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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한뼘 양생』 지은이 이희경 선생님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4. 10. 11.

『한뼘 양생』 지은이 이희경 선생님 인터뷰


1. 책 제목이 『한뼘 양생』인데요, 양생이란 무엇인지요?
양생(養生)! 기를 양(養)에 날 생(生)! 직역하면 생명을 기르는 행위. 원 출전은 『장자(莊子)』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백정이 그의 임금을 위해 소를 잡고 있었는데 살 한 점, 뼈 한 조각 건드리지 않고 리드미컬하게 칼질하며 소를 해체하는 모습이 가히 신출귀몰, 천의무봉의 경지였다. 임금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아,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 백정은 정색을 하면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이지요”라고 대답을 했다. 이어서 자신이 처음에 소를 잡을 때는 소가 통째로만 보였지만 십구 년이 지난 지금엔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神) 본다고, 그러면 소의 자연스러운 결(天理)에 따라 칼도 자연스럽게 나아가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임금이 다시 감탄하며 “훌륭하구나, 나는 오늘 그대의 말을 듣고 ‘양생’을 터득했노라”라고 대답을 했다. 

 

저는 『낭송 장자』(북드라망, 2014)에서 이 포정해우(庖丁解牛)편에 나오는 ‘양생’을 ‘삶을 가꾸는 기예’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오래된 단어가 제 삶에 훅~ 들어온 것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부터였습니다. 어머니는 병들고 늙어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는 신세 한탄을 했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원망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나이듦=처량함은 어쩔 수 없는, 모든 노인의 보편적 감정일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어머니의 우울증은 어머니의 자아 이상(理想)이 주름 없는 젊음, 아프지 않은 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더군요. 우리 사회에서는 젊음과 건강이 너무 강력한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늙는다는 것은 결여와 비참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죠.


삶의 지평에서 죽음을 허겁지겁 감추고, 몸의 리듬에서 질병을 완벽히 추방하여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세계보건기구)라는 ‘정상성’을 삶의 목표로 제시하는 생명 권력을 문제 삼기 위해서는 ‘건강’이나 ‘의료’를 대체할 다른 개념이 필요했습니다. ‘양생’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것들은 생-로-병-사의 국면들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생명의 죽음은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순환되는 게 우주의 원리라는 것을 다시 환기하기 위해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꼭 되살려야 하는 용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나이듦과 죽음에 어떻게 직면할 것인가? 아픈 몸으로도 잘 살아가기 위한 지혜는 무엇일까? 좋은 돌봄을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어떤 것들이 마련되어야 하는가? 이것들을 어떻게 우리 공부의 화두로 삼고 함께 공부해 나갈 것인가? 어느덧 저에게 양생은 이 모든 것들을 실존적으로 지시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2. 책에서 “병뚜껑을 못 따는 친구와 사과를 못 자르는 내가 함께 <나이듦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하시며 연구소의 슬로건은 “다른 노년의 발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인문학 공동체를 오래 꾸려 오신 경험과 <나이듦연구소>의 슬로건이 연결되는 느낌인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다른 노년의 발명’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동안 노인은 ‘틀딱’, ‘할매미’, ‘꼰대’, ‘연금충’ 등의 노인 혐오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완고하고, 가르치려고 하고, 냄새나고, 공짜 지하철로 하릴없이 쏘다니고, 건강보험 적자의 주범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근대사회의 생명 권력이 노인을 경제발전에 쓸모가 없는 비생산적 인구로 구분하면서 비롯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상호의존적 존재인데 노인만 의존적 존재라고 사회가 규정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노인은 국가 사회의 ‘대책’ 거리이자 잔여적 복지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노인 인구가 경제 성장의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2018년 <포브스>는 인구 고령화가 기업엔 축복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모 대학 고령사회연구센터가 ‘에이지 프렌들리’라는 주제로 고령화 트렌드를 분석한 보고서를 2022년에 발간했죠. 최근 미디어에서는 액티브시니어, 영피프티, 뉴그레이, 60대 힙스터, 신중년, 선배 노년 같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사회의 짐짝에서 보물단지로 극적인 ‘시니어 시프트’(원래 이 용어는 노년 시장을 겨냥하는 경영전략의 재조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만)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 부담이 되거나 자본의 새로운 호구가 되는 것, 둘 다 정말 별로잖아요. 이 두 가지 방식이 아닌, 노년의 삶에 대한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더구나 초고령사회가 된다는 것, 즉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20%가 된다는 것은 노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재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60대 후반과 90대 초반은 몸의 상태가 다릅니다. 노인 집단 내의 경제적 격차도 점점 커질 것입니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나이듦 과제도 같지 않습니다. 퀴어, 비혼, 장애인의 나이듦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들을 갖고 있나요?
‘다른 노년의 발명’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출현하는 단어입니다. 잔여적 복지의 대상과 액티브시니어의 호명을 넘어 우리는 각자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말년의 양식’을 실험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노년에 대한 단일한 규범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저 같은 1인 가구 여성의 노년을 비롯하여 나이듦에 대한 더 다양한 이야기가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3. 최근 작고하신 어머님과 10년 동안 함께 지내며 돌봄을 하시면서 우리 사회의 돌봄에 대해 누구보다 구체적으로 느끼고 생각하셨을 듯합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돌봄’은 어떤 것일까요?
10년 전 어머니랑 살림을 합칠 때 동생이 말렸습니다. 저까지 지쳐 떨어지면 정말 대책이 없으니 그냥 어머니 가까이서 살면서 어머니를 돌보는 게 더 지속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알게 모르게, 저라면,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삶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쩌면 중년의 딸과 노년의 엄마가 서로 의지하며 함께 늙어가는 이름다운 동거를 꿈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완전 ‘판타지’죠. 실제 ‘현타’가 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늙은 어머니 흉을 보고 있더군요.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짜증이 났고, 그런 어머니가 뿜어내는 부정적 기운에 질식할 것 같았고, 어머니의 삼시세끼를 챙기느라 거의 앞치마와 합체가 될 지경이었고, 독박 부양이 길어지면서 나를 돕지 않는 동생들에 대한 원망도 쌓여만 갔습니다. 그렇게 되자 돌봄은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해야 하는 지옥이나 감옥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기 일상이 가능한 몸에서 자가 보행이 불가능한 몸으로 변하는 10여 년간의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주변 친구들도 하나둘 부모 돌봄에 직면하여 좌충우돌하는 것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돌봄 경험치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제가 깨닫게 된 것은 크게 세 가지예요. 


첫째, 좋은 돌봄을 위해서는 개인적 역량과 사회적 담론 둘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근거 없는 돌봄 자신감을 가진 것도, 돌봄을 무조건 피해야 고통으로 여긴 것도 모두 돌봄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존재론적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근대 합리주의 개인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한 돌봄은 사회적 과제입니다.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돌봄사회로 전환되지 않고서 좋은 돌봄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노인 돌봄과 관련하여 현재 2008년에 제정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유일한데, 더 많고 실효적인 사회정책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좋은 돌봄에 어떤 이상적 상태는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돌봄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설 돌봄과 가족 돌봄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일률적으로 말하기 힘듭니다. 사회적 책무와 개인적 윤리 중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도 따지기 어렵습니다. 돌봄은 지극히 맥락적인 행위이고, 좋은 돌봄은 여러 자원의 협력 속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저는 돌봄을 하는 위치에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위치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누구나 그렇게 되겠죠? 좋은 돌봄을 위해서는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역량뿐 아니라 돌봄을 받는 사람의 역량 또한 중요합니다. 돌봄을 받을 줄 아는 지혜와 기술을 익혀야 할 과제가 이제 저에게는 남았습니다.    
  
4. 본문 중 『장자』를 가지고 ‘나이듦’에 관해 리뷰하신 글 「우두커니 살다가 제때 죽을 수 있을까?」에서 “잉여 없이 살다 여한 없이 죽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는데요, 간략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장자』, 「응제왕」편에 나오는 열자에 관한 에피소드를 읽고 제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열자(列子)는 노자, 장자만큼이나 노장사상의 핵심적 인물입니다. 책에서도 그 열자는 명예나 재산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우주 만물의 원리, 생사의 이치를 깨닫는 데 온 힘을 다 바치는 걸로 묘사됩니다. 그 열자가 어느날 생사길흉을 다 알아맞히는 어떤 무당한테 푹 빠져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그 사람의 특이한 능력이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깨닫겠다’라는 자신의 열망과 의지와 노력이 오히려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는 것 또한 알게 됩니다. 열자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위해 밥을 지을 뿐 아니라 돼지에게도 사람 대하듯 밥을 먹였습니다. 세상일에 좋고 싫음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갈고닦았던 것을 본래의 소박함으로 되돌리고, 흙덩이처럼 우두커니 서서 세상 만물과 섞였습니다. 한결같게 이렇게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모든 자만심을 버리고 세상과 구별되기를 원하지 않으며 타자와 함께 지극히 평범하게 존재하다가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이런 삶에 무언가 깊은 장엄함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외부로 향하는 시선, 인정 욕망을 거두고, 그때그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특별한 의미 부여 없이 담담하게 하면서 사는 게 최고의 내공 아닐까요? 그러면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웰다잉’이라는 이름으로 좋은 죽음을 위한 ‘투두 리스트 (to do list)’가 늘어가는 최근의 상황을 보면서 열자의 말년처럼 일상을 곡진하게 보내는 삶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5. 끝으로 이 책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는지,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 책은 어머니 돌봄에서 비롯된 ‘양생’이라는 화두를 들고 지난 몇 년 동안 쓴 글을 모은 것입니다. 경험적이고 개인적이며 질문으로 가득 차 있는 글들이에요. 


예를 들어 ‘한뼘 양생’이라는 코너명으로 신문 칼럼을 쓰면서는 매번 이것이 양생에 관한 이야기일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책으로 묶으면서 보니 제가 쓴 글들이 몸과 질병에 관한 이야기, 동물, 식물 등 비인간 생명과 돌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내의 활동과 연대활동 이야기로 나뉘더라고요. 양생의 범주에 ‘몸과 일상’, ‘생명과 돌봄’, ‘공동체와 연대’가 속한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책과 영화 리뷰는 제 공부를 위해 시작한 글쓰기입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고요. 이에 비해 간병블루스는 말 그대로 돌봄의 기쁨과 슬픔, 보람과 고통에 대한 저의 적나라한 이야기들입니다. 제가 돌봄 지옥에 갇혔다고 생각했을 때 숨쉬기 위해 썼던 글입니다. 책으로 만드는 최종 단계에서 감정적인 부분을 좀 덜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좀 감정적인 글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재 돌봄을 하고 계시는 분들은 공감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돌봄을 앞두고 있는 분들에게는 제 글이 케이스 스터디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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