견된 흑요석은 대체로 크기가 작았다. 비봉리의 것이 가장 작다. 날카롭게 이용하기 위해 원석을 계속 깎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흑요석은 잘 깨어지기 때문에, 쓸모 있는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또 부서지기도 쉬워 대대로 물려주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흑요석의 맛을 알았던 선사의 공주 사람들은 대대로 흑요석을 구하기 위해 북으로, 바다 건너로 길을 나서지 않았을까?
그럼 석장리나 비봉리, 혹은 동삼동 사람들은 무슨 수로 흑요석을 얻어올 수 있었을까? 어디 소문 좋은 터를 찾아서, 발견되는 대로 흑요석을 들고 돌아왔을 리는 없다. 흑요석이 귀하다면 백두산이나 규슈, 홋카이도의 선사인들도 그 인근에서 터를 잡고 살았을 법하기 때문이다. 석장리 사람들도 뭔가 매력적인 것을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흑요석 교환에 있어서 구석기와 신석기의 차이가 있었을 수도 있다. 확인은 불가하다. 현재로서는 신석기 흑요석 교환에 대해서 대략 추론할 수 있다. 신석기의 동삼동 패총에서는 과하게 많은 조개팔찌가 출토되었다. 이런 사치재가 흑요석과 교환되었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석기를 다루는 기술력이다. 후기구석기 시대부터 선사인들은 창이나 특히 활과 화살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한반도 후기구석기 창에는 슴베찌르개라는 석기가 나무창과 결합된 사냥도구가 발견된다. 슴베란 나무와 결합되는 석기 하단의 뾰족한 직사각형 부분을 말한다. 슴베 찌르개는 석장리에서만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규슈 지역에서만 출토된다. 일본에서는 슴베찌르개를 박편첨두기(薄片尖頭器)라고 부르고 한국에서 열도로 건너간 기술품으로 본다. 규슈에서는 흑요석으로 만든 슴베찌르개까지 나왔다고 한다. 흑요석이라는 석재의 교류와 함께 슴베라고 하는 기술력의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슴베가 아닌 단순한 석촉과 작살의 모양은 한반도와 열도에서 비슷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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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 외에도 광범위한 동아시아 문화권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토기이다. 한반도 신석기 토기문화의 일번지로 알려진 곳은 제주 고산리다. 고산리 일대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 좀돌날 문화의 흔적도 발견되고 신석기 조기의 양면박리 석기와 원시형 고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고산리 유적에서 나온 토기의 무늬는 양양이나 부산의 것과는 달리 아무르강 유역 가샤(Gasya) 유적과 그로마투하(Golomatuha) 유적과의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가샤 유적의 토기는 풀을 섞어 성형했고, 350℃라는 비교적 낮은 온도로 구워냈다. 외면 조흔 평저심발형이라고 한다. 석기가 동반되어 출토되었는데 양면박리 첨두기 등 석기와 세형몸돌 등이다. 아무르강 중․하류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평저이고 태토에 식물성 섬유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내․외면 융기문이 시문된 것을 특징으로 하는 문양계통이나 원공문토기, 회전압날문, 압형무늬 기법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들 유적의 절대연대측정치는10,000~13,000B.P. 사이에 있다.
고산리 초기신석기문화는 아무르강 유역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이 있다. 흥미롭게도 한반도 내륙에서 고산리 유물과 같은 조합은 확인된 바 없다. 아무르강 유역으로부터 고산리까지 사람들이 어떻게 내려왔을까? 지금으로부터 만 년 전 황해바닥 전체가 초지였고 아무르강 유역부터 한반도, 일본 열도 전체가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면 육로로 내려왔다고 가정할 수 있다(링크) 선사 시대는 숲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에 압도되어 제 자리를 겨우 지키며 살았던 사람들의 시공간이 아니다. 현대를 사는 나보다도 더 멀리 길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들의 세계였을 것이다.
4. 검은 엘도라도를 찾아서
흑요석과 같은 석재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한반도 선사인들만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흑요석 교류담은 2만 년 전 파푸아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오세아니아 근해는 뉴기니 동쪽 바닷가부터 멀리 남쪽과 동쪽 깊숙이 태평양까지 이어진다. 비스마르크 제도의 섬들은 오랫동안 외부 유입된 인공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고립된 섬생활의 보고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도처의 섬들에서 대략 2만 년 전 흑요석 박편이 발견되기 시작해 다양한 문화 교류를 짐작하게 해준다(브라이언 페이건,『인류의 대항해』, 87~88쪽). 브라이언 페이건에 따르면, 섬사람들이 흑요석만이 아니라 풍경을 이동시키기도 했는데 어떤 때에는 나무에 사는 유대류 회색늘보주머니쥐를 카누에 실어 이 동물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섬에 들이기도 했다 한다. 육로나 해로를 통해 동식물들이 자연적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양한 이유로 인간이 동식물을 일부러 옮기는 일도 후기구석기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도대체 왜 멀쩡히 한 섬에 사는 주머니쥐를 다른 곳으로 옮긴단 말인가? 이주라도 결심했던 것일까? 회색늘보주머니쥐에게 최적인 장소는 따로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경제 인류학자인 마르셀 모스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 벌이는 대규모 바다 원정 교역인 쿨라 교환을 모델로 야생의 증여론을 펼쳤다. 모스가 크게 주목한 연구는 선배 인류학자인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다. 두 연구에 따르면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를 하는, 무문자 사회의 야생에서는 경제의 기본은 자립이어서 원시적 풍요 사회를 구축하기에 힘쓴다. 그들이 교역을 한다면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지 관계의 증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개 팔찌와 조개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를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돌리면서 많은 부족의 손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 사치재에 담긴 인간의 모험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바다 항해가 주는 공포와, 그것을 넘어선 미지에 대한 호기심, 관계 자체에 대한 욕망으로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원정에 대한 꿈으로 늘 기대에 차 있다. 교역은 실용을 넘어선 차원의 일이었다.
마르셀 모스라면 흑요석의 교환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까? 모스라면 흑요석을 그 실용성 차원에서만 주목하면서 한반도 선사의 교역을 필수품 찾기에 급급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의 진보에 대한 갈망으로만 읽지는 않을 것이다. 쿨라라고 하는 대규모 원정은 그것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경우 그에 부수적인 실제적 물물교환의 장이 열린다고 한다.
물건들은 그것들을 원산지로부터 멀리 실어 간 항해 이면의 복잡한 관계와 사회적 동학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다. 역사 시대의 오세아니아 근해 사회들이 어떤 안내가 되어 준다고 한다면 파벌 관계, 끊임없이 변하는 동맹, 갑작스러운 습격이 섬 생활의 일부였다는 점이다. 상당히 멀리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기에 평생 한두 번 대면할까 말까 한 개인들 간의 소중한 관계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한 접촉은 심오한 종교적 의미를 띠는 값진 물건의 교환으로 종종 강화되었고 훨씬 폭넓은 교역 관계를 위한 일종의 보호막을 형성했다.(『인류의 대항해』, 111쪽)
앞에서 추정한 대로 농경이 시작되면 흑요석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교역 차원에서 해석하면 흑요석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것은 석장리나 비봉리의 입장에서 보면 백두산과 일본 규슈와의 관계도 위축됨을 의미하게 된다. 구석기의 광역 기술 네트워크가 재배 시대를 맞아 국지적으로 축소되었다고 생각해야 할까? 흑요석의 길이 열렸다 닫히는 바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나는 흑요석을 얻기 위해 석장리에서 산 넘고 물 건너 백두산 인근까지 걸었을 사람들, 카누를 타고 대한 해협을 건넜을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향으로의 귀환이 보장되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낯선 세계로 나아가는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이 무기였을지 선물이었을지? 흑요석을 향한 최초의 발걸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백두산이나 규슈 쪽에서 먼저 출발했을 수도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보석 흑요석을 갖고 교역에 나선 누군가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석장리와 동삼동에서 먼저 출발할 수 있을까?
그 답례였다고 가정했을 때 석장리에서 백두산까지 가는 루트에 무엇이 있었을까? 동삼동에서 출발한 카누에는 얼마나 많은 물과 식량이 실려 있었을까? 마을에서는 과연 누가, 그 목숨을 건 여정을 지휘하기 위해 손을 들었을까? 이 여행을 떠나는 이는 아마도 부족 최고의 리더 혹은 기술자일 것이다. 그런 인재를 장기간의 탐험으로 잃는 것은 마을에서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일 수 있다. 그러니 다시 한번 의문이 든다. 정말로 흑요석이 없으면 고기를 못 먹고 가죽옷을 못해 입었을까? 진짜로 기술을 얻기 위해 그 먼길을 떠났던 것일까? 그렇게 기술 의존도를 외적으로 높이게 되면 공동체 내부의 자율성이 떨어질 텐데도?
이 지점에서 과감하게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어쩌면 길을 떠난 석장리와 동삼동의 탐험 대장에게 흑요석은 하나의 상징물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황금이 없어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엘도라도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엘도라도는 스페인어로 Dorado 즉 ‘도금하다(dorar)’의 과거분사형을 지명으로 쓰는 장소다. 황금이 넘쳐나는 도금된 나라! 대항해시대에 이 전설의 이상향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먼 바다로 나섰던가! 최근에 개봉된, 《오즈의 마법사》를 새롭게 리메이크한 영화 《위키드》(2024)에는 온통 모든 것이 초록색인 왕국에 가기를 꿈꾸는 초록 마녀 엘파바가 나온다. 역사 시대 인간에게 황금이 그러했듯이, 엘파바에게 오즈가 그러했듯이, 선사시대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흑요석의 나라로 상상하지 않았을까?
대항해시대 스페인 사람들도 단지 물질적 부만 추구하려고 황금에 목을 맨 것은 아닐 것이다. 엘파바는 자신의 상실과 고독감이 전부 해소될 수 있는 낙원을 꿈꾸었다. 이런 유토피아를 찾아,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는 용사야말로 마을에서 일상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온갖 인간사의 번뇌와 궁핍을 견디게 해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내 눈에 흑요석 파편은 선사인들이 주어진 현실에 완전히 자족하지 않았음을, 그들은 생의 절망과 공포가 치유되고 단편적으로밖에 맛볼 수 없는 환희심이 지극히 충만한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로 보인다. 이렇게 그려보니 흑요석 하나를 들고 자신들의 엘도라도를 찾았을 백두산과 규슈인의 마음도 또한 이해가 된다. 인류는 낙원에 대한 동경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 참고문헌 ※
브라이언 페이건,『인류의 대항해』, 미지북스
『바다를 건넌 선사인들-흑요석의 길, 석장리 박물관 특별기획전(2019~2020) 도록)』
# 흑요석 화살촉의 제작 : https://www.youtube.com/watch?v=NzHlWmZEYwI
# 백두산 흑요석으로 화살촉 만들기 : https://www.youtube.com/watch?v=O_9GrZJ7JTc&t=36s
# 고산리 토기 특징 :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567&idx=547
# 고산리식 토기 제작 과정 : https://www.youtube.com/watch?v=0pwLhZ4wjNM
# 흑요석의 비밀 : https://www.youtube.com/watch?v=nOSwcfEgJ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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