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집의 영성
1. 입춘의 청소
새해맞이, 그리고 입춘이다. 아이들 학기 시작 전에 집을 좀 치우고 봄 준비를 하고 싶어 청소를 시작했다. 일단 냉장고에 지난 방학식 때부터 쌓이기 시작한 유통 기한 지난 음식들도 버려야 하고, 계절을 바뀔 터이니 이불이며 옷가지를 빨아 다시 정리해 넣을 궁리도 해야 한다. 키도 좀 컸는데 작년 가을의 환절기 바지는 맞을는지 모르겠다.
창문을 열자마자 날 때부터 붙어 지내온 쌍둥이가 다툰다. 문득 각자 자기 영역이 갖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는 자기 공간 갖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차라리 이사를 가는 것이 빠르다. 아이들은 커서 언젠가 집을 나갈 것이다. 세종시에 사는 우리가 언젠가는 다른 도시로 또 옮겨가 살 수도 있다. 사람이 크고, 물건이 드나들고, 결국 모든 것이 세월을 먹고 토해내며 이 집을 저 집으로 바꿀 것이다. 아이들도 크고 나도 늙고 있다. 문득 처지에 따라 집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든다. 신석기시대라고 하면 인류가 정주를 시작한 시기라고 알려져 있다. 정주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집을 갖고 산다는 의미다. 신석기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집을 세우고 꾸미고 바꾸며 살았을까?
2. 갈대로 엮고 풀고 말리며 집을 짓기
신석기주거 양식은 기본적으로 땅을 파서 기둥을 나무로 세우고 다양한 나뭇가지 등으로 집체를 올리는 형태라서 ‘움집’이라고 한다. 나무 재질로 지어진 신석기 움집의 상부 형태는 세월의 파도에 씻겨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기둥 자리들이다. 그동안 답사를 다녔던 신석기 유적 박물관들에서는 신석기 집 구조의 재연물을 볼 수 있었다. 양양 오산리처럼 유적박물관 밖에 집을 실물 크기로 재구성해 놓은 것도 있었고, 시흥 오이도에서처럼 박물관 내부에 그 모형을 세련되게 축소해 놓은 것도 있었다.
확인할 수 없는 유적을 무슨 수로 상상했을까? 신석기 유적에 볏짚 같은 것은 쓸 수가 없다. 쌀농사 이전이기 때문이다. 자연 환경이 천년 단위로 확확 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유적지에서 나온 여러 생활 흔적들을, 예를 들면 탄화된 곡식이나 도토리 등을 찾아 관찰하면 과거 집짓기 재료들 추측이 가능하다. 모양도 집 자리의 기둥 박음 자리의 위치 등을 고려하면 대강은 나올 수 있다. 신석기 최고 마을 유적터라고 알려져 있는 서울 암사동 유적터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봄이 되면 한강 이남 쪽으로 답사를 떠나 보려고 한다.
오산리와 오이도 답사의 기억을, 당시에 주거 재연물로 찍은 사진을 보며 다시 떠올려본다. 오산리를 참고해보면 한반도 신석기 해안가 주거의 건축학적 특징은 우선 그 모양에 있어 네모꼴, 둥근꼴, 모가 죽은 네모꼴, 긴네모꼴, 타원 모양 등 다양한 형태가 나온다는 점이다. 기둥 위치 등으로 생각했을 때 오산리 유적을 보면 둥근꼴을 갖추었는데, 지름 또는 한 변의 길이가 5~6m 정도로 면적이 20~30 제곱미터 정도로 대강 네 명에서 다섯 명 사이의 사람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이도 유적은 방안 모양이 네모다. 둘 모두 바닥은 땅을 파서 자연 토벽(土壁)을 만든 뒤 진흙을 깔아 다졌고, 그 위에 마른 풀이나 짐승 가죽 등을 여기저기에 깔았을 듯하다.
재료는 갈대풀을 썼다. 그럼 전체 원추형이 된다. 갈대풀을 쓴 덕분에 방수방풍에 뛰어나고 병충해를 막기에도 편하다. 원추형이기 때문에 위에서 내린 비가 흘러내려 아래로 떨어지기에도 좋다. 풀이 아주 두껍게 묶여 있기 때문에 비가 안으로 샐 염려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비가 새지 않는다고는 갈대는 방수 재질은 아니기 때문에 물을 머금는다. 그때 집 안의 습기는 어떻게 했을까?
오산리 재연된 집 안에는 화덕 자리가 발견된다. 양양 오산리의 재연 그림과 설명에 따르면 이 화덕 자리 요리와 난방을 겸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오이도에서는 내부 화덕의 경우 조리보다는 난방과 조명용이라고 본다. 재연 설명의 차이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집안의 화덕은 습도를 조절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부에서 불을 피웠다면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석기 주거의 지붕 위에는 마지막에 풀을 묶기 전에 구멍을 만들어 두었던 것 같다.
잠깐 멈추어 생각해본다. 현대의 우리 건축은 대규모 석재를 위주로 쓴다. 신도시 세종에서는 구도심이 없기 때문에 콘크리트가 아닌 집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경주라든가 서울 남산의 한옥마을 같은 곳을 탐방하면 흙과 나무로 지은 집들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석기의 집은 나무조차 아니다. 갈대같은 풀이다. 갈대로 만든 배도 엮고 말리기가 어려웠는데(14회 참고-링크) 갈대로 만든 집이라니! 한번 지으면 몇 년 동안 유지될 수 있는지, 장맛철이나 추운 겨울철을 날 때마다 새롭게 꺾고 다듬어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닐 테고, 짐승이 뜯어 먹는다던가 집 안과밖의 화덕에서 불이 옮겨붙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부분부분 유지보수도 해야 했을 것이다. 이들은 매일매일 집 생각을 하며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언제 물이 들어찰 것인가, 언제 말릴 것인가, 언제 불이 붙을 것인가? 신석기 사람들은 매일매일 집 걱정을 하며 전전긍긍했을까?
어쩌면 반대였을 수도 있다. 주거 공간의 불안정성이 한편으로는 생활을 더 여유롭게 가져가도록 했을 수도 있다. 특히 갈대라는 재료가 그렇다. 식물은 나무까지를 포함해 제약이 많은 재료다. 자체로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소재이고 굵을 필요조차 없다. 10cm 정도 폭에 3cm 길이 정도만 되어도 얼마든지 붙이고 잇고 엮어서 구조를 만들 수 있다. 그 기본단위를 통해 자유자재로 구상하고 구축하고 분해할 수 있어서 만드는 이가 자신의 직관적 창의력을 고도로 발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재료로 집을 짓는다는 것.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기에 이 한정적인 조건에 건축가는 끊임없이 반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식물상의 재료를 쓰게 되면 유한한 제한과 무한한 창의력 사이에서 긴장된 생활을 하게 되지 않을까?
지난 가을에 오래간만에 서울 마포에서 친구를 만날 점심을 할 기회가 있었다. 마포역에 도착하니 주변에 큰 건물을 올리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친구가 일하는 곳은 건물의 18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창밖을 보니 공사 현장이 보였다. 인부들은 자기 집을 짓고 있지 않았다. 재료는 콘크리트였다. 콘크리트라는 재료는 산업화시대를 상징한다. 지속가능한 어떤 힘을 지상 위에 박아 올린다는 것은, 대지를 지배하고 하늘에 도전하는 인간의 능력을 바로 직시하게 한다. 그러나 그 건물을 만드는 이는 그곳에 살지 않으며, 콘크리트를 다루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힘으로는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콘크리트를 이용한 대규모 공사에서는 만드는 이도 이용하는 이도 소외를 겪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자연의 무한한 힘과 나의 유한한 능력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삶을 꾸려가는 일. 거기에 깃들 어떤 자존감, 자기 공간을 스스로 만들고 다듬고 고치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일의 활력에 대해 짐작해본다.
3. 화덕 앞에 앉아 떠들고 놀며 배우기
집 내부 인테리어는 어떠했을까? 중부 서해안 운서동 유적에서는 원형 내지 사각형 움집의 네모서리에 기둥을 설치하고 중앙에 화덕을 설치했다. 그뿐 아니다. 서해안 주거지 내부에 단 시설도 확인된다. 오이도의 재현물에도 단 시설이 표현되어 있다. 내부 공간 분할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석기 주거가 땅을 일부 파서 지어 올렸는데, 그 안에서 다시 단을 쌓아 올렸다면 이것은 흙이 남아돌거나(재료 잉여), 시간이 남아 돌아서가 아니라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단은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침대 형태였을 수도 있고, 먹거리 등의 보관 용도였을 수도 있다. 나는 여기에 하나의 상상을 덧붙이고 싶다. 혹시 재단은 아니었을까? 조상을 생각하는 재물 등을 두지는 않았을까? 《창원 중동패총전시관》은 3세기 무렵의 것이니 신석기 유적은 아니다. 그런데 패총 유적에서 확인되는 집 자리를 보면 신석기 일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움집처럼 땅을 파고 다진 뒤 가운데 화덕 자리를 놓았다. 기둥 자리가 둥글게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은 원추형이었을 것이다. 이 집 자리에는 계단이 있어 입구로 걸어 올라가게 되어 있다. 계단이란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조금 덜 부담스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하는 설치물이지만, 집을 하나의 정신 공간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현관 입구의 이런 계단은 집안과 집밖을 의식적으로 구분한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신석기 주거로 돌아오자. 신석기 집 내부에서 공간이 분할된다는 것을 조금 확장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바닥의 평면 형태, 내부시설의 형태와 배치는 환경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동북쪽에서는 원형이 사각형과 긴사각형으로 변하고 돌두식(圍石式) 화덕 자리와 구덩식(土壙式) 화덕 자리가 모두 확인된다. 기둥은 움집이 원형과 사격형인 경우에는 모두 벽을 따라서, 긴 사각형의 집인 경우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된다. 서북쪽의 움집 구조와 변화도 동쪽과 유사하다. 대동강 유역 및 황해도는 원형 또는 사각형이 주류를 이루다가 긴사각형이 등장한다. 역시 돌두름식이나 구덩식 화덕이 중앙 또는 한쪽에 치우쳐 설치된다. 중부지역도 대동강 및 황해도지역과 아주 유사하다(『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123쪽). 오이도의 재연물을 보면 내부 공간 배치를 보면 중앙에 화덕이 있다.
현대의 주거, 특히 아파트에서 주방의 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지만 ‘구석’에 자리하게 된다. 특히 화기는 창문과 가까운 곳에 둔다. 요리를 방안에서 했건 하지 않았던 불이 집의 한가운데에 있고 그 주위로 식구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공동생활의 밀도도 높았을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당연히 핵가족 중심주의로 내 새끼, 내 가족만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 둘러보면 오이도의 집에는 수도 시설이 없다. 물을 길어 와야 하고, 땔감도 밖에서 구해 와야 한다. 마트가 없었을 테니 수렵이든 채집이든 전부 강과 산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처럼 생활의 필수적인 물질 전부를 집 바깥에서 얻어 와야 하니 가족의 삶은 자연에 깊이 의존한 형태여야 했을 것이다. 하루하루의 날씨라든가 계절의 변화, 집 밖 동식물들의 생태에 주의가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식구들끼리의 친밀도가 높으면서도 늘 주변 환경에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서북쪽과 중북쪽은 특히 토기를 거꾸로 박아 만든 저장시설이 추측되고 있다. 집 기둥을 이용해 횡으로 대를 마련하고 식재료를 말리는 용도로 썼다. 냉장고가 아니라 건조고가 있었던 셈이다. 방구석 한쪽에는 땔감을 쌓아두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는 도토리 등의 열매를 모아 두는 토기도 두었던 듯하다. 오산리 선사 마네킹들은 집 앞에서 고기를 굽고 토기를 만지고만 있는데, 오이도에는 그런 마네킹은 없지만 바구니같은 것이 널대 중간중간에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양한 바구니를 짜지 않았을까 상상된다. 집안의 불 가까이에서 어른들 어깨 너머로 바구니짜기를 배웠을 아이들도 떠오른다. 서로 가르칠 것과 배울 것은 집밖의 자연만큼이나 풍부했을 테니 굳이 사생활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4. 마을에서의 일과 나날
양양 오산리에 갔을 때, 처음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원추형 신석기 주거 입구였다. 재현된 건축물은 관람객을 유도하기 위해 입구가 한 사람의 성인이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오이도의 재현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양양에서 아예 마을 규모로 집들을 묶어 재현해놓은 것을 보니까, 입구가 튀어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무척 작았다.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혀야 한다. 입구가 작은 이유는 밖에서 무서운 동물이 갑자기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였을 수 있다.
애완견이라면 어떨까? 개는 인류의 길들임 역사에서 제일 앞에 있는 동물이다. 개는 그 생김이나 성질로 볼 때 기본적으로 노동력을 보충하거나 고기의 용도로 가축화의 문턱을 넘었으리라 생각하기 어렵다. 반려라는 관점에서라면 개는 신석기 주거의 입구 문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동물들 중에 어떤 것을 특별히 들였다면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이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문’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생각해본다. ‘문’의 형태도 문제지만 문은 자연발생적이라기보다는 공간의 내부와 외부 즉 ‘우리’와 ‘너희’라는 개념이 작동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더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이런 집들이 모여 있을 때 집 입구를 어떤 방식으로 열어 두었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서 오산리 선사 유적지의 마을 재현물이 떠오른다. 오산리 마을 터를 보면 모든 집들의 입구 방향이 다 다르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집 외부와 내부의 공간 배치에도 화덕의 자리라든가 단의 마련 등을 보면 다 의미가 부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 마을의 지면 배열에서도 구성원들의 위계라든가 공동 생활에서의 역할 배분에 따라 공간을 목적별로 구획하고 다른 방식으로 구성했을 법하다. 그런데 재연된 집들이 몇 채 되지 않기 때문에 마을 전체의 구성을 재구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 와중에도 조금 이상했던 점은 각 집들의 입구가 다 다른 방향으로 나 있었다는 것이다. 신석기 주거 내부의 화덕을 요리용으로 보지 않는 연구도 있다. 대개는 마을의 한 가운데에 공동 불 자리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냉장 시설이 따로 없고, 매일 같이 동물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에 식재료가 준비되면 함께 밥을 해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의 상상으로는 이런 화덕을 중심으로 집의 입구가 다 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각기 다른 방향으로 입구를 열었다고 오산리 박물관은 해석하고 있는가? 여기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보겠다.
레비 스트로스는 남아메리카 보로로족 마을의 지면 배열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보로로 사람들은 원형으로 마을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위와 아래를, 강한 것과 약한 것을, 남과 여를, 생과 사를 관념적으로 배치했다. 만약 어떤 무례한 외부인이 그 마을의 기둥 하나, 집 자리 하나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보로로 사람들의 큰 분노를 얻을 것이다. 보로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자리, 함께 살을 섞고 생과 사를 나누는 공간에 대해 이론적으로 해석하면서 그 지면 배열을 통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갔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내가 어떤 식으로 공간을 짜고, 그 안에 무엇을 두고, 결국 누구와 함께 나누는가를 생각하는 일이 사는 일의 전부였다. 오산리나 오이도의 선사인들도 멋진 마을을 꾸미고 살았을 것이다. 그 지면 배열에 표현되어 있을 선사의 지혜가 궁금하다. 나는, 누구와, 어떻게 함께인가?
# “이 원형의 거주형태는 보로로족의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에 매우 핵심적인 요소였기 때문에, 다스가르사스 강 지방의 살레지오회 선교사들은 보로로족을 개종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들의 부락을 포기하도록 만들어, 오두막들이 평행으로 열을 이루는 다른 주거지로 옮기는 것이라는 점을 즉각 깨달았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모든 면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 및 종교체계(뒤에서 알게 되겠지만, 이 양자는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다)는 매우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거형태에서 뚜렷이 나타나며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을 확신시켜주는 그와 같은 구성체계 없이는 그들은 존재할 수 없으며, 또 그들의 전통에 대한 모든 감정들도 소멸되어버릴 것이다.”(『슬픈 열대』, 414쪽)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참고문헌*
김범철,성춘택,천선행,『고고학자가 얘기하는 우리의 선사시대』, 진인진
레비 스트로스,『슬픈 열대』,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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