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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의 독국유학기

[현민의 독국유학기] 경계의 포용성

by 북드라망 2024. 8. 16.

경계의 포용성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독일의 이모들
쿠키이모는 독일에 산다. 작년 나는 잠시 서점을 쉬고 여름을 쿠키이모 집에서 보냈다. 떠나고 싶었는데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서 머물러도 되는 곳에 갔던 것 같다. 이모와 첫 식사를 마친 후, 이모는 나에게 흡연 여부를 물었고 그렇게 우리는 맞담배를 피며 여름을 한 집에서 보냈다. 이모와 나는 술과 담배, 한국 음식과 강아지를 좋아했다. 그 여름 동안 나는 어떤 감각들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적당함을 알아가는 기분. 과하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느낌.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이모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이곳에 오래 산 한국인 이모들을 종종 만났다. 그들은 대체로 내 나이를 묻고, 고향을 묻고, 국제결혼은 너무 힘들다고 하더니 곧 이어서 너도 독일인이랑 결혼하라는 말들을 했다. 그때는 음 그래서 결혼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어린데 결혼 얘기를 하시네... 라고 생각했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모들은 모두 내 나이 때 결혼했고, 국제결혼이 그들 모두에게 삶의 큰 사건이었을 것 같다.

이모들은 한국어로 말했지만 표준 한국어와는 발음이 달랐다. 독일어 단어들도 자주 섞여 있었다. 한국어를 아예 잊어 독일어만 쓰는 이모도 있었다. 그건 한국어라기엔 독일어 같았고, 절대 독일어는 아니었다. 그건 다른 종류의 언어였다. 그들은 고된 노동을 자처해 추석이나 설에 잔치를 열었고, 실력에 상관없이 열정적으로 풍물패를 했다. 그리고 모두가 독일인 남편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한국어를 하지 못하지만, 이모들은 능숙하게 독일어를 구사했다.

이모들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태원 사고가 있었을 때 이모들이 말해주었던 옛날 이태원의 모습. 80년대에 인천에 한국 최초의 아파트가 생겼다는 이야기. 그들이 대부분 기억하는 한국은 2,30년 전의 모습이었다. 내가 자라온 한국과 그들이 살았던 한국은 큰 차이가 있었다. 이모들은 독일의 일상적 생활문화, 지역감정, 사투리, 마트별 특징과 이번 주의 할인품목에 더 빠싹했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너무나 독일인일테고, 독일에서는 언제까지나 한국인일 것이다. 그들을 보며 내가 이곳에 오래 머문다면 내게도 저런 크기의 간극이 생기기라 예상했다. 이모들은 왜 이곳에 남아있을까? 평생 외국인 신분과 얼굴을 가지고 이곳에 산다는 건 어떤 걸까? 그건 돈이나 자식, 혹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모들을 만날 때마다 종종 그들이 이 삶을 위해 낸 용기를 생각해보곤 했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여름이 지나 나는 독일에 살기로 마음먹었고, 한국에서 서점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임시 집들을 전전하며 외로움에 까무러쳐 가는 중, 한인회장 이모가 김장 페스티벌에 나를 초대했다. 오면 김치 주겠다는 말 보다도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갔던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허둥대다 눈칫밥 제대로 먹고 괜히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확실히 이상한 경험이었다. 11월의 독일 외딴 동네 커다란 집 마당에서 스무 명의 시어머니를 둔 기분으로 김장을 하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여자들은 일을 잘한다. 독일이라고 딱히 성평등적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따라온 아저씨들은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거나 사교를 했고, 이모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김치국물에 고무장갑을 낀 손을 푹푹 넣으며 일을 했다. 그들은 400포기의 배추를 절였고, 20가지의 재료를 넣어 속을 만들었다. 또 기가 막힌 기억력으로 김치통을 구분하며 불가피하게 오지 못한 언니 동생들의 몫까지 챙겼고, 그 마당을 깨끗이 다 치워냈을 뿐만 아니라 김장 페스티벌에 온 사람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냈다.

 



김장이 끝난 뒤 이모들과 작은 쇼파에 엉덩이를 구겨 앉고 한국이야기를 했다. 한 이모는 이렇게 말했다.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애국심 같은 게 생겨.

 

그런 게 나에게도 생길까? 혹은 이미 내 마음 어디에 내재해 있을까? 한국에서 산 시간만큼, 혹은 그보다 더 오래 이곳에 살고 있는 이모들이 왜 아직도 장구를 뚜드리고 싶어 하는지, 김치를 만들고 싶어 하는지,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가 궁금했다. 왜 이들 집에는 이렇게 태극기가 걸려있는지, 왜 나는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환대받는지 같은 것까지도.

한국에서는 내가 한국인인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 곳에 있던 모두가 한국인이었으니까. 그건 너무나 당연해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이었고, 한국에서 한국인처럼 생기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으로 통칭되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이 미국으로 피난 간 우크라이나인, 그리스 혼혈 독일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란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의 미디어에서도 외국인 이미지를 소비할 때 그들을 과대평가하고,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들이 한국을 너무 좋아해서 이곳에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들 입으로 한국이 좋은 곳이라는 걸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반면에 이곳에서는 외국인이라는 말을 쓴 기억이 적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혼종이니까. 순혈이 무엇인지, 누가 진짜가 아닌지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나는 외국인보다도, 한국인인 것이다.

 

혼란 혹은 편안함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게 너무 지독해서 한국이 싫었다. 나는 마음이 자주 좁아졌었고, 누군가가 미웠고, 일을 많이 했다. 이 곳에 오면서 한국과 거리를 둘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주 내게 한국이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그들에게 답을 하기 위해 한국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그들 앞에 앉아 한국에 대해 설명하는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동천동에서 서점을 했던 20대 여성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그저 한명의 한국인이었다. 그건 내가 한국에 대해 지겨워하고, 이해할 수 없고, 미운 마음이 드는 감정과 거리를 두고 한국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러다 보면 내가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한국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한국의 어떤 공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곤 했다.

웨얼알유프롬이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니하오 하는 사람, 한국이 내내 사계절 더운 나라인 줄 아는 사람, 북에서 왔냐 남에서 왔냐고 묻는 사람, 김정은 미쳤다는 얘기만 하는 사람.

이런 일들이 몇번 반복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웨얼알유프롬을 들으면 그냥 짜증이 난다. 그래서 한때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서로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는 대화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말 내 나라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곧 나를 설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에서 자랐는지, 그러면서 무엇이 싫고 무엇이 아름다웠는지 그것을 주고받고 들어주는 일은 마음에 오래도록 유효히 남는다.

정체성이라는 게 얼마나 아무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나를 설명하는 큰 것인지. 이 나라에 와서 내가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 여자애라는 걸 생각할 때마다 자주 외로웠다. 이 생각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보였다. 내가 조그만 아시아 나라 여자애고 쟤가 유럽에서 태어났고 사는 백인 남성이라는 것은 대체로 언제까지나 사실이고 그게 다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 제국주의 이성애주의 가부장제 현대사회에서 어떤 정체성은 권력적이니까, 내가 이 땅에서 느끼는 이 이질감을 쟤도 느껴봤을까? 하는 것이다. 편견을 가지는 게 때론 나를 보호한다고도 생각했는데, 반면에 그것들이 나를 자주 외롭게 만들었다.

 

 

T와 갔던 독일 근대 여성주의 작가 전시
내 서류에 기입된 것.
배우, 공장직원, 사진작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내 유일한 직업은 배우는 것이라고 써져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똑같이 생기고 똑같이 살지 않아서 불평등이라는 것도 생기는데. 그러다가 내가 이 다양함 속에서 얼마나 편안한지를 생각해보았다. 딱 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설명되지 않고, 내가 그 하나로 고유하고, 너도 고유하고,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고 나눠야 하는 혼란 혹은 편안함 속에 나는 있다.

너의 나라에 대해 듣다가 여행하고 싶은 곳의 목록을 늘리고, 안녕 인사를 배우고, 그 나라 욕을 배우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농담을 만든다. 터키어로 Hello는 매러바Merhaba, 그리스의 Hello는 Yasu, 한국은 Annyeong. 남미에서는 미국과 브라질을 제외하고 스페인어를 쓰는데 같은 언어권이라도 코스타리카에서는 셔츠가 까미사camisa고 멕시코에서는 챠마라chamarra라고 한다. 어제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조나단과 포르투갈 노래를 불렀고, 오늘의 나는 자이니즘Janisim을 믿는 인도인 쿠씨 옆방에서 이 글을 쓴다.


새로 들어간 셰어하우스 부엌,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면서 둘러앉아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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