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한겨울에 읽는 8편의 소설 - 세계문학을 만나다 ②

 한겨울에 읽는 8편의 소설 - 세계문학을 만나다 ② 


이야기는 ‘나’를 바꾼다




에디파는 옷장이 달린 화장실로 들어가서 재빨리 옷을 벗은 다음 가져온 옷을 가능한 한 모두 껴입었다. 갖가지 색깔의 팬티 여섯 벌, 거들, 나일론 양말 세 켤레, 브래지어 세 벌, 바지 두 벌, 하프슬립 네 벌, 검은 웃옷 한 벌, 여름 드레스 두 벌, A라인 스커트 여섯 벌, 스웨터 세 벌, 블라우스 두 벌, 누빈 실내복, 하늘색 실내복, 헐거운 올론 드레스에다 팔찌, 핀, 귀고리, 목걸이 등을 몸에 걸쳤다. 다 걸치는 데만 몇 시간은 족히 걸림 직했고, 이윽고 그녀가 그것들을 다 껴입은 후에는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전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실수를 범했는데, 거울 속에는 다리 달린 비치볼이 서 있어서, 너무나 격렬하게 웃어 대는 바람에 그만 쓰러져 버렸다.(42쪽)


 "그 책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이미 누가 가져갔어요. 개막 파티를 열 때마다 최소한 여섯 권 정도는 늘 잃어버리거든요” 그는 샤워실 밖으로 머리만 불쑥 내밀었다. 다른 부분은 수증기 속에 휘감겨 있었는데 그의 머리가 풍선처럼 섬뜩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100쪽)



사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설혹 안다고 생각하더라도 안다고 생각하는 ‘나’는 대개 선택지를 앞에 두고 관습대로 행동해왔던 통계적 산출물이기 십상이다. 내가 어떤 돌발적 행동을 할지는 알 수도, 예측할 수도 없다. 이마저도 ‘생각’으로 이야기를 넘기면 평균화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진다. 온갖 것들로 가득한, 우리는 수증기 속에 휘감겨 있는 샤워실의 드리블레트의 몸과 같다. 도대체 알 도리가 없고, 알려고 덤벼들어도 그 순간, 큰 혼란에 휩싸일 뿐이다. 니체가 간파하였듯,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디파는 메츠거와의 ‘스트립 보티첼리’라는 옷 벗기 게임에 앞서 온갖 옷들을 겹겹이 입는다. 그것들이 사실 아무 소용도 없는데 말이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망상적이다. 도덕과 그것들로 비롯되는 부끄럼들은 우리들의 의식을 망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그 집안에서 기거한다. 지켜야 할 ‘나’의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나의 망상구조를 구성하고, 그것에 터 잡아 끊임없이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어서 치장하게 만든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박스를 갖다 놓고 갖가지 포장지를 겹겹이 싸면서, 그 안에 있다고 여기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기는 것과 같다.

결국 이 망상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사유의 첫 걸음은 자신을 동물과 동일한 수준으로 의식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라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떠해야 한다는 전제들은 사유의 지독한 적들이었다. 모든 훌륭한 사유는 인간적인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유란  애초부터 인간을 싫어한다.


노만 록웰, <거울 앞 소녀>




‘이제는 도대체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문지기가 묻는다. ‘자네는 정말 만족을 모르는 끈질긴 사람이야’ ‘모든 사람이 법에 이르고자 애를 쓰고 있는데...’ 남자가 말했다 ‘그 긴 세월 동안 나 말고는 아무도 입장을 요구하는 사람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문지기는 남자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깨닫고는 꺼져가는 그의 청력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게 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여기는 자네 말고는 아무에게도 입장이 허락되지 않아.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자네만을 위한 것이었거든. 이제는 가서 그 입구를 닫아야겠네.(269쪽)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쫙 펼쳤다.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빰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쪽)



시골사람은 나중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문지기의 기약없는 한 마디에 법 앞에 터 잡아 ‘살아간다.’ 그리고 법으로의 입장을 수없이 시도하며, 문지기를 끊임없이 설득한다. 심지어 문지기 옷깃에 있는 벼룩까지 관찰하며 버틴다. 어쩌면 그는 이제 필요 없게 되어 법이 스스로 문을 닫을 때까지 법의 기만을 즐기며 한바탕 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그게 그의 삶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어쨌든 시골사람은 법에 들어가려고 시도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하는, 그러나 블로크처럼 노예상태에는 떨어지지 않는 아주 기묘한 시간들을 만들어 냈다. 이 시간들이야말로 존재하지만 필요 없어진 법의 상태, 실질적 무죄판결의 상태가 아닐까?

사실 법이란 도무지 기원도 없고 이유도 없다. 오직 법이란 형식을 둘러싼 더러운 공모만 존재하는 듯하다. 그래서 그 법을 지키는 문지기들도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곳엔 두려움만 가득하다. 사실 그들도 법의 내부 깊숙이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법원 정리도, 예심판사도 모두 고위 관료를 본 적이 없다. 그들조차 더 깊숙한 내부에 자리 잡은 세 번째 문지기를 보는 것이 무섭기만 하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보다 더 자유롭지 못할지 모른다. 법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매여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법으로부터 기만을 당할 뿐만 아니라 외부로 나가지도,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처지인 것이다.

이런 세계 속에서 K는 끊임없이 내부로-판사가 있는 곳으로, 상급법원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려 한다. 자신의 무죄판결을 위해서는 ‘최종 의사결정권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 이처럼 법의 세계는 ‘무한히 연속되는 형식’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듯하다. 법이 의도하는 것은 법의 네트워크로 사람들을 포섭하는 것, 그 자체다. 뭔가 정의로운 판결을 수행할 것처럼 무늬를 만들고, 유혹하지만, 그 안에 뭔가(예를 들면 정의, 선과 같은)가 실제로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법이란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금기사항들을 조문 삼아, 이것을 어기면 처벌하겠다는 엄포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 엄포에 사람들은 마치 금기사항을 처음부터 욕망이라도 했던 것처럼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죄의식 상태에 빠지게 할 뿐이다. 법이란 부끄러움에 빠뜨리는 그 네트워크, 그것일 뿐이다.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가능성도 없었던 그런 욕망에 덧씌워져, 스스로를 검열하게 하는 것, 그것이 법이다.





당신이 냉철하게 계산하면 할수록, 당신은 앞으로 전진하는 법이지요. 사정없이 때리세요. 그러면 모두가 당신을 두려워할 거예요. 역에서 마다 바꿔 타고 내버리는 역마처럼,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대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욕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게 될 거예요. 아실 테지만, 당신에게 관심 가진 여인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은 사교계에서 아무것도 아니지요. 당신에게는 젊고, 돈 많고, 우아한 여성이 필요해요. 당신이 진실한 감정을 가졌다면 보물처럼 숨겨두세요. 결코 그것을 남이 알아채게 해서는 안 돼요. … 당신은 이 세상이 얼간이들과 사기꾼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그 어느 편에도 속해서는 안 돼요. 이 미궁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는 당신에게 아리안의 실처럼 내 이름을 주겠어요. 이름을 더립히지 마세요. (109쪽)
 


그는 벌들이 윙윙거리는 벌집에서 꿀을 미리 빨아먹은 것 같은 시선을 던지면서 우렁차게 말했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 사회에 도전하려는 첫 행동으로, 라스티냐크는 뉘싱겐 부인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396쪽)



맑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상품의 집적으로 구성된다고 했을 때, 그 상품은 비단 물질적 구성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제적 대상들을 벗어나서, 사회적, 법률적, 문화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상관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법률 시장은 소송 상품 교환시장이다. 송사라는 놈은 웬만해서는 시장에 올라오기 힘들다. 소송을 걸었을 때 벌어질 체면 손상, 승산여부에 따른 경제적 이해득실, 소송 상대방과의 관계 등 갖가지 고려사항들이 쉽게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다. 결국 등록되지 않는 소송은 뒷골목 폭력이나 기껏해야 합의서로나 존재하게 될 뿐, 상품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의 필사적인 매개를 통해 일단 소송 시장에 들어서면, 송사-상품은 자신의 승리를 돋보이게 하는 모든 요소들을 빨아들이며, 배심원들에게 '승리'라는 댓가를 받고 기어코 팔리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된다.

19세기의 사교계는 온갖 귀족과 부르주아에게 구애하며, 성공에의 야심으로 무장한 청년-상품들이 가득한 ‘성공시장’이다. 이 상품이 팔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냉철하여야 하며, 모든 일에 정확한 계산을 들이대어야 하고, 상대를 바꿀 때는 마치 바꿔 타는 말처럼 단호하게 처리해야 된다. 나아가서 그들은 자신이 상대에게 팔리고 싶다는 감정 따위는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마치 상품이 가격표에 응당한 화폐를 흡수하기 전까지는 진열대를 굳건히 지켜야 되는 것처럼 말이다. 단 한 번의 눈빛도 건네지 않고, 가격표를 냉철하게 이마에 붙이고 서있는 루이뷔통 가방을 보라. 훌륭한 상품은 그 전 주인의 흔적을 갖지 않는 법, 그 가방은 진열대를 지키고 있다가 주인이 바뀌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주인에게로 떠날 것이다. 으젠 드 라스티냐크는 온갖 사람들로 뒤범벅된 이 시장에 성공적인 교환을 열망하는 필사적인 상품이다.

그러나 이 상품은 젊고, 돈 많고, 우아한 여성, 뉘싱겐 부인을 등에 업어야만 한다. 상품들은 홀로 존재하거나 교환될 수 없다. 오직 매개물을 통해서만, 그 너머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것이다. 뉘싱겐 부인은 최초에는 사랑이였다가, 고리오 영감이 죽은 후 그 전과는 다른 뉘싱겐 부인으로 뒤바뀐다. 이제 라스티냐크는 사랑이라는 사용가치(C-M-C)의 회전에서, 성공을 향한 자본(M-C-M)의 회전으로 뒤섞이게 된 듯하다. 아마도 이제부터 라스티냐크의 길은 목숨을 건 도약의 길이 될 것이다.

구스타브 칼레보트, <파리의 오후, 비 오는 날>




어쩌면 패러것은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줄곧 알고 있었으며 그 말을 듣기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는지도 몰랐다. 만약 조디에 대한 사랑이 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한다면, 좀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가 잃어버린 청춘에 집착하게 됐기 때문일 수 있었다. 패러것에 비해 조디는 달콤한 숨소리와 피부를 가진 젊은 청춘이었고 그런 그를 안고 있을 때면 패러것도 잠시나마 푸른 젋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나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젊은 시절 찾아갔던 아름다운 해변의 오두막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패러것은 그렇게 자신의 청춘을 그리워했다. …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게으르고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르지만 매우 유쾌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다니, 이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121쪽)


패러것이 자신의 인생과 에너지를 기다림에 과도히 소모하는듯 보였지만, 그 기다림은 비록 아무도 오지 않을지라도 결코 좌절로만 점철된 기다림은 아니었다. 그것은 회오리바람처럼 묘한 기대감이 함께 뒤섞인 기다림이었다. (116쪽)



패러것이 들어간 팔코너 감옥. 감옥 안에는 만기 출옥했다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오는 걸 ‘휴가 갔다 돌아오는’ 정도로 아는 만성 도둑들로 가득하다. 이들에게 이번 출옥과 재수감은 구십삼 일 휴가, 전전번에는 일 년 반짜리 휴가다. 경비병조차 이들을 ‘착한 소년’이라고 부르며, 마치 학교 기숙사 경비 아저씨처럼 맞이한다. 패러것이 배정된 방은 F동. 독방동은 F로 시작하는 모든 더러운 단어들을 몸에 지니고 있다. fuck, freak, fools, fruits, first-timers, fat asses, phantom, funnies, fanatics, feebies, fences, farts.... 이런 곳에 와 있는 자신의 신세가 더욱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진다. 치킨 넘버 투가 말해주듯, 여기에 있게 된 게 전부 실수인 것일까.
 
이런 곳에서조차 사랑은 찾아오고, 그 사랑을 기대하고, 그리워한다. 그의 ‘찍찍 끌리는 농구화 소리’를 들으려 매번 교도소의 갖가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오직 그 소리만이 패러것이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디가 떠나가자, 그에 대한 그리움이 그와 접촉했던 생식기로부터 먼저 발생한다. 두뇌는 생식기의 그림움을 해석할 뿐이다. 이 그리움은 자기 자신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이다. 조디와 있었을 때 자신에 아로새겨진 기억들. 생식기는 그와의 성애 속에 펼쳐졌던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그 기억들이 다시 지금-이곳에서 펼쳐졌으면 하는 기대감에서 생긴 그리움이다. 말하자면 패러것은, 아니 패러것의 생식기는 조디를 통해 자기 자신의 기억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리움은 생식기와 두뇌를 거쳐, 거기서 다시 심장으로, 영혼으로, 정신으로 퍼져가 그의 몸 전체를 꽉 채워버린다.

어제 저녁 다투고 헤어진 연인의 문자메세지를 기다리듯이, 연인을 9층 집으로 데려다주던 엘리베이터 소리를 기다리듯이, 연인이 녹슨 현관문의 열쇠 돌리는 소리를 기다리듯이, 벌거벗은 연인이 욕실 문을 열고 나오길 기다리듯이, 수업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듯이, 9호선 급행열차를 기다리듯이, 162번 버스를 기다리듯이, 휴가 비행기를 기다리듯이, 페리호의 출발 고동을 기다리듯이, 오, 짝사랑하는 여인이 내 품에 뛰어들게 할지도 모를 행운의 정전 사태를 기다리듯이, 우리도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항상 기다린다. 이 기다림이란 사실 나 자신의 사랑 기억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몸의 징표이다. 그 그리움이 내 기억을 환기하는 것인 한 그것들은 모두 바로 나다. 그래서 모든 나는 나를 기다린다. 사실 산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고, 그것도 오래 기다리는 것이고, 그것은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쩌면 삶의 실감이란 나를 기다리며 생기는 “묘한 기대감” 그 자체가 전부일지 모른다. 내가 나를 기다리며, 나에 대한 사랑의 기대감으로 충만한 나르시스트, 그가 바로 당신과 나다. 모든 헤어짐에 슬퍼하지 말지니.



_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살바도르 달리, <시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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