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 ③캐릭터
할머니 소피 – 날마다 예뻐지는 청소부
청소하는 인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포스터는 그냥 황야를 걸어오르며 힐끗 뒤돌아보는 등이 굽은 할머니의 모습만 나온다. 오른편 언덕 위 멀리 움직이는 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뿡뿡 올라가는 검은 김의 활력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할머니의 쭈그렁한 얼굴이 훨씬 더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미야자키는 왜 할머니에게 주목하는가? 앞 장에서 보았듯 할머니의 능청스러움에 매력을 느껴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는 할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드물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샤먼 할머니가 나와서 정복자 크샤냐에게 달려들어 ‘죽일 테면 죽여보라고!’하며 문명에 대한 광신은 틀렸다고 야단친다. 《모노노케 히메》의 샤먼 할머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 부족을 이끌고 당황함 없이 숲속으로 들어간다. 에미시의 이 샤먼은 나고 죽는 생의 숭고한 법칙에 종사하도록 아시타카를 이끌며 그의 저주를 가여워하지 않았다.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에는 이처럼 자연의 법칙에 충실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공동체의 수장 같은 면모가 있다.
또 하나의 대표 유형으로 엄격한 코치형이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공적(空賊) 대장 도라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온천장 주인 유바바다. 도라와 유바바는 그 화려한 치장에서도 닮았지만 자식이나 제자, 직원을 위기의 상황으로 내몰고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면서 그 분야의 인재가 되도록 확실하게 키워내는 똑부러진 행동에서도 닮았다. 이런 할머니 모습에서 단연 압권은, 치히로가 오물신의 방문을 받고 과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지 아주 흥미롭게 내려다보는 유바바의 얼굴이다. 유바바는 오물신의 목욕을 돕지 못해 온천장이 위기에 처할 걱정보다 치히로의 대처가 더 궁금해 죽겠다는 듯 얼굴 주름 하나하나를 움직이면서 기대했다. 그 밖에도 《벼랑 위의 포뇨》에서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어벤저스 할미들처럼 소년 소녀들을 든든하게 보호해주는 가디언즈가 있다.
소피는 어디에 속하나? 미야자키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노년을 찬미할 생각을 하지도 젊음을 그리워할 생각도 없었다. 작품 내내 소피의 등이 굽었다가 펴졌다가 얼굴 주름이 늘었다가 펴졌다가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길어졌다가 빈약하게 짧아졌다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할머니’라고 딱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사실 소피 할머니는 사실 할머니답지가 않은데 위의 세 유형 모두가 새끼들을 이끌고 돌보는 모습인 반면, 소피는 자기 문제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피는 사랑하는 하울을 구하고 자기 저주를 푸는 일에 집중한다. 캘쉬퍼를 지혜롭게 만들어주지도 않고, 마르클을 세게 훈련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소피는 청소한다. 그동안 미야자키의 영화에서 주로 누가 청소를 했는가, 누구를 위해 청소를 했는가? 구겨진 빨래를 개며 엄마의 퇴원을 걱정하는 아이들에게 힘을 북돋았던 《이웃집 토토로》의 칸타네 할머니가 있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도라는 밥이나 청소일은 하지 않았다. 타이거모스 청소는 아들들이 했을 것이다. 키키는 항구도시에 도착한 첫날 빵집 2층을 청소했다. 마녀의 방답게 꾸미는 것이었으므로 자기 돌보기에 해당한다. 키키보다 조금 더 어리지만 치히로는 자기 마음을 돌보기보다는 신들의 목욕탕 청소에 바빴다. 그런데 이 온천장 주인이 할머니이신 유바바님이시다. 그리고 할머니가 청소를 박력 있게 하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있다.
소피 청소의 특징은 무엇인가? 남의 집을 청소해서 자기 집으로 만들기이다. 소피는 빗자루로 성의 임자를 바꾸는 마법을 부린다. 하울은 집을 비워도 ‘움직이는 성’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소피는 잠깐만 외출하고 돌아와도 큰일이 나게 되기 때문이다. 식구들 전부가 소피 없이는 놀 수도 없고 먹을 수도 없고 잘 수도 없다. 이렇게 모든 이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식구들의 심장이 된다는 의미에서 소피는 진정한 성의 주인이다. 마녀의 상징이 빗자루를 드는 것이라면 소피는 정말 청소를 해서 공간의 성격을 바꾸니까 마녀다. 그런데 키키처럼 어린이가 아니라 할머니의 청소에서만 그런 마법은 일어난다. 미야자키가 ‘청소+할머니’로 캐릭터를 만든 것에는 어떤 의미가 더 들어 있을까?
우선 청소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청소란 더러움을 제거하는 행위다. 뭔가 형태가 무너지고 풀어지면서 제 모습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더럽다고 본다면, 이런 오염(汚染)은 만물의 숙명이다. 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오염’이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분해’라는 말로 ‘다른 생물의 단백질을 먹고, 소화하고, 산산조각냄으로써 그걸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과 끊임없이 교체하는 활동’을 생명의 근간이라고 설명했다(후지하라 다쓰시, 박성관 옮김,『분해의 철학: 부패와 발표를 생각한다』(사월의책), 33쪽). 후쿠오카는 이를 ‘동적 평형’이라 부른다. 생명 활동은 오염활동과 나란히 갈 수밖에 없다. 소피가 처음부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나옴으로써 관객도 어떤 경우에도 삶에는 중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저주도 자고 일어나서 밥 먹고 일해야 하는 이 숙명을 초월해 있지 않은 것이다.
청소의 인류학적 의미를 더 분석해보자. 만물의 숙명인 분해, 즉 형태 풀어짐의 무질서는 존재의 진행 방향이기에 어쩔 수 없다. 청소란 이 진행속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일이다. 무문자 사회의 신화에는 똥이나 오줌, 정액과 월경혈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 속 더러움을 ‘멀고 가까움에 있어 거리 조정이 실패한’ 사태를 포착하는 야생의 기호라고 본다(레비 스트로스, 『신화학』참고). 각각의 문화는 이런 무질서를 관리하는 것을 ‘청소’로 보는데 질서에 대한 구상은 환경에 따라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더러운 물건이 문화마다 다르다. 어떤 물건도 그 자체로 더럽지는 않다. 신발은 식탁 위에 올려 놓았을 때 더럽다. 식기도 침실에 있거나 화장실에 있을 때 더럽다. 위에 있을 것이 아래에 있고, 밖에 있어야 할 것이 안에 있을 때가 더럽다. 그러나 식탁과 침대 사이의 거리, 무엇을 위에 둘 것인가는 각 공동체 구성원들이 오랜 시간 탐구해서 얻은 결과를 따른다(메리 더글러스, 유재분·이훈상 옮김,『순수와 위험』, 69쪽).
흥미롭게도 야생의 많은 부족들이 이런 더러움을 ‘신’으로 부른다고 한다. 문화적 배치 즉 질서의 바깥은, 질서 자체를 출현시키는 광대한 힘들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무질서란 근원적 가능성의 심연으로서 존귀하다. 그래서 야생의 부족들은 청소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청소란 결벽증적으로 물건의 깨끗한 상태를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우주 안에서 관계의 편중을 해석하고 교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란 질서의 바깥으로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내가 사는 이 우주적 리듬을 능동적으로 탈 수 있도록 하는 수련이 된다. 일 자체로 신과의 만남이 되기에 하면 할수록 보통 이상의 능력자가 된다. 무질서를 감당한다는 것은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소피는 모르는 마법사의 집에 들어온 바로 다음날 청소를 시작할 수 있었다. 갑자기 할머니가 된 덕분에, 소피는 젊은이가 평생 청소하면서 익혀야 할 질서에 대한 통찰력을 한 방에 얻게 된 것이다. 부럽다, 접신(接神)이 가능한 소피!
쓸고 닦는 능력
자기 집인데 하울은 왜 청소를 못하나? 그 많은 물건들의 실제 쓰임이라든가 다른 물건들과의 관계라든가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울은 일단 좋아 보이는 것은 다 갖고 본다. 또 그것들을 들고 있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방어벽을 친다. 그래서 성이 잡동사니 천지가 된다.
그럼 소피의 청소법을 보자. 소피는 먼저 필요 없는 것을 버린다. 마르클이 소피가 청소하는 동안 항구도시 잰키스 마법가게 앞에 끄집어낸 물건들은 소피의 거침없는 손길로부터 살아남은 것들이다. 소피는 캘쉬퍼 앞에 산처럼 쌓여 있었던 재를 확 긁어내 버리고, 천장 위에 늘어진 거미줄도 싹 걷어낸다. 킹스베리에서 소형 동력기를 타고 황야로 돌아올 때 비행기가 성에 박히게 되는데, 아무리 하울이 쓰던 거라 해도 집 안에서의 쓰일 일은 없을 테니 발로 퍽 차서 내버린다.
그런데 ‘필요’에 대한 결정은 누가 하는가? 소피는 성에 처음 왔는데 무엇이 어떻게 필요 없는지를 알 수 있었을까? 바로 이것이 할머니의 능력이다. 긴 세월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본 경험은 가르친다. 이때에는 이것이 저때에는 저것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집 안에서는 그냥 먹고 자고 쉬는 한 사람이다. 8만 신들의 온천장에서 보았듯이 신들도 과로하면 쉬어야 한다. 그런데 하울은 자기가 쉴 공간조차 제대로 만들지를 못했다. 자기 집이지만 자기 필요도 계산할 줄 몰랐던 것이다. 하울에게는 뭐가 빠진 것일까?
이 꽉막힌 잡동사니 소굴이 소피 덕분에 누군가가 들어왔다가 나가고 다시 들어오는 열린 공간이 된다. 소피는 필요란 관계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것임을 이해했다. 그래서 자기가 침대로 쓴 쇼파를 황야의 마녀에게 내주기도 하고 무대가리를 빨랫줄 고정 막대기로 쓰기도 한다. 이런 소피 옆에서 식구들은 뭔가를 익힌다. 하울도 황야의 마녀와 강아지까지 들어오게 되자 화장실이 두 개는 있어야겠다며 이사도 한다. 모두의 뒷바라지에 바쁠 소피도 가끔 혼자 있는 공간이 필요할 테니 따로 방도 만들어준다. 필요를 결정하는 것은 집안 구성원들 그때그때의 처지다. 소피가 청소를 잘한다는 사실은 식구들의 마음을 이리저리 잘 헤아린다는 뜻이 된다. 소피 할머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청소에 관련된 이런 직관은 남들과 함께 살면서만, 그것도 오랫동안 부대끼며 서로를 겪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하울은 혼자 목욕탕 거울에 자기 얼굴만 바라보고 살았던 것이다.
청소의 두 번째 방법은 하나하나 씻고 닦기이다. 영화에서 이 과정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청소 직후에는 모든 것이 반짝반짝해져 있다. 하울이 모은 엄청난 그릇, 책, 여러 가지 장식품들을 일일이 다 꺼내어 씻는 동안 소피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 하나하나를 욕심냈을 하울을 떠올렸을 것이다. 또한 소피는 물건 자체의 생김과 쓰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소피의 씻고 닦기는 물건 각각에 대한 어루만짐이며, 그것들을 모으며 살았던 하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소피가 다른 물건을 열심히 씻는 것과는 달리 하울은 자기 몸만 엄청 열심히 씻는다. 작품에서는 소피가 자기 얼굴을 닦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울은 그 몸에 새겨진 기억이나 상처를 보듬는 행위로 목욕을 생각하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주로 염색을 했다고 나와 있으니 말이다. 똑같이 씻더라해도 정성스럽게 그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소피의 세 번째 청소법은 물건과 사람의 위치를 찾아주기이다. 이때 소피는 시행착오를 한다. 하울 목욕탕의 약 위치를 바꿔놓는 바람에 염색이 잘못되어 하울이 엄청 화를 내는 일도 벌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청소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식구들 각자의 ‘필요’를 다 계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소란 이런 위치조정 즉 식구들의 많은 필요들 사이에 위계를 정미롭게 만드는 연습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머리 염색을 잘 못하게 되어 못생겨진 덕분에 하울은 허세를 벗고 식구들에게 솔직한 얼굴이 될 수 있었다. 위치 조정은 실패할 때에도 뭔가 집안에 새 공기를 불러 일으킨다.
성에서 소피는 자기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뭐, 있다면 해터스 가게에서 쓰고 나온 ‘모자’ 정도? 성에서 소피는 자기 잠자리를 캘쉬퍼 옆에 두었다. 같은 마녀인데 키키가 ‘자기만의 방’을 고집했던 것과 다르다. 아마 노인이라 몸이 차가워져서 더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소피는 자기 침대를 황야의 마녀에 내주고 매트리스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는 청소하기의 인류학적 관점에서는 대단히 일리가 있는 설정이다.
청소 잘하기란 주어진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는 물건들의 관계를 읽는 능력에 달려 있다. 한 집에 갓난아이와 수험생과 요양이 필요한 환자가 산다고 해보자. 과연 누구에게 맞추어 집을 꾸며야 하나? 이 집을 청소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것은 차이 나는 가족들의 욕구를 조정하는 능력이다. 이때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청소하는 사람의 취향, 혹은 특정한 사람의 처지이다. 갓난아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집을 장난감 왕국으로 만들면 조용히 집중해야 하는 수험생이나 요양이 필요한 환자에게는 괴로운 집이 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저런 사정 다 내려놓고 주부가 그리는 스위트홈에 맞추기만 하면 물건이 집주인이 된다. 그러니 일 년을 주기로, 계절을 단위로 해서 조금씩 가족 중에 힘을 좀 몰아줘야 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대청소를 해야 한다. 서로는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집의 인테리어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하울은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면서 자기 취향을 고집하느라, 어린 마르클이 아침밥으로 따뜻한 후라이도 못해 먹게 성을 만들어 놓았었다. 소피가 청소하면서 ‘예쁨’에 대한 자기 고집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자기 예쁨만 챙기는 사람은 청소를 잘 할 수 없으니 그런 것은 서둘러 내려놓는 것이 좋다. 하울도 그 많은 자기 욕망들을 갖고 도대체 뭘 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청소를 잘 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하울은 소피를 사랑하게 되자 이사를 간다. 자기 마음에 소피라는 방향이 생기자마자 집을 정리할 생각이 든다. 하울은 성의 내부를 아예 소피가 살던 공업 도시의 모자가게로 바꾼다. 그러나 이를 어째? 이제 소피는 모자가게에서 일하던 그 아가씨가 아니다. 하울이 소피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사주면서 방도 좀 꾸미려고 하자 소피는 그럴 필요 없다는 미소를 짓는다. ‘성 전체가 내 안목으로 가꿔질 텐데 내 방이 따로 왜 필요하겠니?’ 라는 의미로 말이다.
고집을 버린 윤택함
하울은 자기 성을 소피 한 사람을 중심으로 채우려 했다. 그리고 그런 집을 지키기 위해 설리반과의 전쟁에 나선다. 여기서 소피의 마지막 청소의 묘가 나온다. 소피는 청소를 하고 싶지 잘 정돈된 어떤 집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무리 깨끗해도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소피식 청소가 아니다. 그래서 소피는 집을 지키기 위한 하울을 말리려고 성을 부숴버린다. 작품을 그냥 보면 소피가 청소에 환장한 것 같기도 하다. 부수면 또 청소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소피는 하울을 사랑하지만 하울과 대립한다. 소피가 청소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물건들, 상이한 욕망들 사이에 길을 내는 능력이 있어서다. 할머니의 많은 주름은 그 길의 많음을 상징한다. 소피는 관계 속에서 중요도를 결정하고 그에 맞게 물건들을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다. 이런 청소 능력이 경계해야 하는 바는 깨끗한 상태에 대한 집착이다. 삶에 방향을 설정하는 것은 좋지만 그 방향을 절대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비행선을 발로 차서 밖으로 토해내게 한 직후에 소피는 마르클과 강아지에게 ‘모두들 밥 먹어요~’라고 한다. 당장 치워야 할 것이 산더미지만 아이나 노인의 허기가 지금은 더 우선이다. 소피는 위계를 금방금방 바꿔내면서도 끄달리지 않는다. 이때의 식사 장면을 보면 캘쉬퍼 앞에 재가 잔뜩 쌓여 있다. 아니, 우리 소피가 저것을 그냥 눈에 두고 본다고? 그런 재들은 소피가 엄청 바빴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 소피는 결벽증자가 아니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더러움은 감수한다. 이렇게 능동적으로 필요를 조정하는 소피 주위로 서로에 대한 가족들의 위로와 응원이 끊이지 않는다. 소피는 성에서 제일 사랑받는 사람, 모두에게 예쁜 사람이 된다.
하울은 설리반의 제자다. 설리반이 결벽증자였던 것은 앞서 말했다. 하울이 소피의 안전을 고집하자 소피가 아예 성 자체를 파괴해버린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만 보고 살아서도 안 된다. 소피의 청소 덕분에 나중에는 설리번도 ‘필요 없는’ 전쟁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소피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다양한 욕망을 긍정하되 누구와 함께 그 욕망을 끌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누구에는 소피도 있고 마르클도 있고 하울의 마녀도 있고 캘쉬퍼도 있다.
개 힌은 주인 설리반을 배신하고 마르클과 놀기 위해 움직이는 성에 남는다. 황야의 마녀는 캘쉬퍼랑 마르클 노는 것을 보며 차 마시는 오후가 좋아 성에 남는다. 그런데 이 괴상한 가족들은 사실 도시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미취학 아동과 강아지, 담배쟁이 할머니는 공장 도시나 항구 도시에서처럼 뭔가를 생산해서 팔고 돈을 버는 존재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 이전에도 이들은 이만저만한 이유로 사람들 눈 밖에 나 있던 존재들이었다. 우리는 설리반이 온실을 지키기 위해 하울을 청소하려고 했던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필요와 관계를 결정하는 시야를 더욱 넓히자. 이 넓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결말에서 성이 그토록 날렵하게 날았다. 빨래를 펄럭이며!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 스튜디오는 도쿄 미타카에 〈지브리 미술관〉을 만들었다. 2005년 12월에 미술관 아래층 작은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는 단편 영화 《물고기 몽몽》,《별을 샀던 날》,《집 찾기》의 상영에 앞서 미야자키는 스테프들에게 어떤 권고의 말을 했다. 청소를 열심히 하자는 것이다. 〈지브리 미술관〉은 해외에서는 입장권을 구하기 어렵고 일본 내에서도 한 달 전부터 표 예매를 서둘러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이다. 흘러내리는 듯한 외관이라든가 다채로운 외벽 색감이라든가, 구석구석 미로처럼 움직이게 해둔 내부 동선이 관람객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전시물의 압도하는 양에 입이 떡 벌어진다. 2층에 재현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업실은 실제 그가 쓰다 남긴 몽당연필이라든가 담배꽁초라든가까지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고, 영화마다의 준비를 위해 참고한 항공 서적, 군장비 서적, 그리고 다양한 탈것 먹을 것 모델 등이 있어 보는 이의 혼을 빼앗는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머릿속같기도 하다. 미야자키는 매번 새로 스케치 같은 것을 그리고, 미술관 구석구석의 장식을 바꾸고, 어떤 때에는 초콜릿이나 장난감 같은 것을 숨겨 두어서 어린 친구들이 찾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맥시멀리스트는 미술관 스텝에게 왜 청소 이야기를 했을까? 사실 미술관 전시물들은 터질 듯이 많은 애니메이션 관련 물건들로 채워져 있어 대충 보면 아무도 정리를 안하나 싶다. 그런데 이렇게 엉망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도 청소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하나의 물건들이 인접한 물건들과 매번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 수 있도록 미술관 스텝들은 조금씩 조금씩 위치 조정을 하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요구는 전시물에 내려앉은 먼지나 털라는 것이 아니다. 미야자키는 전시물들을 조금씩 움직여 가며 사물들 사이에 새로운 활기를 일으키자고 한다. 그렇게 미야자키는 가도 또 가고 싶은 윤택한 미술관을 꿈꾼다.
청소란 삶이 늘 움직임의 연속이라는 것을 보고 가는 행위이다. 중요한 것은 그 움직임에 방향을 부여하고 사물들 사이에 리듬을 조정하는 일이다. 사람은 그렇게 청소하며 안내하며 나이를 든다고, 할머니 소피가 온몸으로 말한다. 청소하며 나이가 들면 소피처럼 생각지도 못한 곳에까지 가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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