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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연필과 석기

by 북드라망 2024. 11. 7.


연필과 석기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편견의 하나는 문화가 진보한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문명의 진보’라는 표현은 너무 자주 들어서 진부하기조차 하다. 소박하고 원시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진보적이지 않다’는 딱지를 붙인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는 암시가 들어 있다.
  실제로, 진보라는 발상 자체는 흥미로운 문화적 현상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인류의 대다수는 역사의 대부분을 통해 진보라는 발상에 물들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정적인 세계, 변화가 없는 인간은 당연한 것이었다. 설사 변경의 관념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초기 황금시대로부터의 타락이라고 치부되는 경우가 많았다.”(알프레드 Kroeber(1923), 프란스 드 발, 박성규 옮김,『원숭이와 초밥 요리사』, 262쪽 재인용)

 

 

 

1. 돌의 시대? 
석기시대로 들어가자. 나는 7월의 어느 날 ‘인문세(인류학 답사 밴드)’의 세종 캠프를 나와 공주 석장리로 향했다. 석장리 가는 길은 금강을 따라 있다. 신도시의 높은 건물을 뒤로 하고 낮은 산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강변을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 이것은 여름 소풍이다!  


차차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지로 남아 있는 곳은 주로 강변이다. 배산임수다(背山臨水). 연천 전곡리가 그렇고 단양 수양개가 그렇다. 강에서는 물고기를, 등 뒤 야산에서는 동물과 식물의 열매를 얻는 일은 먹고 산다고 하는 생활의 일차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좋았을 것이다. 반면 신석기 유적지는 대부분 바닷가에 있다. 빙하기 한반도의 해안선은 극빙기를 기준으로 서해안에는 대평원이 있었을 정도이니 지금과는 많이 달랐겠지만, 한반도 신석기의 생활 모델은 어로(漁撈)를 통해 이해해야 한다. 한반도인들의 오랜 정신 문화는 강과 바다에서 즉, 물길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강이나 바다를 떠올리다보니 갑자기 ‘석기’라는 말이 낯설어진다. 그리고 ‘선사’라는 말도 조금 새롭게 다가온다. ‘선사’는 역사 시대 이전을 뜻한다. 찾아보니, ‘선사학’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든 사람은 존 러복(John Lubbock; 1834.4.30.~1913.5.28.)이었다고 한다. 역사 이전의 유물이 인류의 시야에 새롭게 들어온 것은 산업혁명 때였는데, 철도와 도로, 운하를 건설하면서 국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만들었음이 분명한 주먹도끼가 매머드 같은 멸종 동물의 뼈와 ‘함께’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거대한 동물과 동반되어 출현하는 독특한 도구에 대한 관심과 평가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깨는 돌은, 한 사람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압도적 규모의 공장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미개해 보였기에, 증기기관이 쉭쉭 돌아가는 산업화의 필연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것 같았나보다. 


‘선사’라는 말이 있기 전에 이미 석기-청동기-철기시대라고 하는 시대 구분이 있었다. 세 시대로 나눈 체계는 북유럽에서 발달했다. 톰센(Christian Thomsen; 1788.12.29.~1865.5.21.)은 덴마크 국립박물관의 운영을 맡아 선사시대 유물을 효과적으로 전시하는 방법을 골몰하다가 유구 출토폼을 시간별로 배열하면서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나누었다. 톰센은 전문고고학자가 아니었지만, 1836년 간행한 전시안내서에 ‘삼시대 체계(Three Age Syste)’라고 기록했다. 얼마 후 코펜하겐대학의 고고학 교수로 임명된 보르소에(Jens Worsaae; 1821.5.14.~1885.8.15)는 그러한 체계를 층위 발굴로 입증했다. 삼시대 체계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자, 존 러복이 1865년 『선사시대prehistoric Times』에서 석기시대를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로 나누기에 이른다(관련, 파스칼 피크 외 지음, 김성희 옮김,『최초의 도구』, 16쪽).  

 

‘역사 이전’이란 말이 파생시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과거를 ‘돌’을 통해 떠올리게 될 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역사의 한 시기를 history ‘이전’으로 명명한다는 것은 ‘역사(歷史)’라는 기준으로 인류의 고대를 바라보겠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란 무엇인가? 기록된 과거사다. 지금처럼 필기구가 흔했던 시대가 아닌 고대에 쓰기는 왕의 입장에서, 사태를 확정 판단하기 위한 근거 역할을 했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메소포타미아 왕궁 건설의 부채 기록표였다. 그러므로 ‘역사 이전의 시기’는 왕이 없는 시대, 왕궁이 필요 없는 시대, 서로 빚진 것을 따져가며 채권자와 채무자로 상대를 바라보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그 시대를 왜 ‘돌의 시대’라고 하는가? 돌이 딱딱하고 오래 두어도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사 연구가들이 ‘기록된 것’의 이미지를 과거로 투사했다. 돌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는 힘이 다른 자연 소재들에 비해 강하므로, 돌로 만든 인간의 물건들이 현대까지 남아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석기시대로 선사를 이미지화하면 고대인들을 자꾸 뭔가를 남기려는 이로 상상하게 된다. 


게다가 석기는 그 형태가 한 손에 쥐기에 벅차 보일 정도로 크고, 또 깨이거나 갈린 측면이 매우 날카롭기 때문에 용도가 공격용 무기 같다. 석기를 쥔 인간은 큰 짐승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힘들게 얻은 포획물을 어떻게든 저장해서 끼리끼리 나누어 먹을 것만 같다. 그들에게 환경은 적의로 가득 차, 이름도 겁나는 ‘도끼’로만 대응이 가능한 살벌한 곳이었을까? 게다가 돌은 단단하고 각을 이리저리 잘 맞추면 쌓아 올리기에 좋다. 벽을 쳐 둘러 담을 만들기에도 좋다. 나는 돌에게서 우리 사람, 너희 사람으로 구분하고 출입을 통제했던 성(城)의 미래가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선사를 ‘남은 돌’이 아니라 부서지고 스러진 나무나 갈대, 풀 같은 것으로 명명하고 상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무는 더디기는 해도 사계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바꾸며 점점 더 두께를 키워간다. 그 두께란 꼭 물질적 부피만을 뜻하지 않는다. 나무는 많은 것들을 품으면서 제 모습을 바꾸고 그러면서도 계속 크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각기 다른 벌레와 곤충 새와 동물을 데리고 살며 땅밑으로는 뿌리를 뻗고 하늘로는 가지를 올린다. 하지만 나무는 생물이기에 위로 크기에 한계가 있다. 또 자기가 뿌리 내린 곳을 떠날 수 없어서 옆으로 퍼지기에도 한계가 있다. 나무는 그가 있는 땅, 기후, 주변의 생물들과 분리할 수 없다. 선사를 나무와 함께 상상하면 항상 변하지만, 항상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는 한정적 생활이 떠오른다. 

 


2. 금강도, 인연도 흐른다
〈공주 석장리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은 강변을 바로 보면서 지어져 있는데 매표소 뒤로 황토색 외관을 갖춘 작은 전시동 두 개가 보이고 그 앞으로 구석기인들의 움집 재현물이 있다. 여기저기에 구석기인들이 물고기도 잡고 불도 피우며 함께 웃고 떠들고 있다. 모두 재현물인데, 기계음 섞이지 않은 구석기식 소란스러움이 느껴져서 좋다.  


〈석장리박물관〉은 구석기 공부에도 좋지만 멍 때리고 세월을 낚기에도 좋다. 매표소 앞에 커피 자판기가 있고 간이 의자도 몇 개 놓여 있어서 앞으로 흐르는 금강을 내려다보며 바쁜 마음 내려놓을 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여유야말로 선사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자, 커피 한 잔을 했으니 이제 박물관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엄청난〈석장리박물관〉의 상징물이 있다. 역시 돌도끼다. 그런데 사람의 손이 그 돌도끼를 쥐고 있어서 흥미롭다. 연천의 〈전곡 선사박물관〉상징물도 돌도끼지만, 여기에는 사람의 손은 표현되어 있지 않다. 〈석장리박물관〉은 도구를 ‘인간이 손으로 가공한 것, 인간에 의해 쓰이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인간’에 의한 ‘석기’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인간인가? 

 


공주 석장리 유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1964년의 금강변 홍수 때문이다. 1964년 봄 미국인 대학생 엘버트 모어(Albert Mohr)와 그의 아내(Sample)씨는, 그해 홍수로 범람했던 석장리 금강 부근을 답사하다가 무너진 강변 지층에서 뗀석기를 찾았다. 당시까지 한반도에 구석기 유적이 공식적으로 발견되었다고 보도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이 발견을 의혹에 찬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였던 손보기 선생님(1922~2010)의 분석에 의해 이 석기가 구석기 유적임이 밝혀진다. 1972년까지 진행된 분석에서 분포 유적들의 문화층이 확정되었는데, 구석기 전기 중기 후기까지의 유적이 고루 발견되었다. 이후 2010년까지 발굴이 더해져서 신석기 청동기 시대 유물까지 확인되었다. 구석기 전기라고 하면, 석장리 발굴 유물의 연대는 30만년 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공주 석장리 강변은 30만년 전부터 청동기가 거의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기원 전 4세기까지 엄청난 시간을 사랑받은 장소인 셈이다. 


여기서 하나 유의할 점이 있다. 30만년 전부터 2024년까지 금강의 석장리는 한결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빙하기에는 해수면 높이가 낮아져서 지금의 서해 바다가 모두 육지였었다. ‘한반도’가 있지 않았다. 수원의 분포도가 지금과 달랐을 것임은 당연하다(링크참고)‘석장리’라지만 시대별로 기후와 생활 조건의 변화에 따라 매번 다른 풍경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으리라. 


30만년 전이면 그는 호모 에렉투스다. 호모 사피엔스는 대략 10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떠났다고 하니, 한반도에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다. 같은 풍경을 사랑했다지만 그 사랑의 주인공들은 아예 종이 다른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과거를 넓게 바라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감수성을 갖고 살아갔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 엄청난 인연의 소용돌이가 필요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마음으로 금강을 바라보면, 인류 진화의 소용돌이를 천천히 쓸어가고 있는 자연의 무상한 흐름마저 느껴진다.  
   


3. ‘도구’라는 개념  
〈석장리박물관〉이 도구의 문제에서 석재와 인간, 둘을 함께 생각하라고 하니, 우선 ‘석기’의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인류가 돌을 깬 것이 마땅한 기술 개발의 전개일까? 사실 대형 유인원은 어느 정도는 도구를 다룰 수 있다. 도구의 사전적 정의는 ‘일을 할 때 쓰는 연장의 총칭’이다. 이 일차적 정의에서 누구의 일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두드리는 데 쓰는 돌, 찌르는 데 쓰는 나무 막대기, 닦는 데 쓰는 나뭇잎이 모두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목적을 가진 작업자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보노보 모두 도구를 쓴다고 해야 한다. 

 

“침팬지 개체군에서 확인되는 도구는 다양하다. 군집 생활 곤충을 잡을 때 쓰는 손질된 잔가지, 잠잘 곳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둔 둥지, 물을 뜰 때 쓰는 열매 껍질로 된 잔, 견과를 깰 때 쓰거나 다른 침팬지가 위협적으로 접근해올 때 겁을 주려고 휘두르는 굵은 나무토막, 몸을 닦을 때 쓰는 나뭇잎, 코나 이빨을 청소할 때 쓰는 작은 나뭇가지, 가시가 있는 나무에 오를 때 신는 일종의 샌들, 다른 동물을 쫓을 때나 다른 개체와 싸울 때 던지는 돌멩이….”(『최초의 도구』, 29쪽) 

 

 

그런데 침팬지 개체군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 사이에서 확인되는 140여 가지의 도구 가운데 돌로 된 것은 18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니 선사인들의 도구에서 돌이 주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랑우탄의 경우에는 집단 안에서 서로의 행동을 통해 넌지시 배우며 제작 방법을 전승하는 도구들, 효용적 가치를 공유하는 도구들 중에 돌과 관계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까지 한다. 


도구에는 2차적 정의가 있다. 단단한 돌을 쪼개고 갈아서 만든 돌조각이 대표적인 예다. 2차 도구는 도구로 만들어진 도구로서,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의 전유물이다. 3차적 도구도 있다. 이것은 두 개의 목적을 가진 도구들을 결합한 것으로 역시 호모 사피엔스만의 작품으로, 석기시대 시대 구분에 따르면 구석기에서 신석기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설정된 ‘중석기시대’의 도구가 여기에 해당한다. 

 

도구에는 꼭 결합되어 있지는 않지만 돌을 더 잘 깨기 위해 사용되는 받침대처럼 원래 도구의 기능을 보완 강화하는 것도 있다. 이것을 ‘메타 도구’라고 하는데 이 경우를 아프리카 기니의 보수(Bossou) 지방에 사는 침팬지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1차에서 3차를 거쳐 메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인간의 도구력을 정점에 둔 단선적 발전사로만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도구의 진화사라는 관점에서 그 크기가 점점 더 작아지고 세부 형태가 정교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왜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까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들은 미개해서가 아니라 굳이 도구가 필요 없어서가 아닐까? 

 

“오랑우탄이나 꼬리감는원숭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침팬지가 도구를 쓰는 행동은 환경적으로 열악한 조건(나무가 드문드문 있는 사바나savanna, 건기의 메마른 숲)에서 더 자주 관찰되는데, 이는 그 같은 문화적 행동이 적응적인 성질을 지녔음을 잘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일부 개체군이 도구를 쓰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탄자니아 곰베(Gombe)의 침팬지 개체군은 견과가 아니어도 먹을 게 있기 때문에 주위에 견과가 있어도 깨뜨려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최초의 도구』, 51쪽)   

 

 


4. 석기로 나누어본 선사 문화

겨우 돌 덩어리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깎는 일이 어디 쉬울까? 본격적으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석기 모양에 따른 구석기 일반 도구의 전개에 대해 알아보자. 일단 구석기 시대의 문화 구분은 다음과 같다. 


한반도 석기 유물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하게 살펴봐야 할 시기는 올도완 문화의 올도완 석기와 아슐리안 문화의 아슐리안 석기다. 

 



① 올도완 문화(Oldowan culture) 석기 : 올도완 문화는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250만 년 전부터 2만 년 전까지 발견된다. 어쩌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기부터도 제작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올도완이라는 이름은 이 석기가 1930년대에 탄자니아 올두바이 협곡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올도완 도구는 ‘자갈 도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손잡이에 해당하는 아래가 둥글고 위가 큼지막하게 푹푹 깎여 있기 때문이다. 〈석장리박물관〉상징물은 올도완 석기를 닮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랫부분을 둥글게 표현했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자연상태의 모습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석장리에서는 올도완 석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가장 오래된 올도완 도구는 약 260만년에서 258만년 전의 것으로 에티오피아 아파르주의 고나 강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원시 돌도끼는 지역의 다른 돌멩이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돌과 돌을 부딪혀 만든 돌 조각의 경우 부딪친 지점의 바로 옆에 ‘충돌구(bulb of percussion)’라고 부르는 독특하게 부푼 흔적이 나온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기준으로 자연적 충돌이나 물의 작용으로 그냥 부서져 생긴 돌멩이와 인공의 석기를 구분한다(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인류의 위대한 여행』, 27~34쪽).

② 아슐리안 문화(Acheulean culture) :  ‘아슐리안’은 프랑스 생따술(St, Acheul) 지방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전기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석기 공작이다. 약 140만 년 전 에티오피아의 콘소 가둘라 유적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오랜 시간 지속하다가 약 10만 년 전쯤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타원형 또는 삼각형 모양으로 양쪽 면을 모두 고르게 손질하여 석기의 옆면이 마치 두 손바닥을 모은 모습을 한 것이 특징이다. 이른 시기의 것들은 거칠게 가공한 것들이 많았지만 점차로 대단히 정형화된 것들이 많아졌다. 아슐리안 석기는 유럽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한반도 연천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됨에 따라 세계 고고학계가 크게 놀란 적도 있다. 아슐리안 석기에 관해서는 연천 답사를 갈 때 더 자세히 알아보자. 

③ 무스테리안 문화(Mousterian culture) : 아슐리안 도구는 170~25만 년 전까지 아주 긴 시간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사용되었다가 아프리카, 유럽, 남부 아시아에서 중기 구석기 또는 무스테리안 문화라고 불리는 것이 나타났다. 무스테리안이란 이름은 프랑스 남서부의 네안데르탈인 유적인 무스테르에서 따왔다. 굳이 말하자면 유럽 중기 구석기 도구를 무스테리안 석기라고 한다. 무스테리안 석기의 주인공들은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로, 그들의 후손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에 의해 유럽에서 무스테리안 석기는 계속 명맥을 이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유럽식 도구를 갖고 인류 중기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것은 유럽 기술만이 특별히 진보중이라는 착각을 가져다주기 쉽다. 


무스테리안 석기, 또는 중기 구석기 석기의 특징은 양날로 깨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실제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다만 크기가 확실히 작아졌다든가, 양날은 아니면서도 다채롭게 깨는 방식이 발견된다든가 한다. 중기 구석기 시대에는 철 함량이 높은 황토도 사용된다. 이 시기에 인류 최초의 화덕도 발견되는데, 중석기 사람들의 뼈를 분석한 결과 고기를 많이 먹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쇠닝겐에서는 40만 년 전의 창촉이 발견되는 등, 석기를 깍고 다듬은 나무와 결합한 창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인류의 위대한 여행』, 27~34). 지금 공주 석장리에 가면 지금 쇠닝겐 창의 재현물을 볼 수 있다. 어찌나 날렵하게 깎았는지 우아하다는 느낌이 들어 사냥무기같지가 않다. 어쩌면 정말로 장식품은 아니었을까?

 


5. 돌의 인연
보통 구석기인을 생각할 때 손에 ‘돌도끼’를 쥐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큰 사냥감을 때려 잡는 장면을 곧바로 생각하기가 쉽다. 하지만 실제로 〈석장리박물관〉의 돌도끼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사냥 무기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쓴다면 도끼를 든 자의 손에 더 큰 상처가 날 수도 있을 정도로 깎인 부분이 날카롭고, 식물이나 동물을 베려고 했다면 도끼 자체의 크기가 너무 커서 상대편에서도 큰 상처를 입기 쉬울 것이다. 돌도끼는, 침팬지의 경우 보통 7년이나 8년 정도에 걸친 연습이 필요한 물건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라도 아침밥 먹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몇만 년에 걸쳐 서서히 그 제작 기법을 바꿀 수 있었을 정도로, 현대적 비유로 치면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것 정도로 집단 지성과 오랜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도구 제작을 위해서는 다양하면서도 확실한 필요가 먼저 제작자의 마음에 떠오르게 된다. 


나는 상상해본다. 이들의 마음에는 두 개의 세계가 떠올랐을 것이다. 하나는 숲이다. 그들이 베어 찍는 나무와 살을 발라 내는 동물들의 세계 말이다. 주먹도끼는 일차적으로 자연과 도끼 제작자 자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나온다. 다른 하나는 마을이다. 선사의 맥가이버칼을 가진 이들은, 요즘도 세련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듯 그 능력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주먹 도끼는 내가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나눌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는 만들 수가 없다. 스티븐 마이든과 같은 인류학자는 특히 두 번째 가설에 힘을 싣는다. 세련된 도구의 기능이 이성의 매력을 얻는 데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기의 목적은 실용이 아니라 어떤 장식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런 해석이 아예 설득력이 없지가 않는데 현대 사회에서도 딱히 실용과는 상관 없는 물건을 지닌 것으로 그의 매력을 따질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자, 본격적으로 금강변에 앉아 석기를 떼어보자. 석기를 만들려면 제일 중요한 것은 돌이다. 공주 석장리 석기는 주로 석영을 갖고 만들었다고 한다. 연천 전곡리의 경우 규암을 많이 썼다고 한다. 석기 제작자가 석영이나 규암 등을 잘 고른 뒤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돌의 재질에 따라 다른 손힘이 요구되듯, 이제 석기 제작자는 자기 팔과 손의 힘을 돌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손힘의 조절이다. 큰 덩어리의 돌을 세게 두드려 여러 조각으로 나누려면, 특히 몸돌(石核)에서 격지(薄片)를 떼어내려면 응력(應力; 단위면적당 작동하는 힘)의 분배에 신경을 써야 한다. 무턱대고 돌을 두드리다가는 크게 두조각이 나거나 볼품없는 쪼가리만 떨어질 테다. 올도완 모형의 주먹도끼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잘 보여주듯 구석기의 석기는 몸돌이 둥근 원뿔 모양이다. 돌을 돌려서 깨나가야 하고, 깨진 부분의 형태가 대칭적으로 안정감 있게 만들어져야 한다. ‘망칫돌’을 이용해 타격을 가해나가면서 하나씩 돌려 깨다가 마지막에는 제일 처음에 떼어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적당하게 깨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제작자에게 중요한 것은 융통성이다. 〈전곡 선사박물관〉소개 동영상을 보면 관장님께서 직접 전곡천 앞에 자리를 깔고 앉으신 다음 주먹도끼를 깨시는 장면이 나온다. 강조하시는 바는 창의성인데 곧 융통성이다. 돌이 원하는 모양대로 나오지 않더라도, 즉 어느 한 부분이 지나치게 크게 떼어졌다면 그 다음은 조금 작게 떼어낼 수 있도록 목표를 고집하기보다 돌의 성질과 떼고 있는 자신 사이의 힘 겨루기를 계속 해나가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석기 제작자의 융통성은 그가 자기가 원하는 모양의 돌도끼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리고 석기 제작자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돌을 변형하면서 벌어지는 우발적 사건들을 진정 즐길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인내심이다. 그는 강가에 앉아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돌을 깨어보며 돌에 대해, 이 주먹도끼로 할 일에 대해, 그 일의 노고와 성과를 나눌 이들에 대해 생각하며 참을성을 갖고 깨고 또 깨었으리라. 그의 마음은 돌을 깨면서 만나게 되는 의도치 않은 변형들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서서히 목표에 다가가려는 활기찬 긴장으로 가득했을 듯하다. 선사의 석기 제작자는 광물학의 대가이면서도 참을성 있게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예술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심’이라는 단어를 조금 다르게 가져가야 한다. 보통 인내란 특정한 목적을 향해 집중하는 마음으로서, 도달점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곤란을 견디는 상태를 뜻한다. 그런데 앞서 두 가지의 목표 중, 주먹도끼 제작자가 후자에 더 초점을 맞춘다면 그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돌도끼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자신이 돌도끼를 만들 수 있다는 그 능력을 증명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석기 제작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인내’가 아니라 ‘여유’일지도 모른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Tim Ingold)는 주먹도끼에 대한 우리 상식을 뒤집는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는 연필을 쓸 때, 심이 닳을 때마다 계속 깎는다. 잉골드는, 연필을 깎을 때처럼 실제로 석기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떼어낸 박편들일 것이고, 저토록 큰 석기는 더 이상 뗄 수 없을 정도로 깎인 돌의 상태라는 것이다(Tim Ingold, ‘On making a handaxe’, Making, 38~43 참고) 즉 우리가 〈석장리박물관〉에서 보는 것은 석기인들의 몽당연필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팀 잉골드는 발견된 주먹도끼를 노동의 ‘결과’로 보지 않고 진행을 멈춘 ‘과정’으로 본다. ‘형태란 부여된 것이 아니라 출현한다.(앞의 책, 44)


도구의 사용은 인류를 자연의 모든 종보다 우월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인류의 정신은 목적을 전제하고 사물을 수단화할 수 있으며, 그것을 자기의 의지와 능력으로 완성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팀 잉골드의 완료를 모르는 ‘만들기’ 개념은 그런 인류관을 내려놓게 한다. 최종 형태를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도구가 아니라, 우발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변에 널린 우연적 조건에 자기를 맞추어가는 과정에서 파생적으로 나온 것이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석기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도 몸돌만 남아 있기 때문에 박편들로 석기인들이 무엇을 했을지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게 떨어져 나온 도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차고 넘치게 많았을 것이다. 창의 날로도 쓸 수 있을 것이고, 작은 풀들을 베거나 꼴 때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날카로운 돌날로 바위나 땅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들기란 어떤 행위일까? 미리 목적을 정하고, 디자인을 구상한 뒤, 설계도를 만들어 물질과 소재를 조립하여 완성하는 일일까?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만들기란 대화이며 삶을 낳는 행위라고 본다. 제작자는 재료를 느끼며 그것에 자신의 힘과 능력을 가미해 다른 형태의 삶을 부여한다(팀 잉골드, 차은정·권혜윤·김성인 옮김,『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팀 잉골드는 제작자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건은 완성을 모르며 쓰이는 과정 속에서 자기 인연을 따라 다른 관계적 삶을 만들며 따라간다. 북서부 인디언 부족들은 나무 사람들이다. 그들은 커다란 삼나무를 잘라 부족의 상징 토템 기둥을 만드는데, 나무로 만들다보니 결국 썩어 부서질 수밖에 없다.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당국자와 연구 자료를 보관하고 싶은 인류학자는 어떻게든 나무가 썩지 않도록 보관할 방법을 궁리하지만, 정작 부족민들은 영험한 토템폴이라도 보존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을 원하는 인간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간도 있다. 도구의 인간, 기술의 인간 호모 파베르는 완성과 보전이 아니라 이행을 도구의 본질적인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참고문헌 ※ 
앨리스 로버츠 지음, 진주현 옮김,『인류의 위대한 여행』, 책과함께
파스칼 피크 외 지음, 김성희 옮김,『최초의 도구』, 알마
프란스 드 발, 박성규 옮김,『원숭이와 초밥 요리사』, 수희재
팀 잉골드, 차은정·권혜윤·김성인 옮김,『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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