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배려 : 저항하는 주체의 생성
누구나 푸코를 읽다보면 푸코가 깨부수는 망치질에 놀라게 된다.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가고야 마는 그의 언어는 감동을 넘어서, 어떤 경외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게 깨부수기만 하면 되는가? 그렇게 깨부순들 어떤 결과를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깨부순 이후를 생각하노라면 일종의 불안감이랄까, 공허함만 덮치는 것이다. 그저 속 시원해지는 효과 말고는 더 뭐가 있을까 싶다.
더군다나 푸코가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도대체 우리가 이따위 곳에서 살고 있었느냐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해지기도 한다. 푸코 말대로라면 ‘나’라는 사람은 근대 담론이 만들어 놓은 ‘인간’ 가면을 쓰고, ‘국가장치들’이 만들어 놓은 정상성이라는 규범에 둘러싸여 어떤 조작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저 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뿐, 도무지 뒤집을 방법은 갖고 있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하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쇠창살에 갇혀 있을 뿐 그것에 저항하고 뒤집을 방도는 전혀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푸코의 말대로라면 역설적으로 권력은 영원히 승리할 뿐이지 않은가?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저들이 승리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푸코가 일러준 대로 세상이 권력에 의해서 구성된 세계라는 것을 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푸코의 이 문제를 사토 요시유키의 『권력과 저항』이라는 책과 함께 풀어보도록 한다.
제임스 앙소르, <음모>
푸코의 질문 : 주체의 문제
1969년 프랑스 철학회에서 행한 푸코의 강연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당대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다.
… 구조주의든 아니든 꼬리표에 의해 모호하게 한정된 분야에서는 주체의 부정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체의 종속이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프로이트의 회귀라는 층위에서는, 정말로 기본적인 어떤 것, 우리가 ‘시니피앙(signifiant)'이라는 용어로써 분리시키려 했던 어떤 것과 관련된 주체의 종속이 문제가 됩니다.
─푸코, 강연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 발표에 대한 라캉의 발언
이는 당시 강연을 통해 ‘저자의 죽음’이 이야기되는 과정에서 참석자들 사이에 주체의 부정─구조만 있을 뿐, 주체는 없다? ─에 대해 논란이 일자, 라캉은 이에 주목하여 구조주의자로서 주체란 없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어떤 것’과 관련하여 주체가 종속/의존하여 구성될 뿐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주체가 의존하고 있는 ‘기본적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라캉에게 ‘시니피앙’(기표)이다. 라캉에게 구조는 시니피앙의 연쇄들일 뿐인데, 이 연쇄들이 변함에 따라서 시니피에(기의)로서의 주체가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구조주의 권력 이론은 바로 이런 라캉의 시니피앙 이론을 권력 이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만들어진다. 즉 주체는 권력에 의존하여 구성된다. 권력에 종속/의존하는 주체.
구조주의적 권력이론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여 권력에 종속된 주체가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주목했다. 이 이론은 권력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수많은 ‘장치’(dispositif)[국가기관들, 학교들, 교회들, 가족들…]에 의해서 행사된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것들이 권력에 순종하는 주체를 생산하고, 또한 재생산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알튀세르가 이른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것을 처음 제시하긴 하였지만, 권력을 담지하면서 사회 곳곳에 퍼져있는 그 무엇이 그런 장치를 말하는 것이라면, 푸코의 ‘규율권력’ 또한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구도라면, 즉 주체가 단지 권력에 의존하여 구성될 뿐이고, 심지어 권력 장치들에 의해서 조작되어 생산될 뿐이라면, 소위 ‘능동적인 주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설혹 있더라도 결국 구조주의적 권력이론에 따를 때 주체-권력관계에서 ‘주체’는 사라질 뿐이지 않은가? 주체는 그저 권력이라는 객체 속에 머물 뿐인 것이다. 따라서 라캉의 저 말, 즉 ‘주체의 종속’이 끝끝내 문제가 된다. 주체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에셔, <반사된 공을 든 손>
푸코는 이렇게 된 이유를 칸트가 구성한 근대적 주체에서 찾는다. 칸트에 따르면 자아는 외적 사물을 우선 직관으로서 받아들이며(수용성), 이어서 자신의 지성[오성]을 사용해 직관으로부터 개념을 만들어낸다(자발성). 즉 외부의 사물을 표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내부화’(!)하고, 그 내부화된 표상을 기반으로 대상을 인식한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식이 1차적으로 내부화된 표상-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이어서, 끝내 외부의 ‘물자체’는 알 수 없게 된다. 푸코가 보기에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가 분절된다고 보았다.
한편으로 외적 사물을 직관으로 받아들이는 자아는 ‘경험적 자아’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험적 자아가 받아들인 표상을 대상으로 개념을 생성하는 ‘초월론적 자아’가 있다. ‘나는 생각한다’는 표상이야말로 초월론적 자아에 속하는 대표적인 발언인 것이다. 이렇게 분절된 자아를 푸코는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라고 불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초월론적 자아이다. 그것은 스스로 반성한다. 그것은 경험적 자아가 하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반성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부에 깊숙이 머물면서 내부화된 표상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규제하는 자아이다. 바로 그것이 ‘내면화된 권력’인 것이다. 앞서서 주체가 의존하는 권력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사실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말하곤 하는 인간의 ‘기본 본성’이라는 것, 즉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은 인간 유한성의 다른 말이다. 인간은 인간의 ‘기본 본성’이라는 것 안에 자신을 스스로 가둬버리고, 외부성[물자체]을 내부로 끊임없이 끌어들여서[표상화] 그것을 이리 저리 판단하는 소아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칸트의 유한성 관점은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를 만들어내고, 따라서 규제적 자아에 의해 권력에 종속/의존하는 주체 생산의 출발이다. 결국 칸트는 다음으로 귀결될 운명인 셈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고로 권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푸코는 니체를 통해 이런 이중체로서의 자아를 돌파한다. 니체에게 오히려 인식은 “서로 상이하고 대립되는 충동들 상호간의 특정한 태도”(니체, 『즐거운 학문』 ‘인식이란 무엇인가?’ 301쪽)일 뿐이다. 스피노자가 ‘비웃지 말고, 탄식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고 인식하라’고 했던 말을 비틀면서, 오히려 인식은 비웃고, 한탄하고, 저주하는 충동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칸트에서처럼 인식이란 초월적 시선에 의해서 경험적 표상들을 반성하면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통일이 있기 전에 충동들이 서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어떤 적절한 관계를 구성하는데, 그 순간 충동들 간에 화해를 이루고, 결국 충동들 간에 스스로 일종의 정의와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인식이 생긴다. 니체에게 인식은 바로 그 정의와 협약, 즉 화해의 모습이다. 이렇게 되면 인식한다는 사실 속에는 이미 지배하는 관계, 즉 권력관계가 스며들어 있는 셈이 된다. 즉 인식이란 충동들 사이의 투쟁이었다. 푸코는 이 투쟁을 사회적 장에서의 힘들 사이의 투쟁으로 전환하여 독해한다. 그렇다면 인식은 사회적 장에서의 힘들 사이의 투쟁이 만들어 놓은 효과이다. 우리는 사회적 장 안에서 일어나는 투쟁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인식한다. 그 투쟁관계의 틀 안에서만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식은 구성되는 것이다. 사회적 장에서 이루어지는 투쟁들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인식은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들은 힘의 관계가 변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아주 일시적이고 역사적인 결과물일 뿐인 거다. 그것은 역사에 따라 때때로 변할 것이다. 니체의 ‘종교발명설’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종교는 사회적 장에서의 힘의 투쟁이 이루어놓은 어떤 결과물,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인식은 이런 이유로 반드시 편파적이고 기울어져 있다. 그것들은 항상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권력 관계로 설명한다면 권력에 의해 종속/의존하는 주체도 항상 어느 한쪽의 승리에 의해서 구성될 것이다.
에셔, <낮과 밤>
다시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로 돌아가 보자. 경험적인 심급은 다양하다. 아마도 니체가 말했던 바, 충동들이 투쟁하는 곳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정도 없이 그것들은 힘들 사이의 투쟁으로 나타날 것이다. 아주 다양한 권력들 사이의 투쟁이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의 장이다. 그런데 이 투쟁이 서로 화해를 하고 일종의 정의와 협약을 이루었을 때 바로 그것이 초월론적 심급을 형성한다. 따라서 주체는 다양한 충동들, 즉 사회적 관계에서의 권력들 사이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구성되고 있을 뿐인 비결정적인 어떤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칸트의 이중체적 주체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푸코의 아포리아 : 저항의 문제
푸코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기에 권력은 우선 작용영역에 내재하고 조직을 구성하는 다수의 세력관계,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통해 다수의 세력관계[힘의 관계-인용자]를 변화시키고 강화하며 뒤집는 게임, 그러한 세력관계들이 연쇄나 체계를 형성하게끔 서로에게서 찾아내는 거점, 반대로 그러한 세력관계들을 서로 분리시키는 괴리나 모순, 끝으로 세력관계들이 효력을 발생하고 국가 기구, 법의 표명, 사회적 주도권에서 일반적 구상이나 제도적 결정화가 구체화되는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112쪽
푸코에게 권력은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로서 힘의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임이자 전략이다. 이런 입장은 한 해 앞서 저술한 『감시와 처벌』(1975)에서도 이미 똑같이 표명되었다. 즉 “권력은 하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그 권력지배의 효과는 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열, 조작, 전술, 기술, 작용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푸코, 『감시와 처벌』, 57쪽) 그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전투”(58쪽)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사실 니체가 묘사한 힘의 관계에 다름 아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추적하면서 이르기를,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란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제압 과정의 연속이며, 이에 반대하여 매번 행해지는 저항”(니체, 『도덕의 계보』, ‘제2논문’, 422쪽)이라고 하고서, 형식만 유동적인 게 아니라, 그 내용도 유동적이라고 했다. 여기서 ‘제압과정과 저항’은 푸코가 말하고 있는 ‘다수의 세력관계[힘의 관계]’에 상응하는 니체적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주체가 의존하는 권력이란 바로 ‘다수의 세력관계’로서, ‘제압과정과 저항’이 뒤엉킨 그 무엇이 된다.
여기에 이르러 푸코가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푸코, 『성의 역사1-앎의 의지』, 115쪽)는 말을 이해하게 된다. 이 말에 이어서 푸코는 저항은 권력관계에서 다른 항(項)이고, 요지부동의 맞은편으로서 권력관계에 편입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저항은 권력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권력 자체의 구성 조건으로서 권력 자체에 내재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눈
그러나 바로 여기에 푸코의 아포리아가 존재한다. 이런 권력관계라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투쟁으로서 권력관계의 변화만 있지, 그 판 자체를 뒤집을 저항 가능성이 근본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파놉티콘이라는 유명한 감옥에 대해 생각해보자. 파놉티콘에는 중심에 탑이 있다. 그 주위로 독방 건물이 분할되어 원형으로 배치된다. 감시탑에서는 수감자의 독방을 감시할 수 있는 반면, 독방의 수감자는 감시탑의 교도관을 볼 수 없다. 이런 구조 때문에 수감자는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억제한다.
가시성의 영역에 예속되어 있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 권력이 강제력을 떠맡아서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작용시키도록 한다. 그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여 1인 2역을 하는 셈이다. 그는 스스로 예속화의 원칙이 된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외부의 권력은 물리적인 무게를 경감할 수 있게되고 점차 무형적인 것으로 된다.
─푸코, 『감시와 처벌』 314쪽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감시한다는 이 사실[1인 2역]은 외부의 권력관계가 내면화되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주체는 권력을 감시하는 자아와 그에 복종하는 자아로 분할된다. 즉 주체는 권력관계를 내면화하고, 상위의 자아가 하위의 자아를 규율화한다. 물론 여기서 칸트적인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의 구조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칸트에게 ‘규율’은 ‘이성의 규율’이었다. 이 규율의 원리는 자아의 초월론적 심급에 있었다. 즉 규율은 오로지 추상적인 이성에 의해서만 산출된다. 그러나 푸코는 규율이 이성이 아니라 외적인 힘들로서의 권력관계이다. 그것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권력관계에 따라 구성된다. 따라서 이성적 규율에서 사회적 규율로 전환이 이루어지긴 하였다. 하지만 푸코의 주체개념에서는 여전히 초월론적 자아와 경험적 자아의 관계를 품고 있다. 다시 말하면 힘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을 갖지 않는다. 즉 파놉티콘의 세계에서는 모든 저항과 장애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것은 “영원한 승리”(푸코, 『감시와 처벌』, 314쪽) 속에 있는 것이다.
경험적 심급이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다양체로서 나타나는데 반해, 초월론적 심급은 그것이 지배의 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한에서 하나의 힘만 있는 장일 수밖에 없다. 권력관계를 수용하기만 하면, 주체는 이중으로 분할되어 한편에서는 감시를, 다른 한편에서는 복종만 하는 주체로 고정되고 마는 것이다. 분명 칸트적 주체를 넘어서서 사회의 권력관계로부터 주체를 설명해내는 공헌이 있었지만, 『감시와 처벌』은 여전히 칸트적 구도를 유지함으로써 저항의 개입 여지를 막아버렸다. 권력관계라는 게임을 시작하였지만, 시작하자마자 게임종료인 셈이다. 왜냐하면 이런 구도라면 권력은 항상 승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푸코의 돌파 : 자기의 문제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는 분명히 기존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 의도를 갖고 있었다. 가톨릭이 도래한 이래 ‘고백’은 종교적 회개라는 의례적이고 독점적인 실천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 이래로 그것은 교육학, 의학이라는 세속학문에 하나의 형식으로 들어감에 따라 점차 세속화된다. 자녀와 부모, 학생과 선생, 환자와 정신과 의사 등의 사이로 고백의 형식이 스며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은 이런 고백의 역사에 자리매김되어야 마땅하다.
고백이 갖는 형식이 중요한 것은 고백하는 자가 자신의 고백의 의미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데 있다. 고백의 진리성은 언표행위의 주체[고백하는 사람]와 언표의 주체[고백 내용을 행위한 사람]가 일치함으로써 보장된다. 그런데 이 진리성을 결정하는 사람은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백을 듣는 사람이다. 고백의 진리성이 고백을 듣는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다. 주체의 진리, 즉 고백하는 사람 자신에 대한 진리가 주체의 외부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나는 나의 진리성을 결정하지 못한다!
주세페 몰테니, <고해성사>
따라서 여기서 다시 푸코가 비판했던 타자가 진리의 주인으로 간주되는 권력관계가 다시 나타난다. 주체는 고백이라는 권력 장치에 의해 권력에 예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은 파놉티콘의 다른 버전이다. 즉 고백은 권력에 대한 예속화를 산출하는 의례적인 기계인 셈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도 푸코는 이 예속화를 벗어날 새로운 주체 개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가 나오자 다음과 같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푸코는] 하나의 출구를 찾아낸 것과 똑같이 그 출구를 닫아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푸코는] 진리를 권력에 종속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 범주를 완전히 혁신할 수 있었는데, 이런 혁신 속에서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재료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나는 그 방법을 모르겠다. …… [또한] 쾌락들은 어떻게 대항권력들을 활성화하는가? 그리고 미셸은 이 쾌락 개념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들뢰즈, 「욕망과 쾌락」사토 요시유키의 인용을 재인용
규율권력은 개개인의 신체를 감시, 훈육하고, 자신의 신체를 자신이 통제하는 반성적이고 규제적 자아를 만들어낸다. 프로이트도 자아는 외부세계의 자극[고통의 기입]과 그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작용[고통에 대한 반성]에 따라 형성된다고 보았다. 바로 그렇게 구성된 자아가 스스로 자신의 신체적인 힘을 조절한다. 유용성의 측면에서는 신체의 힘을 증가시키지만, 복종의 측면에서는 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푸코 『감시와 처벌』 217쪽). 푸코가 말한 ‘혼은 신체의 감옥이다’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권력관계에 의해서 생성된 규제적 자아가 자신의 신체를 감시하고 훈육한다. 이것은 다시 칸트적 주체, 즉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의 다름 아니다. 규율권력은 신체에 고통을 기입하고, 그 고통에 따라 자아의 반성성을 만들어낼 뿐인 거다. 이런 구도라면 여전히 저항을 위한 발판은 마련하기 힘들다.
이 아포리아를 품고 푸코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이래 8년 간의 고투를 겪는다. 그는 기존 권력이론에 깃든 어떤 아포리아를 해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푸코는 놀라운 것을 발견한다. 아주 새로운 돌파다. 사실 규제적 자아는 니체가 비판에 열중했던 그 ‘노예의 의식’에 상응한다. 그것은 ‘병든 양심’인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라는 놀라운 존재이다.
형제여,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자기가 그것이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자기인 것이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것은 규제적 자아와는 완전히 다른 능동적인 힘이다. 여기서 자기를 발견한다는 것은 규제적 자아를 능동적인 자기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병든 양심’을 ‘약속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신체의 감옥으로서의 혼, 즉 반성적인 자아를 능동적인 ‘자기’로 전환시킴으로서, 저항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 바로 이것이 푸코가 그리스-로마로의 전회가 발생한 지점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생각해보면 이것은 아주 묘한 지점이다. 칸트적 주체에서 초월론적 심급은 반성적 심급으로서 경험적 주체를 감시하고 처벌하였던 규제적 자아였다. 프로이트의 초자아도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푸코는 그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다른 결론을 내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쏟아붓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규제적이지 않고, 오히려 주체의 존재 양태를 변용시키는 시선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미 지나간 하루 전체를 ‘점검’한다. 그것은 피고가 재판관을 앞에 두었을 때의 사법적 관계와 같지 않다. 자기를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존재를 이성적이고 단독적인, 완전히 새로운 주체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후회의 느낌을 돋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명한 처신을 확보해주는 이성적 각오를 강화하기 위해서 그는 홀로 자신을 점검한다. 그는 저녁의 점검을 통해 매일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할 것이다. 그것은 생활에 스며든 복종적 태도[습관에 따르는 주체]를 끊임없이 털어내고자 하는 저항의 태도이다. 습관을 바꾸는 것, 그것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 거점을 기반으로, 이른바 칸트적 주체(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로부터 윤리적 주체(자기배려하고 저항하는 주체)로의 변용을 시도한다. 이 윤리적 주체가 지향하는 목표는 일반적인 도덕과 다르다. 도덕적 주체화는 구성원의 행동 규칙을 보편화함으로써 공동체의 규범과 법에 적응시키는 것이라면, 윤리적 주체화는 자신의 행동을 개별화하고 변조하며, 자신의 행위에 단독적인 광채를 부여할 수 있는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결국 도덕으로 대표되는 규율권력은 일반적인 규범을 개체에게 부과하는 장치로서 작용한다면, 윤리적 주체화는 개별적인 힘으로서의 특이성을 구성하고 조직화하는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반성적 자아는 주체가 자신을 스스로 규율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성적 시선은 윤리적 주체를 형성하는 기능을 동시에 품고 있으면서, 규율에 저항하는 역량으로 나타난다. ‘규제적 자아’가 ‘탈복종적인 자기’로 탈바꿈된다. 결국 푸코에게 주체의 반성적 자아는 ‘인식의 주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권력에 ‘복종하는 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것들을 뒤집는 ‘저항의 주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바로 반성적 자아 자체가 혼종적(heterogeneity)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곳에는 인식도 있고, 복종도 있으면서 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도 있다. 푸코는 저항의 주체로서의 혼종적인 주체를 발견함으로써 자기배려의 세계로 성큼 들어간 것이다. 자기배려, 그것은 저항이다.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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