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로, 공상의 미래에서 일상의 지금으로
토토로는 낭만의 화신이 아니야
《토토로》의 인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작품이 발표된 1988년은 우리도 88올림픽으로 한껏 들떴던 때이지만 일본 역시 고도성장기였다. 당시는 도로에 갑작스럽게 외제차가 많아지고 명품 구매가 과도해지는 등 도시 문화가 사치스럽게 변했다고 한다. 89년의 한 인터뷰에서 미야자키는 이런 속물적인 일본이 너무 싫다고 토로하기도 했다(수잔 네이피어,『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둠과 빛, 미야자키 월드』, 196쪽). 그런 분위기 속에 발표된 1950년대 농촌의 소박하고 정겨운 풍경은 버블 경제로 인한 정신적 공황감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논밭에서 평화롭게 곡식이 익어가고, 이웃집 할머니가 아이들을 아낌없이 돌봐주고, 푹신한 토토로가 숲과 사람을 키우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나중에 봉제 인형계의 황제가 되는 토토로는 남들 다 일하는 낮에 늘어지게 잠을 자고, 비오는 날엔 걷기도 하고 고양이 버스 대절해서 짧은 나들이도 하니 여유 만땅이다. 허겁지겁 돈벌이에 바쁜 도시인들이 보기에 과연 상팔자로다! 게다가 엄마는 아이들의 투정쯤은 받아주고 싶다고 병상에서도 따뜻하게 말씀하신다. 대중은 미야자키가 자본주의의 광폭한 흐름에 맞서기 위해 평화로운 농촌 공동체와 고향 어머니에 대한 향수를 그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세간의 평가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토토로》의 농촌 사회가 그저 평화롭지가 않다. 이 시골은 괴물이 살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어린아이가 실종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서재에 채워져 있는 책이 고고학 관련 서적인 점에 대해서도 주의해야 한다. 메이의 아버지는 조몬 문화를 연구하기에 바쁘다. 고고학자인 아이들의 아버지는 ‘인간과 나무가 친구였던 시절’을 말하기에, 사실 농업 이전의 문화를 바라보는 학자인 셈이다. 사실 미야자키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에서가 아니라 군국주의에 대한 반발심으로 숲에 눈을 돌렸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전쟁 전에 태어나 자연스럽게 갖게 된 전쟁에 대한 자신의 큰 관심이나, 실제 전쟁특수로 유복했던 유년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었는데 우연히 민족식물학자 나카오 사스케의 『제배식물의 기원』이라는 책을 읽고 자기가 조엽수림 문화의 아들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어 큰 해방감을 느꼈다고 한다. 메이 아버지가 고고학자인 것은 이런 미야자키의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미야자키는 ‘순수한 고향에 대한 향수’나 ‘상실한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도 한다(수잔 네이피어, 앞의 책, 196쪽 참고).
“『재배식물과 농경의 기원』은 정말 우연히 손에 쥐게 되었다. 찾으면 언젠가는 만난다거나 운명의 만남 같은 걸로 꾸미지 않겠다. 나는 읽어가면서 내 눈이 아득히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지나간다. 국가의 틀도, 민족의 벽도, 역사의 답답함도 발끝 아래로 멀어져서 조엽수림의 생명의 입김이 떡이나 낫토의 끈적끈적함을 좋아하는 내게 흘러들어온다.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던 메이지 신궁의 숲과, 조몬 중기 때 신주에는 농경이 있었다는 가설을 제창하던 후지모리 에이이치를 향한 존경과, 말하는 소질이 있는 모친이 반복해 들려주던 야마나시 산촌의 일상들이 모두 하나로 엮여 내가 무엇의 후예인지를 알려주었다.”(『출발점』, 232)
작품 속에서 자매의 어머니가 아프다는 설정에도 유의하자. 많은 이들이 미야자키의 어머니가 오래 결핵을 앓았었고 유년시절 그 자신이 가사일을 하며 가족을 돌보고 어머니 걱정을 많이 했다는 점을 들어 『토토로』를 분석한다. 지브리 작품세계를 연구하는 수잔 네이피어도 미야자키가 《토토로》를 통해 유년시절의 결핍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프루스트도 말했듯이 자기의 외상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된 붓질이라도, 작가는 세상 모두의 상처와 회복을 향한 길을 닦는다. 토토로는 엄마가 죽지 않을 것임을 알려주는 정령이 아니다. 작품은 엄마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보다는 자연의 사계 안에서 만물 모두가 나고 죽는다는 점을 알려준다. 어린 메이라도 실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병마와 노화는 존재의 숙명이다. 미야자키는 《토토로》에서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야자키가 어머니를 언급한 적도 있는데, 아파서 아들을 걱정시키는 이로서가 아니라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는 어머니였다는 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겠다. 《토토로》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해소시켜주는 작품이라기보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무한히 많은 일들로 가능하다는 점을 소박하게 알려준다. 자, 그럼 1980년대에 제작된 《토토로》가 여전히 인기 있는 이유를 다시 한번 찾아보자.
작은 틈의 큰 신비
기계의 꿈이었던 라퓨타를 그린 뒤, 미야자키가 바로 돌입한 작품은 195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시골 소녀 모험기이다. 어떤 이미지든지 입힐 수 있는 공상적 미래가 아니라 빼도 박도 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로서의 근과거 일본을 그리다니,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극단적이다. 하지만 라퓨타와 토토로는 중요한 키 포인트를 공유한다. 첫 번째는 커다란 나무로 상징되는 무궁무진한 생명력이다. 두 번째는 해적과 비행석은 아니지만 식물의 정령과 도토리가 이끄는 스릴 만점의 모험이다. 미야자키의 비행사들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삶이 주는 신비함은 더욱 배가 되어, 관객에게 나날의 평범한 삶이야말로 진짜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야자키가 어떻게 공간을 묘사하는지 살펴보자. 가장 큰 공간 설정은 사츠키와 메이 자매가 이사 간 시골집, 그리고 토토로가 사는 거대한 녹나무 두 곳에 있다. 먼저 자매의 집부터 방문해보자. 사츠키와 메이처럼 낯선 고장, 새 집에 이사를 막 온 기분으로 천천히 그 입구에서부터 따라가보자.
이삿짐 트럭이 집 앞에 막 도착하는 장면을 보면 집은 약간 언덕 위에 서 있는 듯한데, 작은 시내가 흐르는 다리를 지나 그곳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무들 사이로 흙이 깊게 패어 있어서 마치 나무로 된 터널처럼 보인다. 집에서부터 바깥으로 내려오는 관점에서 보면 터널 다음에 물길이 흐른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치히로가 유바바의 온천장으로 건너갈 때 낡은 철도 터널을 지나 강을 건너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집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터널 같은 점은, 토토로네 집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작은 관목들의 터널처럼 제시되는 것과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다. 터널은 이편과 저편을 단절시키면서도 연결하는 통로이기에 그저 대문을 지나 집으로 올라가는 길일 뿐인데도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터널을 보니 전작 《라퓨타》에서 시타가 광산 갱도로 떨어져내리는 것도 떠오른다. 이런 설정은 사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닮았다. 앨리스가 시계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로 내려가듯 메이가 작은 토토로들을 따라 큰 토토로네 비밀 굴로 빠지게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이런 직접적인 연관에 대해서 따로 언급은 하지 않는다. 시계토끼의 굴도 인류의 무의식에서 루이스 캐럴이 길러 올린 것일 테니 말이다.
터널을 지나면 풀이 이리저리 나 있는 앞뜰이 나오고 바로 양옥과 일옥이 조합된 집이 나온다. 양옥은 아빠의 서재가 되는데, 조몬시대 연구자의 공부방답게 온갖 고고학책이 방 전체를 꽉 채우고 있고, 입식 책상이 놓여 있다. 반면 일옥은 다다미가 깔린 두 개의 방과 부엌, 그리고 어른 한 사람과 아이 둘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탕이 있는 목욕탕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양옥 테라스의 기둥이 매우 낡았다. 메이와 사츠키가 흔들면 무너질 듯 위태로워 집 자체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또 이 집은 아직 완성이 덜 되어 있기도 하다. 마당 곳곳이 정돈되지 못한 채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이 아기자기하게 공존하며, 과거와 미래가 어지러이 붙어 있는 까닭에 이 집은 그 외관 자체가 신비롭다. 원래 설계자가 한 사람일 리 없는 이러한 배치는 기이한 느낌을 준다. 많은 사람이 이 집에 살고자 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 누구도 오래 못 살았다는 것도 알겠다.
무엇보다 새집의 가장 큰 특징은 틈이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이 틈이라는 점은, 사츠키와 메이가 집 문을 열고 처음 발견하게 되는 것이 도토리라는 것에서 딱 알 수 있다. 갑자기 메이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도토리. 도대체 어디에 틈이 나 있는 것일까? 그런 데다가 다다미문은 여닫이라, 방들은 폐쇄되었다가 열렸다가 한다. 아이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신기한 듯 이 방 저 방 뛰어다니며 술래잡기 하듯 노는데, 그때 메이와 사츠키는 방과 마루 사이에 난 창문을 두고 장난을 친다.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집 안의 공간 배치 덕분에 집이 접혔다 펼쳐졌다 한다. 미야자키는 열 살 아이와 다섯 살 아이가 쫓고 쫓기며 달릴 때 어떤 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질지를 철저하게 계산했다고 한다. 실제 도면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이 집은 정교하게 측량된 것이다. 하지만 도처에 벽이 문이 되는 설정이 있어, 답답하지 않고 미로 같은 느낌을 준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다 숨겨진 다락을 발견한다. 이 다락 역시 터널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되어 있어서 토토로의 집이 터널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잘 대비된다. 평범한 외벽이, 갑자기 새로운 공간으로 안내하는 입구가 된다. 이렇게 어디서 어떻게 열릴지 모르는 집에서 결국 마쿠로구로스케라고 하는 검댕먼지 정령이 스르륵 집 안의 어떤 틈으로 빠져나간다. 마쿠로구로스케는 메이와 사츠키가 집의 뒷문을 여자마자 스르륵 모든 틈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메이는 2층 벽면의 틈으로 마쿠로 구로스케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정황을 짐작하고 있던 이웃 남자 아이는 귀신 사는 집에 아이들이 이사왔다며 놀리기도 했다. 나중에 메이가 소토토로 중토토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낡은 바케스 바닥의 뚫린 구멍을 통해 도토리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토로를 쫓아다니는 장면에서는 집 하단 부의 틈이 나오기도 한다. 도처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토토로들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잘 짜여진 것 같은 일상이지만 어떤 구멍이 숨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집! 그래서 새집 여기저기를 탐사하는 아이들은 인디아나 존스 저리 가라로 긴장해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 ‘거침없이 하이킥’이라는 시트콤 시리즈가 있었다. 이 시리즈를 만든 김병욱 감독도 틈을 좋아했다. 1층 다용도실과 2층 옥탑방이 뚫려 있어 가족들이 봉을 타고 오르락내리는 시리즈도 있었고, 아들 방 벽에 구멍이 뚫려 있어 멀쩡한 방문 놔두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개구멍 드나들 듯 그 구멍으로 오가는 시리즈도 있었다. 정해진 문이 아니라, 또 다른 틈이 있다는 생각은 평범한 집을 특별하게 만든다. 사람이 타거나 기어서 돌아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웃음도 난다. 계단이 아니라 봉이, 큼지막한 문이 아니라 작은 구멍이, 우리들 집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일상을 또 다른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하기에 즐겁다.
일상적 시공간에 틈을 내기 좋아하는 소설가로 무라카미 하루키도 있다. 『1Q84』에는 고가도로에 비상용으로 뚫어놓은 구멍으로 사다리를 타고 여주인공이 내려오는 장면 같은 것도 나온다. 하루키는 상식적인 시공간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려 있어, 그곳으로부터 이상한 바람이 불어오고 인물들에게 삶의 신비를 깨닫게 해준다는 생각했다. 메이와 사츠키의 집 구석구석이 뚫려 있다는 발상에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비로운 부해(腐海)가 아니어도 좋다. 온갖 욕망을 다 채워줄 천공의 성은 필요치 않다. 우리가 매일같이 먹고 자는 이 자리야말로 그 어떤 판타지보다 흥미롭다! 이것이 미야자키의 생각인 것이다.
그런데 문득 새롭게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이 틈의 의미에 대해 미야자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메이와 사츠키가 이사오는 장면에서 두 아이는 이삿짐으로 꽉 채운 삼륜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책상 아래 빈 공간에서 머리를 내놓고 바람을 맞고 캐러맬을 나누어 먹으며 놀았다. 그때 언니 사츠키가 갑자기 메이에게 숨으라고 한다. 제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을 보아서다. 사츠키는 그가 경찰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큰 한숨을 쉰다. 미야자키의 틈, 구멍은 경찰이 활보하는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다. 미야자키가 공권력을 비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찰로 대표되는, 계획과 질서만 중요한 세계와 틈의 세계는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벌레의 시간, 새의 시간, 인간의 시간
부해라든가 천공의 성이라든가 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막 끝내고 돌아와서 펼쳐낸 이야기가 1950년대 일본 농촌이야기라니 정말 의외다. 그런데 사츠키와 메이가 새로 이사온 이 마을은 나우시카와 라퓨타에서 나온 비밀 정원보다 훨씬 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아찔할 정도로 무섭다. 그 ‘비밀’을 알아보자.
먼저 미야자키가 작품에서 일상적 시간을 강조한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초반에 엄마 병실에 걸려 있는 달력을 보면 6월이라고 나와 있고 교실 칠판에서도 6월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그런데 나중에 메이 실종 사건이 벌어질 때쯤은 옥수수가 익어가는 여름 방학인 8월이 되어 있다. 작품 마지막 엔딩에서는 가을에서 겨울로까지 시간이 이어지니까 《토토로》전체가 시골의 사계를 다룬다. 이는 《나우시카》가 영화 도중에 예언의 테피스트리를 보여주고(지로 왕의 침대 뒤에 있었다), 《라퓨타》의 오프닝에서 라퓨타의 장엄한 과거가 서사시처럼 제시되는 것과 비교된다. 《나우시카》와 《라퓨타》는 굳이 말하자면 서사시적 시간을 차용하는 것으로, 장엄한 과거를 오늘 되살리려고 한다는 점에서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이다. 그런데 《토토로》는 달력이라고 하는 구체적 날짜로 전개된다. 구체적인 사건 하나하나가 다 다른 무게를 가지고 변한다. 어떤 여름도 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이 일상은 어떤 공간인가? 마을은 아주 작지만 이곳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큰 나무가 있다. 작음 속에 큼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라퓨타의 나무가 ‘비행’과 반대적으로 ‘뿌리’를 강조한다면, 토토로에서 나무는 무성한 뻗음, 높이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 자이언트 녹나무는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엄청나게 강한 바람을 불러들이기도 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녔고 그것은 일종의 공포로 사츠키를 엄습하기도 한다. ‘아빠, 집이 무너질 것 같아’ 그 강한 바람에 부엌의 가재도구가 흔들리며 부딪혀 작은 쇠소리를 내고, 널어놓은 행주가 펄럭거린다. 일상의 견고함은 바람이 주는 위력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곧이어 슬레이트 지붕이 벗겨질 듯 흔들거리고 창문들이 바람을 맞아 드들드들하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책상이 놓은 방을 밝혀주는 작은 불. 집이라는 공간이 외부의 긴장을 한껏 막아치면서 제 나름 기운을 모아 버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막 이사를 와서 낯선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바람을 맞는 나무를 통해 잘 전달된다.
작화가들에게 가장 큰 관건은 나무의 크기를 어떻게 키울까였다고 한다. 그 무궁무진한 존재감, 세월의 깊이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미야자키가 발견한 것은 ‘큰 것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떤 것은 그리지 않아야 한다’였다. 맞는 말이다. 감상자가 녹나무가 거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려면 그 전부를 보여주지 않아야 한다.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 곳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크기란 여백을 통해 부풀려진다.
“큰 나무를 제대로 그린 것은 처음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크기를 표현하는 즐거움이죠. 그런 큰 물체를 그리려면, 풀처럼 끝까지 쭈욱 평균적으로 그리면 크기가 살지 않으니까 어딘가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곳을 그저 안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부분도 실제로는 있다는 식으로 보이기 위해 빛을 조금 가리거나 끝쪽에 이끼를 조금 넣기도 하는 등 어떻게 하면 크기가 살아날까 궁리하느라 애먹었습니다.”(오가 카즈오,『지브리 아트북 토토로』, 93쪽)
이사 온 직후 자매는 나무 터널을 통과해 집으로 들어갔다. 둘째 날, 메이는 언니가 학교 가고 아빠가 일하는 동안 또 다른 나무 터널을 통해 집 뒤의 작은 숲으로 들어가고, 거대한 녹나무에 뚫린 틈을 통해 토토로의 집으로 떨어진다. 미야자키는 그들의 집에서만큼이나 숲에서도 틈을 강조한다. 이 틈은 집의 미닫이 창문이나 문들이 그런 것처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열릴지 닫힐지는 모두 운에 달린 것으로 신비하다. 집과 그 밖의 공간을 역시 도처의 틈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평범한 시골 마을 전체가, 낯설어서라기보다 그 자체로 신비를 품고 있는 공간이 된다.
그래서 이 마을의 들판과 작은 숲들은 조용하지 않다. 들판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가고, 매일은 날씨에 따라 또 전혀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 이사 온 처음에 푸릇했던 들판은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잘 익은 옥수수와 영글은 오이, 토마토로 장식된다. 마을은 계절의 변화뿐만 아니라 날씨의 변화에 따라서도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된다. 비가 엄청 오는 날, 자매는 편하고 여유롭게만 느껴졌던 새 마을이 심한 비와 함께 무섭고 두려운 장소로 변한다는 것을 경험한다.
당연한 듯 정물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공간이라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을의 그 누구도 녹나무를 제대로 다 볼 수 없었다. 우리 각자에게 다 드러나지 않는 한 그루 나무란 무엇을 의미할까? 나에게 다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나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녹나무가 품은 시간의 장엄함을 알려준다. 물리적 사이즈가 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다양한 눈높이가 나무를 크게 만든다. 메이의 눈높이에서 이 작은 숲은 푹신한 잎들로 포근하게 안아주는 곳이 되기도 하고, 아무리 걸어도 끝나지 않을 정도로 크고 튼튼한 뿌리가 드레스처럼 펼쳐져 있어 작은 아이에게 끝없는 신비감을 준다. 심지어 메이는 이 나무뿌리들 사이에서 틈을 찾아내 토토로의 집으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사츠키에게 이 나무숲은 동생의 놀이터로 생각되기도 하고, 나중에는 토토로가 사는 신당처럼 되기도 한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쑥쑥 커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나무를 바라보았다. 이 나무는 토토로가 사는 집이기도 하다. 토토로는 뿌리 밑에 침실을 두어 쉬고, 나무 꼭대기 테라스에서 오카리나를 부며 논다.
“인간의 시간과 새의 시간과 벌레의 시간, 혹은 박테리아의 시간. 전부 다른 시간이지만, 각각의 생물에게는 동질의 시간으로, 동시에 한 그루의 나무란 거대한 공간에 있어요. 이파리들 사이를 나는 새들이 본 풍경과 벌레가 본 광합성 현장. 옆의 돌멩이에서 본 세계. 각각의 시선에서 전면적으로 살펴보면, 잡목림 구석에 있는 아무것도 아닌 한 그루의 나무도 굉장한 세계라고 느껴져요. 인간의 시선에서 봤을 때 나무가 기분 좋고 멋진 것이 아니라, 약한 식물에는 벌레가 붙기도 하고, 벌레도 해충이라 인간이 쿡쿡 찌르거나 하면 엄청 혼란스러워지지요. 빗방울도 벌레한테는 극히 표면장력이 강한 신기하고 투명한 구슬로 보입니다. 그런 시점과 시간 축을 바꾸는 것을, 한 그루의 나무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요소도 있어야 해서 어렵지만요.”(『출발점』, 172)
미야자키는 틈을 통해, 저마다의 다양한 눈높이를 통해, 평범한 시골 마을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신비가 평화롭지만은 않다. 마을에서는 곡식과 열매가 매일매일 새롭게 익어가지만, 그런 일상의 틈을 뚫고 아이의 실종이나 부모의 죽음 같은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난다. 사츠키는 거대한 상실의 공포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동생을 필사적으로 찾기 위해, 순식간에 공포스러운 장소로 변한 그 마을을 두 발이 다 까지도록 달렸다. 미야자키는 평소의 건강한 모습과 생활 뒤에 숨어서 어른거리는 삶의 두려움과 경이를 말했던 것이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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