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포뇨》② 사건
물고기의 인간 되기 – 달리고 먹고 웃겨라
인간과 비인간
《벼랑 위의 포뇨》 핵심 사건은 물고기의 인간 되기이다. 인간과 바다 어머니 그란만마레 사이에서 태어난 하이브리드 포뇨는 호기심에 이끌려 바다 표면까지 올라온다. 자기가 보기에 육지에서 제일 높은 곳 벼랑 위에 이끌리고, 벼랑 위 작은 집에서 내려오는 한 소년에게 반한다. 여기서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어공주’ 패러디가 시작된다.
그런데 확실히 다르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인어공주는 왕자를 구하고, 그의 사랑을 얻어야만 하는 운명의 사슬에 묶여, 온갖 질투에 시달리다,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포뇨는 쇼스케에게 도움을 받고, 쇼스케를 먼저 사랑하고,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포뇨는 동료 인어의 질투가 아니라 인간을 혐오하는 아버지 후지모토의 염려에 시달리고, 원작에서는 왕자가 인어공주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쇼스케는 물고기든 인간이든 포뇨를 당장 알아본다. 덕분에 포뇨의 인간되기는 반인간주의(아버지의 반대)와 비인간주의(쇼스케의 응원) 사이에서 길을 내는 이야기가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에 대한 분석을 다각도로 해왔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오는 왕들이 보여주듯 인간은 탐욕적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먹보 부모들은 자기밖에 모르는 무례한 자들이기도 하다. 미야자키가 가장 비판하는 인간상은 어리석은 자 《모노노케 히메》의 에보시다. 산의 나무를 다 베고 나면 자기 살길도 막히는데 일단 눈앞의 이익밖에는 챙길 수 없는 그 편협함에는 관객도 질린다. 모노노케 히메는 자식을 들개의 먹이로 던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종을 용서하지 않았다.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해 청소년까지 나온다.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서 이토록 엉망진창인 인간이지만,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고 힘들여 말한다.
부정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는 작품일수록 그 안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나우시카는 제 욕심에 다치고 지친 사람들을 치유했고, 시타는 한 사람이라도 불길을 피할 수 있도록 자신을 던져 천공의 성이 폭주하는 것을 막았다. 행방불명된 치히로는 친구와 동료와 부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구원받는 자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헌신이었고 이는 청소 대마왕 소피가 보여준다.
미야자키의 이런 인간학 계보 어디에도 끼워 넣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벼랑 위의 포뇨》다. 포뇨는 자기밖에 모른다. ‘헌신’이라는 단어는 포뇨 사전에는 없다. 후지모토가 브륀힐데라고 지어준 이름을 거절하고 쇼스케가 부르는 대로 불리겠다며 억지를 부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는 유바바로부터 자기가 받은 이름을 부정하면 안된다는 경고를 받았는데, 포뇨는 이름이야 내 맘이라며 아주 당당하다. 포뇨는 아빠가 주는 음식도 싸가지없이 거절한다. 물고기인데 인간이 되겠다고 버둥거리며 반항하고, 키워준 부모 노고 따위는 가볍게 씹어먹는 모습은 미야자키가 그린 아이들 누구한테도 없었다.
오직 자기가 원하는 바에만 집중하는 포뇨의 모습은 무섭다. 미야자키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착한 목적론도 주변을 다 태워버리는 광기로 전환된다고 했다. 포뇨도 마찬가지다. 포뇨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생명수가 저장된 지하실을 폭파해버렸고 자연계에 질서를 해쳤으며 그 결과 무시무시한 해일이 일어나 바닷가 마을을 순식간에 물에 잠기게 한다. 《벼랑 위의 포뇨》가 발표된 것은 2008년이다. 2011년에 동일본에서 3.11 대지진이 일어나 쓰나미로 엄청난 피해가 닥친 바가 있다. 해일이라는 자연의 사건이 원자력 발전소 붕괴라는 인간의 사건으로 전환되어 끔찍한 결과를 일파만파로 초래하는 과정을 지켜본 우리로서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포뇨의 욕망 안에 깃든 무책임한 혼돈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포뇨는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탐욕, 아집, 무지라는 비인간 3종 세트를 완벽하게 갖춘 괴물이다.
뛰는 파도
문제는 이 괴물이 너무 사랑스럽다는 데에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 마녀가 인간화되는 순간 그 눈에 구면(球面)의 느낌을 부여해 발랄함을 표현하고, 몸 전체는 갓구운 빵처럼 하얗고 포동하게 만들어 그 살집으로부터 온통 에너지가 샘솟게 한다. 인간이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면죄부를 준다는 말일까? 그럴리가!
이유는 이야기를 잘 따라가보면 알 수 있다. 포뇨가 인간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탐욕, 아집, 무지라고 하는 3종 세트를 돌파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서일까? 아니다. 포뇨가 생각한 ‘인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을 지니고 헌신하는 만인의 벗, 뭐 이런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포뇨는 처음부터 어떤 ‘인간’이 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모든 일은 언덕 위의 그 집에 대한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트북 벼랑 위의 포뇨』에는 쇼스케 집의 조감도가 나온다. 집은 그 현관을 정면으로 했을 때 관객의 눈에 왼편 뒤로 보이는 물탱크를 눈으로 하는 물고기 모양이다. 포뇨가 선택한 집답다. 그리고 포뇨는 언덕 위에서 뛰어 내려오는 한 소년을 본다. 마침 그 소년이 자신을 구해주자 소년과 함께 놀 생각이 든다.
포뇨가 인간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포뇨는 인간을 달리는 존재라고 본다. 포뇨는 후지모토에게 다시 잡혀 바다농장 연구실 안에 갇히게 되었을 때 팔다리를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혼자 용을 써서 없던 손가락 발가락을 몇 개 만들어낸다. 포뇨가 달리기를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는 수어로 변한 동생 물고기들의 등을 이리저리 타면서 뛰고 또 뛸 때 알 수 있다. 포뇨는 어떻게 달리는가? 포뇨의 발은 물 안에 살짝 잠겨 있다. 단단한 땅을 딛고 뛰는 것이 아니어서 물컹거리는 표면을 차고 오르려면 포뇨는 허벅지에 힘을 리드미컬하게 실어야 할 것이다. 이런 포뇨를 응원하듯 수어는 포뇨를 밀어 올리며 힘차게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한다. 포뇨가 탁탁탁이 아니라 ‘착착착’ 물을 차며 재주를 부리는 장면을 보면 나도 뛰고 싶어진다. 포뇨는 수어를 타고 도로 위를, 리사의 차 바로 뒤까지 따라와서 뛴다. 얼마나 행복한지 활짝 입이 커진다. 이때 수어들도 펄떡펄떡 뛰는데 마치 많은 발들이 움직이는 듯하다. 포뇨도 파도도 달리고 싶다!
포뇨의 달리기는 자유로우면서도 위태롭다. 달리기란 나를 지탱해주는 대지와 균형 잡힌 관계를 맺는 일이다. 수어들은 포뇨에게 그 점을 알려준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수어 위를 달리는 포뇨의 역동성을 만들기 위해 정말 엄청난 양의 그림을 쏟아부었다. 인간이 된 포뇨가 달리기의 큰 매력 즉 디뎌야 한다는 것, 움직일 때마다 무게 중심을 잘 실어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완전히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미야자키는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는 파도를 떠올리며 바다가 달린다고 생각했다.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면 해일이란 바다가 거대한 걸음으로 육지를 향해 발을 옮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속에서 천천히 자맥질하던 그 발을 높이 들어 포뇨처럼 육지의 언덕이나 계곡을 욕망해서 해일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해일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고인 물을 휘휘 저으면 물 안에 산소가 확 공급되는 것처럼 어떤 바다생물에게 해일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만 갑자기 파도에 밟히게 되는 자들에게 해일은 문제가 된다.
인간만 걷지 않는다. 바다도 얼마든지 육지를 걷고 싶다. 인간이 이런 바다의 욕망을 이해하면서 걸으면 어떻게 될까? 바다에 이런 인간적 욕망을 투사하는 일을 과도한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류는 의인화를 통해 자연을 인격화했으며 토테미즘을 통해 인간을 자연화했다(레비 스트로스,『오늘날의 토테미즘』참고). 영화의 후반부에 해일 덕분에 물속 나라에 가게 된 요양원 할머니들이 나온다. 자세히 보면 할머니들 입에서 거품이 뽀글뽀글 나오는데 거대한 공기막 안에 안전하게 폐호흡을 하시는 듯하지만 실은 모두 아가미 호흡 중이시다. 여기서 할머니들은 십대 소녀들처럼 달리기 시합을 한다. 포뇨가 파도를 타며 육지 위로 달려나갔듯이 할머니들은 마치 운동장을 함께 뛰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듯 바닷속을 함께 뛴다. 바다가 육지 위를 걷고 싶듯, 인간도 물속을 헤엄치고 싶다.
포크를 든 인어공주
인간이 되기 위한 포뇨의 다음 시험은 먹기에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먹는 일은 중요하다. 미야자키는 캐릭터들에게 절대로 혼자 먹게 하지 않는다. 먹기란 늘 친구와 가족과 함께 관계를 만드는 일이며, 공동의 미션이 주는 어려움을 덜고 피로를 다시 회복하게 하는 필수 코스다. 포뇨의 먹기에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생각하는 먹음의 철학이 아주 잘 나온다.
먼저 쇼스케의 집에 도착한 포뇨는 리사가 만들어주는 차를 마신다. 셋 다 엄청난 해일을 타며 피하며 벼랑 위에 도착한 탓에 잔뜩 긴장한 몸을 좀 풀 필요가 있었다. 리사는 부엌에서 우유와 꿀과 그리고 컵, 스푼을 챙겨온다. 리사가 데운 우유에 꿀 한 스푼을 넣고 천천히 젓고, 그것을 쇼스케가 따라하면서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숟가락에 남은 꿀을 쪽 빨아 먹는다. 이 모든 것을 본 포뇨도 숟가락으로 컵의 꿀을 저어 녹이고 마지막에 빨아 먹으면서 감탄한다. 그다음 햄을 먹기 위해 세 사람은 라면을 저녁으로 하는데, 이때 리사는 인스턴트 라면을 굳이 뚜껑이 있는 사기 그릇에 담아 면과 어묵, 햄이 익을 동안 눈을 감고 ‘기다리게’ 한다.
일본에서는 인스턴트 라면도 그릇에 넣고 먹나보다 하고 넘어가지 말자. 미야자키 하야오가 차 마시고 밥 먹는 이 장면들 전체에서 강조하는 것은 먹는 방법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요리’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웃집 토토로》다. 자매와 아빠가 아침 도시락을 만들거나 저녁을 차릴 때 강조된다. 또 《하울의 움직이는 성》 초반에 하울이 베이컨 6조각, 계란 6개를 프라이팬에 넣고 익히는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야자키는 이 두 작품에서 새집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의 요리하기를 보여준다. 이때 요리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인연을 넣고 섞어 하나로 만드는 제의적 의미가 있었다.
포뇨의 경우 먹는 과정이 클로즈업된다. 특이 중요한 것은 식기이다. 움직이는 성에서의 첫 식사에서 소피는 마르클이 더러운 포크 하나와 더러운 숟가락 두 개를 내밀었을 때, 베이컨을 먹는 데는 불필요할 숟가락을 선택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숟가락에 묻은 더러움을 슬쩍 닦았다. 물론 마르클은 접시째 음식을 들이마셔서 아예 포크가 필요도 없었다. 미야자키는 식탁의 정리정돈이나 식기의 사용에 주의를 두는 소피의 모습에 아주 많은 공을 들인다. 이뿐 아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마히토가 아랫세계에서 과거의 엄마를 만나 식빵에 딸기쨈을 발라 함께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엄마는 세트로 된 티포트와 찻잔을 낸다. 포뇨의 엄마는 색깔을 맞춘 컵 세트와 라면기 세트를 아이들에게 낸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카레를 담을 때 쓰는 그릇과 우동을 담을 때 쓰는 그릇이 다른 것은 단지 숟가락으로 긁어 올리는 내용물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식기란 음식과 나의 ‘관계’, 함께 먹는 이들의 ‘관계’를 물질로 표현해준다. 그러면서 내가 ‘먹는 것’의 성질과 본성을 생각하게 한다. 포뇨의 엄마는 자식인 쇼스케와 손님인 포뇨에게 같은 모양의 그릇을 내주었다.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괴물인데 식탁 위에서 동등하다. 리사는 세트로 그릇을 맞추면서 포뇨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엄마는 아이들과는 달리 머그컵이 아니라 찻잔에 차를 마신다. 리사가 어떤 차를 마셨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요리’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내용물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찻잔이다. 리사는 어른으로서 자신의 휴식은 좀 다른 것임을 보고 있다. 포뇨와 쇼스케는 함께 인스턴트 음식을 마신다. 햄도 가공육이다. 미야자키는 유기농에 제대로 된 일본 가정식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무엇을 먹더라도 관계 속에서 생각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제대로’가 어디 있겠는가? 상황 속에서 방식을 결정해가며 살아야 한다.
인간으로서 먹으려면 자기 식기를 들고 양식에 맞게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어 먹어야 한다. 포뇨는 라면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익기 전에 부스러기 같은 것을 손으로 막 집어 먹기도 했다. 하지만 먹는 장면 끝에 보면 포크도 아니고 젓가락을 들고 있다. 미야자키가 고급 식기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먹는 교양에 대해 무슨 특별한 취향 같은 것도 없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는 도망치는 와중에 파즈와 시타가 손으로 샌드위치나 사과를 먹는 장면도 나오지 않던가? 쫓기는 와중에 숟가락 포크까지 챙겨올 여유는 없을 수도 있다. 나우시카도 전쟁에 바빠 치코 열매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런데 후지모토는 물고기 포뇨를 ‘부룬힐데’라고 부르며 올리브 같은 것을 이쑤시개에 꽂아 먹여 준다. 이쑤시개라니? 후지모토는 포뇨를 애완동물로 생각했던 것일까? 아끼고 사랑한다지만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무능력한 존재로 아이를 바라보는 후지모토의 이쑤시개보다 리사의 컵이 더 훌륭해 보인다.
마을이 전부 물에 잠기고 난 뒤, 사라진 리사를 찾기 위해 포뇨와 쇼스케가 모험을 떠난다. 이때 포뇨는 리사가 싸준 샌드위치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스프가 담긴 보온병과 컵 하나를 매고 나선다. 전에는 자기밖에 모르던 포뇨였다. 내가 인간이 되고 싶다는데 부모가 무슨 소용이냐며 거침없었다. 하지만 길을 나설 때 컵 하나를 챙겨갈 수 있을 정도로 주변을 볼 줄 아는 아이가 된다. 그리고 포뇨는 이 컵에 스프를 담아 타인에게 건네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관계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웃겨야 사는 인간
포뇨의 마지막 미션이 남았다. 안데르센에게 익숙한 관객에게는 쇼스케의 키스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일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온통 바다가 되어 버린 세계에서 포뇨와 쇼스케는 갓난아이를 데리고 소풍을 나온 듯한 부부를 만난다. 자신은 포뇨이며 원래는 물고기였다고, 포뇨는 어느새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기 인사를 먼저 하는 아이가 되어 있다. 그런 포뇨의 눈에 자기보다 어린데 왠지 뚱해 보이는 아이가 들어온다. 포뇨는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자기라면 먹고 싶을 스프를 컵 하나에 가득 따라 준다. 컵 위로 찰랑거리는 따뜻한 스프의 온기에 해일이 덮친 세계의 슬픔 같은 것이 녹는다.
포뇨는 아이에게 주려던 스프를 그 엄마가 먹는 것을 보고 놀라지만, 결국 엄마의 젖을 통해 아이가 먹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 감동한 포뇨는 햄이 빠진(포뇨가 집에서 출발할 때 다 빼먹었다) 샌드위치를 전부 아기 엄마에게 준다. 리사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음식이 어떤 엄마에게 가고, 그 엄마의 몸에서 젖으로 변해 아기에게까지 간다. 포뇨는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선의가 돌고 돈다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인사 나누고 각자 가던 길을 가려던 찰나 포뇨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부부의 배로 되돌아간다. 물 위를 팍팍 뛰어 말이다. 아직도 뚱해 있는 아기가 마음이 쓰여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포뇨는 거의 물고기로까지 퇴화할 정도로 자신의 마력을 다 쏟아, 재미난 얼굴을 만들어 아이 볼에 제 뺨을 부비며 행복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눈물 콧물 쭈욱 나온 아기의 얼굴이 기쁜 흥분으로 반짝이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칭얼대는 아기 때문에 걱정 많던 엄마의 얼굴도 활짝 피게 되었다. 타인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일종의 ‘헌신’이기는 하다. 하지만 무대가리와 소피, 하울처럼 목숨을 거는 일은 아니다. 이때 포뇨는 무엇보다 자기가 웃는다. 포뇨는 삶의 목적도 수단도 웃음임을 알게 되었다. 함께 웃을수록 더 많이 웃게 된다는 것도 말이다.
포뇨의 식기 사용 레슨도 두 번이었다. 머그컵과 라면기. 포뇨의 베품 레슨도 두 번이다. 스프-샌드위치 주기와 볼 부비기. 인간이 된 포뇨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진 미션은 웃기기였다. ‘인간이 될 거야’만 외치던 포뇨는 모르는 아이의 불만을 해결해주러 나서는 따뜻한 존재가 되어 간다. 그래서 엄마가 없어 슬프고 괴로운 쇼스케를 천천히 위로할 수 있게 된다. 포뇨는 장난감으로 되돌아가버린 배의 물을 천천히 빼서 쇼스케에게 돌려주며, ‘눈에서 물이 나오는구나. 리사를 찾아보자’라며 어려운 길을 계속 같이 가자고 한다.
포뇨의 마력이 훅훅 떨어진 일차적 이유는 단지 DNA의 교란에 의한 일시적 인간화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아기를 웃기느라 자기 능력을 다 써버린 까닭이다. 포뇨가 물고기로 되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점차로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뇨는 인간으로서든 물고기로서든 리사를 찾으려는 쇼스케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런 포뇨는 물고기로 되돌아가도 인간이다. 달리고 싶고, 관계를 알고, 함께 행복하려고 하니까 말이다. 이 세 가지가 포뇨가 생각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미야자키는 기계도 나무의 자식이라고 했다. 멧돼지도 증오에 허덕인다고 했다. 이성을 사용한다는 둥, 언어가 발달했다는 둥, 역사와 국가를 가졌다는 둥, 이런 것들은 인간을 설명하는 부차적 요소일 뿐이다. 달리려고 하고 관계를 익히며 같이 웃는 존재라면 그는 누구라도 인간이다.
엔딩 장면은 앞으로 포뇨가 살아가게 될 세계를 보여준다. 원래 공간을 중요 배경이 되는 장소들만을 연달아 붙여 줄여 놓았는데 먼저 해일로부터 복구된 바닷가 마을이 나온다. 해가 바다 너머로 넘어가려는 늦은 오후, 둥근 바다 위로 조업하는 배들이 바쁘다. 해안가에 높이 올라간 크레인은 뭔가를 옮기거나 짓는 일을 한다. 멀리까지 떠 있는 다양한 종류의 배들만큼이나 바닷가 나무들 사이로 삐죽삐죽 보이는 집들의 모양이 알록달록 다양하다. 그러다 유치원과 해바라기집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포뇨가 쇼스케와 리사와 함께 살게 될 벼랑 위의 집이 나온다. 원래 이 집 인근의 토지에는 빈집이 많고 ‘매매’ 광고가 붙어 있었다. 그만큼 인기 없고 쓸모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엔딩에서 보면 집 뒤로 빨래가 많이 걸려 있다. 포뇨와 쇼스케가 엄청 옷을 더럽히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눈에 띄는 것은 해바라기집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점이다. 그러고보니 집 뒤쪽으로까지 할머니와 이웃 아이들이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함께 웃는다.
벼랑 위를 지나면 이제 오른쪽으로 다시금 높아진 파도 위에서 후지모토가 이들을 보고 있다. 밤이 되었는데 후지모토의 배 위에서 등대처럼 집 쪽으로 안심하라는 의미의 불빛이 나온다. 다시 오른쪽으로 해가 떠오르며, 그 다음으로는 작품 맨 처음에 등장했던 해파리들이 밤하늘 별처럼 심연을 반짝이며 가득 채운다. 끝으로 바다농장에서 포뇨의 동생들이 헤엄쳐 나온다. 아마 이들도 포뇨처럼 ‘무엇무엇이 될꺼야!’를 외치며 세상을 모험하고 이치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란만마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 지금까지 포뇨가 쓸 수 있었던 마법을 버려야 한다. 둘째, 쇼스케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포뇨는 첫 번째에 대해서 아무런 미련 없이 마법과 ‘바이바이’ 한다. 인간이 된 포뇨는 식기의 사용에서부터 마음을 나누는 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누군가와 함께 배우면서 행복을 찾아나가야 한다. 포뇨는 이런 삶이 물속에서 주어진 방식으로 헤엄치는 것보다 좋다고 확신한다.
쇼스케의 사랑 부분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론 쇼스케는 계속 포뇨를 사랑할 것이다. 미야자키가 이 조건을 통해 말하려는 바는 분명하다. 인간으로서의 네 존재의 의미는 다른 사람이 찾아주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포뇨는 이제 자기와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두 손을 꼭 잡고 최후의 미션을 향해 긴 터널을 걸어 들어가던 포뇨와 쇼스케의 모습이 떠오른다. 천천히 함께 걷는 이들은 멋지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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