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변신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지난 10월 25일 개봉했다. 7월 일본 개봉 이후로 명작이냐 망작이냐를 두고 전세계에서 다양한 평가가 나왔다. 지난 열 편의 미야자키 감독 작품들과 달리 대단히 압축적인 방식으로 전개될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 작품의 디테일에 대한 보충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스스로도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도 많이 있다고 할 정도다. 개봉 첫날 아침에 영화관을 찾았다. 정말 한 방울의 정보도 없었기에 장면 하나하나에 푸욱 빠져서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 역시 주인공 마히토의 고민과 결단, 그 주변 가족들의 행동 방식, 왜가리-남자라는 독특한 캐릭터 등 어떤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선명하지 않았다. 심지어 두 번을 보고 극장 밖에서 혼자 공책을 펴서 줄거리를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도대체 마히토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인 것인지 동선조차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화관을 몇 번 더 찾았다(극장에 아무도 없는 날도 있었다).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이 막막함이야말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관객과 나누고 싶은 정서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점점 더 불확실해져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누구도 정답을 알지 못한다. 11월 초인데 어제는 반팔을 입고 출근을 했는데 오늘은 패딩을 꺼내 들어야 할 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의 초안을 잡기 시작한 것은 7년 전이라고 한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이고 뉴스에서 기후위기 등도 간간이 말해질 때였다. 이제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주목했듯이 정말 불확실한 시대 속을 휘청휘청 걸어간다. 막막하다. 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열 편의 전작(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과 상당히 다르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저 세계로 통하는 터널이 나온다든가(《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소년의 간식이 카스테라인 것이라든가(《바람이 분다》), 식빵에 뭘 발라먹는다든가(《라퓨타》) 하는 식으로 익숙한 장치들이 눈에 많이 띈다. 하지만 전적으로 다르다.
첫 번째, 캐릭터들이 말을 너무 안한다. 마히토가 예의 바른 소년이어서 어른들 앞에서 잘 나서지 않는다고 보기가 어렵다. 극중에서 제법 중요한 장면이 되는, 마히토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우는 대목은 아예 말소리가 무음 처리된다. 그냥 리듬감 있는 배경 음악이 깔린다. 물론 사태의 추이야 감상하는 관객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지만 미야자키가 앞으로도 하나하나 디테일을 살려 설명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기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새엄마는 피곤해서 쓰려진 아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새엄마를 미워하더니 갑자기 구하러 가겠다고 활까지 챙기는 마히토도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두 번째, 미야자키의 전작이 대부분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원령공주》는 산을 타고 《벼랑 위의 포뇨》는 바닷속을 헤엄치지만) 신작에서는 하늘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비행기 조종사나 엔지니어로 나오던 주인공과 달리 마히토는 꿈도 없고, 있다고 해도 비행과 관련된 일일 리는 없어 보인다. 마히토는 날지 않는다. 오히려 추락한다. 하지만 《라퓨타》에서 시타가 하늘의 보물로서 멋지게 내려오는 것과 달리, 마히토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윗세계를 두고 아랫세계로 낙하한다. 마히토는 위가 싫고 아래가 좋다고 하니, 하늘은 그의 관심 밖이다.
세 번째, 사건의 측면에서는 ‘엄마 구하기’가 제일 중요하니, 망해가는 지구를 구하거나 납치된 유치원생들을 구하거나 돼지로 변한 부모, 저주에 걸린 연인을 구하는 이전 작품의 사건과 같은 계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엄마를 구하는 일은 불에 타 죽은 엄마를 다시 죽음으로 이끌게 되므로 ‘살리기’는 곧 ‘죽이기’가 된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 마히토는 엄마를 구하는 것보다 친구를 사귀는 일이 더 중요한 것처럼 말한다. 치히로는 돼지로 변한 부모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그 목적을 이루었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그런데 마히토는 엄마를 구하는 일이 엄마를 잊는 일이라는 역설에 이르면서, 애초에 자신에게 부여된 미션의 틀을 바꾼다.
네 번째, 미야자키가 멋진 소년들을 그리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지만 모두 조연이었다. 《바람이 분다》는 소년이 주인공이 아니라 아저씨가 극을 이끌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미야자키는 처음으로 소년을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소년은 그의 소녀들과 달리 꿈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별다른 능력도 없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리움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나우시카는 크샤냐의 군대가 아버지를 직접 죽이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시타는 자기도 죽고 친구도 죽고 라퓨타도 다 없어지기를 소망하기도 했다(《라퓨타》). 명랑하다지만 사츠키와 메이는 엄마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있고(《토토로》), 치히로는 영영 저승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협박을 줄곧 받았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미야자키의 주인공들 중 두 다리 쭉 뻗고 한가하게 춘풍을 즐기는 청춘은 없다. 모두가 다 목숨 걸고 미션을 통과한다. 그런 정도에 비하면 마히토도 물론 고생을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구간에서 조력자가 떠나질 않고 그를 도우며 비교적 안전하게 문제를 돌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히토가 나이브하다고는 볼 수 없다. 마히토는 돌로 자기 머리를 찍을 정도로 악에 받쳐 있다. 미야자키의 주인공 중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원령공주》에 나오는 저주받은 소년 아시타카도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시타카는 저주로 타오르는 팔을 하고도 사랑하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을 뛰어다닌다. 여기서 다섯 번째 차이점이 나온다. 아시타카를 비롯해서 미야자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트루러브를 외쳤다. 그 진실된 사랑이란 타인에 대한 헌신을 의미했다. 하지만 마히토는 다르다. 물론 아랫세계에 내려간 새엄마를 구한다고는 한다. 그래도 모험의 목적은 일단 ‘엄마가 살아 있다’는 왜가리-남자의 말을 확인하는 데에 있었다. 즉 자기 슬픔을 해소하기이다. 이런 마히토가 결론으로 품게 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우정이다. 미야자키는 왜 사랑이 아니라 우정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의 키워드로 삼는 것일까?
여섯 번째로 큰 차이는 캐릭터이다. 그동안 미야자키는 거신병이라든가 토토로, 가오나시 등 신비롭고 영적인 존재를 많이 창조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도 왜가리-남자가 나온다. 몸과 다리는 새인데, 윗부분이 머리가 벗겨지고 딸기코인 아저씨다. 앵무새인데 걸어다니는 남자도 있고, 얼굴 없는 뱃사람들도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괴물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자는 마히토와 나츠코다. 물론 마히토의 아버지이자 나츠코의 남편인 아저씨는 돈이면 뭐든 다 되는 줄 아는 바보로 나와서 굳이 해석할 필요도 없긴 하다. 그런데 핵심은 마히토의 심리가 완전히 가려져 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이 작품에 이르러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넓고 깊다고 본다. 벼랑 위의 포뇨 즉 인어공주를 그린 이후로 미야자키는 인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그것이 《바람이 분다》이다. 하지만 지로의 욕망은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라는 것으로 너무나 확실했다. 《바람이 분다》는 순수한 인간이 어떻게 전쟁 때문에 파괴되는지를 다루기 때문에 어떤 구석에서도 신비할 바가 없었다. 과연 마히토와 나츠코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괴생명체일까?
미야자키 하야오는 매 작품 자신의 전작(前作)을 뛰어넘으려 했다. 착하고 예쁜데 의사이기도 하고 생물학자이기도 하고 메시아이기도 한 공주를 그렸다가, 바로 다음에는 무능력한데 명함만 공주인 소녀를 그리고, 그러다가 마녀이기는 한데 날 수 있는지 없는지 본인도 확신하지 못하는 아이가 나온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변화는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극단적이다. 이제 그 이유를 작품의 공간, 사건,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나씩 풀어보자. 위에서 살펴본 미야자키의 급변 포인트를 따라가면서.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왜가리가 말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은퇴를 번복하고 무려 7년 동안 황혼의 열정을 불태워 만든 작품이다. 3D를 넣지 않아 전부 수작업으로 그린 덕분에 100억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다. 그런데 올 7월에 공개되기 직전 어떤 광고도 티저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개봉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브리는 상영을 전부 거절했다. 미야자키는 누군가의 친절한 설명 없이도 온전히, 펼쳐지는 작품을 너 자신의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의 관객에게 묻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쯤은 어떤 사전 정보 없이도 과감하게 선택하고 느껴볼 수 있어야 한다! 네 느낌, 네 생각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대들, 그러니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는 많은 정보가 오히려 감상을 방해한다, 정보 과잉 시대에 자재할 필요가 있다, 미야상 스스로도 모르는 부분이 많다 등으로 이 홍보 방식의 절제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에 모든 돈을 다 쏟아부어서 광고 만들 제작비까지는 없었다는 소문도 들린다. 그런데, 광고에 극도로 금욕적인 태도를 취한 까닭은 광고비가 없어서라거나 홍보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미야자키의 변한 영화관이 깊이 반영되어 있다. 개봉된 작품 역시도 작화는 뛰어나지만 스토리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다며, 캐릭터의 개연성, 사건의 일관성 등에서 그냥 미야자키의 내면을 이리저리 펼친 것에 지나지 않느냐는 악평이 많았다. 주인공의 심리나 사건의 모티프에 대해 작품 자체가 설명을 아끼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설명을 자제하는 방식은 미야자키가 만든 앞의 10편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줄곧 현실의 이치에 대해, 생명의 본질에 대해 묻고 답하려고 했다. 나우시카는 부해가 만물이 정화하는 필연적 과정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시타와 파즈는 라퓨타로 승화된 인류 최고의 문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 고단한 여행을 했다. 키키야 앞으로 마법계가 어떻게 될지는 몰랐겠지만 적어도 관객은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었다. 아시타카와 원령공주는 생명이란 제 모습을 바꾸며 끝없는 길을 간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센은 인사를 주고받는 힘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을 배우고, 소피와 하울은 사랑하는 마음만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인간이 되고 싶은 포뇨가 귀엽기는 하지만 그런 이기심은 자연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관객은 알 수 있다. 엔지니어 지로는 비행의 꿈이란 필연적으로 죽음을 몰고 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주인공이나 관객은 뭔가를 알게 되어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주인공이 뭔가를 알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마히토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는 서로 빼앗고 죽이는 무법한 세상일 것이다. 세상이 어찌될지, 마히토가 잘 살 수나 있을지, 이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작품 안에서나 밖에서 아무도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모른다. 전작들에서는 최소한 주인공들 자신은 그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생명이란 나고 죽는다, 어떤 경우에도 바르게 처신하면 복을 받는다, 타인을 돕고 훌륭히 성장하라! 이 자명한 이치만 붙들고 있으면 노후 보장이다!
신작에서는 윗세계인 현실에서는 전쟁의 결말을 장담할 수 있는 이가 없고, 아랫세계에서는 주재자 큰할아버지가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중이기는 하나 굶어 죽어가는 이들 천지이다. 언제나 파도가 한번 크게 일어나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한다. 왜가리-남자는 큰할아버지 앞으로 가려는 마히토에게 어쩐지 예감이 안좋다고 말한다. 마히토의 죽은 엄마이자, 아랫세계에서의 친구 히미는 자신이라면 아랫세계의 금기를 깨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마히토가 터부를 깨는 것을 보고 있다. 위쪽 세계에서나 아래쪽 세계에서 뭔가를 다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사실 작품에서 미야자키는 말 자체의 진위를 의심하고 있다. 왜가리-남자는 마히토에게 엄마가 죽지 않았다며 거짓말을 했다. 마히토는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지만 왜가리-남자를 따라 아랫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참과 거짓의 문제 앞에서도 마히토는 당황하지 않는다.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왜가리가 말했다’는 말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마히토는 이 말은 거짓이라고 한다. 왜가리는 이 말만은 진짜라고 한다. 그런데 서로 속이고 으르렁대었지만 둘은 친구가 된다. 진짜여도 가짜여도 어쩔 수 없고, 내가 걷는 길이 위선이고 내가 사귀는 이가 사기꾼이어도 괜찮다.
아랫세계에서 마히토는 어떤 불확실함, 어떤 오류에도 결과를 걱정하지 않는다. 엄마의 생사를 몰라도, 엄마가 살아 계시다는 말이 틀렸어도, 엄마를 찾으러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태의 진실은 내가 무엇을 믿고 따르느냐이고 설령 내가 거짓을 따라가고 있다 해도 그 길에서 나는 나만의 경험을 한다. 마히토의 엄마인 히미는 아랫세계를 버리고 윗세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랫세계에서 우연히 만난 자신의 아들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훌륭한 삶을 축복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이 선택이 나에게 최악의 결과를 불러올 것을 ‘알아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거짓과 사실을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잠깐 《라퓨타》의 결말이 떠오른다. 《라퓨타》에서 파즈와 시타는 세계가 멸망할 줄을 알고 ‘바루스’를 외쳤다. 하지만 라퓨타를 둘러싼 문명의 낡은 껍질이 부서졌을 뿐, 라퓨타도 세계도 부서지지 않았다. 멸망할 줄을 알아도 멸망하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시대이다. 검색엔진을 돌리면 금방금방 세상 도처의 문제들이, 사실들이, 정보들이 쏟아진다.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세상은 더 작아지는 느낌이다. 더이상 새로운 곳이나 신선한 인물이 없는 듯만 하다. 그런데 미야자키의 불충분한 모든 설명은 관객의 인생과 만나면서 새로운 이야기로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미야자키는 《토토로》에서 이를 이미 시험해본 적이 있다. 메이네 집 뒤 거대한 녹나무를 표현해야 했을 때, 미야자키는 전체를 다 보여주지 않기로 한다. 4살과 10살 각각의 눈높이에서 이 나무가 어떻게 보일지, 또 식물의 정령인 토토로의 손끝에서는 이 나무가 어떻게 다가올지를 다각도로 보여주었다. 그 결과 누구나 자기만의 녹나무를 보았고, 타인에게 그 나무가 다른 질감과 의미로 전달됨을 알 수 있었다. 그런 방식이었기에 한 그루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크기로 다가왔다. 대상의 크기와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을 채우는 정보가 아니다. 작품이 설명이 잘 해주지 않는다, 어떤 관객도 정답을 모른다, 심지어 감독조차도. 그러니 미지로 남겨진 부분을 통해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갈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열자.
이제 하늘은 없어
벌레를 사랑해야지(《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세상을 탐험할 거야(《라퓨타》), 씩씩하게 걷고 싶어(《토토로》), 어른이 될 거야(《마녀 배달부 키키》),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자(《붉은 돼지》), 생명을 돌봐야 해(《원령공주》),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자(《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등. 미야자키는 줄곧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었고 그때마다 관객도 많은 답을 찾았다. 미야자키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일까?
미야자키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질문은 한결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미야자키는 언제나 깨닫고 선택하는 인물을 힘차게 그려왔다. 그러나 전작들과 신작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 질문이 놓인 배치, 이 질문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인물들이 이런 질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환경에 있었다. 지구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고, 천공의 성이 온 세상을 불태울지도 모르며,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 미야상의 최후 작품이 될 뻔했던 《바람이 분다》(2014)에서도 성실한 비행기 설계사 지로의 발목을 잡은 것은 전쟁에 몰두한 일본이라는 국가였다. 미야자키는 ‘어리석은 어른들 탓에 황폐해지고 초라해진 세계’, 그 안에서 어떻게 너는 소중한 꿈을 지키며 살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바로 이 구도를 내려놓는다. 세계의 악마성이 아니라 ‘그대’의 악마성이 문제가 된다. 때문에 현실에 대한 묘사가 현실적이지 않고 무의식 혹은 저 너머 세계에 대한 설명이 훨씬 더 복잡하게 전개된다. 전쟁중이지만 전쟁 자체에 대한 묘사는 없고, 공습으로 병원이 불탄다라고 하는 정도에 그친다. 전쟁이 왜 일어나고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피해를 주는지에 대한 분석이 없다.
작품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전쟁과 평화가 아니라, 마히토가 경험하는 위쪽과 아래쪽이다. 미야자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나 《벼랑 위의 포뇨》에서 이원 세계를 묘사해왔다. ‘밤의 강’으로 나뉘지만 ‘낮의 터널’로 종횡으로 연결되는 것이 전자이고, 거대한 심해와 바닷가 마을처럼 상하로 나뉜 것이 후자이다. 이렇게 나뉜 두 세계는 서로 간섭하진 않지만 특별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센은 현실 세계에 있다가 신들의 저편에 다녀오고, 포뇨는 생명의 심해에서 육지라는 표면으로 올라온다. 두 세계를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를 공경하는 마음과, 생사의 이치에 대한 겸손한 마음이다. 저편 세계에서 길어온 생명력으로 소녀들은 이편의 곤경을 씩씩하게 해결해갈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원 세계를 펼쳐낸다. 표면적으로 보면 터널이라는 장치, 저편이라는 바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벼랑 위의 포뇨》를 종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야자키는 전작에서 그려낸 이 두 개를 다시 몇 겹의 의미를 지닌 상징으로 재탄생시킨다. 그 과정에서 저편 세계는 생명력의 보고가 아니라 악의 저장고임이 드러나고, 소년은 그 세계를 파괴하고 이편으로 귀환한다. 저쪽 세계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설정은 확실히 전에 없던 것이다.
두 세계의 이동 방식은 심층으로 계속 내려가는 형식을 취한다. 공습의 도쿄를 피해 지방으로 내려왔다가 집 뒤에 붙은 탑에서 저편인 바다 세계로 내려간다. 바다 세계에 도착해서는 먼저 무덤을 지나 키리코의 와라와라(아기 생명체) 데이케어 센터, 앵무새가 점령한 대장간, 히미의 오두막, 엄마가 갇힌 탑의 지하 산실까지 넓고 깊게 계속 내려간다. 이때 터널과 같은 복도, 계단 등을 통과한다. 바다 세계에서 마히토는 꿈을 꾸게 되는데, 여기서 다시 아랫세계의 주재자인 큰할아버지의 명상실 같은 곳으로 더 깊게 내려간다. 여기서는 조금 언덕을 오르기는 하는데, 전체적으로는 계속 내려간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 미야자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공간은 하늘이었다. 포뇨에서는 바다가 주무대이지만 포뇨의 헤엄은 새의 비행과 마찬가지로 그려지고, 인간이 된 포뇨를 축하하며 하늘에서 축포처럼 햇살이 쏟아지는 점은 역시 하늘의 강조이다. 두 다리를 갖고 싶은 포뇨나 신들의 숲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한 원령공주가 있긴 하지만, 미야자키는 비행사와 엔지니어를 줄곧 그려왔다. 미야자키에게 하늘은 지상의 모든 구획들, 법칙들을 뛰어넘어 다양한 삶의 경로를 그릴 수 있는 꿈의 무대였다. 그런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이런 하늘이 나오지 않는다. 《라퓨타》의 시타처럼 마히토가 하늘에서 떨어져 바닷가에 이른다. 그의 무릎까지 파도가 차오른다. 덕분에 마히토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간이 어떤 배치 안에 갇혀 신음하는지를 볼 수는 없다. 아래쪽으로 그를 이끄는 힘은 오직 엄마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이다. 세계가 아니라 자기 그리움, 자기 무의식이 문제인 셈이다.
계단의 저주 :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이런 전체적 전개를 염두에 두고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공간의 공통점부터 알아보자. 두 개의 공간은 마히토의 말처럼 다르지만 닮은 점이 많다. 위쪽 공간의 물건들은 모두 사실적이지만, 왜가리가 부순 막대기가 번듯하게 제 자리에 있는 듯하더니 마히토가 건드리자 와르르 부서져내리거나 그 왜가리 자체가 인간의 말을 하는 등 시간이 군데군데 뒤틀려 있고, 동물종 사이의 벽이 여기저기서 무너져 있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는 왜가리의 말에 당황한 마히토를 두꺼비들이 감싸 올라 먹어치우는 듯한 모습도 대단히 환상적이다. 위쪽 세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주 많이 일어난다. 반면 아래쪽 세계에서도 해가 진다든가 하는 지구 리듬은 정확하게 지켜진다.
두 세계의 가장 큰 공통점은 낡았다는 점이다. 마히토가 이사간 어머니의 본가, 본당의 부엌 벽면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 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불들이 가득하다. 하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이고, 그나마 할아버지들 중 한 분은 아파서 누워 있다. 낡음은 아픔이고 또한 궁핍이다. 부자 주인 나리가 도시에서 통조림 몇 개를 갖고 오기는 했지만 담배 한 갑 제대로 된 것이 집에 없을 정도로 어렵다. 아래쪽의 주재자인 큰할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 아픈 이들은 없지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서슴없이 살생을 하는 팰리컨이라든가, 잡는 일에 목숨을 건 앵무새들이라든가 모두 허덕허덕 먹을 것을 찾는다. 여기서도 오래됨은 가난함이다. 최소한 치히로가 일했던 저편의 온천장은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한 풍요로운 세계였다. 팔만 신들이 먹고 마시고 실컷 쉬어도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마히토의 아랫세계는 모두 굶주린다. 미야자키는 작품 속에서 처음, 가난을 그린다.
위쪽과 아래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위쪽 세계에서 마히토가 이사간 대저택은 커다란 본당이 있고 그 왼쪽으로 2층 양옥이 있다. 마히토네 가족은 양옥에 살고, 이 집의 할머니 할아버지 일꾼들은 대저택과 연결된 별당에서 지낸다. 이 왼쪽 양옥에서 다시 조금 뒤쪽의 왼편으로 4층 정도로 높이 솟은 탑이 있고 이 탑을 통해 마히토가 아래로 내려간다. 대강의 배치는 이렇다.
미야자키가 위쪽에서 강조하는 공간 설정은 계단이다. 마히토는 도쿄에서 엄마 병원의 화재를 확인하기 위해 집안의 계단을 빠른 속도로 오른다. 그때 카메라가 위에서 마히토를 아래로 내려보면서 잡는데, 때문에 몇 개 안 될 수도 있는 계단이 좁고 가팔라 보이고 오르는 일이 아주 어렵게 느껴진다. 마히토는 새엄마의 집 2층에 머물게 된다. 첫날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다 잠깐 내려와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이때 계단 아래로 불꽃이 밀려와 마히토에서 손을 뻗치며 도와달라고 외친다. 엄마의 목소리다. 곧이어 9시 무렵 퇴근한 아버지에 의해 환영은 깨지지만,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뽀뽀 쪽 하는 소리에 당황해서 마히토는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정리하자면, 마히토는 계단을 기준으로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다. 올라가면 엄마의 죽음을 봐야 하고, 내려가면 엄마의 환영이나 싫은 새엄마와 마주해야 한다. 이렇게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 이것이 마히토의 위쪽 세계에서의 처지다. 그래서 탑의 정문으로 들어가게 될 때, 옛날 어른들이 위험하다며 입구를 막은 탓에 마히토는 얼굴 하나도 계단 위로 들이밀기가 어렵다. 이사를 오고 난 뒤 마히토에게 올라간다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위로 올라가는 일이 어렵다면, 양옆으로 움직이는 일은 가능한가. 그것도 불가능하다. 마히토는 학교에 간 첫날 친구들과 다투고, 자기 머리를 돌로 찧는다. 그 뒤로는 집에서 치료하는데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에게 기부금을 크게 낸 뒤로는 아예 학교 자체도 못 가게 된다. 이 아버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캐릭터 편에서 더욱 분석하게 되지만, 마히토를 위로도 옆으로도 못 움직이게 하는 이가 바로 아버지다. 이 아버지의 욕망과 돈이 아들의 발목을 붙잡는 셈이다.
미야자키가 그리는 현실 세계는 갑갑하다. 대저택이지만 정원에 늪이 있다. 파도가 치지 않는 늪. 고인 물에 왜가리가 날고, 마히토가 화내자 흥분하면서 물결이 인다. 이 세계 궁핍함의 일차적 원인은 전쟁에 있고, 한 발짝 더 물러서 보면 아버지 같은 황금만능주의자의 이기심이 문제이다. 이 숨막히는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나? 마히토의 친구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었던 것일까? 자신들은 책도 못보고 학교에서 근로봉사를 하는데, 있는 집 자식은 자동차 타고 다니며 말쑥한 옷에 이 난리를 피해간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노동에 대해, 어떤 자긍심도 가질 수 없는 비참함이 초등학교 교실에 완전히 깔려 있다. 마히토가 갈 수 있는 유일한 바깥은 학교인데, 그 역시도 막혀 있는 셈이다.
미야자키는 이런 상황을 ‘바람이 분다’라는 말로 설명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에게 바람이라는 메타포는 정말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어서 다 정리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지만, 2000년대 특히 2011년 3·11 이후 미야자키는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의 본성에 빗대어 시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경제 얘기만 있었습니다. 터질 만큼 가득 물을 부어 넣은 풍선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해야 했습니다. 그런 조마조마함을 안고, 영상이니, 게임이니, 소비행동이니, 건강이니, 키우고 있는 개가 어떠니, 연금이 어떠니 걱정하며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를 풍선을 굴리면서 불안은 착착 부풀어 올랐고, 20대 젊은이도 60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뭔가가 일어날 거라고 모두가 예감하면서 그래도 훌륭한 전쟁보다는 어리석은 평화가 더 나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역사의 톱니바퀴가 덜커덕하고 돌기 시작했습니다. 평온한 삶이 위협받는 시대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 나라만이 아닙니다. 파국은 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량 소비문명이 피할 수 없는 종말의 제2단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맑은 정신을 놓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미야자키 하야오, 서혜영 옮김,『책으로 가는 문』(다우), 151~152쪽)
마히토의 아버지는 승전을 확신한다. 하지만 일본은 패망했다. 우리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도 어떤 바람에 말려들어갈 것이다. 인간은 21세기여서가 아니라 언제나 예측불가의 삶을 이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은 옛날에도 불었고 오늘도 불고 내일도 불 것이다. 갑갑하기만 한 마히토의 세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리라. 자 그럼, 사방팔방이 막혀 있고 위로도 아래로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마히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음 주를 기대하시라! ^^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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