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연결의 도구
1. 한결같은 돌도끼
한여름 공주 금강변은 매우 뜨거웠다. 선사의 금강인들이처럼 나도 어떻게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나는 〈석장리 박물관〉의 전시실을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점점 더워지는 지구를 느끼며 도끼를 든 인류의 난감한 미래를 희망을 갖고 상상해보았다.
기술 철학자이자 공생의 인류학자인 E.F. 슈마허는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는 우리 형이상학의 산물이라고 했다. 슈마허는 지금 이 세계가 근대 형이상학의 수족인 과학과 기술의 자식이라고 보면서, 특히 지금의 기술관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기술의 목표를 한계를 모르는 생산력에서 잡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반생명적이므로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이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항상 언제 어디서 멈춰야 할지를 안다. 슈마허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주장하면서 한계 속에서 즉 관계 속에서 그 목적을 살피는 생명의 기술관을 제안한다.
“자연의 성장도 신비롭지만 성장을 멈추는 자연은 더 신비롭다. 자연 세계의 모든 것에는 규모, 속도, 힘의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그 결과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 체계는 자기 균형 능력을 보이면서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고 정화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E.F. 슈마허,「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작은 것이 아름답다』(문예출판사), 181쪽)
나는 슈마허가 말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의 예를 2024년 봄에 실내 전시실의 구성을 크게 바꾼 〈석장리 박물관〉에서 발견했다. 일단 <석장리 박물관>의 전시 자체가 고인류의 기술관과 현대의 기술관을 대비해서 보여주기에 흥미로운데, 그 점부터 천천히 설명드리고 싶다.
〈석장리 박물관〉의 전시 공간은 전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실내 전시실은 두 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별전이 열리곤 하는 ‘손보기 홀’과 상설 전시관이 있고, 야외에 있는 실외 전시공간에서는 구석기인의 수렵, 채집, 여가를 둘러싼 다양한 생활상을 재현해 놓았다. 지금 ‘손보기 홀’에서는 특별전 ‘구석기의 위대한 발견’이 열리고 있다.
상설 전시실을 ‘기술관’을 중심으로 거시적 차원에서 구획하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입구에서 먼저 제시되는 것은 현대의 기술관이다. 들어서면 일단 ‘주먹도끼’가 아니라 석장리 유적 발굴팀의 지난했던 발굴 과정을 알리는 사진들이 우리를 반긴다. 그 다음 눈에 들어오는 전시물은 엄청나게 다양한 끌개와 흙손, 채 들이다. 크기는 비슷하지만 각 날의 사이즈나 벼려진 정도가 다르고, 흙으로부터 유물을 채취하기 위한 채들도 그 거름망의 크기에 따라 나뉘어 있다. 쇠꼬챙이 같은 경우는, 처음 시도되는 구석기 발굴 작업이니만큼 미세한 흙조각들을 털어내기 위해 석장리에서 발명된 것도 있다. 말 그대로 ‘도구의 도구들’이다.
발굴팀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흙을 팠고, 발굴된 유물에 대해서도 어떤 사랑을 쏟았는지 잘 느껴진다. 연구자들은 돌 조각 하나를 보면서 세월을 거스르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이 시대로, 귀한 유물을 데리고 올 것인지 그 가치를 설명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서 자로 유물을 재거나 그 모양을 그린 연구 노트들을 보고 있자니, 갓 태어난 아이 발육 상태를 일일이 기록하면서 더 멋지게 크기를 바라는 엄마의 마음같은 것도 느껴진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발굴 도구들을 보고 다음 섹션으로 가면 갑자기 풍경이 달라진다. 투박한 주먹 도끼 몇 점이 유리 상자에 갇힌 모습으로 나열되어 있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올해 재단장하기 전 석장리에서는 조금 더 많은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수가 대폭 줄어 있었다. 연구팀의 노력으로 어두운 과거의 흙더미에서 걸어 나온 이 손님들은 투박하고 단조롭다. 현대의 다양한 발굴 도구들을 보고 온 뒤라 수도 적고 모양도 단조로운 도구들이 어딘가 미덥지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유럽이나 미국같은 ‘선진국’(구석기를 다루는데 선진국이 무슨 상관이랴? 아무튼! ^^)의 구석기 모습은 좀 다를까? 이는 시야를 확대해도 마찬가지다. 전 세계 구석기 도구의 모습은 아프리카 동남부에서부터 칠레 남단의 해안가에 이르기까지, 세부적으로 특히 깎는 모양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하다. 통상적으로 석기 시대의 역사는 돌도끼의 크기가 줄어들고 그 깎임이 좀 더 정교해지는 것을 기준으로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 하지만 사실 모양 자체에는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00만 년 전에 출현했다고 하는 호모 에렉투스에서부터 1만 년 전에 신석기 혁명을 이룬 호모 사피엔스까지, 다양한 호모 종들이 전부 비슷한 모양의 석기를 썼다는 것이 된다. 이들은 서로 ‘기술은 개발하지 말자!’고 의논이라도 했던 것일까?
도구 보수성에 대해 그 누구도 제대로 말해줄 수는 없겠지만 일단은 지금 핸드폰 모양을 두고 추측해본다. 휴대 전화가 나온 것이 90년대 말이다. 널리 이롭게 사용된 것이 2000년대부터인데 그때만 하더라도 다양한 모양이 있었다. 크기나 색뿐만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도 사진 찍기에 특화되는 것, 음악 감상에 좋은 것 등으로 제각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의 핸드폰은 그 모양에 차이가 거의 없다. 기술의 세대론까지 불러일으켰던 아이폰과 갤럭시폰도 직사각형 네 변 길이의 비율이라든가 각짐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 이렇게 외모가 동질화되고는 있지만 기종들 전부가 일상적 노트부터 가전제품이나 자동차 등 생활 기기의 제어, 예술 작품 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진화 중이다. 내부 기능은 강화되지만 핸드폰 모양은 점점 더 보수화된다. 혹시 선사의 주먹도끼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투박한 저 석기는 의외로 아주 많은 목적을 수행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2. 손재주꾼의 충만한 노동
‘도구’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발굴팀의 도구에는 저마다의 목적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하지만 석장리의 주먹도끼에는 다양한 목적이 걸려 있었을 수도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부족들의 도구관을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정의한다. 만물의 우주를 단지 실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던 무문자 사회의 부족민들은 우발적인 필요를 우연적 조건을 활용하여 해결하는데, 이때 사물들은 목적인 것이 수단이 되기도 하는 식으로 계속 그 성질과 위상이 바뀐다(레비 스트로스, 안정남 옮김,「제1장 구체의 과학」,『야생의 사고』(한길사), 특히 69~71쪽 참고).
우리 시대의 예로 레비 스트로스의 브리콜라주 개념을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솜씨 좋은 주부가 냉장고 문을 연다. 묵은지 조금과 두부가 보인다. 저녁 식사를 위해 묵은지를 볶아 두부김치를 만들려고 하는 찰나, 하교한 아이들이 갑자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한다. 주부는 급히 노선을 변경하여 프라이팬 아래의 불을 끄고, 냄비에 물을 담아 새로 끓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혹시나 있나 돼지고기를 찾기도 하는데 없어도 괜찮지만 문득 유통기한을 코앞에 둔 참치캔이 떠오르기도 한다. 주인공으로 예정되어 있던 ‘김치를 곁들인 두부 씨’는 어떻게 되나? 더 잘게 썰려 찌개의 풍미를 더하는 조연으로 활약하게 되리라.
레비 스트로스는 브리콜라주에 능숙한 이를 ‘손재주꾼(브리콜레르)’라고 하면서 이들의 주변 사물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력과 목적을 바꾸는 데에 발휘되는 능란한 유연성을 극구 칭찬한다. 이런 손재주꾼에게는 도구와 재료가 모두 잠정적인 것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두부김치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부들부들 떤다면, 그 주부는 손재주꾼으로서는 자격이 없다. 훌륭한 요리사에게 냉장고란 참으로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 잠재성의 보고이리라.
이 손재주꾼을 우리 시대 기술자들과 구분시켜주는 것은 그가 목적에 도달하는 것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손재주꾼은 진정 목적으로 가는 길을 즐긴다. 위의 주부를 예로 들어 더 풀어보자면, 주부는 두부김치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해 어떤 불만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찌개가 김칫국으로 변신하더라도 그는 만족할 것이다. 어쩌면 묵은지와 함께 가능한 이런 밥상, 저런 밥상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 끝내 식탁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서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의 항해자들을 관찰했던 인류학자 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1884~1942)도 비슷한 관찰을 보고한다.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섬에 사는 야생의 부족들은 자신들의 밭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그 생산력을 과시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생산력’이란 단지 작물의 양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밭을 잠깐 구경하자.
그들의 노동은 많은 부분이 실용적이기보다는 심미적인 측면에 투입된다. 예컨대 모든 돌멩이를 치워 밭이 깨끗하고 산뜻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깔끔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치며, 특히 강하고 큰 얌 나무 지지대를 설치하는 등 밭을 보기 좋게 가꾸는 데 많은 시간과 노동을 바친다. [중략] 땅이 빈틈없이 깨끗이 개간되고 식물을 경작할 준비가 갖추어지면 원주민은 각기 밭을 작은 정방형으로 나누는데, 이것은 밭이 조그많고 아담하게 보이기 위한 관습을 따르려는 의도에서이다. 자존심 있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도 없다.(브로니스라브 말리노프스키, 최협 옮김,『서태평양의 항해자들』(민속원), 94쪽)
농부들은 자기 밭을 작고 아담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땅을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단지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점만 과시하기 위해 수확물이 썩어가도록 전시하기도 한다.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사람들은 한 알의 곡식에서 ‘불릴 배’라는 목적만이 아니라 그 밭의 심미적 아름다움과 농부의 기술적 우수성을 동시에 본다. 이곳 농부의 하루는 얼마나 바쁘며 또한 안 바쁠 것인가? 자신의 밭을 자기 손재주와 심미안을 뽐내는 데에 이용해야 하니, 기르기도 하고 가꾸기도 하며 그의 손과 발은 다양하게 움직이리라. 그에게 일단 많이 키워야 한다는 데 따른 초조함은 없을 것이다.
3. 자작나무 타르의 연결
석기에 다양한 목적이 들어갔다 나왔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도구란 목적 지향적이기보다는 연결 지향적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런 생각에 불을 지핀 것은 〈석장리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이다. 25년 2월 28일까지 이어질 ‘구석기 위대한 발견’ 전시회는 인류의 위대한 발견인 불의 사용법이라든가 뼈바늘을 이용한 옷의 제작, 다양한 채색 물감의 발견을 통한 예술품 제작의 특징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기술의 측면에서 나의 눈에 크가 다가왔던 것은 자작나무 타르다.
석기가 다양한 목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할 때 쉽게 떠오르는 것은 돌과 돌을 엮어 만드는 투석기라든가 돌촉에 나무를 붙여 만든 활이다. 석기로 나무를 벨 수도 있고, 죽은 짐승의 사체에서 뼈나 가죽을 벗겨낼 수도 있고, 멀리 있는 동물을 놀래키거나 잡는 데 쓸 수도 있다. 이때 석기는 다른 사물과 접합되어야 한다. 그런데 무엇으로 석기와 석기를, 석기와 뼈를, 석기와 나무를 연결할 것인가? 돌 자체에는 접착력이 없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식물이다. 〈석장리 박물관〉을 찾기 전 〈연천 전곡선사박물관〉에서 열렸던 ‘선사의 석물점’ 전시에서는 다양한 석기들을 볼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복합도구들은 질긴 풀로 다양한 물질들을 결합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구석기의 위대한 발견’ 에서는 그때 놓쳤던 구석기의 본드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 바로 자작나무 타르다. 이 전시에서는 자작나무 타르를 제작하는 과정을 소개하는 영상도 상영되고 있었다.
제작 방법은 이렇다. 자작나무 껍질을 오래 태우다 보면 조금씩 검고 끈적한 물질이 뚝뚝 떨어지는데 이것을 모아 식히고 굳히면 고체 본드같은 타르가 생긴다. 이 타르를 날카롭게 뗀 석기에 뭍혀 나무 등에 발라 붙이면 철떡같이 안 떨어진다고 한다. 자작나무 껍질을 엄청 많이, 오래 태워야 타르 조금이 얻어지는 만큼 이 접착제를 얻는 과정도 여간 어렵지가 않다(자작나무에서 타르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다음의 영상도 참고할 수 있다 ⇒ 링크) 어쩌면 석기 시대의 결정적 도구는 타르가 아닐까?
그런데 타르 제작 과정을 보고 있으려니, 연결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그 성질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타르는 자연 그대로의 물질이 아니다. 이 타르는 불에 탄 나무껍질이 재로 변하기 전에 공기와 만나 엉겨 붙은 새로운 물질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브리콜레르란 기본적으로는 대화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주변에 놓인 물질들을 보면서 평소에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응용하자면, 손재주꾼은 주변의 동식물과 사물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그들로부터 자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뗀 돌로 죽은 짐승과 산 인간을 연결할 수 있다. 연결자인 그도 자작나무 타르처럼 어떻게든 변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레비 스트로스가 ‘대화한다’고 했지만 이 대화란 어떤 것인가? 대화라는 점에서 그의 손은 입이다. 그 손이 말하는 것은 자작나무와 불의 이야기이지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다. 연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관심이지 자기 말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석기의 타르 제작가는 자작나무의 결들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고 했을 것이다. 천천히 자작나무를 태워 보며 떨어지는 검은 액체의 냄새를 맡고 그 성질은 이해하기 위해 자기 오감을 다 동원했을 것이다. 그는 타는 불 앞에서 오래오래 머무르면서 어느 정도로 식히고 굳히고 보관해야 하는가를 실험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손은 점점 더 검어지고 거칠어졌을 것이다.
4. 손은 잇는다
자작나무 타르도 석기도 모두 도구다. 그리고 이런 도구를 매만지며 다른 도구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나의 손도 도구다. 많은 인류학자가 주목하듯이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까닭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사실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의 연결자-도구가 아닐까?
손을 지녔다는 점이 새삼스럽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러고보니 이런 모양의 손을 가진 종도 인류뿐이다. 인간, 혹은 엄밀한 의미의 호모 속에 속하는 종들 안에서 손은 거의 200만 년간 동일한 모습을 유지해왔다. 장골(掌骨; 손바닥을 이루는 다섯 개의 뼈)로 이뤄진 손바닥의 면은 짧고 넓은 형태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손가락은 짧고 넓은데, 손가락뼈는 직선으로 되어 있다. 엄지손가락은 두 개의 뼈로 되어 있고, 다른 손가락들보다 굵다. 그 끝이 집게손가락의 처음 두 뼈를 잇는 관절과 거의 같은 선상에 위치한다. 이러한 형태의 손은 나무 위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로지 두 발로 걸어 이동한 최초의 인류인 호모 에르가스테르(Homo ergaster)와 더불어 나타났다.
침팬지의 경우 일명 루시(Lucy)로 불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rensis)같은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처럼 손이 더 길고 좁은 형태다. 그의 손바닥면은 직사각형이며, 손가락은 길고 가는데 안쪽으로 굽어 있다. 엄지손가락은 다른 손가락들과 굵기 차이가 별로 없고, 긴 손바닥 때문에 엄지손가락 끝이 집게손가락이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러한 형태의 손은 나무에서 이동하기에 더 적합하다. 잡는 경우에 있어서도, 침팬지와 일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인간처럼 엄지와 검지로 잡는 게 아니라 엄지손가락과 손바닥의 옆면 사이에 끼워 잡는다. 침팬지는 손을 써서 땅에서 이동할 때 손가락의 첫째 뼈와 둘째 뼈 사이의 관절로 땅을 짚는다. 이른바 ‘너클 보행(nuckle walking)’이다(파스칼 피크, 엘렌 로슈, 김성희 옮김,『최초의 도구』(알마), 40쪽)
인류는 이렇게 독특한 손으로 만물과의 연결을 시도했다. 그 마음이 최고로 확장된 것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동굴에 남긴 손도장 암벽화가 있다. ‘구석기, 위대한 발견’ 전에서도 그 모형을 확인할 수 있다. 동굴 깊숙한 곳에 들어와 사람들은 왜 자기 손가락에 대고 붉은 물감을 입으로 뿌려가며 손그림을 만든 것인가? 여기에 대해 많은 해설이 있지만 ‘연결’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선사인들은 자신의 손으로 신성한 벽을 만지며 그 ‘만짐’에 큰 의미를 부여했기에 주변에서는 잘 나지 않는 붉은색 안료를 써서 그런 표현을 했던 것이 아닐까? 이때의 손은 신성함과의 연결이라는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인류학자 로베르 에르츠는 실제로 인류 대부분의 집단이 오른손과 왼손의 용법을 철저히 구분했던 점에 착안하여 ‘손의 신성성’을 연구했다. 에르츠에 따르면 오른손과 왼손은 인류 문화 속에서 공평하게 대우받은 적이 없다. 대부분의 문화가 오른손 편향을 보여서, 왼손잡이에 대해 생애 내내 주의를 보이며 기본적인 도구를 오른손에(야구 글러브 등) 맞추는 것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여기에 대해 인간의 좌뇌, 그러니까 브로카 영역이라고 하는 언어 영역 발달을 근거로 오른쪽 우의의 신체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대칭은 사실 해부학적으로 보면 크게 대수롭지 않다. 인간의 두 손이 좌우비대칭인 적절한 유기적 원인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형질이 가까운 동물들 오랑우탄이나 침팬지가 양손을 모두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보면 인간의 좌우 비대칭은 인류의 뇌 구조 때문이 아니라, 그 외부 조건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로베르 에르츠는 이 원인을 문화에서 찾는다.
숭배의식 때 인간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힘을 접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힘을 강화하고 증대해 그 힘의 작용에서 나오는 혜택을 자신에게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오른쪽만 이러한 호의적 관계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오른쪽이 숭배의식이 행해지는 사물과 존재의 본성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신들이 우리 오른쪽에 있으니, 우리는 그쪽을 향해 기도한다. 성소에 들어갈 때는 오른발부터 들어가야 한다. 신들에게 성스러운 제물을 바치는 것도 오른손이요, 하늘로부터 은총을 받아 그것을 축복으로 전하는 것도 오른손이다. 힌두교도와 켈트족의 경우 의식에서 좋은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 그리고 축복하거나 봉헌하기 위해, 사람이나 사물 주위를 마치 태양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몸의 오른쪽을 안쪽으로 향하게 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오른쪽에서 나온 신성하고 유익한 덕성이 성스러운 원으로 에워싸인 존재를 향해 흘러 들어가도록 한다. 같은 상황에서 반대방향으로 돌고 반대 자세를 취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이고 불길한 일이 될 것이다.(로베르 에르츠, 박정호 옮김,『죽음과 오른손』(문학동네), 88~89쪽)
신성한 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오른손을, 세속적인 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왼손을 쓰는 식으로 개별 문화는 인간의 몸을 변형시켰다. 그런 적극적인 변용 없이는 적합한 연결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필요한 생활 도구를 마트에서 사지 않고 직접 깨고 엮으며 살아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도구의 보수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이마트에 가면 다양한 목적을 가진 도구들이 진열 칸에 빼곡하다. 솔도 텀블러냐 변기냐, 어떤 구멍이냐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그런데 석장리 사람들에게는 그리 많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석기가 잘 부서지지 않는다고 하면, 금강변의 누군가는 평생 몇 점의 돌 도구만 가졌을 수도 있다. 그들은 몇 점의 석기로도 풀과 타르 등을 이용해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만족했을 것이다.
사지 않고 직접 만드는 도구에는 어떤 성질이 부여될까? 돈을 주고 구입하는 도구들은 상품이기 때문에 공정과정의 복잡도 즉 자본 집약성에 따라 비싼 것이 좋다는 식으로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나 내가 깬 주먹도끼는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돌에 길들인 내 손에 맞는 유일무이한 도구로서, 깨는 동안 나의 입김과 손길이 돌에 다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돌의 성질이 나의 손에도 깃들게 된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관찰한 민족지에 따르면, 야생 부족들의 장례식에는 종종 그가 사용한 물건들이 함께 매장된다고 한다. 그 물건이야말로 죽은 이 자체이기 때문이다. 클라스트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같은 일이 있었는데, 인연이 있었던 현지 부족의 친구들이 그를 기리며 옛친구가 쓰던 만년필을 제사 지내준 것이다. 석기 제작의 풍경을 떠올리다 보니 과연 어디까지가 나인지 생각하게 된다. 더 많은 것과 연결되는 삶 이외의 목적은 없었던 석기인의 피가 내 안에서도 흐르고 있을 텐데 …….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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