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없어도 아이는 자란다
《라퓨타》는 고아 소녀 시타가 자신의 뿌리를 찾고, 그 어두운 운명과 단호히 결별하는 이야기이다. 예쁜 얼굴로 작품 내내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이는 시타가 어떻게 그토록 단호하게 혈족을 버리고 타인을 구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시타는 죽음을 겁내지 않고 멸망의 주문을 부른다. 어리석은 무스카에게 고귀한 힘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각오 하나로 파즈와 손을 맞잡고 ‘바루스!’를 외친다.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시타가 도착한 광산 마을의 건강함이다. 광부들은 해적도 국가도 두려워하지 않고 쫓기는 여자 아이를 도왔다. 지하 갱도의 늙은 광부는 ‘보물에는 저주가, 재능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가르침도 주었다. 광부들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서로를 돌보며 함께 웃을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시타 곁에는 훌륭한 세 사람이 있었다. 해적 대장 도라, 현실주의자 파즈, 그리고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거신병이 바로 그들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유일한 악당이기도 한 무스카는, 그 탐욕과 비겁함에도 불구하고 시타의 성장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오늘은 시타를 성장시킨 세 사람, 그들에게서 소녀가 받은 세 가지 교훈에 대해 알아보자.
너의 욕망을, 너의 독립을, 너의 능력을 껴안으라!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하늘의 해적(空賊) 두목 도라다. 도라는 이후 미야자키 영화에서 계속 변주되는데, 직접적으로는 《붉은 돼지》다. 그녀의 아들들이 나중에 《붉은 돼지》에서 중요한 해적단으로 다시 나온다. 도라가 어떤 존재인지 정리해보자. 우선 그녀는 ① 욕망 덩어리다. 도라는 할머니에, 이빨도 하나 빠졌는데 식지 않는 매력을 자랑한다. 풍성하게 양 갈래로 땋은 붉은색 머리, 해적질할 때에 꼭 차려입는 레이스 달린 정복, 발목 위까지 날렵하게 올라오는 카우보이 구두 등은 도라가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라의 방에는 칼이나 총 같은 무기가 단정하고 우아하게 진열되어 있기도 했다. 도라가 피부색이 다양한 아들들을 두었다는 설정은 그녀가 욕망하고 사랑하는 대상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도라는 ② 독립적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스토리보드에는 해적선이 지상에 정박하는 차고 같은 것이 그려져 있긴 했다. 하지만 상영된 영화를 보면 해적들은 하늘에서만 산다. 지상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라의 욕망은 그 어떤 척도에도 구애받음이 없다. 도라는 비행선이 비좁아 보물 싣기 어렵다며 아들들더러 하늘에서 뛰어내리라고 명령도 한다. 자식이고 뭐고 자기 욕망에 비해 다 부차적이다. 미야자키식 유머가 잘 나타나는 부분이지만, 해적이란 기본적으로 독립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아들들도 엄마를 마찬가지로 대한다. 아들들이 도라 밑에서 일하는 까닭은 늙은 부모를 모시려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엄마에게 실력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한다. 배울 것이 있어서 그 밑에서 시키는 것을 한다. 부모 자식 사이지만, 각자 원하는 것이 있기에 함께 할 뿐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일이다. 그래야 해적들의 세계에서는 같이 하늘을 날 수 있다. 독립적이면서도 함께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왕국에도 구애받지 않으려는 해적들의 모습은 나중에 미야자키가 본격적으로 그리게 되는 마녀와 마법사들에서도 다시 확인된다(《하울의 움직이는 성》).
도라는 ③ 실력이 있다. 미야자키의 모든 영화에서 언제나 최고의 업무 능력을 보여주는 이는 노인들이다. 이는 《나우시카》에 나오는 최강 전사 유파부터이고. 《라퓨타》부터는 할머니가 이 계보를 잇는다. 그래서 최고 실력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유바바가 된다. 온천장 꼭대기에 있는 오피스에서 유바바는 온갖 사무를 능숙하게 처리했을 뿐만 아니라, 욕장에 내려와서는 오물신이나 요괴를 재치있게 물리치기도 했다. 유바바는 모습도 능력도 도라와 닮았다. 도라는 수염 숭숭 난 아들들보다 잘 뛰고(원령공주처럼), 잘 쏘고(나우시카처럼), 잘 먹고(소피처럼), 비행기를 잘 몬다(나우시카처럼).
엄청난 욕망에다 실력까지 견비한 절대 고수 유바바가 센을 가르치듯이 도라도 파즈와 시타를 가르친다. 도라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자기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대등한 눈높이에서 키운다. 시타에게는 부엌일을 던져 주고 가르치고, 파즈에게는 비행기 정비를 맡겨 가르친다. 제 몫을 하며 살도록 힘껏 사지로 내몬다. 시타가 여자임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타이거모스의 파수대에 올라가겠다고 하자, 자기 상식과 맞지 않지만 허락하고 기뻐한다. 미야자키의 할머니는 모성을 상징하지 않는다. 도라는 자식들을 무조건 품어주고 응원하는 엄마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자기 일을 해내려고 하는 아이에게는 기회를 주고 그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업계의 선배다. 그래서 도라는 파즈와 시타에게 자기처럼 해적이 되라고 하지 않는다. 미야자키는 “실수한 자식은 발로 걷어 차지만 가망이 있다고 생각하면 힘이 되어 주는” 존재를 생각하며 도라를 그렸다고 한다. 시타는 이런 막강한 인생 선배를 보며, 자신의 작은 소망을 귀하게 여기고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바로 타인을 돕는 사람이 된다.
현실주의자는 먹고 시작한다
도라가 《라퓨타》에 갈 것을 결심하게 된 데에는 파즈의 영향이 컸다. 파즈가 어떤 소년인지는 그의 집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파즈의 집은 마을 제일 꼭대기에 있다. 부모가 없어 형편은 어렵지만 소년은 비둘기도 돌본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파즈는 아침을 먼저 맞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일찍 깨우기 위해,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새를 돌보기 위해 높은 곳에 산다. 무스카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총쏘기 위해 높은 자리를 찾지는 않는다.
인상적인 부분은 이 소년의 집이 잘 정돈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면대 근처에는 수건도 깨끗하게 걸려 있다. 파즈의 세면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비누와 수건은, 혼자 일하고 밥해 먹으면서 꾸는 비행을 향한 소년의 꿈이 절대로 공상일 수 없음을 말해준다. 정갈하게 자기 삶을 꾸리는 자, 일상을 소중하게 가꾸는 자, 그런 사람이 꾸는 꿈이야말로 현실적일 것이다.
파즈가 얼마나 현실주의자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세 가지를 꼽고 싶다. 먼저 시타가 하늘에서 내려올 때이다. 이때 파즈의 손에는 도시락통이 들려 있다. 파즈는 시타를 받기 위해 ‘잠깐’ 도시락통을 내려놓는다. 놀라운 일이 생겼다며 막 던져도 되는 도시락은 아닌 것이다. 통 안에는 광부 아저씨와 파즈 두 사람 몫의 저녁이 들어 있었다. 어려운 광산촌에서의 한 끼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도시락은 돈을 주고 산 것이다. 파즈의 이런 현실주의는, 무스카가 시타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준 동전 몇 닢을 화가 난다고 해서 집어던지지 않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행사를 꿈꾸는 기계공인 만큼 현실적이고,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파즈는 시타를 구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
두 번째 장면은 파즈가 하늘에서 떨어진 시타를 침대 위에 편히 쉬도록 하고, 그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하는 부분이다. 밤늦게까지 비행공부를 한 소년의 잠자리 옆에는 연필이 떨어져 있다. 아침 일찍 비둘기 모이를 챙겨주는 낭만적인 소년처럼 보이고, 헛것이었을 수도 있는 아버지의 ‘라퓨타’를 자신도 확인하고 싶어하는 몽상적 소년 같지만, 파즈는 매일 밤, 어떤 밤에도 비행기 날개를 만든다. 비행석은 오직 이런 소년에게만 찾아오는 기적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파즈의 조끼와 가방이 나오는 부분이다. 파즈의 조끼와 가방에는 주머니가 많이 달려 있다. 파즈는 넣을 것을 많이 갖고 다니는 인물인 것이다(지하실의 할아범도 가방이 많았다). 그 가방 안에는 온갖 것들이 다 들어 있는데, 심지어 후라이된 계란 한쪽까지 들어 있다. 랜턴과 식빵, 후라이된 계란, 사과, 사탕, 온갖 기술적 도구가 다 들어간 가방을 소년은 언제고 놓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재치 있고 명민한 소년이 파즈이다. 하지만 파즈는 욕심꾸러기는 아니어서,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신발을 버리고 뛰어나갈 수 있고, 모두가 평화롭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라퓨타를 찾고 싶은 자기 꿈마저 포기할 줄도 아는 소년이다.
그래서 파즈는 무스카와 대비된다. 무스카는 라퓨타 일족의 한 사람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지 700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천상 보물을 되찾으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그의 현실주의도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왕과 군대를 위해 봉사할 정도로 철저히 상황적이며 준비적이었다. 하지만 무스카는 욕심 때문에 악의 화신이 된다. 미야자키는 선악 구도가 애매한 복합적인 인물들을 많이 그렸다. 그런 것에 비하면 무스카는 가장 단순한 인물이다. 단순함이 어떻게 악이 되는가? 무스카가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옷이었다. 무스카는 시타를 회유하기 위해 예쁜 옷을 선물한다. 왕족이나 여성은 이런저런 옷을 입어야 하고, 또 그것을 좋아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퓨타》에서 무스카만큼이나 옷과 외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도라다. 하지만 도라는 여성다움을 고집하지 않았다. 도라는 흰 드레스 같은 것을 입고서는 제대로 일할 수 없다며 시타에게 자신의 바지를 건네주었다. 머리카락이 잘린 것이 황금을 잃은 것보다 더 슬픈 일이라며 괴로워하지만 바람을 탈 때에 불편하니까 머리를 양갈래로 질끈 묶어버린다. 도라에게는 미에 대한 전형도, 아름다움에 대한 전형도 없다. 도라의 욕망은 바람과 같아서 다양한 것을 탐하지만, 그녀는 파즈처럼 다 잃어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욕망이란 그 양이 아니라, 그 종류가 얼마든지 다양하니까 말이다. 단순하다는 것은 자기 욕망을 절대화함을 뜻한다. 거기에 맹목이 생기면, 그때부터 그는 몽상가가 된다. 무스카가 높은 곳만 올려다보는 비현실주의자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도라와 파즈에게 공통점이 있음을 알겠다. 둘 다 먹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라는 비행석의 행방을 알기 위해 파즈의 집을 쳐들어 갔었다. 파즈가 없는 동안 도라는 아들들과 함께 거나하게 고기를 뜯으며 식사를 하는데, 파즈네 식재료를 훔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날 파즈와 시타는 마른 빵에 계란 후라이를 반쪽씩 겨우 나눠 먹을 수 있었다. 도라는 타이거모스의 주방에서 식재료를 가지고 와 파즈의 부엌에서 아들들을 시켜 요리했을 것이다. 도라는 경우 없이 훔치는 해적이 아니다.
전작 《나우시카》에서는 먹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다들 전쟁중이라 바쁘기도 했겠지만, 나우시카는 고단백 치코 열매를 먹으며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파즈와 시타, 도라는 다르다. 해적단은 하루 다섯 끼 정도는 먹어야 날 수 있었고, 그 매번을 고기 국물 진하게 우려낸 식사여야 했다. 똑같이 하늘을 날지만 치코 열매를 먹고 나는 것과 다섯 끼의 고기반찬 먹고 나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은 다 땅에서 나온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먹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라퓨타》는 꿈이란 대지에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먹는 문제에 있어 파즈가 도라와 다른 점이 있다. 파즈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동료인 광부 아저씨와 함께 먹을 야식을 구입했다. 파즈는 고아에 혼자 살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었다. 파즈는 식사예절도 중시한다. 지하 갱도에 떨어져 시타와 함께 한참을 헤매다가 마른 빵에 계란 후라이를 얹어서 먹게 되었을 때, 파즈의 가방 안에는 푸른 사과와 사탕까지 있었다. 그것은 디저트다. 밥을 먹을 때는 격식을 차려 먹어야 하고, 식사를 한 다음에는 디저트로 마무리도 해야 한다. 파즈의 이런 품위 있는 식사는 와구와구식 도라의 만찬과는 다르다. 도라는 음식을 손으로 먹었으니, 파즈는 도라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파즈가 도라와 대비되는 점이 하나 더 떠오른다. 현실주의자이지만 파즈가 하는 모든 일은 타인을 위한 것이다. 파즈는 광부들을 깨우고, 비둘기를 먹이고,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하고, 시타가 라퓨타를 보게 돕는다. 파즈는 자기의 욕망과 꿈을 보고 가지 않기에, 독립적으로 자기 마음을 보고 가는 해적단은 될 수 없다.
기계는 살고 죽는다
마지막으로 시타에게 큰 감동을 준 존재는 거신병이다. 그는 기계지만 그 어떤 인간보다 복잡한 내면을 지녔다. 거신병의 특징은 차례로 살펴보자. 일단 외모는 어떤가? ① 거신병은 크다. 인간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는 점에서 오무, 토토로, 사슴신, 그랑맘마레(포뇨의 엄마인 바다 여신)를 연상시킨다. 미야자키는 이 거신병을 1980년대 유행했던 건담이라든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이듯 거대한 병기 만화의 유행을 따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거대병기와 거신병이 다른 점은 섬세하다는 데에 있다. 그는 큰 몸집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머리를 가졌다. 미야자키는 로봇의 작은 머리를 아날로그 시계 내부를 보고 떠올렸다고 한다. 그 작은 머리에 눈도 작고 입은 더 작다. 이런 불균형 때문에 그 거대한 몸은 모든 작은 것들을 품기에 적당해 보인다. 거신병은 풀숲에 은밀히 놓인 둥지의 새알을 소중히 여기고 돌본다. 뿐만 아니다 꽃을 꺾어 손님을 환대하기도 한다. 다정한 마음의 소유자다. 그래서 앤서니 리오이라는 비평가는 이 거신병이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부활한 것이라고까지 해석했다(수잔 네이피어, 183쪽 재인용). 자기가 돌보아야 할 귀중한 것, 연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물불 가리지 않기 때문에, 새끼를 지키는 무시무시한 모성의 화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곰 중에서 제일 무서운 곰은 아기 곰이 아니던가? 아기곰 주변에는 늘 새끼를 돌보는 어미가 두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니까. 누구라도 어린 것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 어미에게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거신병은 딱 이런 어미를 닮았다. 거대한 철갑, 즉 중장비의 기계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남성적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그 거대한 철갑에 모성을 입힌다.
기계가 모성적이다보니 거신병에게서 확 떠오르는 것은 생명력이다. 죽어가는 거신병의 몸에 이끼가 끼고 그 위에서 풀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만물의 늙음이 떠오른다. 라퓨타의 정원은 거신병들의 무덤이기도 한데, 정원에서 녹이 슬고 있는 그들의 육신은 노쇠해서 늙어 죽은 나무들 같기도 하다. 라퓨타의 거대한 나무 아래 스스로 걸어 들어와 죽어간 것처럼 스러져 앉아 있는 그들의 육체는 장엄한 생명력을 환기시킨다. 그들의 시체 위로 다시 이끼가 돋고 꽃이 피고 새들이 날아든다. 미야자키의 거신병은 돌보고 가꾸며 늙어 대지로 돌아가는 생명이다.
바루스! 더 많은 꿈을 꾸라!
욕망하는 현실주의자들 곁에서, 시타는 미야자키의 여주인공 중에서 가장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우시카처럼 자연과 교감하고 모두를 멸망의 바다(腐海)에서 구하려는 영웅성 같은 것도 없고, 돼지로 변한 부모와 저주에 걸린 친구를 구하기 위해 담대히 마녀와 맞서는 용기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꼭 뭔가를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온몸을 바쳐 좌충우돌 큰 액션을 해야 주체적인 것일까?
시타는 수학기호인 시타(θ)에서 왔는데, 라퓨타인이 과학과 수학에 능통했다는 점에 착안해서 나온 이름이다. 시타의 본명은 ‘류시타 토에르 우르 라퓨타’로, 우르는 왕, 토에르는 ‘진짜’라는 의미가 있다. 시타는 라퓨타의 진짜 계승자라는 뜻이다. 시타는 과연 무엇을 계승했는가?
시타는 무스카의 끔찍한 야망에 쫓긴 덕분에 도라와 파즈, 거신병을 만나 자신의 운명을 완수한다. 미야자키가 줄곧 말하는 바이지만 우리 삶에서 없애야 할 그런 사건이란 없다. 나쁘기만한 그런 존재도 없다. 시타는 도라를 보며 무스카처럼 자기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것도 어떤 욕망의 일종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파즈와 함께 해적선에서 밥하고 땜질하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바를 아낌 없이 다해야 함을 깨달았다. 거신병을 보면서는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존재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을 느꼈다. 시타가 마지막에 단호히 ‘바루스!’ 멸망의 주문을 외울 수 있는 것은, 혈족이 야만적인 물질문명을 낳았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자신의 작은 몸을 던져서라도 그 불행에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부모가 있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적이 없다.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토르메이카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츠키와 메이의 아빠는 도시의 교수로 바쁘고, 엄마는 병원에서 요양중이다(《토토로》), 키키는 마법 수련을 위해 13살에 집을 떠나 다른 도시에 도착한다(《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는 가족이 없고(《붉은 돼지》), 원령공주는 부모가 늑대 밥이 되라며 숲에 버린 아이였다(《원령공주》). 센의 부모는 돼지로 변해버렸고(《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소피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해서 따로 산다(《하울의 움직이는 성》), 물고기 포뇨는 부모가 멀쩡한데도 인간이 되겠다며 바다를 뛰쳐나간다(《벼랑 위의 포뇨》). 물론, 설계사 지로도 부모나 선생님이 뭔가를 알려주고 이끌어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야자키도 부모가 있는 아이의 이야기는 시시하다고 본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쯤 되려면 일단 조실부모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이를 두고 전쟁통에 아버지는 바쁘고, 결핵으로 어머니마저 아프셨던 미야자키 개인사를 거론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하지만 ‘부모가 없다’는 서사적 장치를 이렇게 간단히 작가 개인사에 오버랩시킬 일은 아니다. 시타의 입장에서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는 무고한 많은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기 뜻에만 복종하도록 힘을 행사한 자들이다. 시타가 정말 계승해야 할 것은 핏속에 있지 않았다.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해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익혀야 할 것은 어떤 것인지 배우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주변을 살필 일이다. 부모가 있어도 말이다.
바루스! 이 멸망의 주문은 《라퓨타》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텔레비전에 재방송될 때마다 세대를 막론하고 아이나 어른들이 함께 외치며 즐거워한다고 한다. 바루스! 계승해야 할 단 하나의 사명이란 없다. 꾸어야 할 꿈은 많다! 현실적이 되라! 더 많은 것을 사랑하라!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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