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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석기 시대

[나의 석기 시대]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한 여행

by 북드라망 2024. 10. 31.

보이는 것 너머를 향한 여행


눈(目)의 여왕
안데르센의 동화 중에 추운 나라 마녀가 총명한 소년을 납치하는 이야기가 있다. 「눈의 여왕」이다. 덴마크어로야 눈(雪)이 눈(目)일 리 없지만, 우리말로는 이 살벌한 겨울 마녀 이야기가 본다는 것의 문제를 제기하는 동화로 읽힌다.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악마가 이상한 거울을 하나 만들었다. 아무리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라도 그 거울에 비치기만 하면 구차하고 비루하게 보이는 거울이었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경치는 푹 삶은 시금치처럼 보였고, 사람들은 몸체 없이 머리로 서 있는 것처럼 소름끼치고 흉측하게 보였다. 거울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완전히 뒤틀려서 도무지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으며, 주근깨라도 하나 있으면 얼굴이 온통 주근깨 투성이인 것처럼 보였다. 또 아무리 착하고 경건한 생각을 하더라도 그 거울에 비치면 악한 생각으로 바뀌어 버렸다.”(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윤후나 옮김,「눈의 여왕」,『안데르센 동화전집』(현대지성), 265쪽) 

 

악마들은 이 거울을 들고 하늘 높은 곳에서 천사들을 우습게 만들어 보이려고 했다. 그러다 그만 거울을 놓쳐 깨고 말았다. 깨진 파편들은 사람들의 눈에 슬그머니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뒤틀린 마음으로 사물을 비뚤게 보기 시작했다. 파편은 날아가 어떤 도시의 하늘 위에서도 내렸다. 우정이 돈독했던 카이와 게르다가 놀고 있는 곳에도 떨어졌다. 유독 공부를 잘 했던 카이의 눈은 이 거울 조각이 탐낼 만한 마음의 호수였다. 결국 카이는 심술궂은 아이가 되어 게르다에 대한 사랑도 버리고, 악마 중의 악마인 눈 여왕을 따라 겨울 왕국에 가서 살게 된다. 물론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카이는 친구를 걱정하는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로 눈에서 거울 조각을 뺄 수 있게 되어 착한 아이로 고향에 돌아온다. 


안데르센은 이 요술 거울의 출처를 재미있게 밝힌다. 바로 악마들의 학교다. 사실 카이가 거울을 맞은 이유도 게르다보다 월등히 똑똑해서다. 눈의 왕국에는 그 한가운데에 ‘이성의 거울’이라는 호수가 있고, 여왕은 그 위에서 얼음 조각들을 짜 맞추어 ‘영원’이라는 글자를 만드는 미션에 시퍼런 얼굴을 하고 집중한다. 「눈의 여왕」에 따르면 이성적 지식은 아름다움을 왜곡하고, ‘영원’ 즉 박제된 지식을 지향하는 이들은 지금 살아 있는 감정을 놓친다. 안데르센은 그렇게 얼어붙은 눈을 악이라고 한다. 그래서 교훈은 ‘이성의 눈으로 세상 보기를 두려워하라!’이다. 

 

안데르센은 이성적 지식, 객관적 앎을 불신한다. 본다면 게르다처럼 사랑의 눈으로, 비루하건 어리석건 상대방의 모든 모습을 아름답게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게르다처럼 보며 카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동화에서만이 아닐까?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카이의 불안과 초조를 ‘자기 마음대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다 해결될까? 동화의 게르다는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눈이 젖어 있어, 자기 발밑이 얼어 있는지 녹아 있는지 제대로 볼 줄을 몰랐다. 게르다는 ‘착한 카이’를 사랑했지만 그것은 모두 게르다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
어떻게 보아야 잘 보일까? 구석기 시대 공부를 위해 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석기 시대의 정보라든가 사진 이미지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십 만년 전 인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책만으로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과거에 대한 지식이 내 안에서 차고 무르익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사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방문 날에 큰 좌절을 했다. 〈공주 석장리 선사 박물관〉이었는데 70만 년 전 유물이라고 해서 돌도끼와 그 파편들 몇 개가 전시되어 있었다. 인류가 돌도끼를 든 것은 중요한 사건이라고들 하지만, 그 객관적 정보를 갖고 무엇을 더 알아보고 이해해야 할지 막연했다. 그래서 뭐 더 생각할 거리가 있나 싶어 연천 전곡리의 선사 박물관으로 갔다. 연천은 세종에서 편도로 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구석기라는 과거를 맛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다! 


그런데 연천에서는 더 곤란했다. 역시나 주먹도끼뿐이었기 때문이다. 연천의 전곡 선사박물관은 공주 석장리 선사 박물관보다는 다양했다. 그래 봐야 큰 주먹도끼, 작은 주먹도끼, 윗부분을 깎은 주먹도끼, 양옆을 깎은 주먹도끼, 까만 도끼, 점이 톡톡 많이 붙은 도끼, 거칠거칠한 도끼 …… 다. 도끼, 도끼, only 도끼! 진짜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도끼만 쥐고 살았단 말인가? 확인할 길이 없다. 당연하다 돌이야 풍파를 견디며 몇만 년 버틴다지만 나무 등의 재질을 지닌 선사 유물은 남아 있을 리 없다. 아는 만큼 보려 해도 볼 것이 없다니? 공주에 다 있는 것을 연천에서까지 와서 왜 봐야 한단 말인가? 나는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금강과 연천의 주먹도끼들 사이에서 아연했다.  


그런데 두 곳의 선사 박물관을 다녀온 이후부터 서서히 나의 질문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내가 불충분하게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먹도끼가 정말 주먹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분명 아기자기하게 잘 다듬어 놓은 돌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주 석장리에서 영접한 실물은 20센티미터가 거뜬히 넓고, 폭이 10센티미터 가까이 되는 것도 있었다. 정말 엄청 손이 큰 성인 남자도 저 돌을 제대로 쥘 수는 없을 것이다. 나중에 찾아본 바로는 실제 공주 석장리 주먹도끼의 주인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에렉투스로, 실제로 키가 아주 크고 몸집도 다부지며 손과 발 힘이 대단했으리라고 한다. 이 주먹도끼를 쥔 이는 내가 아는 범위의 인간이 아니다. 호모 에렉투스가 실제로 사피엔스보다 키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키가 큰 사람의 다리와 몸집에 대해 그의 손 모습에 대해서는 정말 단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가. 나는 ‘아는 만큼’이라는 말의 깊이에 놀랐다. 돌도끼 뒤로 어떤 인류가, 그의 강과 들판이, 그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먹도끼에 대한 정보에 대해서도 조금씩 다르게 생각되었다. 실제로 호모 에렉투스의 것이라 해도 그 도끼는 너무 컸다. 그들은 주먹도끼로 무엇을 했을까? 사냥을 했을까? 무기가 큰 만큼 눈앞의 동물도 큰 몸집을 가졌을까? 곰이라고 생각해보자. 아! 그런데 곰이 그 정도로 바보일 리는 없다! 저렇게 큰 돌을 들고 다가오는, 정말 큰 동물이 사냥꾼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리 없다. 그럼 작고 날랜 사슴일까? 사슴이라고 바본가? 사슴은 정말 예민한 동물이고 진짜로 빠르다고 한다. 저렇게 둔탁한 돌도끼를 맹렬히 달아나는 사슴을 향해 던져도 소용이 없으리라. 교과서에는 구석기인들이 ‘주먹도끼를 썼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썼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썼다’라고 하는 이 동사 하나를 이해하려면 선사 문화에 관해 더 많이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유물을 보며 더 적극적으로 상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중에 답사를 더 다녀보고, 책을 더 읽어보고 알게된 것이지만 주먹도끼의 실제 효용은 동물 사냥에 있지 않고, 나무를 베는 것에 있었던 듯하다. ‘도끼’라고 하면 실제로도 나무를 벨 때 사용하는 도구다. 나는 왜 그렇게 쉽게 주먹도끼를 짐승을 찍어 죽이는 무기라고 생각했을까? 어쩌면 나는 인간이 본디 뭔가를 공격하는 존재, 상처 입히고 죽이면서 제 배를 불리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지만, 진짜로 나는 아는 그것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금강 강변에 앉아 조용히 돌도끼를 깨던 그는 누구였을까? 금강 옆에서 움집을 짓고 살았을 그가 보았을 풍경은 내가 보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주먹도끼를 쥐고 그는 어디를 향했을까? 한 손으로 도끼를 쥔 채 다른 손으로 이 나무 저 나무를 더듬었을까? 문득 그가 느꼈을 바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세월을 버티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유물은 어떤 지혜를 품고 있다. 그것은 카이가 보고자 했던 객관적 사실도 아니고 게르다가 느꼈던 주관적 감상도 아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에서 켈트인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곁에 가만히 있는 듯한 사물들은 시간을 품고 있다. 이 사물을 시심(詩心) 가득한 누군가가 건드리게 되면 그때부터 무한한 이야기가 풀려 나온다. 켈트인들처럼 나도 유물로부터 객관적 정보나 주관적 감상이 아니라 어떤 풍경과 낯선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다. 

 

 


재현에 도전하는 답사
진품과 사실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자. 선사 박물관에서 볼 것은 실물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재현물이야말로 선사 박물관 관람의 큰 재미를 선사한다. 재현물이라, 굳이 말하자면 ‘가짜’다. 그것도 시대의 해석이 담뿍 들어 있는 가짜다. 한반도 중요한 선사 유물은 대부분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기 때문에, 실제 출토지 부근 박물관에 있는 것이 모조품일 때가 많다. 창령 비봉리에서 출토된 우리나라 최초의 나무배가 그렇다. 진품을 보려면 용산의 국중박에 가야 한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진품이어야 한다. 만약 가짜를 ‘가짜’라고 버젓이 두고 미술관을 운영할 수 있다면 ‘모나리자’가 있는 파리의 루브르라던가 ‘반 고흐’가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을 굳이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술관의 프라이드는 오직 ‘진품’에서 온다. 그런데 석기 시대 연구는 ‘가짜’와 함께 할 줄도 알아야 한다니? 사실과 진짜에 집착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재연품은 크게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썩어 문드러졌을 목재품이나 뼈제품을 복원한 경우로, 이것은 그나마 석기 시대 교과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하나는 마네킹들이나 그림들로 재현한 선사시대 복원 풍경들이다. 여기에는 실물의 크기라든가 재질이 모두 애매모호하다. 한반도 신석기의 대표적 패총 유적지는 세 곳이다.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 시흥의 오이도. 그런데 세 곳 박물관의 신석기 생활상 재연을 보면 모두 옷입은 바가 다 다르다. 거의 계급 차이라고 할 정도로 옷감이나 디자인이 차이가 나서, 옷만 놓고 보면 오이도는 신석기 시대의 파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반도 신석기의 범위가 몇천 년이나 되고, 청동기나 철기 시대가 되어도 일반인들은 옛날 식으로 옷을 입고 집을 지어 살았을 수가 있기 때문에 진짜 ‘신석기’의 재현을 불가능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더라고 해도 대표적인 옷매무새의 특징이 너무 달라서 각자 재연의 근거를 어디서 찾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반도 신석기라지만 동해와 남해, 서해는 각기 다른 문화권이라고 해야 하나?  

 

  (왼쪽) 양양 오산리 신석기 유적 / (오른쪽) 시흥 오이도 신석기 유적


마침내 나는 이런 불확실한 재현품을 보다가 그만 여러 박물관의 마네킹들에게 정이 들고 말았다. 선사 박물관 자체를 여러번 방문하다보니 갈 때마다 친구 만나러 가는 기분도 든다. 진짜 선사시대인들도 아닌데, 그들 표정을 읽으면서 이런들 저런들 어쨌든 어떤 인류가 석기를 들고 살았다는 사실을 새롭게 환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네킹이고, 현대적 통념을 담뿍 담았다고 해도 어쨌든 덕분에 나는 과거의 인류에 대해 감정이입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구석기인들 
이제 내가 만난 구석기 친구들과 그들의 삶을 소개해보겠다. 구석기의 경우, 석기 시대에 대해 가장 생동감 있게 알려주는 박물관은 단연코 공주 석장리다. 연천 전곡리 선사 박물관도 석장리만큼 다양한 생활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석장리 마네킹들은 표정이 풍부하다. 사냥과 채집 생활을 하는 구석기인들 각자가 불 피우고 물고기 잡고 쉬는 일상을 어떻게 느꼈을지 그들 표정으로 아주 잘 알 수 있다. 

(1) 석기의 생산 양식은 다양하다. 석장리 박물관에서는 구석기 시대를 재현하는 것이니만큼 다양한 수렵 풍경을 보여준다. 박물관 주차장 북쪽으로는 거대한 매머드를 잡고 있는 두 명의 사냥꾼이 보인다. 매머드는 나뭇가지 등으로 위장된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미 창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녀석의 크고 슬픈 눈 뒤로 아직도 긴장을 늦추지 못해 언제라도 다시 일격을 날릴 준비를 하는 사냥꾼의 뒷다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죽어가는 매머드 앞에는 큰 주먹도끼로 내리찍을 준비를 하는 사냥꾼도 보인다. 협동적이고 지능적인 수법이며, 함정, 활, 주먹도끼 등 복합적인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박진감 넘치는 동물 사냥은 표를 끊고 들어오면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두 개의 전시동 중 왼쪽의 특별 전시관 위에는 맷돼지에게 정신없이 쫓기는 아저씨들이 있다. 또 상설 전시실 지붕 위에는 담대하게 사냥감을 쫓고는 있지만 실은 바로 뒤에까지 쫓아온 살기 등등한 검치 호랑이도 보지 못하는 사냥꾼도 있다. 전시동 뒤 선사 시대 체험관 쪽으로 가보면 사슴 사냥하는 장면도 두 개 나오는데, 어떤 것에는 사냥꾼이 사슴 히프를 낮은 자세로 창을 들어 겨냥하고 있고, 다른 것에는 사냥꾼이 아예 사슴과 대치하고 있다. 사슴은 언제 뛰어갈지 모르므로 근거리 사냥이 어렵다. 사슴과 대치하는 사냥꾼의 이마에 찰나를 노리는 긴장된 땀방울이 흐를 것만 같다. 


마음만 먹으면 매머드도 쉽게 몰아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구석기의 사냥은 여간해서는 쉽지가 않은 활동임을 알 수 있다. 또 동물과의 관계는 매우 어렵고 복잡해 보인다. 검치 호랑이의 번뜩이는 눈도, 당황해서 죽어가는 매머드의 혼미한 눈도 저렇게 가까이서 마주한다면 인간에게는 극심한 공포, 더 나아가 윤리적인 부하감까지도 줄 만하기 때문이다. 저렇게 힘이 세고 강력한 존재를 내 배 불리자고 죽여도 될 것인가? 물론 한편으로는 사냥을 통해 그런 자연의 힘과 직면하게 된 자신감도 느껴진다. 


사냥과 관련해서 주로 느껴지는 바가 긴장감이라면 똑같은 사냥이기는 하지만 물고기를 잡아 오는 금강변의 어부에게서는 여유가 느껴진다. 매표소를 바로 통과하면 보이는 강변의 막집은, 실제 강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할 정도다. 사냥꾼은 작살에 민물고기 두 마리를 꿰어 왔다. 그 정도는 함정을 판다거나 사슴 뒤를 민첩히 노리는 등의 훈련 없이도 할 수 있는 노동처럼 보인다. 


생계 활동 중에서 석장리가 놓치지 않는 것에는 채집도 있다. 사과를 쥐고 있는 소년과 함께 즐겁게 산을 내려오는 듯한 소녀는 오누이 사이로 보인다. 빨갛게 익은 사과 한 알은 집단적으로 달려가 하루에 다 먹어치우지 않는 한 가을 내내 조금씩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채집에는 또 다른 도구도 보인다. 바로 풀로 엮은 바구니이다. ‘구석기 시대’라고 해서 주먹도끼 위주의 석기만 썼을 것 같지만 사냥보다도 어로보다도 쉬운 채집 활동을 고려한다면 구석기인들은 석기보다 바구니를 짜는 기술을 먼저 발전시켰을 수도 있다. 다만 풀로 짠 바구니는 세월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유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석기 시대지만 식물이 생활경제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놓치지 않아야겠다. 남아 있는 것 너머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었음을 느낀다. 

(2) 두 번째는 주거 생활의 다양함이다. 석장리에는 크게 세 가지 주거 공간이 재현되어 있다. 하나는 어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강변의 막집이다. 이 재현물은 집자리터를 바탕으로 세계 고고학계의 기초 자료를 바탕으로 고증한 것이다. 바로 누워 잔다고 했을 때 빽빽이 성인 다섯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규모다. 나는 슬쩍 들어가 보았는데 입구가 어른이 몸을 완전히 굽히고 들어갈 정도로 낮고 좁았다. 눅눅하지 않은 시원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안에는 환기구가 없기 때문에 불을 피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입구 쪽에 불을 피워놓고 생활했을 것이다. 


구석기의 다른 주거터는 동굴이다, 석장리에서는 동굴에서의 잠자리 같은 것은 재현하지 않았는데, 대신 동굴을 깊고 복잡하게 인공적으로 제작하여 그 안에 전 세계와 한반도에서의 다양한 암각화 그림을 모사해 놓았다. 낮게 시작해서 높은 곳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든 모형을 통과하는 것은 터널 경험과 비슷하다. 터널이란 미야자키 하야오도 여러 번 쓰듯 이 세계 너머로 우리가 하강하거나 도약하게 해주는 의식의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인류 최고의 철학은 모두 동굴 안에서 만들어졌다. 석장리의 동굴은 양쪽으로의 입구가 모두 좁다. 때문에 밖으로 나갈 때 정말 뭔가를 통과한 느낌이 든다. 오르게 되면 멀리 강이 내려다보일 정도의 언덕이 된다. 선사인들은 멀리 더 크게 조망할 수 있도록 의식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것으로 동굴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들이 동굴을 집으로 삼고 살았다면 그들에게 귀가(歸家)란 매일 근원적 자리로 돌아갔다 나오는 종교적 체험과 같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 입구에 불을 피울 수 있다면 굴속 습기도 조절할 수 있고, 역시 아늑한 잠자리를 원하는 검치호랑이나 매머드의 공격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주거 유적은 반건축형인데, 석장리 동굴을 나오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완전히 자연에 의탁한 주거형태는 아니고, 적당히 굵은 나무통을 엮어서 지붕만 얹은 듯한 형태를 취한 것이다. 추위나 동물들을 완전히 막아줄 수는 없겠지만 적당히 불을 피울 수 있다면 이 역시 간단히 건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동을 할 때에는 유익한 집짓기 방법으로 보인다. 

(3) 주거의 다양함만큼이나 이들 재현물은 그런 집자리를 만들어 누리는 사람들의 생활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임시형 막집 스타일에는 막 잡은 사슴을 해체하느라 새까만 수염 숭숭한 아저씨들이 바쁘다. 막집 바로 바깥에는 가죽 벗길 궁리를 하는 이도 보인다. 막집 안에는 엄마가 두 아이를 돌본다. 한 녀석은 이제 막 기기 시작했는지 엉덩이를 치켜들고 즐거워한다. 남자 어른이 셋에 여성 한 사람과 아이 둘의 가족 구성원이다. 


박물관 입구의 움막에서는 물고기를 잡고 오는 아버지를 할머니와 엄마 아들이 맞고 있다. 이 가족들 풍경에서는 할머니의 얼굴이 가장 인상적이다. 늘어진 가슴과 늘어진 뱃살로 겨우 할머니임을 추정할 수 있지만, 주름 가득한 이 노인의 손동작인 지금 큰 집짓기의 어려움이라든지 아침에 마주친 무시무시한 동물을 묘사하기라도 하듯 아주 활발하다. 아들인지 사위인지가 물고기를 잡아오기는 하지만 이 집안에서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은 아마 이 할머니이시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상설 전시관 앞에 불을 피우며 환호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그 앞에는 개와 노는 어린이도 있다. 개는 인류가 가축화한 동물들 중 첫 번째로 늑대의 변종이라 한다. 하늘에서 치는 번개를 꺼트리지 않게 되었을 때, 부싯돌을 이용해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켰다가 끌 수 있었을 때, 그 최초의 순간에 느낀 환희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게다가 매머드나 검치 호랑이처럼 무섭지도 않고, 사슴처럼 너무 여리지도 않는 개라니?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 느꼈을 즐거운 안정감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하다. 나는 재현물이지만 이 인형들 앞에 오래 서 있고 싶어진다. 자신의 지혜가 계발됨을 느끼는, 삶이 요구하는 많은 것들 앞에 침착하게 나아가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선사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진다. 
 
(4) 석장리 박물관의 최고 재현물은 홀로 있는 인간이다. 석장리에는 선사인이라고 해도 각자가 가졌음직한 번뇌와 기쁨이 표현되어 있다. 입구에서 핸드폰을 보듯 주먹도끼를 들고 궁리하는 사색가를 보고 있노라면 검색에 바쁜 내모습 같아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편안히 양팔을 의자에 기대고 조용히 금강을 바라보는 사나이 옆에서는 같이 좀 앉아 있고 싶다. 

 

 


최근에 선사 박물관으로 답사를 많이 가게 되었다. 몇 개 남지 않은 유물로 한반도의 선사를 재구하려다 보니 대부분 재현물을 보게 되는데, 구석기이건 신석기이건 다들 바쁜 모습이어서 놀랐다. 정말이지 석장리 박물관을 제외하고는 어디 노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이 세 시간을 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되는 구석기 생활을 묘사하면서도 박물관들은 쉼 없이 일하느라 바쁜 노동형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석장리의 재현물들은 구석기인들이 먹고 사는 일에 허덕이는 사람들로는 그리지 않았다. 그들에게 동물은 압도적으로 큰 힘으로 인간을 언제든지 제압할 수 있는 존재였고, 강물은 쉼 없이 흐르는 만큼 끝없이 인간에게 뭔가를 주고 있었다. 석장리에서 내가 만난 구석기인은 한 줌의 불씨에 감탄하며 한 알의 사과에 기뻐하는 수다쟁이들이다. 운이 좋아 꿈속에서라도 우리 만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그들에게는 나에게 들려줄 숲과 강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리라.    

 


그들도 나를 본다
지난 가을 인문공간세종 친구들과 서울대공원 동물원에 다녀왔다. 살아 있는 동물을 관찰하는 즐거움은 아주 색달랐다. 가만히 놓여 있던 주먹도끼나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불을 피우고 있는 재현 마네킹들과 달리 동물들은 어슬렁거리고 끼룩끼룩 고함을 지르고 낯선 냄새를 풍겼다. 물론 갇힌 동물을 밖에서 관찰하는 일에는 분명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서 발견한 생각할 거리들에 대해서는 수렵을 다루는 연재에서 다시 나누기로 하고, 일단 이날 내가 가장 놀랐던 점은 그들도 나를 본다는 사실이다. 어떤 침팬지는 사람을 놀랠 목적으로 갑자기 유리창을 주먹으로 쳤다. 졸다 깬 채로 관객이 좋아할 만한 포즈를 취해주는 고릴라도 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거친 훈련을 받으며 인간을 관찰하고 관찰해, 마침내 인간의 취향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볼 때, 그들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다만 차이는, 나는 내 식으로 동물을 보고 그들은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 보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프카가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갇혀 있다. 관람객으로 왔다지만, 앞서 보았든 나는 내가 아는 것에 갇혀 있다. 석기 시대의 유물을 봄으로써 안다고 생각했던 내 시선의 한계를 깰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 석기인으로 재현된 마네킹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시선의 훈련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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