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①배경
꿈과 광기의 왕국
새처럼 날고 싶어
2008년 《벼랑 위의 포뇨》 이후, 2013년에 미야자키의 신작《바람이 분다》가 발표된다. 2023년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발표될 때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십 년이라는 오랜 공백이 생긴다. 후기의 이 두 작품은 미야자키 월드 전체에서 아주 다른 결을 가진 작품이다. 첫째, 두 작품은 모두 소년이 주인공이다. 미야자키는 소피와 포뇨를 통해 여성의 근원적 힘을 낳고 죽이는 거침없는 생명력으로 확실히 정의했고, 쇼스케를 통해 정직한 눈으로 모든 변화를 감당하며 나아가는 씩씩한 사나이의 원형을 만들었다. 다음 작품인 《바람이 분다》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쇼스케에 비하면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안하고 동요하면서도 꾸역꾸역 해야 할 일을 찾아가는 서툴고 딱한 남자 주인공을 그린다.
둘째, 이 두 작품은 모두 환상의 세계를 주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 부해가 펼쳐지고 성이 날아다니는 먼 미래도 아니고, 마법사들의 왕국인 황야도 아니다. 토토로가 호흡하는 활기의 숲도 없다. 대신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일본 도쿄의 도심이라든가, 1923년 관동대지진과 같은 실제 사건이 핵심 배경으로 들어와 있다. 미야자키는 처음으로 구체적인 역사의 한 지점에 서서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제작 기법과 서사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할머니나 소녀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모두 1940년대 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 때문에, 이 두 작품은 미야자키의 자전적 요소가 가득한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지로가 쉴 줄 모르는 성실한 설계자인 점이라든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마히토가 자기 안의 염세주의와 싸우는 모습에서 미야자키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특히 두 작품 모두에서 지로 아내 나츠코가 결핵에 걸려 있고, 마히토의 엄마 히미가 일찍 죽는다는 점도 미야자키의 어머니의 오랜 투병 생활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런 개인사에 작품을 오버랩시켜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미야자키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지브리 스텝 몇 백명을 데리고 몇 년의 고난의 행군을 감행했을 리도 없다. 그는 자신의 꿈과 고민이 모두의 것이 되는 과정을 중시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과 아주 닮은 두 사람을 통해 어떤 문제를 관객들에게 던지고 싶었을 뿐이다. 그게 무엇일까?
《바람이 분다》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닮기도 했지만 차이점도 많다. 가장 큰 차이는 《바람이 분다》가 공간을 병렬적으로 아주 다양하게 펼쳐 놓는다는 점이다. 계열화에서만 보더라도 각각 ‘꿈’(소년의 꿈, 카프로니의 꿈, 두 사람 모두의 꿈), ‘현실’(지로 고향 마을, 도쿄, 나고야, 독일 데사우, 다시 마의 산, 고산 병원, 전쟁터) 모두에서 엄청나게 다양하다. 이토록 많은 공간이 나오는 만큼 이야기가 펼쳐지는 전체 시간만도 지로가 13살 때부터 시작해서 42살에 끝나니까 30년 정도로 길다. 《바람이 분다》는 한 인간의 일생을 다룬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하루의 일이다.
이 정도 규모의 스케일은 10년 동안 간헐적으로 연재된 만화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정도인데, 만화에서 나우시카의 모험도 30년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역시 시간적 스케일로는 《바람이 분다》가 가장 광범위하다. 그런데 30년의 시간 동안 또 뭐 특별한 일이 있었냐고 보면, 부모가 돼지로 변한 적도 없고 저주에 걸려 지로가 할아버지가 되지도 않으니까 그저 평범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지로가 카미카제 특공대가 타고 날아간 일본 자위대 비행기 제로센의 개발자가 되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실제 패전의 원인을 분석하는 장면 같은 것도 없다. 기술자이자 평화사상가인 지로의 내적 갈등이 분출되는 구체적 지점도 없다.
결말에서 제로센의 비극도 시체가 나뒹굴고 피가 튀기는 식으로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비참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미야자키는 현실과 꿈을 포함해서 많은 시공간을 독자들로 하여금 감정이입할 수 없도록 원경에서 잡는다. 여기에 지로의 성격도 한몫을 한다. 지로는 쇼스케처럼 자기 기분에 확실한 사람은 아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열심히 연구하는 지로의 책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우시카의 변한 얼굴, 쇼스케에 기쁜 얼굴 등 얼굴이 아니라 책상만 남는다. 유튜브에 보면 ‘스터디 위드 미’라고 집중력 높이는 영상등을 사람들이 편집해서 올리곤 하는데, 지로가 혼자 밤낮으로 연구하는 장면이라든가 미쓰비시 비행기 회사 연구실에서 연구원들이 들썩들썩 함께 뭔가를 토론하며 계산하는 장면 등이 지브리 대표 스터디 위드 미인 듯 많이 올라와 있다.
매일매일 연구만 한 사람의 일생을 영화로 따라가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정직하고 성실한 한 사람의 인생이 왜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제목처럼 바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니, 그런 인생은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괴롭기만 할 것이다. 지금부터 왜 이렇게 많은 공간 설정, 시간 설정이 필요했는지, 지로 표정의 변화없음과 많은 공간의 의미를 따라가보자.
《바람이 분다》의 공간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크게 두 개로 계열화할 수 있다. 꿈 계열과 현실 계열이다. 크게 보면 꿈 차원이 현실 차원을 감싸는 구조인데, 13살의 지로가 비행기를 모는 꿈에서 시작해서 42살의 지로가 자기 꿈이 악몽이었음을 받아들이면서도 다시 꿈꾸기를 다짐하는 것으로 끝난다. 지로는 비행기 설계사로 대학교에 가고 취직하고 독일 등지에 가서 뭔가를 배워오기도 하는 도중에 잠깐씩 꿈을 꾼다. 그 꿈의 내용은 모두 같다.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다.
지로의 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첫 장면에서부터 잘 나온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는 폴 발레리의 시가 먼저 나오고 곧바로 어슴푸레한 새벽이다. 외출복에 교모까지 쓰고 손에는 흰 장갑을 낀 소년이 지붕을 조심스레 올라 처마에 매달린 새 닮은 비행기를 탄다. 멀리 높은 산이 보인다. 소년이 비행기를 몰기 시작한 순간 아침 해가 뜨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에 맞추어 들판이 햇빛으로 아름답게 물든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일단 지로가 자신의 집 지붕에서 날아오르려고 한다는 점이다. 지로의 비행기는 절대로 높이 날지 않는다. 작은 하천의 다리 밑을, 일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고 낮게 날 수 있을 정도로 저공비행이다. 비행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낮게 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쳐다본다. 이 비행의 목표는 분명한데, 동네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꿈이 평화롭지만은 않다. 첫 번째 꿈에서부터 지로의 비행을 방해하는 것이 나온다. 갑자기 나타난 공군의 비행기들이다. 위에서는 어린아이가 모는 비행기라도 개의치 않고 대포를 떨어뜨린다. 안경을 쓰고 제대로 좀 보려 하지만 부서진 비행기에서 지로는 추락한다. 그 왼편으로 기차가 지나간다. 학교에서 <Aviation>이라는 비행잡지를 빌려 온 날, 지로는 또 꿈을 꾸는데 이번에는 이탈리아 설계사 카프로니 백작의 꿈이다. 여기서 카프로니 백작이 설계한 비행기는 무기를 싣고서 적지를 날아갔다 돌아오지 못한다.
카프로니 백작은 비행기가 무기가 될 운명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꿈을 접지 않는다. 전쟁은 곧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로니는 자신이 바라는 바는 손님 몇 백 명을 태우고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이런 카프로니 백작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하다. 카프로니 백작의 말처럼 비행기는 전쟁의 도구도 장사의 수단도 아니다. 카프로니의 이 말은 붉은 돼지가 했던 ‘나의 비행은 전쟁을 위한 것도 경쟁을 위한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카프로니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지로의 꿈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작품 내내 중간에 삽입되곤 하는 꿈의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푸르다. 카프로니를 만난 첫 번째 꿈에서 지로는 나무로 만든 6엽 비행기 위를 걸어보기도 하는데 강하지만 부드러운 바람에 온몸을 맡긴 지로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다(지로의 꿈에 등장하는 비행기는 모두 1919년 실제 카프로니 박사가 개발한 비행기들이라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항공기 사랑이 듬뿍 담긴 장면들이다). 카프로니와 헤어지기 직전에는 맑은 달까지 떠올라 온누리에 그 꿈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이후로도 계속 카프로니의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이탈리아의 바다는 웃음꽃이 만발하게 나온다. 지로가 데사우에서 꾼 꿈에 나온 카프로니의 은퇴식 비행에서는 비행기 구멍마다 사람들이 꽃다발처럼 파팍 튀어나왔다. 비행은 함께 웃으려고 하는 일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꿈의 아름다움을 배경이 되는 하늘 구름의 풍요로움과 햇빛을 받을 때마다 달라지는 다양한 색감으로 계속 강조한다. 마치 어떤 현실의 고난과 슬픔도 높고 푸른 하늘이 다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대지진과 과학기술의 공진화
꿈이 소년을 계속 하늘로 초대함에도 불구하고 지로의 설계는 자꾸 실패한다. 꿈과 달리 작품 속 현실 공간은 아름답지가 않다. 미야자키는 현실의 양면성과 복잡함을 보여준다. 첫 번째 지로의 고향 마을을 보자. 13살 지로의 현실 세계에서 핵심축은 학교다. 학교는 좋은 곳이다. <Aviation>이라는 영어로 된 항공잡지를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학교에서 상급생과 하급생으로 학생들을 가르고, 가끔은 고학년이 학년이 높다는 이유로 저학년을 괴롭힌다. 이 장면을 잘 보면 괴롭히는 고학년들의 옷차림과 저학년 아이의 옷차림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 씬이 반복되는데 거기서는 부잣집 아이여서 전쟁 근로를 하지 않는 마히토를, 형편이 어려운 동급생들이 괴롭힌다. 이런 부분을 유추해서 보면 지로네 학교의 일진들이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학교는 빈부를 보다 확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 다음 주요한 배경으로 도쿄가 나온다. 20살이 된 지로가 기차를 타고 도시로 들어가는데 이때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나오코와의 만남이다. 바람에 날려갈 뻔한 지로의 모자를 나오코가 집어 주는 것이 계기가 되어 인사를 나누는데, 이때 두 사람은 폴 발레리의 시를 불어로 읊으며 공감을 나눈다. 앞서 학교가 영어를 접할 수 있게 해서 지방 소도시 소년에게 이탈리아 비행기 설계사와 만나는 꿈을 꾸게 한 것을 언급했다. 지식은 지역적 차이 같은 것을 넘게 한다. 나오코는 2등칸을 타고 있고 지로는 3등칸을 타고 있다. 미야자키는 나오코가 다시 기차의 자기 자리로 돌아갈 때 확실히 ‘2등칸’을 보여준다. 두 사람 사이의 계층적 차이가 불어로 매개된 근대 지식을 통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나중에 나오코가 고산 병원에서 지로와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을 보면, 3등칸을 타고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근대지식, 문명은 계층을 넘나들게 한다.
한편, 지식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계층의 벽을 넘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지진이다. 관동대지진으로 땅이 울려 기차가 탈선하고 그 과정에서 나오코의 유모가 발목이 부러져 지로가 업고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게 된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통해 상관없던 사람들끼리 도울 수 있다. 물론 미야자키는 실제 관동대지진 당시에 도쿄의 일반인들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와 같은 혐오 루머를 퍼뜨려서 자경단을 조직해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음을 모르지 않는다. 지로의 선의가 특별한 것이었음은 유모를 구해준 지로를 보고 나오코네 집 사람들이 당연하다 생각하지 않고 좋은 청년이라며 칭찬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지로는 왜 비행기의 꿈을 계속 버리지 않는가? 이 지진 장면을 묘사하기에 앞서 기차가 일본 관동지방을 달리는 모습을 와이드 앵글로 보여준다. 이 다음 장면에서는 황궁이 있는 도쿄 전체가 지진의 일격을 받아 차례차례 무너져서 타오르며 폐허가 되는 모습을 그린다. 그런데 빽빽이 늘어선 가옥들 끝 지평선에서 화재가 일어나 불이 맹렬히 타오르며 하늘로 높이 잿빛 구름이 검고 탁하게 피어오르고 그 끝에 푸른 하늘이 살짝 보이는 장면이 한번 더 나온다. 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 존재란 얼마나 미약한가! 비행기는 공업기술, 근대기술의 총집합이다. 지진 장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지로는 땅의 위태로움을 넘어설 길이 기술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진 때문에 기차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며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로는 ‘기차가 폭발할 일은 없다’며 대단히 차분하게 대응하고, 유모의 부러진 발목에 자신의 자를 대어주기까지 했다. 지로는 기술 지식이 자연재해를 직시할 힘, 그리고 사람을 돕고 치유할 능력을 준다고 생각한다. 지로는 이 기술의 힘을 끝까지 믿는데, 이 대지진 때의 경험이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을 끝까지 보면 이런 자연재해에 맞서기 위한 과학기술이 그런 자연재해와 똑같은 인재를 낳는다고 나온다. 제로센에 의해 전쟁통에 폭격을 당한 도시 묘사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장면 자체로만 놓고 보면 원인이 지진인지 전쟁인지 알 길이 없을 정도로 똑같은 구도, 번져 오르는 핏빛 구름과 불에 타 고통받는 대지, 그리고 쓰러진 기술의 잔해들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가 하나를 맞물고 있으며 끝은 모두 다 불에 타 버린다.
마지막 꿈에서 지로의 다짐을 보면, 역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바는 다시 기술 개발을 해보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도쿄에서 지로가 불탄 도서관의 책들을 구하는 장면, 그리고 그 와중에 카프로니 백작이 새 비행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광고 엽서를 발견하는 장면을 열심히 끼워 넣는다. 이후 도쿄가 금방 회복되는 모습이 잠깐 나오고 24세의 지로는 나고야역에 미쓰비시 항공 회사 연구원으로 취직이 되어 기차로 도착한다. 아마 지로와 같은 개발자들이 열심히 노력을 했을 테니 세상은 더 좋아졌어야 할 텐데, 상황은 더 나빠져 있다. 지로가 기차로 나고야에 들어갈 때, 기찻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 있다. 모두 지방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걸어서 나고야로 들어가는 중인 것이다. 또 도착한 나고야시 거리에는 사람들이 은행 앞에서 엉망진창으로 몰려 있다. 돈이 없어 살길이 막힌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방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대공황인 것이다. 인심은 또 얼마나 나빠져 있는지, 회사에서 퇴근한 지로가 늦은 시각까지 부모를 기다리던 동네 꼬마들에게 카스테라를 주었는데 아이들은 쏘아보면서 도망친다. 아이들은 배를 곯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나가는 어른을 믿을 수는 없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인정이라고는 다 썩어 문드러진 세태를 그린 장면이다. 심층적으로 설명해보면 지로가 매진하는 기술의 꿈이 아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으리라는 점을 예고한다.
그런 와중에도 지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비행기를 만들지에 대한 그림을 그려간다. 바로 하얗고 매끈하고 작은 비행기, 외관의 날렵함은 그 가벼움만큼이나 멀리 높이 인간을 데리고 가 줄 것만 같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지로의 실험은 더더욱 실패하고 결국 지로는 독일 데사우로 견학을 가기로 한다. 데사우는 나고야보다 더 살벌한 도시다. 데사우에는 독일 항공 회사의 큰 공장이 있고, 거기에는 철의 기능과 아름다움이 하나로 멋지게 융합된 폭격기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독일 사람들은 견학온 지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일본인들은 꺼져!’라는 말을 반복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꺼져! 꺼져!’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결국 실제로 누군가를 꺼지게 하느라 독일 군인이 사람들을 해치는 장면까지 나온다. 독일 항공기 회사 직원이 지로에게 꺼지라고 한 것은 기술유출에 대한 위험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기술은 고도화될수록 사유화되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가 된다.
물론 이것은 기술을 ‘관리하는’ 이들의 관점이지 기술자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대지진에서 나오코와 지로의 만남이 보여주듯 과학기술은 성과 계층의 경계를 넘게 한다. 그러니 민족이나 국경의 경계도 얼마든지 넘을 수 있다. 이를 경계하기에 나라에서는 기술자들을 감시하고 전체주의적 뜻에 맞지 않으면 추격해 괴롭히기까지 한다. 데사우의 공장 견학을 일본인에게 허락해주었던 융커스 박사도 쫓기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기술 개발하는 지로도 감시 대상이 된다. 대지진이 기술을 부르고 기술이 다시 대재앙을 부른다. 자유를 주었던 지식은 나를 구속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것이 지로의 고민이다.
순진무구의 마의 산
30세, 겨우 작은 비행기의 설계에 성공한 지로는 휴가 여행을 떠난다. 이때도 기차를 타고 달려 높은 고원의 한 호텔에 도착한다. 미야자키는 근대화의 상징인 기차를 부정하지 않는다. 근대화의 근대화를 상징하는 비행기를 거절하지 않는 것처럼.
호텔은 걱정 없이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부유한 사람들이 휴가를 보내는 장소다. 여기에서 지로는 초반에는 여전히 자신의 비행기가 추락하는 꿈에 시달리지만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어, 호텔을 나올 때에는 건강한 모습이 된다. 독일인 친구 카스트로프가 이야기하듯 이 마의 산에는 지로를 방해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다. 지로는 오히려 비행의 꿈을 더 구체적으로 꿀 수 있었다.
마의 산에서 지로는 우선 바람이 분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강한 바람에 날린 우산을 주워 건네는 과정에서 지진 때 기차에서 만난 나오코와 재회한다. 나오코는 화가로 바람 부는 언덕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둘 사이를 매개하는 흰 우산은 사랑에 대한 기대로 부푼 두 사람의 마음처럼 둥실 하늘을 날고, 둘의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세찬 비를 온몸으로 막기도 한다. 하얀 옷과 하얀 와이셔츠, 하얀 모자를 쓴 지로에게 하얀 우산은 꿈속에서 그려 보던 하얀 비행기 그 자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로는 꿈에서 비행기로 사람들을 웃게 했다. 지로는 아픈 나오코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비행쇼를 한다. 두 사람은 날아오르는 종이비행기를 잡기 위해 손을 이리 들고 저리 들고 하면서 같이 웃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종이비행기도, 그 비행기를 잡으려는 청춘 남녀도,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도록 그린다. 호텔 3층 발코니에서 아픈 몸이지만 작은 비행기의 활강을 지켜보는 나오코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퍼진다. 확실히 지로는 고공비행을, 많은 무기를 싣고 하는 비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비행기의 저공 활강이 주는 즐거움이야말로 최고다! 지로는 하얀 우산, 하얀 종이비행기에서 자기 꿈을 다시 확인한다. 지로는 이렇게 나오코와 재회해 사랑을 나누게 되고, 화분을 먹는 것처럼 물냉이를 좋아하는 독일인 카스트로프와도 친구가 되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면서 추락하는 비행기에 대한 공포를 이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역시 마의 산은 그 이름에 걸맞게 악마적인 구석이 있었다. 카스트로프에 따르면 ‘마의 산’에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지로는 분명 마의 산에서 비행의 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 안에는 기술 실패의 위험과 성공의 광기가 들어 있었다. 마의 산에서 그저 아름답고 기쁜 것에만 도취되고 말았다면 지로는 꿈의 이면을 도외시하면서 광폭하게 기술 개발에 몰두하는 엔지니어가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지로를 나오코가 구한다. 사정은 이렇다. 나오코는 건강한 모습으로 지로와 결혼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결핵을 치료하려고 한다. 나중에는 고산병원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공기 치료를 한다. 미야자키는 깨끗한 얼음 나라에 고치를 틀고 누워 있는 것처럼 요양하는 고산병원의 결핵 환자들을 보여준다. 결핵은 이런 순백의 장소에서만 치유될 수 있는, 더럽혀진 피의 병이다. 만약 나오코가 완치를 고집하면서 산 위 병원에 계속 머물러 있는다면, 나오코의 상태를 그저 오는 좋은 안부 인사로밖에 추측할 수 없을 지로는 그 심각성도 모르고 계속 비행에만 매진할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나오코는 단호히 결심을 하고 산을 내려와, 상사의 집 별채에서 변변한 살림도 없이 함께 지내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의 신혼집은 그동안의 지로의 공부방, 직원 기숙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지로는 아파 누워 있는 나오코 옆 책상 위에서 계속 연구를 거듭한다. 아름다운 비행기를 손 쓸 길 없이 죽어가는 아내 옆에서 만든다. 그래서 지로는 전쟁의 수단도 산업의 도구도 아닌, 아름다운 비행의 꿈을 끝까지 놓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품고 있는 재앙도 도외시하지 않고 말이다. 지로는 망상가가 되어 자기 비행기 만들기만 고집하지도 않고, 재앙을 핑계로 자기꿈 속으로 자조적으로 도피하지 않는다. 지로는 기술 개발에 매진할수록 아내의 죽음을 재촉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고 간다. 하얀 비행의 꿈 안에 무시무시한 병균이 들어 있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악마가 될 것이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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