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석기 시대

[석기시대] 나의 석기시대

by 북드라망 2024. 10. 17.
『슬픈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 『신화의 식탁위로』의 저자 오선민 선생님을 따라 <석기 시대>로 떠나봅니다.  왜 하필 <석기 시대>일까요? 아니, <석기 시대>여야 할까요? 바로 선민샘께서 친절하게 설명해주십니다.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석기 시대 공부의 장점 세 가지! 1. 극도로 경쟁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여기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하나의 기술이 된다. 2. 일상을 낯설게 볼 수 있다. 3. 석기시대 공부의 최고 의미는 그 정답 없음에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다고요? 당연합니다. 이제 앞으로 찬찬히 석기시대를 만나게 되실 테니까요. 2주에 한번, 오선민 선생님의 <석기 시대>가 여러분들을 찾아옵니다~ 기대해주세요!

 

나의 석기시대

 

이상한 사람, 이상한 일
공주 석장리 구석기 박물관에 주먹도끼를 보러 갔다. 나 외에, 박물관에는 관람객이 아무도 없었다. 여러 주먹도끼(주먹도끼도 종류가 엄청 다양하다!)를 관찰하고, 좀 갑갑한 마음에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작은 전시실 안에 담긴 고대 한반도 중원 풍경도 신기했고 박물관 앞을 조용히 흐르는 금강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한참 왔다갔다 하는 나를 보고 매점 아저씨께서 말을 거셨다. ‘뭐 하시는데? 여길 왜 왔어요?’ 박물관 터줏대감이 보시기에도 구석기 관람은 신기한 일인가보다. 아저씨는 참지 못하고 장난 섞인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더 하셨다. ‘신석기도 아닌데?’ 


하루가 멀다하고 최신 기술이 개발되는 중이다. 달나라 여행이 홈쇼핑에 뜰 날도 머지 않았다. 그런데 70만 년 전의 주먹도끼라니? 논밭도 국가도 없는 시절의 이야기를 왜 하고 싶은가? 그렇다. 나는 요즘 이상하다. 다들 바쁜데 혼자 시간이 넘친다. 살고 있는 세종시에서 왕복 8시간을 운전해 강원도 양양의 선사 박물관(여기는 신석기 박물관이다)에 다녀오거나 KTX를 갑자기 타고 부산 영도 앞 바다 동삼동으로 패총을 보러 간다. 이상한 사람은 이상한 사람을 알아 보는가? 혼자일 줄 알았는데, 느긋이 석기 유적지 다니기를 좋아하는 친구들도 사귀게 되어 매일 10만 년 전, 8000년 전 세상 이야기에 푹 빠져 있다. 유물을 보며 과거를 상상할 때 나의 마음은 편안하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가 느껴지는데, 티끌같이 미미한 내 하루도 귀하게 생각된다.   

 

출처 - 인문공간세종 카페

 


다시마 루트를 따라
석기시대 공부에 마음을 내게 된 것은 다시마 때문이다. 인류학자 스티븐 마이든은 『빙하 이후』라는 책에서 다시마를 예찬하는 것을 읽고서다. 그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메리카 대륙까지 어떻게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각 대륙의 선사 캠프 생활을 상상해가며 천천히 설명한다. 일단, 20만 년 전 쯤 아프리카 남부에서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는 대륙의 기후가 사바나로 변함에 따라 관목들이 드문드문 나 있는 초원에 적응해야만 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미지에 대한 탐구심이 가끔 아주 크게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는 지금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말레이반도 근처의 순다랜드, 북쪽으로는 유라시아 대륙을 통과해서 마침내 그들은 1만 5000년 전 쯤, 지금의 베링기아를 통과하게 되었다. 베링기아는 지금 바다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짧은 풀들이 매끄러이 깎인 광활한 초지였다. 사피엔스는 이 들판을 통과해 남아메리카 몬테 베르데까지 쑤욱 내려갔다고 한다.  


문제는 루트다. 스티븐 마이든은 호모 사피엔스의 남아메리카 진출에 관해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하나는 육지 가설이다. 온난해진 기후로 북아메리카 대부분을 꽝꽝 덮고 있었던 빙하가 녹자, 북아메리카 동쪽의 로렌타이드(Laurentide) 빙하와 서쪽의 코딜러란(Cordillerran) 빙하 사이에 길이 뚫려 마침내 유라시아의 사냥꾼이 남하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닷길 가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동아시아 남단(한반도도 그 출발지로 유력하게 거론되는데)에서 출발해서 아메리카 서쪽 해안의 우림을 따라 남하했으리라고 한다. 


스티븐 마이든은 이 바닷길 루트에 더 무게를 두는데, 이유는 걸어서 가기보다는 수심이 얕은 해안선을 따라 땟목을 타고 내려가면 더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음식이다. 일단 내륙에서 우물을 찾기보다 해안가 근처에서 식수를 구하기가 더 쉽다. 또 육지 식물에는 어느 하나 독성이 없는 것이 없는데 해조류는 어느 것에도 독이 없다. 그리고 해조류는 육지 식물이 봄여름가을겨울을 타는 것과 달리 계절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서쪽 해안 루트에는 풍부한 다시마숲이 연안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그 자체로도 충분한 먹거리를 제공하지만 어류, 해양포유류, 성게, 갑각류, 연체동물들의 안정된 서식지 역할도 한다. 스티븐 마이든과 같이 바닷길에 주목하는 인류학자는 이 길을 다시마 루트(Kelp highway)라고 부른다. ‘다시마’는 풍요로운 바다 숲을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다. 


실로 상식적인 분석이다. 인류가 선택한 길, 그 최초의 걸음에 대해서 놀랍도록 낯선 분석이 필요하지 않다. 육지길보다 바닷길이 계절의 영향도 덜 받으면서 물과 음식, 게다가 이동 수단까지 얻으며 잘 살 수 있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그 챕터에서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책에서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걷든 자든 무엇을 하든 간에 사람은 마셔야 한다.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물이 있어야 내가 있다.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다시마 루트라는 말이 내포하는 바는 풍요로운 생태계다. 육지에 살건 바다에 살건 생명에게는 물이 필요하다. 물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나를 살리는 것은 물이다. 내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 내가 한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어디서나 쉽게 사서 마실 수 있는 물이라니? 나는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물은 도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살린 물은 다른 존재도 살린다. 물은 어디서 오는가? 강에서 온다. 강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계곡에는 수원이 있다. 그럼 계곡의 물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땅속이다. 땅속에는 왜 물이 있는가?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물이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이어준다. 나란 욕망과 재주로 제 뜻을 실현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주머니 같은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실로 그렇다. 인간적 삶이란 입과 항문 두 개의 마개를 다루는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근본적 조건을 생각하자니 물을 마시고 뱉는 모든 존재들이 형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냥꾼이냐, 채집인이냐? 
스티븐 마이든에 따르면, 인류학자들 사이에서는 최초의 아메리카인들이 육지 루트를 따랐는지 다시마 루트를 따랐는지에 대한 입장을 가지는 것이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은 육지 루트 설에 힘을 실었다. 왜냐하면 증거가 모두 아메리카 내륙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1927년 뉴멕시코주 폴섬(Folsom)에서 들소 뼈 사이에서 찌르개가 발견되었다. 길이 6cm 정도로 양면이 정교하게 떼어 내진 석기였다. 기부에서부터 길게 홈조정(flute)까지 있어서 긴 막대기와 결합된 형태로 쓰였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1993년에 콜로라도 주 덴트(Dent)에서 폴섬에서 나온 것보다 더 큰 석기가 발견되었다. 이 클로비스 석기가 발견된 지점 근처에 매머드 뼈가 대량으로 나왔기 때문에 클로비스 석기는 폴섬보다도 앞선 석기로, 인류 매머드 사냥의 멋진 증거로서 해석되었다. 아리조나 남부 산페드로(San Pedro) 강 유역에서는 매머드 한 개체의 거의 완전한 뼈대와 함께 클로비스 찌르게 8점이 한꺼번에 나오기도 했다. 

 

이런 육지 루트 설을 지탱하는 것은 사냥도구로서의 석기였다. 최초의 아메리카인은 무시무시한 사냥꾼이라는 말이다. 이런 해석은 오랫동안, 클로비스 사냥꾼이 서기전 11,500년 즈음 얼음 없는 통로의 남쪽 끝에 도착한 뒤 불과 몇백 년 만에 삼림지대를 지나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평원과 숲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매머드뿐 아니라 여러 대형동물을 절멸에 이르게 했다는 결론까지로 이어졌다.  

 

그런데 다시마 루트 설을 밀어붙이게 되면 사냥꾼으로서의 아메리카인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다. 바닷길을 따라 남하하는 인류의 주된 미션은 사냥이기보다는 통나무를 베어 뗏목을 제조하거나 다양한 해양 연체동물들 해조류들을 채집하고 먹기일 것이다. 채집이 주된 활동이라면 다양한 식물 줄기로 바구니를 짜거나 낚시 그물을 만드는 일에 활동이 더 집중되었을 수도 있다. 석기를 든 인간은 그것으로 큰 짐승이나 사람을 때렸을 것 같다. 매머드처럼 큰 동물을 잡을 때에는 당연히 누군가는 덫을 놓고, 누군가는 유인하고, 누군가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식으로 협동도 할 것이다. 이때 당연히 최후의 일격자에게 더 많은 몫의 고기가 돌아갈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물을 짜기 위해서는 일단 모두 둥그렇게 모여 앉아야 한다. 각자 자기 석기를 들고 협동하는 것과 공동의 그물을 함께 짜고 던지고 잡아 올리는 활동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지는 않을까? 매머드가 아니라 작고 다양한 모양의 조개가 주된 식량원일 때 그 공동체의 삶에는 어떤 차이가 발견될 것인가? 

 

 


석기 중심의 인류관을 내려 놓으면 인간사에 대한 다른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메리카 이동 루트를 둘러싼 인류학계의 논쟁은 최초의 인류를 서서 거대한 동물을 잡고 배분과 저장에 힘을 쏟는 계급적 사냥 집단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해안가에 앉아 두루 모여 식물 줄기를 꼬거나 하루하루 엮은 그물로 물고기를 건져 먹는 평등한 채집 집단으로 볼 것인지를 두고 일어났다. 즉 어떤 인간상을 대륙의 선조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정체성 담론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석기시대란 인류가 돌을 쓰며 생활한 시대를 뜻한다. 에티오피아 ‘고나’에서 270만년에서 258만년 정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최초의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시점부터 시작해서 인류 농경의 대확산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기원전 9000년~8000년 전까지이다. 신석기시대도 ‘석기’ 시대이기는 하지만, 신석기시대의 포인트는 재배와 정주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류학에서는 돌이 아니라 목재에 바탕을 둔 나무 생활에 초점 맞추게 된다. 그런데 첫아메리카인들은 재배와 정주를 몰랐지만 식물상에 집중했다. 그럼 그들을 구석기인이라 불러야 할까, 신석기인이라 불러야 할까? 


다시마를 따라가다 보니 인류사의 한 시대 이름에 불과하다지만, 경우마다 그 내포가 매우 다름을 알게 된다. 흥미롭게도, 어떤 명칭에도 정답은 없다. 스티븐 마이든은 인류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다시마 루트는 모두 바닷가에 있고 석기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인간사 전반에 대한 풍부한 해석력이라고 한다. 당신이 조상으로 삼고 싶은 이는 사냥꾼인가? 채집인인가?  
  

 

Back to the Future
지금부터 연재할 글은 모두 석기시대 유적지 답사기이다. 석기시대란 더 이상 지구상에 남아 있지 않다.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국내의 다양한 사건사고 뉴스와 도처의 전쟁과 기후 위기 뉴스가 쏟아지는데 왜 굳이 아득한 과거로 돌아가야 할까? 

 

우리는 극도로 경쟁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경쟁이란 결과를 놓고 다투는 게임이다. 누가 결과를 선점(先占)하는가가 관건이 되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의 분위기가 타오르게 되면 각자가 어떤 자리에 있든 선점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일이 벌어진다. 물론 목표를 향한 성실한 기투는 우리에게 성취감과 그에 따른 자존감을 안겨 준다. 그런데 과열된 목표지향적 열정은 뭐라도 해야 성이 차는 들뜬 상태로 자꾸 사람을 몰아갈 수 있다. 추구하려던 결과가 무엇이든 일단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매일이 숨찬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곧 뒤처지는 일이 된다. 그래서 왜 경쟁하는지, 내가 왜 하필 그것을 추구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질문할 여유도 없이, 어떻게든 매달릴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불안 중독증에 시달리고 만다.  

 

뿐만 아니다. 경쟁적 문화는 일상 전반을 결과 효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시선을 낳는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항상 쓸모 있는 것과 없는 것, 도움이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의미 있는 일과 그렇지 않는 일을 색출하면서 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생활은 매 순간이 백과 흑을 가르는 게임이 된다. 그런데 조금의 실수나 실패도 스스로 용납하기 어려운 금욕적 성실주의로 일 년 365일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팽팽히 부풀어오른 과다 열정의 풍선은 결국 터져버리게 되어 있다. 자기 서 있는 자리를 스스로 돌볼 최소한의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번-아웃의 막다른 골목에 도착하고 마는 것이다.  

 

석기시대 공부는 이와 같은 열정 시대로부터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하나의 기술이 된다. 잠깐 언급했지만 석기시대란 돌을 쥔 인간의 시대다. 인간이 연필도 쥐고 핸드폰도 쥐고 뭔가를 늘 들고 있는데 돌을 든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런데 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깎아 들었다는 사실에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 

 

아프리카의 무성한 숲에서 생활했던 유인원 중 몇몇이 급격한 기후변화로 사바나가 된 초원을 돌아다니기 위해 땅으로 내려오면서 인류 직립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타고 나르며 생활하기에 적합했던 네 손 중 두 발이 출현하기까지, 두꺼운 가지를 잠깐씩 쥐기에 적합했던 짧은 엄지가 오랫동안 물건을 쥐어도 피로하지 않은 긴 엄지로 진화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하는 인류는 긴팔원숭이와 오랑우탄, 고릴라와의 공통조상으로부터 600만년 전에 갈라져 직립의 길을 걸었고, 그로부터 200만년 전 즈음에야 본격적으로 직립하는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한다. 직립을 통해 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앞발로 인류는 물건과 계속 관계를 맺어야 하는 종이 되었다. 잘 생각해보자. 우정이나 사랑, 물건이나 돈 같은 대상을 꼭 잡고 있고 싶다지만 그것도 손이 있어야 가능하다. 먹고 입고 잔다지만 그것도 이런 몸으로써인 것이다.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잡기까지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석기시대 공부의 첫 번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석기시대 공부란 인간의 삶을 그 몸의 발생에서부터 바라보는 일이다. 이때 우리 시야 속으로는 반복된 빙하기에 거듭 풍경이 바뀌었던 아프리카 대륙이 들어온다. 인류로서의 내가 그 뿌리를 아프리카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정말이지 한반도만이 아니라 육지와 바다 전부가 나와 무관하지 않은 운명으로 느껴져 마음이 장엄해진다. 그래서 석기시대 공부를 하면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다. 급급한 마음이 절로 차분해진다.    

 

두 번째 의미는 일상이 낯설어지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가끔씩 반찬으로 식탁 위에 오르는 다시마 한 조각에도 인류 문화의 구석구석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석기시대 공부는 각각의 인류 집단이 저마다의 고민 속에서 그 의식주 형식을 모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 만약 인류가 사바나의 숲에서 걸어 나오지 않고 기어 나왔더라면 우리가 추구해야 마땅한 목표는 지금과는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네 발로 운전하는 자동차, 온몸의 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줄 패션? 우리와 다른 방향에서 진화를 거듭한 보노보처럼 강력한 모계 사회는 또 어떤가? 이렇게 실현되지 않은 많은 길에 대해 상상하며 인류 진화의 시도 하나하나를 더듬어가다 보면, 마땅한 듯했던 모든 것이 다 인류가 이렇게도 걷고 저렇게도 걸은 자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 내가 손에 쥐려고 급급했던 모든 것들이 조금 미덥지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게 된다. 

 

마지막으로 석기시대 공부의 최고 의미는 그 정답 없음에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호모 에렉투스로, 호모 에렉투스는 유럽에서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동북아시아에서는 북경원인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다시 아프리카에서 20만년 전 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다. 한반도에는 공주 석장리 등 구석기 유적지에서 70만 년 전의 석기가 출토되었다. 70만년 전이면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에 10만 년 전 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 사피엔스가 이 땅을 찾을 때까지 무려 60만 년 동안 이곳은 에렉투스의 터전이었다. 그럼 체취며 의사소통 방식 등 모든 것이 달랐을 두 종의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 마주쳤을까? 

 

아무도 모른다. 두 종의 마주침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자연 안의 모든 것은 변하고 또 변한다. 세월의 풍파를 벗어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각 대륙과 바다에서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느꼈을 ‘모든 것’은, 지금의 세계지도와 일기 정보로는 아무리 해도 다 재구할 수 없다. 그런데 정확히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또 추정할 수 있다. 내가 휴대폰을 들고 있을 때 어느 네안데르탈인은 주먹도끼를 쥐고 있었을 뿐! 가족이나 친구와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우리 둘의 욕구는 동일할 터이니 충분한 정도의 차이점과 공통점이 떠오를 것이다. 

 

석기시대 공부는 목표지향적으로만 조정되어 있던 우리 시야를 넓혀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편협한 나의 상식이 깨지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계절이 남아 있는(아직까지는) 온대 기후의 생활만이 아니라 열대나 한대 기후에서의 삶까지도 내 관심 안에 둘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정답이 아니라 상상력이 더 많이 요구되는 작업으로, 나 자신을 반성하기보다는 다른 기후 다른 풍경 속의 누군가를 떠올리기는 일로 공부의 방향을 옮기는 일이 즐겁다. 

다음 화부터는 한반도 석기시대 유적지를 본격적으로 답사해보자. 몇십 만 년 전에 이 땅을 걸었던 이들과 나 사이의 아득한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또한 공통점에 대해서도 상상해보자.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낯설어질 것인가? 그만큼 우리 숨찬 일상에 신선한 바람이 불 것이다.  

 

 

 

글_오선민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