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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기도는 손으로 하는 일

by 북드라망 2025. 1. 23.

기도는 손으로 하는 일


1. 기도는 손으로
울산 태화강 하류에는 선사인들이 그린 암각화가 있다. 지난 시간에 토기의 무늬에 대해 이야기했으므로 오늘은 본격적으로 무늬 즉 선사의 그림에 대해 생각해보자. 


울산에서 발견되는 선사 유적은 후기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박물관 안내 책자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는 4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사냥과 채집 활동을 했다고 한다(울산 신화리 유적). 반구대의 제작 시기는 대략 7000년 전의 신석기 시대로들 본다. 한반도 신석기는 대략 기원전 8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밭농사 중심의 농경 흔적은 기원전 2700년 이후다. 그전까지 농경은 채집, 사냥, 어로에 비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울산 지역에서는 반구대가 그려질 당시의 무렵 농경 생산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반구대가 위치한 대곡천 등임을 감안하고, 암각화의 주된 동물상이 고래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울산 지역에서는 어로가 주된 생활 활동이었던 듯하다.  


인류사에 있어서 신석기 시대를 농경 특징이라고 정리하지만, 어느 곳에서나 농경과 정주, 국가의 결합이 전면적으로 개시되지는 않았다. 재배가 들어간 곳에서도 수렵과 채집의 일상이 병행되거나 그 비중이 높았다. 레반트 지역의 예리코에서는 기원전 9400년까지로 올라가는 무화과 재배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하고 중석기시대 나투프 유적지에서도 기원전 15000년부터 기원전 7000년까지로 추정되는 곡물 생산의 흔적이 일부 확인되지만, 그것이 주변 지역으로 대규모 집중식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7000년 전의 동해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위에 그림을 그렸을까? 후기 구석기 동굴 벽화, 암각화, 암채화의 목적에 대해 추정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정보 저장의 기능(스티븐 마이든,『빙하 이후』), 두 번째는 샤머니즘이다(장 클로트,『선사 예술 이야기』). 스티븐 마이든은 비교적 단출한 규모로 수렵 채집의 이동 생활을 하는 후기 구석기인들이 다른 캠프와의 정보 교류의 필요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본다. 아네트 라밍 앙트레르는 신화 기원설로 정보 이론의 계열에 선다.

 

“그 그림들은 역사, 신화, 설화적인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굴벽화는 그 민족 전통의 보관 자료이자 민족 정체성의 원산이며, 토템 신앙을 가진 선조들이 숭배를 위해 찾았던 성역이자 영웅담 등이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벽화 속의 동물 문양들은 기원 설화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는 마치 집단적인 믿음을 자극하는 인간이나 특정 부족을 위의적으로 표현한 이미지와 마찬가지라고 한다.”(엠마뉴엘 아나티,『예술의 기원』, 67쪽의 재인용) 


한편 장 클로트는 선사인들이 동굴 안에서 증식의 바램을 담아 영험한 바위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동물 형상을 중첩시켜서 표현함으로써 기도를 했을 것으로 본다. 장 클로트의 논의와 비슷한 것으로 성적 상징주의 이론이 있다. 특히 선사 예술에 표현된 기하학 무늬를 남성과 여성의 성기로 읽는 독법이다. 결합을 통한 증식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장 클로트는 기하학적 무늬에 주목하면서 고도로 깊은 명상 훈련을 받은 샤먼이 생사를 통찰하는 과정에서 얻은 내부시각 이미지라고 보고 성적 해석에는 치우치지 않는다. 장 클로트는 선사인들이 동물을 살해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부하를 자연적 힘들의 본질적 관계를 통찰하면서 넘어섰다고 본다. 나카자와 신이치도 같은 입장에서 샤먼은 바위에 그림을 그리며 삶과 죽음, 동물과 인간이 근원적으로는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을 것이라고 한다(나카자와 신이치,『대칭성 인류학』).  


그런데 오버랩되어 그려진 많은 동물들과 기하학적 무늬, 또 죽어가는 샤먼의 모습을 보고 어떤 ‘정보 교류’가 있다는 것인지 지금의 나는 이해하기 어렵다. 교류를 목표로 한 집단들 사이에 어떤 공통 기호가 있었던 것일까? 그림 자체를 통해서는 계절의 주기도, 동식물에 대한 생태학적 지식도 알 수 없다. 기도론(祈禱論) 역시도 왜 동물을 그리고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야만 신이 그 성스러운 이해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인지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러니까 후기 구석기인들은 ‘정보 교류’나 ‘지식 이해’ 혹은 ‘기도’라는 문제를 산업화된 사회를 사는 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져갔던 것이다. 이 간극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해준다는 점만으로도 구석기 예술 여행은 즐겁다. 질문을 바꾸고 생각의 방향을 틀어야겠다. 그들에 대한 먼 궁금함을 거쳐 내 편견에 가까이 다가가야겠다. 

 

암각화와 암채화에 대한 첫 번째 이해는 표현된 그림의 지식성에 주목하며 두 번째 이해는 주술성에 주목한다. 그런데 대상이 지식이 되었든 욕망이 되었든 왜 ‘바위’여야 하고 왜 ‘손 제작’이어야 했을까? 지식을 기록하고 다시 해독하는 일이건 기도하며 자비를 구하는 일이건 왜 ‘바위에 손을 대는’ 방식이었을까? 읽기도 소망하기도 모두 돌과 손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니, 나의 읽기와 기도하기를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정보 취득과 증식 도모의 두 과제는 같은 문제였을 수도 있다. 후기 구석기의 예술가들은 옆에서 달리고 있는 들짐승들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캄캄한 동굴 혹은 늦은 밤에 바위 옆에 불을 피워 돌이 불러주는 대로, 자신의 정련된 몸을 써서 태고의 지혜를 풀어내었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거듭하는 자신의 노고를 바쳐 신 즉 자연의 지혜에 한 방울 감사의 힘을 보탰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몸으로 변용된 이해와 감사의 기운이 우주 자연의 활력을 고양시키는 데 한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모두는 보다 풍요로운 삶을 새로이 마주하게 되었으리라. 


나는 이 아이디어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2024)이라는 전시회에서 얻었다. 전시물 중에 나바호족의 덮개가 있었다. 아이대즐러(eyedazzzler)라 불리는 어질어질한 무늬를 비롯해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를 선보이는 나바호족의 덮개는 말 그대로 여성이나 남성, 전사나 추장의 특별한 의례에 쓰이는 망토 같은 물건이다. 전시실에는 나바호족 직조 예술가 D. Y. Begay씨가 노동집약적인 직조를 설명하는 여상이 있다. 비게이 작가는 너무 고단한 작업이라고 했다. 베틀로 직물을 짜기 전 양털을 준비하는 과정이 엄청나게 지루한 동시에 고도의 집중력까지 요구하는 일이라서 정작 직물을 짜는 단계에 들어가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실을 얻었다고 해도 베틀 앞에 앉기는 더욱 어려운데 나쁜 생각을 갖고 그 앞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직물은 의례적으로도 쓰이지만 일상적으로도 필요한데 언제라도 경건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베틀 앞에 앉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나바호 여인들에게 직조란 ‘신성한 사람들’과의 대화다. 신의 말씀을 듣고 축복과 조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 베틀 앞에서 씨실과 날실을 짜는 일이다. 나바호의 여인들은 ‘거미 여인’과 ‘거미 남자’의 선물을 받는 행위다. 거미 여인은 베틀 위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도록 직조 과정을 가르치고 영감을 주며, 거미 남자는 직조공들을 위해 베틀과 직조 도구를 만드는 일을 책임진다. 베틀 앞에서 여인들이 북으로 실을 끼우며 무늬를 다듬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신성한 사람들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답한 일인 것이다. 바위에 그림을 그린 사람들도 같은 방식이지 않았을까? 신성한 바위 앞에 간 선사인들도 신들과 대화를 했을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들으면서 대답하는 일과 같았을 것이다. 그 신성한 행위, 신의 힘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도록 하는 일에 자기를 내던지는 일을 하는 샤먼에게 손이란 거미 여인의 제자들이 그러하듯 귀과 입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울산 대곡리와 천전리에 그려진 그림들은 남프랑스의 저 유명한 동굴에서 발견되는 육지 포식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 바다 짐승들 특히 고래들이 다채롭게 그려져 있고, ⓑ 전세계적으로 샤먼의 내부시각이라고 평가받는 기하학적 무늬도 많이 보인다. ⓒ 라스코의 버드맨처럼 반인반수로 보이는 샤먼의 모습까지 있다. 이 세 종류가 동굴벽화 삼종 세트라고 할 때, 울산의 바위는 이 구성을 완벽하게 만족시킨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의 라스코인 셈이다.
 

 

2. 왜 대곡리, 천전리인가? 
암각화의 그림 대부분이 바다 고래인 점에 주목하면 울산에서 포경이 선사 시대부터 중요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빙하기 이후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졌고 태화강 상류 인근까지 물이 들어왔다. 반구대 근처 굴화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링크) 지금은 장생포 앞바다에서 반구대까지 26km나 떨어져 있지만 70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만으로 고래를 몰아, 배 위에서 나뭇가지 등을 쳐서 소리를 내며 기슭에서 잡았을 것이다(이런 어로법은 노르웨이에서도 발견된다).


중요한 해석의 포인트는, 지금은 대곡리와 천전리가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 같지만 7000년 전에는 바다 가까이였으며 암각화의 샤먼들은 일상에서 완전히 떨어진 곳에 혼자 고독한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칭성의 이해와 수용, 성과 속을 일상적 공간에서 바로바로 느끼며 살았다. 근대 이전의 동서양에서 무덤의 위치와 죽음에 대한 태도를 비교한 필립 아리에스에 따르면 그 시절의 사람들은 죽음을 그리 멀리 두지 않았다고 한다(필립 아리에스,『죽음 앞의 인간』).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에 따르면, 인간이 고통과 죽음을 사유하는 가운데 ‘혼’이라는 개념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혼이란 삶 저편에까지 자기 힘을 미칠 수 있고, 애초에 바로 그 너머에서 숨 쉬고 살다가 이편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삶을 희망하는 야생의 인간은 반드시 죽음에 대해 명상할 수밖에 없었다. 성과 속을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뜨려 놓을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의 대곡리와 천전리에 살았던 선사인들은 생업의 한 가운데에서 밤에 조용히 명상하고 기도했다.  

 

 

3. 시점의 문제 
대곡리와 천전리의 암각화는 부감 기법이 주다. 특히 동물상을 그릴 때 그러한데 그림을 새기는 이가 하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이런 관점을 가진 것이 인간을 동식물보다 우월하게 생각해서라고 이해할 수는 없다. 보다 전체적으로 우주자연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시점이다. 

 

대곡리 암각화의 경우 이 많은 고래들을 한 사람이 새겼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돌을 쪼개고 문지르며 새기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 직업 예술가가 있던 시대가 아니었고, 샤먼이라고 해도 하루 종일 돌만 바라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세대를 아우르며 그려졌다. 그런 조건에서 암각화의 돌을 만지고 새긴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느꼈을까? 개성적인 욕망을 지닌 자기로서는 암각화에 다가갈 수 없었으리라. 

 

위에서 나바호족의 직조공 이야기를 잠깐 했다. 어떤 나쁜 생각도 베틀 앞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했을 때, 이 ‘나쁜 생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말 그대로다. ‘구체적으로’ 즉 그 개인이 일상에서 직접 부딪치면서 겪고 느끼는 일화들이다. 그런 사심 있는 관점이야말로 ‘나쁜 것’이다. 노동집약적인 실 잣기에서 지루함과 주의력이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의식을 꽉 붙들어 매고 오직 신성한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해야 했을 때, 그들은 절대로 나바호족 누구의 이름으로 직조하지 않았다. 암각화의 부감법은 우리의 현자들 역시 끊임없이 ‘나쁜 생각’을 몰아내기 위해 애쓰며 밤마다 바위로 나아갔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4. 대곡리 암각화 : 선사는 수렵(狩獵)이 아니라 어로(漁撈)
스티븐 마이든이 강조하듯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선사인들은 어쩌면 돌도끼가 아니라 어망을 들고 배를 몰며 움직였을 수 있다. 수렵과 채집에 기반했다지만 육지에서도 강을 끼지 않으면 수렵 채집의 유목 캠프를 치기 어렵다. 그러므로 주먹도끼를 든 선사인을 상상할 때 그 앞에 늘 거대한 맘모스나 흑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민물 고기나 해조류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울산의 두 암각화는 한반도 석기 시대를 바다 중심으로, 더 나아가 인류사에서 물이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되묻게 한다. 물이 있는 곳에 풀과 나무가 큰다. 그 나무 주위로 동물이 모여든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물을 중심으로 생명의 다종다기한 관계를 떠올리게 되면 물고기를 잡고 해조류와 조개류를 캐는 사람들의 심성에 대해서도 상상해볼 수 있다. 

 

출처-위키백과


이제 구체적으로 들어가자. 대곡리 암각화는 전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그림이 표현되어 있다. 압도적으로 많은 바다 동물들이 있고 육지 동물도 호랑이에서부터 멧돼지까지 다양하게 있다. 

① 엄청나게 다양한 고래들이 각기 하나 혹은 셋으로 표현되어 있다. 종류마다의 생태학적 자료가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지금은 잘 볼 수 없고 때로는 멸종 위기종이 된 것도 있지만 신석기 시대 울산 앞바다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고래들이 나타났었다. 선사인들에게 고래들은 먹이였겠지만 그들 하나하나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② 전 세계 구석기 동굴벽화 또는 암각화 암채화의 특징인 ‘겹쳐 표현하기’로 되어 있다. 
 바위 위에 새겼기 때문에 겹쳐 표현할수록 앞 단계의 그림의 윤곽선이나 세부 표현에 손상이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한 사람이 겹쳐 그리는 것인가? 여러 사람이 그리는 것인가? 시간을 두고 계속해서 집단적으로 그리고 또 그리나? 형상을 보전할 의도는 없지만 ‘바위’에 새김으로써 ‘영원성’을 도모한다? 신과의 증폭된 대화이므로 겹쳐 그릴 수밖에 없다. 어떤 캔버스도 돌보다 더 큰 힘으로 이 겹치는 대화의 장을 견딜 수는 없다. 

③ 강한 움직임
선사 암각화는 프랑스 남부의 알타미라부터 라스코 동굴까지, 러시아의 잘라부르가 암각화와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암각화 등에서 보이듯 다양한 방식으로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한다(링크) 반구대 암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고래의 역동성이 드러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역동성을 보강해주는 것이 바로 바위다. 라스코의 동굴 벽화도 내부의 다양한 곡면과 질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암각화들 역시 바위의 위치와 면이 가지는 표면의 역동성을 활용하고 있다. 동굴이라면 인간이 촛불을 들고 들어가게 되고 그때 표면 효과는 극대화되어 동물상들의 움직임은 보다 활발해진다. 위의 링크를 따라가면 선사 예술 연구가인 장 클로트 선생님이 촛불을 들고 동굴 벽화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촛불의 흔들거림에 따라 동굴의 동물들은 숨 쉬고 달린다. 신성한 존재들과의 대화는 불이 타들어가듯 변용의 화염 속에서 이루어진다. 


대곡리와 천전리 암각화의 경우도 강을 끼고 있다. 수량과 유속에 따라 그림의 생동감이 배가 되었을 것이다. 동굴의 경우 음성적 효과도 가미할 수 있다. 굽이 돌아 흐르는 물이 만드는 음악성 역시 울산 암각화의 공감각적 심상을 증폭시키게 했을 것이다. 위 영상에서 실제로 밤에 랜턴을 키고 반구대 암각화를 조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새겨진 고래의 지느러미 등에 빛에 따른 그림자가 져서 그 생기가 낮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달된다. 영상의 그 장면에서는 얕은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 마치 고요한 바닷속을 고래가 움직이는 듯하다.   


반면, 천전리 각석의 경우 움직임이 아니라 정적임이 강조된다. 

 

 “암각 기법과 표현 양식, 제재 구성과 배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서사적 표현이 빈번해지는 단계의 반구대암각화는 표현 대상의 움직임도 사실적이고 세부적 특징도 일부 묘사된다. 그러나 천전리 각석 암각화에는 초기에만 그런 경향이 잠시 보일 뿐이다. 천전리 각석 암각화의 점 쪼기 암각 동물들은 형상 하나, 하나가 고립되었고 자세도 정적이다. 심지어 활 쏘는 인물조차 동세가 약하다. 사냥 대상이 된 사슴이나 다른 우제목 동물들도 대개 화면에 붙박인 모습이다.”(전호태, 『울산 천전리 각석 암각화 톺아 읽기』, 89쪽)


대곡리, 천전리 암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특히 대곡리의 고래다. 암각화의 대상으로 고래가 등장하는 곳은 전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다. 주로 고래 이동선을 따르는 포경 생업의 선사 캠프들 인근에서 발견된다. 선사 연구자들에 따르면(링크) 고래가 그려진 암각화로는 벽의 패널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그곳에 그려진 고래의 종류도 가장 많다고 한다. 형태적 특징뿐만 아니라 생태적 특징 즉 새끼를 업고 다닌다든가 하는 부분까지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정 종류를 많이 그린 것은 없고 세상 모든 고래가 다 나와 있다시피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종적 포착을 하려고 힘쓴 흔적이 있다. 
     


6. 천전리 각석 기하학적 무늬
천전리 각석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다. 


천전리 암각화는 세 단계의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암각은 점으로 쪼아내기 방식이며 두 차례 걸쳐 이루어졌다. “아주 얕고 크게 동세를 갖춘 상태로 동물들이 새겨지다가 뒤어어 비교적 세밀하고 뚜렷한 점 쪼기로 정적인 자세의 동물들이 새겨졌다. 점 쪼기로 새겨진 것은 대부분 동물이다.”(전호태, 앞의 책, 101~102쪽) 두 번째 단계에서는 깊은 선 쪼기에 이어 갈기로 새긴 선각 기하문이 나타난다. 점 쪼기 동물상 위에 겹마름모 무늬와 동심원 무늬를 중심으로 기하문이 새겨져 있는데 덕분에 앞의 동물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전호태 선생님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암각 패턴으로 미루어 그림을 그린 두 집단이 완전히 구분된다고 판단하신다.  


기하학적 무늬는 후기 구석기 유적부터 전세계적으로 꾸준히 발견된다. 고고학은 천전리 각석 암각화 기하학적 무늬가 청동기시대 작품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한국 고고학계는 청동기시대 유물에 상징기호가 많이 나타난다는 상식을 적용해 기하문을 청동기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전호태 선생님에 따르면, 한반도 출토 청동기 유물에 겹마름모 무늬나 동심원 무늬가 동시에 대거 발견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청동기시대 고인돌 상석으로 사용된 함안 도항리 암각화 바위의 동심원문, 부산 동래 복천동 암각화의 동심원문과 나선문 등 암각화 유적에서만 천전리 각석 암각화 기하문과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전호태, 앞의 책, 100쪽). 

 


전호태 선생님은 천전리 암각화의 기하 무늬는 문자 출현 이전 작품이라고 보신다. 청동기시대 이전으로도 소급 가능하다고 해석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전리 점 쪼기 동물상은 신석기 제의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호태 선생님은 반구대 암각화의 예술가들은 앞 그림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천전리 기하문의 예술가들은 동물 그림 훼손에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하 무늬를 새긴 이들의 생업이 이미 농업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울산 지역 청동기 유적 밀도는 한반도 다른 지역보다 높은데, 의외로 농경 의례의 흔적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천전리 암각화의 기하 무늬는 농경 의례와 결부되었을 법하다는 것이다(전호태, 앞의 책, 131쪽). 


기하학적 무늬를 둘러싼 시대 구분을 재현의 무늬가 먼저냐 추상 무늬가 먼저냐 논쟁에 밀어 넣을 필요는 없다. 기하학적 사고란 대칭적 사유이며 스티븐 마이든과 나카자와 신이치는 이 형태에서 인류 사유의 근본 형태성을 본다. 현대 아메리카의 야생 부족들의 직물에서도 여전히 기하학적 무늬가 강세이다. 

 


7. 손으로 쓰는 인류학 
선사의 샤먼은 손으로 돌을 만지며 우주의 진실에 다가갔다. 선사 유적을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은 심원한 상상력에 자기를 내맡기는 일이다. 객관을 찾아갈 길은 애초에 봉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암각화 하나하나의 의미일까? 


이반 일리치가 므네모시네를 둘러싼 기억의 신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뮤즈의 어머니이기도 한 므네모시네는 기억의 신으로 레테의 강이 죽은 자의 발에서 씻어낸 것을 므네모시네의 요동치는 샘물이 살려낸다. 므네모시네는 레테의 강물이 흘러든 샘물의 신으로, 고이는 우물에서 뿜어내오는 물줄기, 회상의 연못에서 조각된 분수에서 튀어나오는 물줄기로 현현한다. 현자와 시인은 이 샘물을 마시며 피안의 지혜를 현재로 불러낸다(이반 일리치,「물의 신화, 망각의 강과 H2O」,『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훌륭하게 지혜를 들이키고 싶은 자는 므네모시네의 샘물을 마셔야 한다.


그런데 므네모시네의 샘물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반 일리치는 ‘샘물을 마시기’에 집중한다. 근원적 지혜를 되살려내는 기억술이 ‘므네모시네의 샘물 마시기’에서부터 인공지능에 의한 정보 재생으로 바뀔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과거를 불러낼 것인가이다. 암각화의 제작 시기, 제작하는 사람들의 욕망과 능력을 찾아 구글과 유튜브 여기저기를 검색할 일이 아니다. 내 혀로 마신 므네모시네의 샘물이 아니면 안되었듯 이 벽화가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지 조용히 듣고 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사인들은 정말로 그러한 지혜를 원한다면 돌에 손을 대어보라고 한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 참고문헌과 영상 ※ 
⦁ 나카자와 신이치,『대칭성 인류학』, 동아시아
⦁ 레오나르도 아담, 김인환 옮김,『원시 미술』, 동문선
⦁ 문명대,『울산 반구대 암각화』, 지식산업사
⦁ 스티븐 마이든,『빙하 이후』, 사회평론아카데미
⦁ 아리엘 골란, 정석배 옮김,『세계의 모든 문양』, 푸른역사
⦁ 엠마뉴엘 아나티, 이승재 옮김,『예술의 기원』, 바다출판사
⦁ 이반 일리치, 권루시안 옮김,『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 장 클로트, 류재화 옮김,『선사 예술 이야기』, 열화당
⦁ 전호태, 『울산 천전리 각석 암각화 톺아 읽기』, 민속원
⦁ 필립 아리에스, 고선일 옮김,『죽음 앞의 인간』, 새물결

⦁ https://www.youtube.com/watch?v=ykqBdLTWiXo
⦁ https://www.youtube.com/watch?v=Wkbgt_HCIJY
⦁ http://www.aljago.com/dan_data/2_17.html
⦁ https://ncms.nculture.org/stonecraft/story/5636
⦁ https://eastsearoad.tistory.com/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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