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 - 파이널 에세이 데이(12.9)> 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난잡함 선언
- 새벽이생추어리 돌봄과 글쓰기
글_경덕(문탁네트워크)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올해 문탁네트워크에서 주역, 불교, 돌봄을 키워드로 공부한다.
돌봄care에 연루되고 있다. 매주 돼지를 돌보면서, 돌봄을 주제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매월 돌봄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돌봄은 반복된 행위이자, 확장된 실천이었고,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하는 세계 만들기, 읽기와 쓰기였다. 돌봄을 중심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돌봄'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의존적일 때 어떤 실천으로 이어질까?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에 참여할 때 존재는 어떻게 변형될까? ‘난잡함promiscuousness과 함께하기’라는 다종multispecies간 돌봄 정치학을 구상해볼 수 있을까?
이 글은 돌봄 현장에서 난잡하게promiscuous 뒤얽히는 종들species의 자취를 더듬는다.
1. 돼지와 마주침
2022년 어느 여름날.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 모집 공고를 읽고 있다.
“돌봄으로 새벽이와 잔디의 삶에 연대하는 보듬이를 모집합니다."
생추어리sanctuary란 동물이 가능한 평생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성된 안식처를 말한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돌봄 활동가)로 지원해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구조된 돼지 새벽, 그리고 실험동물로 태어나 안락사 직전에 구조된 돼지 잔디를 만났다. 나는 매주 그들을 돌보았다. 밥과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똥을 줍고, 땅을 정비하고, 약을 바르고, 잠자리를 정돈하며 그들과 밀접 접촉했다. 그러다 연말에 도착한 문탁 선생님의 메세지.
"내년에 생추어리 돌봄일지를 인문약방에 기록해보면 어때요? 자기돌봄/타자돌봄의 고민과 성찰을 공유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거죠."
2023년에는 <양생프로젝트 '취약한 몸들의 연대와 돌봄사회'>를 신청했다. 첫날 문탁 선생님은 1년 동안 공부하며 “돌봄과 관련된 자기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이면서도 이론적인 형태로 제시”하라고 하셨다. 1년을 마무리하는 지금, 나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나의 돌봄과 글쓰기는 무사히 지속되고 있을까?
2. 취약한 몸들, 난잡한 돌봄
돌봄에 연루된 시점을 떠올려본다. '독립', 그리고 '자율적 개인'을 추구하던 나는, 피할 수 없는 나의 취약한 조건과 맞닥뜨렸다. 나의 위기는 '개인적'인 어려움이 아니었기에 진료나 상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나의 위기는 기후위기와 펜데믹 등의 전 지구적 재난 상황 속에서 나 혼자 예외일 수 없는 '보편적 취약성'에 가까웠다. 나는 한동안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방황했다. 나의 실존적 위기는 불안, 우울, 폭식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도, 전문가에게 의탁할 수도 없어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참여한 길드다 세미나에서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를 읽었다. 거기서 농장 동물들이 살아가는 참혹한 현장을, '훔친' 돼지와 활동가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다. 나는 새벽이생추어리 인스타 계정을 팔로우하며 새벽, 잔디의 삶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고 싶었다. 나는 비건이나 동물권 활동가도 아니었지만 취약한 몸들이 연대하는 ‘동물해방운동’에, 그리고 그들이 '돌봄'을 중심으로 써 내려가는 '생추어리운동'에 이끌렸다.
나의 '이끌림'을 버틀러의 '윤리적 반응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 자신과 타자의 삶 사이의 '윤리적 관계'는 자아에 대한 그 어떤 개별적 감각보다 선행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이미 타자에 대한 취약성vulnerability이 존재한다고, 버틀러는 말했다. 즉 멀쩡했던 내가 취약해진 것이 아니고, 타자와의 만남으로 나의 취약성이 발각된 것이다.
새벽이생추어리의 돌봄 활동가 모집은 선착순이었다. 나이, 직업, 젠더, 계급, 비건/논비건과 관계 없이 "돌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이 있고 "약속된 기간 동안 꾸준히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원할 수 있었다. 활동가들은 돌봄과 관련된 실천과 기술, 생추어리 거주민들과 관계 맺는 법, 그들을 부르는 호칭 등의 언어를 학습했다. 그리고 돌봄 일지를 공유하며 서로의 몸, 마음 상태를 살피고, 거주 동물의 건강과 기분, 시설, 땅, 주변의 비인간 동물, 식물 등이 변화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윤리적 관계로부터 시작된 다종multispecies간 돌봄은 개개인의 정체성 너머의 차이가 구성적으로 상호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돌봄 활동가들과 새벽이생추어리 거주민들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마주침을 통해 서로에게 조금씩 적응하며 인간-비인간 공유지를 만들어갔다. 더 케어 콜렉티브의 『돌봄 선언』에서는 인간, 비인간을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 간에 이루어지는 돌봄을 '난잡한 돌봄promiscuous care'으로 설명한다. 책에서는 혈연이나 가족에 국한되지 않는 '친구'를 돌봄 제공자의 원형으로, 더 나아가 땅, 물, 동물들까지 포함하는 친족개념으로 '돌봄'의 개념을 확장한다.
'난잡함'은 1980년대 에이즈 인권 활동가 더글러스 크림프가 사용한 용어다. 그는 게이들의 성생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던 '난잡함'이란 용어를, 돌봄을 다양화하고 실험한다는 의미로, 돌봄의 위계를 급진적인 평등주의로 전환한다는 의미로 뒤집어 사용하며 “우리의 난잡함이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썼다.
3. 난잡함과 함께하기
취약한 조건 속에서 난잡한 돌봄이 시작되고, 난잡한 돌봄 속에서 서로의 취약성이 공유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아니 "사회 적응을 거부"한 인간의 취약성은 돼지의 취약성과 뒤얽혀 난잡해진다. 새벽과 잔디는 동물산업에 의해 장애화된 신체로 태어나 구조된 이후에도 살처분의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 활동가들은 인간중심적인 사회에서 돼지이기 때문에 느껴야 하는 수치와 위협을 함께 느끼며 끊임없이 서로를 보듬는다. 그럼에도 생추어리의 거주 동물과 돌봄 활동가의 관계가 완전히 대칭적일 수 없기 때문에, 또 현재의 생추어리가 비인간 동물들이 살아갈 이상적 장소일 수 없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동물과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인간의 돌봄’이라는 특권은 어느 정도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 농장 동물로 태어나 구조된 새벽에게 '야생화'도 '가축화'도 아닌, '돌봄으로 연대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야생'에서의 삶이 모든 동물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삶인가? 저마다 다른 습성을 가진 '동물 타자들' 앞에서 '돌봄'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까? 생추어리가 또 다른 ‘시설’이 되지 않으려면 어떤 것들이 고려되어야 할까?
중요하고 긴급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지만 한시도 멈출 수 없는 돌봄 활동은 "궁극적 해답"이나 "최종적 해결"이라는 초월적/낭만적 이상으로 우리를 끌어올리는 대신, 각각의 질문들/활동들과 뒤얽힌 구체적이고 세속적인 상황으로 우리를 끌어내린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요즘, 새벽과 잔디는 지푸라기와 보온 물주머니로 추위를 버티고 있다. 일지에는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지푸라기를 안방에 얼마나 넣어줄까요?", "물주머니는 몇 개가 필요할까요?", "겨울에 난방을 틀 수 있다면 어느 정도로 따뜻하게 지내는 것이 생추어리다운 돌봄일까요?" 활동가들이 구체적인 돌봄 현장에서 길어 올린 질문 덕분에 우리는 “관념적 이상”을 쫓으면서도 "난잡한 현재"에 발 딛을 수 있다.
돌봄 활동가들은 ‘난잡함’ 속에서 돌봄을 사유하고, 배우고, 실천한다. 돌봄은 인간과 비인간이 뒤엉킨 난잡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조율과 타협, 기다림, 실랑이, 피드백, 돌발 상황, 그리고 끝도 없는 선택, 선택, 선택으로 지속된다. 어떤 선택도 완전할 수 없기에 돌봄은 ‘무구함pureness’이 아닌, ‘난잡함과 함께하기staying with the promiscuousness’의 기술을 요구한다.
4. 기이한 친척과 퇴비 만들기
난잡한 돌봄 현장에서 우리는 기이한 친척과 만날 수 있다. 도나 해러웨이는 혼란한 시대에 우리의 과제는 "창의적인 연결망 안에서 친척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척kin'은 혈통이나 계보에 묶인 실체가 아니라, 미생물, 식물, 동물, 인간과 비인간 등의 물질-기호론적 형상들을 말한다. 새벽이생추어리의 친적 중 하나인 환삼덩굴도 물질성과 기호성이 교차하는 형상으로 새벽, 잔디와 함께 거주한다. 인간 사회에서 환삼덩굴은 생태계 교란종으로 찍혀 제거의 대상이 되지만, 새벽이생추어리에서는 돼지의 최애(最愛) 간식으로 제공된다.
환삼덩굴은 돼지에게 먹히고, 소화되고, 배설된다. 활동가들은 돼지의 똥을 주워 퇴비사에 저장한다. 새벽이생추어리의 또 다른 친척인 호기성 미생물은 발효를 통해 똥을 퇴비로 만든다. 퇴비compost로 비옥해진 토양은 땅 속의 온갖 생명들을 길러낸다. 해러웨이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는 인간-비인간 공동의 실천을 ‘퇴비 만들기composting’라고 정의한다. 퇴비 만들기는 새벽이생추어리 바깥의 세계에서도 이어진다. 활동가들은 기후 행진에 참여하고, 도살장 비질 활동을 하고, 살처분 액션을 기획하고, 성노동자 인권 투쟁에 연대하고, 퀴어들의 노-프라이드 파티에 참석하고, 동물 운동과 장애 운동의 교차성을 논의하며 뜨거운 퇴비를 만든다. 그리고 무언가를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고,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고, 몸을 마구 흔들며 퇴비 냄새를 밖으로 널리 퍼뜨린다.
이제 돌봄은 신체적 돌봄 뿐만 아니라 복수의 존재들(새벽, 잔디를 포함한 비인간 동물들, 식물들, 활동가들, 연대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물질적이고(식사를 준비하고, 약을 바르고, 똥을 줍고, 퇴비를 만들고, 집회에 참석하는...), 동시에 기호론적인(인간중심주의, 종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퇴비 만들기'로 확장된다.
5. 돌봄과 글쓰기
돌봄은 글쓰기와 분리될 수 없다. '난잡한 돌봄'과 '물질-기호론적 퇴비 만들기'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연초에 '돼지를 만나러 갑니다'라는 타이틀로 시작한 연재글은 지금까지 11회 업로드되었고 이제 한 회를 남겨두고 있다. 1월부터 어떤 목차나 구성도 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돼지와 함께 춤을>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새벽이를 '소중한 타자성'으로 본다면? 돌봄을 '종과 종의 만남'으로 여긴다면? (...) 글을 연재하는 동안 내가 던진 질문들에 나는 얼마나 답할 수 있을까? 그냥 하루 일지를 쓰려고 했는데 일이 커져버린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미래의 나에게 건투를 빈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돌봄은 질적 전환을 맞았다. 매달 무언가를 써야 하는 압박 속에서 나는 돌봄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돌봄을 관찰해야 했다. 그리고 마감에 맞춰 a4 2-3장 분량의 글을 썼다. 그런데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도 돌봄을 마치면 바로 일지를 써야 했기 때문에, 돌봄에 관한 글쓰기가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돌봄 활동가들은 새잔(새벽, 잔디)의 행동 중 눈에 띄는 점이 있었는지, 그날의 기분이나 감정은 어때 보였는지, 새잔과의 관계에 변화가 있었는지 등을 매번 적어 올렸기 때문이다. 일지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올라왔다. 활동가들은 '좋아요'와 '댓글'로 피드백을 남기고, 다음에 올 활동가가 신경 써야 할 내용을 전달했다. 돌봄은 ‘일지 쓰기’를 토대로 수행되었다. 일지는 ‘돌봄 활동’을 바탕으로 기록되었다. 돌봄과 일지는 연속적이었기 때문에, 너의 일지(돌봄)와 나의 일지(돌봄)는 분리될 수 없었다. 즉 다수가 함께 참여하는 '돌봄-일지' 실천이었다.
인문약방에 올린 에세이도 일지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활동가들의 '돌봄-일지'로부터 확장된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나의 글쓰기는 활동가들이 함께 작성한 일지로부터 뻗어 나온 줄기였기 때문에 개인의 저작물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온전히 나의 경험과 글쓰기일 수 없는 '돌봄-일지'로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도 마감에 맞춰 그때 그때 떠오르는 무언가를 썼다. 어떠한 방법론이나 체계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돌봄에 지속적으로 연루되면서 '저건 꼭 기록되어야 해'라는 충동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슐러 K. 르귄은 『소설의 운반 가방 이론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에서 인간이 최초로 사용한 도구는 창과 같은 무기가 아니라 자루나 가방과 같은 용기였다고,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더이상 영웅과 지배,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수집, 운반, 공유의 서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다니며 야생귀리를 채집하고 겨자씨를 주워 담는 초기 인류의 형상이 우리가 발명해야 할 이야기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돌봄 활동가들이 포대를 들고 다니며 환삼덩굴을 채집하고, 바구니에 새벽과 잔디의 똥을 주워 담는 모습에서 초기 인류의 형상을 떠올린다. 바구니와 포대 안에는 영웅과 승리의 서사 대신, 덩굴잎, 낙엽, 똥, 오줌, 파리, 망가진 물건, 잔디가 짜증 내며 물그릇을 뒤엎은 이야기, 새벽의 급발진에 활동가들이 움찔하는 이야기, 그리고 전염병과 살처분 소식에 모두가 마음 졸이고, 분노하고, 애도하고, 저항하는 이야기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르 귄은 이런 이야기를 영웅이 아닌 '민중'들이 우글거리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돌봄-일지 또한 활동가들이 새벽이생추어리 바구니에 주워 담은 인간-비인간 민중들의 이야기다. 내가 인문약방에 주워 담은 이야기 또한 그러하다. 조각나 있고, 빈틈이 많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미완의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채집되어 새로운 바구니로 흘러 들어간다. 카드뉴스로 만들어진 비질 후기글(9회 : 비질, 기어코 응시하기, 10회 : 얼굴들)이 다른 후기글과 섞여 새로운 줄기로 뻗어 나간다. 활동가들과 함께 작성한 비질 낭독문이 도살장 앞에서 다수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살처분 액션 활동가들이 작성한 성명서와 낭독문이 인문약방 에세이(11회 : 삶은 처분될 수 없다)에 다시 담긴다.
민중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구원하는 유토피아적" 이야기 대신 "문제로 에워싸인 지금 여기"에서의 이야기, 또 다른 이야기를 채집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야기, "끝맺기를 거부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덩굴손처럼 사방으로 줄기를 뻗는다. 덩굴손은 세계를 만든다.
6. 돌봄 정치학
곳곳에서 들려오는 전염병과 살처분 소식, 이 땅 어디에서도 안전할 수 없는 새벽, 잔디의 위태로운 삶, 새벽이생추어리의 열악한 재정 상황, 활동가들의 불안정한 생계 문제. 이런 상황에서도 새벽이생추어리의 인간, 비인간 친척kin들은 '협력적 생존'의 가능성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혼란과 폐허의 현장에서도 예기치 않은 ‘활기’를 종종 분출한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냉소주의나 구원적 미래에 현혹되지 않는 '돌봄 정치학'을 구현한다.
누군가는 미래를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어떤 정치적 비전보다도, 쉬지 않고 지속되는 ‘현재적 돌봄’ 속에서 ‘유예되지 않은’ 해방의 정치를 목격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어 ‘비인간의 협력’을 간곡히 요청해야 하는 세계로 뛰어든다. 누군가는 매일 무언가를 반복하는 ‘돌봄 행위자’들과 연대하며 ‘돼지의 나이듦‘을 상상한다.
오늘도 누군가는 돼지를 돌보러 간다. 누군가는 어김없이 일지를 쓴다. 그리고 누군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며 새로운 이야기를 채집하고 운반하느라, 오늘도 난잡하다.
ps.
1. 새벽이생추어리는 이사프로젝트를 진행중입니다. 이사 후에는 보듬이들의 돌봄 활동도 중단됩니다. 저는 한동안 새벽, 잔디를 만나지 못하겠지만 누군가는 계속 돌봄을 하고, 일지를 쓰고, 새벽이생추어리(https://www.instagram.com/dawnsanctuarykr/)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2.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새벽이생추어리와 새벽, 잔디에게 관심 가져주신 선생님들 감사드립니다. 연재글 읽어주신 선생님들, 애정 어린 댓글 남겨주신 선생님들 감사드려요. 자기돌봄 릴레이 연재로 마감의 고통을 함께 나눈 선생님들 감사드려요. 연재를 제안해주시고 매번 단톡방에 소개글 남겨주신 문탁 선생님 감사드려요. 인문약방에 조용히 들러 글을 읽어주고, 피드백해주고, 지지해준 동료 활동가들 감사드려요. 그리고 서투른 인간의 손길을 허락해준 새벽이생추어리 거주민 새벽, 잔디에게 감사드립니다.
3. 연재는 계속됩니다. 아직 어떤 계획도 세우지 못했지만 새벽, 잔디와 만나며 연루된 돌봄의 감각으로 또 다른 돌봄, 애도, 참사의 현장을 찾아다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선언'해볼까 합니다. 내년에도 여기 저기서 이야기를 채집하고 운반하느라, 주욱 난잡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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