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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하야오-일상의애니미즘] 포뇨와 쇼스케 – 변화무쌍한 어머니와 그의 자식들

by 북드라망 2024. 3. 21.

《벼랑 위의 포뇨》 ③ 캐릭터

 

포뇨와 쇼스케 – 변화무쌍한 어머니와 그의 자식들   

 

소년 시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여성 주인공이 강세이다. 전체 11편의 작품에서 남성이 주인공이다 싶은 장면은 끝의 두 편뿐이다. 《바람이 분다》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두 편을 예외로 하면, 남성일 경우에는 소년이며 그들은 모두 소녀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역할을 찾는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이웃나라 왕자는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역할이 미미하다. 그는 나우시카가 왜 부해를 연구하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이 혈기만 있는 소년이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파즈는 유능한 기술자로 멸망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담대했지만 결국 그를 라퓨타로 이끈 것은 시타였다. 《이웃집 토토로》, 《마녀 배달부 키키》의 이웃집 소년들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붉은 돼지》의 경우도 줄담배에 와인을 즐기는 성인 남자 돼지가 주인공이기는 하지만 17살의 피오 덕분에 저주에 풀려난다. 이렇게 미약한 소년들을 끌어당기는 소녀들의 성격에 공통점을 꼽으라면 보살피는 존재,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들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반면 소년들이 좀 능력이 될 때가 있는데 우선 《모노노케 히메》의 아시타카를 들 수 있다. 아시타카는 숲을 해치려는 인간도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동물들도 모두 이해한다. 어떻게든 함께 살아갈 길을 찾아보자고 외친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엄마 모로를 잃고 사슴신마저 죽음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절망하는 모노노케 히메에게도, 철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자신들을 보호해줄 방법이 없는 타타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공허한 주장으로 들린다. 결국 아시타카는 모노노케 히메가 찌른 원망의 칼도 맞고 마을 사람들의 몰염치한 총도 맞으면서 모든 것을 자기 몸으로 때워야 했다. 성취 면에서 보면 숲과 마을이 모두 타버린다는 의미에서 아시타카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물론 나중에 타타라 마을을 이끌 수도 있겠지만 그 뒷일을 상상하는 것은 관객의 몫일 뿐이다.  


능력자 중의 최고는 움직이는 성의 마법사다. 물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하쿠도 용으로 변신해서 하늘을 날고 온천장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자이지만, 그는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는 바보다. 하울은 일단 자신이 누구로부터 도망가고 있는지, 자기 과거의 이력과 미래의 전망은 어떨지 조금 생각은 하니까 하쿠보다는 낫다. 하울은 돌진하는 대포도 잡아채 딴 데로 내동댕이칠 수 있을 정도로 괴력을 가진 마법사다. 혼자 설리반의 군대와도 맞서 싸운다. 자신을 위협하는 적들을 은밀히 속여가며 평생 도망다닐 수 있을 정도로 변신술에도 능하다. 그런데 한편 하울은 미야자키의 남자 주인공들 중 제일 소심하고 유약한 존재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도망가는 데 썼기 때문이다. 매일 목욕인데 집은 더러운 유치한 사나이다. 그래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능력자 하울이 청소부 소피를 만나 팔자 고치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강력한 마법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할 수 없다면 쓸데없는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 

 

 

 

지키려는 자, 변하려는 자
이런 계열화에 비추어보면 쇼스케는 참으로 훌륭하다. 미야자키도 쇼스케를 ‘수재’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능력 만땅인 쇼스케의 인생도 쉽지는 않다. 이것을 작품 속 두 명의 남자들을 통해 계산해볼 수 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나 《천공의 성 라퓨타》, 《붉은 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등에서 남자 주인공이 전적으로 여자 주인공의 욕망과 동선에 맞춰 성장하는 경우 이들 주변에 다른 남성 캐릭터들은 아주 소극적으로 배치된다. 아예 남자 어른은 등장하지 않는 작품조차 있을 정도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검술의 신 유파 정도가 배우고 따를 만한 어른이지만 서사 안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그리 크지 않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이라든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경우 악마라도 좋으니까 무서워할 만한 남자가 나올 법한데 작품 전체가 힘 좋은 할머니들 무대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벼랑 위의 포뇨》는 쇼스케를 분열시킬 수도 있을 두 명의 남자 캐릭터가 있어 흥미롭다. 첫째는 포뇨의 아빠 후지모토다. 둘째는 쇼스케의 아빠 고이치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후지모토는 아내 그란만마레가 어딘가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반면 고이치는 아내를 갑자기 떠나 어딘가로 간다. 후지모토는 약속이나 계율에 매달리기 때문에 정해진 바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 인면어로 태어났다면 인면어로 살아야 한다며 포뇨가 인간이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고이치는 약속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벼랑 위에서 마누라와 자식이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는 것쯤이야 가볍게 무시하고 딴 일을 선택한다. 그래서 후지모토는 결벽증에 시달린다. 더러운 것, 어지러운 것, 뭔가 헷갈리는 것을 못참고 올바른 일에만 집중한다. 고이치의 배가 어느 정도로 더러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해일의 위험 속에서 배가 전복될 위험에 처했을 때 고이치는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일 자체에 크게 끄달리지 않는 모습이다. 

 

쇼스케는 ‘지키는 자 후지모토’와 ‘어기는 자 고이치’ 사이에 놓여 있다. 굳이 말하자면 쇼스케는 후지모토 쪽이다. 포뇨를 지켜주기로 한 약속에 충실하기 위해 힘쓰기 때문이다. 쇼스케는 후지모토에 의해 포뇨가 다시 바다로 끌려가게 되었을 때 포뇨가 어딘가에서 울고 있지는 않을까봐 크게 걱정한다. 이런 쇼스케의 뒷통수를 치는 것은 사실 포뇨다. 포뇨는 울기는커녕, 바다농장에서 후지모토와 세게 한판 붙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팔다리를 만들며 알아서 인간이 될 궁리에 바쁘고, 아빠가 불러도 흥칫뿡! 대답조차 않는다. 그래서 사실 걱정이 된다. 쇼스케는 얼마든지 인간이 된 포뇨를 지켜주려 할 텐데도, 나중에 포뇨 쪽에서 다리 대신 날개가 갖고 싶다고 외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기라도 하면 포뇨는 쇼스케가 불러도 대답도 않고 단식 투쟁하다가 아예 가출해버릴지도 모른다. 지켜주고 싶지만 지킬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쇼스케는 어떻게 될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 운명에 대해 거의 걱정해본 적이 없지만, 나중에 쇼스케가 포뇨로부터 상처받지나 않을지 자다가도 우려가 되어 벌떡 일어나게 된다.     

 

미야자키는 관객의 이런 우려를 가볍게 불식시킨다. 미야자키가 쇼스케를 표현할 때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소년의 둥글게 반짝이는 눈과 기쁘고 슬플 때 정직하게 커지고 작아지는 입이다. 쇼스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루 보면서 서두르지 않고 문제를 푼다. 고이치가 갑자기 귀가를 미루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자. 쇼스케는 아빠가 오늘밤 오지 않는다고 짜증내기보다는 안전하게 항해하기를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자기 일임을 알고 있다. 모스 부호로 바다의 배와 인사를 주고받을 때, 쇼스케는 화가 난 엄마가 하지 않은 말 ‘건강히 잘 돌아와요’까지를 아빠에게 전한다. 넷플릭스로 이 장면을 보면 이 문장에 많은 한자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쇼스케는 어른들이 쓰는 단어로 인사를 대신 전했다.   

 

 

 

아빠의 미뤄진 귀가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알 수 있듯 쇼스케는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을 하고 수어를 타고 달려오는 여자아이가 포뇨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쇼스케는 그란만마레 앞에서 포뇨가 물고기이든 인간이든 모두 좋다고 대답한다. 쇼스케는 인간이 된 포뇨가 심해로 이어지는 터널을 통과할 때 물고기가 되자 곧바로 바다로 데리고 가 물속에서 살게 한다. 포뇨가 더는 인간이 아니라며 실망하고 어쩌고를 하지 않는다. 

 

쇼스케는 약속을 지키는 자다. 하지만 자기 앞에 닥치는 어떤 변화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토키 할머니는, 해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물속이 더 안전하다며 같이 가자고 후지모토가 손을 내밀어도 이상한 사람 말이라며 듣지 않았다. 뉴스앵커가 보도를 제대로 못한다든지, 정전이 된 해바라기집의 미숙한 처신이라든지, 조금만 이상한 것이 포착되도 온통 호들갑에 불평밖에 몰랐던 토키 할머니와 비교해보자. 쇼스케는 리사가 사라졌을 때에도 크게 울지 않는다. 노란 셔츠를 꼭 잡고 부들부들 떨지만 땅을 치며 억울해하지도 않고, 공포에 압도되어 걸음을 떼지 못하는 일도 없다. 오기로 약속한 엄마의 약속을 믿지만 결과를 견딜 준비를 한다.

 

다산(多産)의 미야자키  
후지모토가 포뇨를 다시 데리고 바닷속으로 내려갔을 때 쇼스케는 지켜주려고 해도 자기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쇼스케는 포뇨가 자신을 더는 사랑해주지 않는 날이 와도 그 변화에 놀라지 않고 덤덤하게 겪을 것이다. 엄마 리사가 또 고이치가 오지 못했던 그날 밤, 조금 화를 내기는 했지만 금방 정신 차리고 용기를 내었던 것처럼 말이다. 


따져보면 쇼스케야말로 그란만마레의 아들 같다. 후지모토는 사랑받지 못하면 물거품이 될 딸을 걱정했다. 이때 그란만마레는, 우린 어자피 모두 물거품에서 온 존재들이라며 쿨하게 포뇨 하고 싶은대로 하게 응원하자고 한다. 포뇨는 엄마를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직접 마주했을 때는 조금 두려워하기도 하는 등 무서워했다. 그란만마레가 풍기는 무서움은 어떤 것일까? 후지모토는 아내이지만 그란만마레의 행동에 어떤 의견도 개진할 수 없었다. 그란만마레는 아마 많은 남편을 두고 바다 여기저기에서 많은 자식을 끊임없이 낳고 있을 것이다. 죽은 배도 살리는, 나무관세음의 화신일 정도로 그녀는 살리는 존재다. 하지만 자기 품 안에서 자식을 키우지는 않는다. 죽든 살든 내버려둔다. 이 모성은 낳지만 기르지는 않는다. 변화무쌍한 생명을 긍정하기에 한낱 물거품에서 시작된 모든 것에 어떤 애착도 갖지 않는다. 쇼스케는 받아들일 것이다. 포뇨의 변화, 그리고 어쩌면 자기 마음에도 깃들지 모를 변심을 말이다. 생긴 사랑에 감사하지만 그것이 물거품으로 사라져도 괜찮다.  


포뇨는 리사와 많이 닮았다. 리사는 포뇨가 벼랑 위에 오고 난 뒤부터는 쇼스케보다 포뇨를 더 자주 부르기도 한다. 아들보다 포뇨를 먼저 닦아주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다. 리사와 포뇨 모두 햄을 좋아하고, 리사의 운전이 아슬아슬하듯 과감한 것도 포뇨가 수어를 타고 벼랑 위로 돌진하는 모습과 닮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닷길과 파도길을 달린다. 리사는 해일의 위험에 맞서 쇼스케를 안전하게 벼랑 위로 데려가려고 최선을 다한다. 포뇨는 바로 그 해일을 몰아 타고 벼랑 위까지 쫓아가 쇼스케와 만나려 한다. 리사는 집요하게 쫓아오는 파도를 두고 ‘물귀신’ 같다고 했다. 두 사람 다 쇼스케를 목표로 지치지도 않고 달린다. 둘은 함께 쇼스케를 사랑한다.   


포뇨는 앞으로도 그다지 큰 고민 없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벼랑 위에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파악할 수 없는 일 앞에서도 침착하게 자식과 노인을 생각하는 리사가 있다. 바닷속에는 변화무쌍한 생명의 길에 아낌없이 정력을 쏟아붓고 있는 그란만마레가 있다. 그란만마레와 리사는 둘이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는 사이다. 이들을 해바라기집 할머니들이 또 응원한다. 여성성의 차원에서 포뇨는 어떤 선택을 해도 응원군밖에 없기에 무적이다. 그런데 쇼스케 앞에는 도망자인 고이치가 있고, 융통성 없는 후지모토가 있다. 하지만 쇼스케는 리사와 그란만마레의 아들이니 걱정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지브리 특유의 모성 과잉이 있다며 비판하기도 한다(우노 츠네히로,『모성의 디스토피아』; 오쓰카 에이지,『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참고). 그란만마레의 큰 가슴이라든가 지나치게 반짝이는 화려한 외모를 두고 감독 자신에게 결핍된 모성성을 대리보충하려는 시도는 아닌가하며 의구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란만마레가 대표하듯 미야자키의 모성은 오직 낳는 힘으로 충만하다. 샤먼(《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도 코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도 훌륭한 인간 만들기를 소망하는데, 구체적으로 기르는 데 있어서는 거의 방목에 가까웠다. 미야자키에게 모성은 낳고 죽이는 힘의 소용돌이 자체다. 새끼가 알아서 크기를 원하는 모성이다. 

 

《벼랑 위의 포뇨》가 개봉했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의 사모님께서 ‘어머! 자기를 그렸네요!’라고 하셨다 한다. 사랑스럽고 당당하며 모든 것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통찰하고 결단하는, 한마디로 멋지고 훌륭한 남자 쇼스케가 미야자키 하야오다. 그런데 분석을 해보니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히려 그란만마레다. 일단 그녀는 많은 남편을 두고 있다. 그녀의 크기와 화려함은 어떤 것과도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광폭한 섭취력과 생산력을 의미한다. 워커홀릭 미야자키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떤 풍경, 어떤 사물에서도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창작적 흡입력이다. 그는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포착해내고는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다. 성이 날아다니는 하늘이라든가 수어가 걸어다니는 바다 같은 것을 낳는 자는 모든 괴물들의 어머니 그란만마레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로 지브리 스튜디오를 개축하려 했을 때 전체 공간을 여성 애니메이터를 배려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스스로 종종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하기도 하고, 스튜디오 뒤편에 유치원이 생겼을 때 참으로 기뻐했다고도 한다. 이런 미야자키 하야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어릴 적 결핵으로 아파서 자신을 잘 돌봐주지 않았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다. 어떤 예술가가 결핍에서 시작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핍으로만 창작할 수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것은 소년이 소녀를 만나 자기 찌질함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년이든 소녀든 그란만마레처럼 세상에 놓인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빨아들이면서 자기다운 삶을 낳고 낳아야 한다. 최후에 그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서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란만마레의 자식이며 커서 그란만마레가 될 것이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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