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③ 캐릭터
설계자 지로 – 아름다운 지옥의 순교자
평범함의 무시무시함
《바람이 분다》는 호리코시 지로라는 한 인간의 일생을 다룬다. 그가 자신의 꿈을 어떻게 이루고 그 결과로 무엇을 받아들이게 되는지가 러닝 타임 2시간 내내 천천히 다루어진다. 서사적 측면에서 보면 가장 큰 특징은 자서전적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난신고도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류의 운명을 짊어진 나우시카나 시타는 아니더라도 치히로나 소피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걸린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험도 없다. 근대 일본의 일상이 치밀하게 묘사되지만 토토로나 키키처럼 환상적인 경험으로 마음이 훌쩍 커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개발품만 떼어 놓고 보면 지로는 그저 열심인 우리 시대의 여느 회사원이나 다름없다. 평범한 일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략 그의 일생을 따라가보자. 지로는 경제적으로 보면 2등칸을 탈 정도는 아니라 해도 집에 유모를 두고 있고 정원까지 있는,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형편이 나쁘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이 집에 아버지, 형, 그리고 남동생도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지로에게 간섭하는 남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들이 친구들과 다투고 들어와도 조용히 말리고, 설계자의 꿈을 이야기하면 무조건 응원한다. 어린 여동생은 오빠를 따르며 밤에 지붕 위에서 함께 별을 볼 정도로 친하다. 지로는 학교생활도 원만하다. 그 당시에 구하기 쉽지 않았을 외국 잡지도 선생님으로부터 쉽게 빌릴 수 있고, 하급생을 구하려고 다투지만 자기 싸움은 아니다. 이 점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와 대비된다. 마히토는 동급생들의 시기와 질투 공격을 직접 받았다.
공부를 잘한 지로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다. 항공기술학과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학교에 가서 밤낮없이 공부하면서 친구도 잘 사귄다. 이때 사귄 혼조와는 평생 경쟁하며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꿈을 향해 일에 매진하는 지로는 설계도면의 선을 깨끗하게 그린다고 나온다.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으면 그렇겠는가? 매사 깔끔하고 확실한 성격에 공부까지 잘했을 테니 지로는 무리 없이 나고야에 있는 일본 최대 군수 회사 ‘미쓰비시 내연기 주식회사’에 취직한다. 취직한 회사에서 동료들의 질투 섞인 따돌림 따위를 겪는 일도 없고, 5년 만에 상사의 낙하산 승진에도 어느 누구 불평하지 않는다. 나중에 지로는 사상범 전문 경찰에게 쫓기지만 이것도 과장님, 부장님의 보호 속에서 다 해결된다.
연애는 또 어떤가? 첫사랑과 무리 없이 결혼한다.. 장인의 서슬 퍼런 반대도 없다. 나오코는 본인이 결핵으로 고생함에도 비행기를 만들고 싶은 지로의 꿈을 백 프로 응원한다. 본인 치료도 마다않고 지로의 설계가 완성작품으로 탄생하기까지를 묵묵히 지킨다. 신혼집이 없어도 과장이 별채를 내어주고, 과장님 댁 사모님이 아픈 아내까지 돌봐준다. 물론 나오코의 결핵으로 사랑은 짧게 끝난다. 하지만 꿈속에서 나오코는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지로를 응원하며 그가 만들어낼 비행기를 기다려준다. 지로는 하고 싶은 것 다 한다.
미야자키는 지로가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단지 1923년의 관동대지진만 언급한다. 지로의 제로센이 실제 쓰이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이다. 일본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기까지 자체적으로 아시아를 정복하기도 했고 미쓰비시의 비행기가 여기에 협력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직전인 1931년에 이야기를 끝내고 바로 42세가 된 전쟁 직후를 보여준다. 이때 지로가 꿈에서 카프로니에게 지난 10년은 지옥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지로는 나오코도 없이 자기 비행기로 사람이 연료탱크를 모는 부품이 되어 전쟁에 닦여 쓰이는 것을 허망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끔찍한 시간은 작품에 나오지 않는다.
나오코는 심각한 결핵을 아침 화장으로 겨우 감추고, 마침내 지로의 설계가 세상에 빛을 본 순간 다시 고산 병원으로 올라갔다. 이런 나오코를 보고 과장의 부인은 ‘아름다운 모습만 남기려고 했다’며 나오코의 그런 선택을 눈물로 격려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지로 인생에서 아름다운 모습만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지로와 카프로니는 비행기의 꿈은 아름다운 것이며, 비행기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마지막 꿈에서 카프로니는 지로의 제로센이 아름답다고 결론 내린다. 물론 이 비행기들은 모두 하늘 무덤으로 날아가버렸다(《붉은 돼지》와 《벼랑 위의 포뇨》, 그리고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바다 위에 가득 몰려서 떠 있는 배나 하늘 한가득 몰려 날고 있는 비행기를, 배들의 죽음과 비행기들의 죽음으로써 표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평범한 일생을 이렇게 길게 그려내는가? 치히로처럼 온천장에서 늪바닥까지 멀고 깊은 곳까지 한참의 모험을 하고 돌아와도 관객들은 환호할 텐데 말이다. 예를 들면 기술자들 간의 경쟁, 자금부족과 날씨의 변덕으로 인한 시험 비행의 실패, 혹은 카미카제가 되고 만 제로센의 참상 같은 것을 다 뺀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지로의 성품과도 연결된다. 지로는 13세 때부터 42세 때까지 한결같다. 침착하고 성실하며 다정하기까지 한 엔지니어로, 꿈꾸던 유년의 그 모습 그대로 늙어간다. 지로는 관동대지진에 앞서서나 연인 나오코의 각혈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지로는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한다.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지로는 미야자키 하야오 주인공 중에서 제일 말도 없고 외부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겉으로 보아 맹숭맹숭한 이런 서사는 지로가 오직 자기 자신의 꿈과만 대결을 벌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앞서의 9편에서 모두 주인공이 외적 조건과 사투를 벌이는 일을 다루었다. 그것이 ‘저주’라는 사건으로 표현되었다. 이제 아니다. 지로는 자기 꿈의 모순을 알고서도 끝까지 붙들고 간다. 카프로니와 약속한 전쟁기의 10년은 그런 지로를 바꾸지 못했다. 지로는 바로 이런 시간을 30년 동안 붙들고 있었다. 이렇게 시종일관 자기 꿈을 밀어붙인다는 것의 힘과 무게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바람도 탈 수 있는 날개가 되어
미야자키 하야오가 비행광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부터 《모노노케 히메》를 제외하고 모든 작품에서 주인공은 한번쯤 하늘 높이 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멋진 비행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영화에서 다양한 비행기를 그려냈다. 그동안 나는 이런 비행기의 외관적 다양함, 도색이라든가 어떤 풍채 자체가 주는 느낌만 피상적으로 보았었다. 미야자키가 그저 비행기를 이렇게 저렇게 그리는 취미가 있다고만, 즉 화가가 풍경화나 인물화에 대한 특별한 취향이 생기듯이 비행기 그리기에 몰두하게 되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일본 도쿠마 서점 어린이책 편집부에서 펴낸 『스튜디오 지브리의 탈것이 잔뜩』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탈것이 잔뜩』은 지브리 영화에 나오는 비행기, 배, 삼륜차, 자전거 등 온갖 탈것들을 자세히 소개한 아동용 그림책이다. 그런데 《바람이 분다》의 비행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상당히 놀랐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비행기 종류는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해적들의 다양한 비행기보다도 종류가 많았다. 당연히 『탈것이 잔뜩』에서 최고로 많은 페이지가 할애된 작품도 《바람이 분다》이다. 미야자키가 이 작품에서 띄운 비행기들은 그가 읽고 들은 이야기 속 비행기들이 아니었다. 날개는 이 책에서 꼬리는 저 책에서와 같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이 부분 저 부분을 이어붙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20세기 초반 아시아를 날다 떨어진 비행기들이었다. 비행기 설계를 향한 지로의 집요함은 실제로 한 기의 비행기가 하늘을 오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연구가 필요하고 너무나 많은 실패가 요구되었음의 반증이다. 그 집요함을 유지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제로센이라고 하는 날개를 가로로 쫙 펴고 꼬리에 단정히 각을 세워 올린 소형기, ‘0식 함상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기술 경합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을 것이다. 미야자키는 비행기 날개의 변화라든가 몸체의 형태가 갖는 유체역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유체역학이란 흐름 저항력에 대한 연구이다. 강풍이든 약풍이든 어느 방향에서 어떤 속도로 불든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도구로서의 비행기란 무얼 의미하는가? 대지진도 아내의 죽음도 설계의 실패도, 지로의 인생에도 너무나 많은 바람이 왔다 갔다. 바람은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타는 것이다. 지로는 공기 역학을 연구하면서 그 비행기를 타는 인간이 자기 삶의 간난신고를 어떻게든 잘 넘어가게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럼 비행기들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지로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를 이해해보자. 13세의 지로가 처음 날개를 단 비행기 꿈을 꾸었던 데에서 시작하자. 이 비행기는 1인승으로 날개의 각도와 형태를 바꿀 수 있다. 날개가 강조된 비행기로 봐서, 그리고 뒷날개가 아니라 지브리 특유의 푸른색 하늘색으로 채색된 옆 날개가 사람 손처럼 따로 논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그래서 이후의 비행기에서도 우리는 날개 모양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카프로니의 비행기가 대형선이었던 것과 달리 지로의 비행기는 처음부터 1인승이다. 카프로니가 주익(主翼)을 두 개에서 세 개로 늘리고, 100명의 승객을 태우기 위해 아홉 개의 날개를 지닌 대형 수상 비행정까지 개발하는 것과도 대비해보자. 지로에게 날개 다음으로 중요한 비행기의 외관은 그 몸체다. 작고 날렵해야 한다.
연도대로 따라가보자. 연도는 《The Art of THE WIND RISES》를, 비행기에 대한 세부 설명은 『탈것이 잔뜩』을 참고한다(『탈것이 잔뜩』에 나오는 세부 정보 중에 영화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그런 부분은 참고하지 않는다). 먼저 1924년이다. 막 취직한 지로는 머리에 돌풍이 일 정도로 자신의 비행기에 대한 생각에 몰입한다. 흰 새처럼 생긴 비행기인데 날개가 쫙 펴져 있어서 최종적으로 ‘0식 함상 전투기’까지 발전될 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로의 머릿속에서 비행기는 공기의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날개가 부서져 추락한다. 지로는 1927년에 미쓰비시에서 하야부사형(準一形) 전투기 개발을 하게 된다. 실제 인물인 호리코시 지로가 이 전투기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속 400km로 급강하하던 중 공중 분해되고 만다(링크). 이 싸이트에 들어가면 하야부사형 전투기의 실제 추락과 낙하산 사용에 관한 상세한 정보가 나온다).
하야부사형 전투기의 실패로 미쓰비시가 소형기를 더이상 제작하지 않고 독일 융커스(Junkers) 항공사에 기술 이전을 위해 견학을 가게 된다. 이때 지로는 대형 여객기 G-38과 두랄루민제 소형기 F13을 보게 되는데, 이때 G-38과 F13 각각의 규모와 기술에 놀란다. G-38은 관객 입장에서도 저렇게 날개가 큰 비행기가 하늘을 뜰 수 있겠나 싶을 정도인데 익폭(翼幅)이 44m, 총 길이가 23.2m나 된다고 한다. 지로는 G-38에서는 크기에 놀라면서도 날개에 의자를 달아 나는 정면에서 하늘을 볼 수 있게 한 설계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한다.
그러다 지로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F13을 보게 되는데 은색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작은 비행기 앞 프로펠러를 한참을 본다. 실제 F13은 군용기로 개발도지만 나중에 여객기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런 사정을 알아 지로가 이 비행기 앞에 더 오래 머물게 한 것은 같다. 지로는 독일에서 서유럽을 돌아 일본으로 오는 길 기차 안에서 카프로니의 꿈을 다시 꾸게 되는데, 이때 지로의 흰 비행기 날개가 7시 정도로 꺾여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지로의 연구가 진행중임을 알 수 있다.
지로는 유럽에서 돌아온 뒤 1932년 시제품이 될 함상 전투기를 개발하게 된다. 함상 전투기란 항공모함 위에서 이착륙을 하는 비행기를 말한다. 『탈것이 잔뜩』에 따르면 지로와 과장 쿠로사와는 이 개발을 위해 라이벌 회사가 제작한 복엽기(날개가 2층)를 견학하러 갔다고 나온다. 타고 가던 복엽기도 엔진에서 오일이 뿜어져 나오면서 겨우 항모에 착륙을 한다. 얼굴을 씻어 그 묻은 기름을 닦아내고 나와 또 관찰한 다른 함상 전투기도 엔진이 터져 바다로 추락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함상 전투기 개발의 어려움을 엔진 능력을 가지고 또 설명했다.
덧붙여 둘 것은 미야자키가 이 두 번째 전투기의 추락 직후 항모에서 신속하게 군인들이 바다로 뛰어내리는 장면을 잘 포착하는 점이다. 물론 군인들에게는 언제든 이런 상황에 즉각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그것의 영화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기술의 위험함과 함께 그 관리에 있어서 사람에 대한 존중을 갖고 가야 한다는 점을, 그럴 수 있다는 점을 일본 해군의 구출 작전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것을 두고 일본 해군 찬양이라는 단편적 감상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일본 해군에게 병사나 인간을 보호하려는 태도가 있다면 마땅히 칭찬해야 하고, 군대나 국가가 최종적으로는 국민과 그의 작품을 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항모에서 소형선박을 타고 육지로 귀환하는 지로의 표정은 좋지 않다. 좋지 않다고 해도 입꼬리가 조금 처진 정도지만, 어떤 실패라도 설계라는 분야의 넓이를 알려준다며 감탄하던 그를 떠올려보면 지로가 정말 큰 실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 지로가 설계한 것은 7시각 함상 전투기이다. 지로가 이 테스트 비행에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그 긴장도가 비행장 위를 함상 전투기를 이끌고 천천히 걸어가는 걸음에서 다 느낄 수 있다. 바람을 타고 싶은 간절함으로 지로 몸이 바람처럼 흔들린다. 이 비행기는 날개가 기체 아래에 있는 저익기(低翼機)인데 소나 트랙터가 아니고 각 날개 13명씩 모두 26명이 날개를 끌어 비행장까지 비장하게 몰고 간다. 결과는? 성공! 미야자키는 이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동체에 무수히 박힌 나사못을 보여준다. 이 못이 나중에 지로가 자신의 비행기를 완성시키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개발 성공의 포상으로 지로가 가루이자와로 휴가를 가게 되는 것 같다. 여기에서 나오코를 만나 약혼하게 된다. 이때 지로가 나오코를 사랑하는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으로 그가 계속 꿈꾸어왔던 비행기가 종이로 제작되어 나온다. 종이비행기다. 첫 번째 꿈에서 지로는 안경을 쓰지 않고 날개 비행기를 몰고 있었다. 다음 꿈에서 지로는 근시와 상관없이 하늘을 꿈꿀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바로 설계자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 중에 안경을 쓴 이로 붉은 돼지가 있다. 그의 썬글라스는 파시즘으로부터 눈 돌리기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지로가 안경을 쓴 이유는 물론 설계자로의 진로변경을 이끌기 위한 장치이지만 다른 의미도 있다. 그것을 종이비행기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종이비행기야말로 지로가 직접 몬 유일한 비행기가 된다. 지로는 종이비행기가 정확히 나오코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오코도 지로도 심지어 독일인 여행자 카스트로프씨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비행기 조종에는 목표를 확실히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로는 천성적으로 근시이므로 목적지 조준의 능력이 없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지로의 꿈은 어떤 목적이 아니다. 지로는 자기 꿈에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조종사가 아닌 것이다.
그대 오늘도 꿈꾸는가?
가루이자와에서 돌아온 지로의 개발은 계속 진행된다. 먼저 지로가 만나게 되는 것은 대형 전투기를 완성하고 있는 혼조다. 지로는 혼조의 비행기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한다. 비행기 항공 역학에 대해 얼마나 많이 연구했는지 지로는 첫눈에 혼조의 비행기가 날 거라고 장담한다. 왜? 비행기 주위로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지로에게 바람이 분다라는 것은 공기의 흐름을 잘 탄다라는 뜻이며 시도한 것이 어떤 식이든 결과를 보리라는 의미임이 드러난다. 지로보다 혼조가 빨리 회사에서 승진한 것 같기도 하다. 혼조는 사내 정치 바람도 잘 타는 것 같다.
지로는 혼조에게 점검구에 접시머리 나사를 사용하면 공기 저항을 줄일 수 있다며 자신의 개발품을 서슴없이 준다. 여기에 더해 정교하게 점검구 해치의 아이디어라든가 계산한 스프링 탄성율도 알려준다. 혼조는 나중에 지로의 양철 오리 즉 소형기가 완성되고 이 나사가 사용된 뒤에 쓰겠다며 유혹적인 이 제안을 양보한다. 언뜻 생각하면 한 회사에서 승진을 다투는 개발자들인데 어렵게 발명한 나사를 기꺼이 주거나 덤덤히 거절하는 모습이 이해가 안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형기든 소형기든 한 대 한 대 자체가 아주 어렵게 개발되는 과정이고 보면 한 개인의 어떤 부분적 성취를 갖고 크게 의미 부여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행이란 말 그대로 철이 하늘을 날아야 하는, 인간이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그러기 위해 설계자들이 마음을 모으고 바람도 잘 불어줘야 가능한 시도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로는 계속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동료들과 비공식 세미나도 왕창왕창 하면서 마침내 1935년에 완성하게 될 9시각 단좌 전투기에 대한 설계를 만들어간다. 지로가 동료들과, 또 실제로 설계도면에 따라 재료를 만들고 붙이는 개발팀과의 협업을 하며 왁자지껄 의기 충만해서 연구하는 모습은 비행기 한 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꿈이 담기는지를 보여준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협업의 충만함으로 이와 비슷한 것을 그린 것은 《붉은 돼지》의 피콜로씨 정비소였다. 여기서 설계자 피오를 비롯 공장의 모든 정비사들이 활기차게 먹고 마시고 아이까지 키우면서 붉은 비행기를 조립하던 열기가 다시 환기된다. 물론 가장 큰 차이는 피콜로 정비소가 완전히 여성 일꾼들의 공간이었던 것과 달리 지로의 연구소는 전부 남자들만 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함께 뭔가를 만들어가는 연구소-공장의 활기는 똑같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본인의 꿈을 모두의 꿈으로 만들어가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연상되기도 한다.
지로는 불철주야, 밤낮으로 담배를 뻑뻑 피며 함상 전투기를 완성한다. 대학 때부터 고등어 반찬만 먹으며 생선뼈의 탄성에 감탄해왔던 지로는 그 우아한 뼈대를 철의 기술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날개를 쫙 편 함상 전투기가 완성되고 240노트로 수직 상승, 수직 하강, 공중회전까지 멋지게 마친 뒤 시험 비행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비행기는 부드러운 구름을 헤치고 태양이 높이 뜬 하늘 끝까지 올라갈 기세로 날았다. 미야자키는 지로의 성공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 비행기가 높이 날 때 그 배경으로 벚꽃이 가득 핀 도심을 보여준다. 구불구불 강이 흐르고, 마치 13살 지로가 꾸었던 꿈에서처럼 하늘도 땅도 비행기를 축복한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날개에 햇살이 찬란히 반사되어 비행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1인승 비행기를 성공적으로 개발한 지로에게 시험 비행기의 조종사는 ‘멋진 비행기였어요.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다. 하지만 결말에서 밝혀지듯 이 비행사는 먼 하늘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지로의 개발을 응원하던 나오코도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는 그 순간 세상을 뜬 것처럼 암시된다. 결과만 놓고 보면 비극을 낳게 될 일시적 성공일 뿐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이어진 줄기찬 연구에서 지로는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비행기가 추락할 수 있다는 공포와 싸웠다. 그것만으로도 무섭고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지로는 자신의 비행기가 어떤 결말을 맞을지 모르지 않았으나, 그 꿈에 진심으로 매진했다. 지로는 또 다른 비극을 마주하면서 계속 비행기에 대한 꿈을 키워갈 것이다.
꿈이란 무엇일까? 나에게도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 꿈은 혼자 책상 앞에서 자기 생각만 키워가면 되는 일이니 지로처럼 평생 꿈과 악몽 사이에서 괴로울 일은 없는 것일까? 미야자키가 비행기 설계자를 선택한 이유는 기술자로서의 자기 작업에 대한 반성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든 결과 아이들을 더욱 더 자폐적으로 전자기기만 보게 하지 않았나? 모든 꿈에는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 어떤 악마성이 있다. 《바람이 분다》에는 유바바나 설리번 같은 마녀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천사이면서도 악마인, 사람을 기쁘게도 하지만 죽여버리기도 하는 기술자가 나온다. 그런데 따지고보면 지로는 성실한 기술자, 회사원, 가장이다. 둘러보면 만나게 되는 우리들의 초상인 셈이다. 지로의 꿈은 현대 생활을 하는 평범한 우리가 날마다 꾸는 그런 꿈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학위를 따야겠다, 승진을 해야겠다, 돈을 벌어야겠다, 자식을 낳아야겠다. 모두 마찬가지다.
지로와 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일상적으로 꾸는 꿈 안에 깃든 악마성을 보고 가느냐 보지 못하고 가느냐이다. 훌륭한 작가가 된다지만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종이가 필요하고, 종이를 위해서는 나무를 베야 하며, 찍어 나르기 위해서는 기계를 돌려야 하고 전기를 써야 한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일상의 활기를 외친다지만, 그런 나의 주장도 기계 문명의 거대한 바퀴를 돌리는 데 한몫을 한다. 모험이라고 하면 부모가 돼지 정도는 되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 꿈을 하루하루 끌고 가는 것이야말로 모험이다. 왜냐하면 꿈을 추구하는 길에는 양립할 수 없는 희생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한다, 자기 꿈의 이면을 주시하면서도 그것을 밀어붙이다 좌초하는 자는 아름답다고. 그 모든 결과의 비극을 감당할 정도로 아름다운 무엇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작품에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깃들기 마련이라고. 미야자키는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꿈은 그 정도로 아름다운가?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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