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로 일상의 애니미즘
《토토로》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이사를 와서, 청소하고, 밥해 먹고, 빨래하고, 엄마 문병을 가고. 학교 갔다가 집 뒤 나무 구경 가고, 비 오는 날 아빠 마중 가기, 잠깐 놓친 동생 찾아 동네를 헤매기. 이 전체 사건들 중에 살면서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토토로에는 《나우시카》나 《라퓨타》처럼 세계를 구한다는 모티프가 들어 있지 않다. 1950년대 초반의 일본 농촌을 다룬다지만 향수를 부르짖지도 않는다. 오직 평범한 나날만 전면에 배치된다. 그런데 평화롭기만한 시골과 귀엽기만한 소녀들이 겪는 일화들은 전혀 사랑스럽지 않다. 자매들은 일상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면서 죽음의 공포와 상실의 비통을 예감한다. 물론, 그러면서 살아갈 힘과 지혜를 얻는다. 그래서 《토토로》는 일상의 고단함과 숭고함이 번뜩이는 작품이다.
기다릴 때는 빨래를 개자
《토토로》는 일상에 주목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기다리기, 둘째는 선물하기이다. 먼저 기다림부터 살펴보자. 아빠와 사츠키와 메이는 엄마의 퇴원을 기다린다. 사츠키와 메이는 아빠의 퇴근을 기다린다. 메이는 언니의 하교를 기다린다(아이들은 토토로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이 기다림의 무게는 작품 중간중간에 어머니의 병실에서나, 사츠키의 교실 칠판에 붙어 있는 달력의 날짜가 바뀌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우리가 뭘 어찌해 볼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다.
기다림이란 어떤 일일까? 우리는 아무나, 무엇이나 기다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비오는 날 학교 정문 앞에 엄마가 서 있다. 아이 하나하나가 교문을 통과하는 것을 참을성 있게 바라본다. 마침내 자식의 둥근 얼굴 하나가 커다랗게 클로즈업될 때까지 말이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 삶의 목표, 간절히 바라는 사물, 깊이 사랑하는 누구만 기다린다. 기다림이란 상당히 목적 지향적인 활동인 것이다.
기다리는 일은 그 자체로 힘들다. 어린 메이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던지, 2시간만 기다리면 언니가 집으로 올 텐데도, 그 사이를 참지 못해 학교로 언니를 찾아나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자신을 돌봐주었던 칸다네 가족들이 뭔가 나쁘게 대해주셨을 리는 없다. 호기심 많은 아이이니, 낯선 이웃집이 재미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농번기다. 바쁜 농촌의 한낮, 어른들도 가을의 수확을 준비하기에 바빴을 테다. 가을을 기다리는 이웃 어른들 속에서 더 마음이 힘들었을 것이다.
약속된 시간을 넘긴 기다림은 더욱 힘들다. 갑자기 감기로 엄마의 외출이 어려워지자 아이들은 속상해서 서로 싸우며 울게 된다. 아픈 엄마가 걱정도 되고, 못 만나게 되는 상황이 속상하기도 해서 아이들은 각자 딴 방에서 쓰러져버린다. 정말이지 미야상은 기다린다는 일이 얼마나 우리를 지치게 하는지를, 두 아이의 뻗은 뒷모습으로 아주 잘 포착해서 보여준다. 한정 없이 엄마를 기다려야 하기에, 어디 다른 일이라고는 하나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어떤 일에도 여유롭게 마음을 둘 수 없는 상태에 몰린 사람은 누구라도 사츠키와 메이처럼 뻗어버릴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야자키는 이 힘든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이 집안일이라고 한다. 칸다네 할머니는 슬프고 괴로워 뻗어 있는 자매에게 다가가 함께 빨래를 개자고 하신다.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함께 있어주겠다고까지 하신다. 토토로도 할머니도 아픈 엄마를 당장 집으로 데려와줄 수는 없다. 다만 그 긴 시간을 곁에서 함께 있어줄 뿐이다. 《라퓨타》에서 파즈와 시타의 빨래가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빨래를 다시 갠다는 것은 입었고 씻었고 다시 입을 그 옷에게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 주는 행위이다. 어떤 목적을 향해 내달린 마음은 입고 달린 옷처럼 구겨지고 먼지가 묻고 피로에 쩔어 있다. 이런 옷을 빨아 다시 개기란, 다시 또 기다릴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것과 같다.
기다림의 끝에 자매는 어떤 행복을 맛볼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미야자키는 아픈 엄마가 집으로 돌아온 뒤를 보인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와도, 아이들에게 달라질 것은 없다. 아빠와 함께 하던 목욕을 엄마와 함께 하게 되는 일이 전부이다. 아이들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따라, 여전히 친구들과 놀고 싸운다. 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칸다네 할머니와 함께 익어가는 곶감 옆에서 떡도 만든다. 미야자키는 열심히 엄마를 기다려도, 그 끝에서 엄마랑만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살면서 우리는 뭔가를 기다리게 된다. 기다리는 대상과 만나고 나도 다시 또 기다릴 일만 있다. 우리 자신을 한없이 작게 만들고, 가끔 방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이 목적들은 언제나 일상의 거대한 리듬에 다시 파묻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목적을 보고 가더라도 자기 일상을 튼튼하게 살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를 개고 잠을 자기. 이 평범함이야말로 모든 기다림을 이어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애벌레의 마음을 닮자
《토토로》의 인물들에게 가장 중요한 미션은 선물하기이다. 다섯 번의 선물이 캐릭터들의 관계를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첫 번째는 비오는 날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츠키를 위해 자기 우산을 건네는 칸다의 선물하기이다. 두 번째는 아빠에게 씌워드릴 우산이었지만 비 맞는 토토로를 위해 양보한 사츠키의 선물하기이다. 세 번째는 이 선물을 받은 토토로가 종합 도토리 선물 셋트로 되돌려준 선물이다. 네 번째는 밭에서 수확한 최고의 옥수수를 이웃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칸다 할머니의 선물하기이고, 다섯 번째는 엄마를 치료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옥수수를 배달하려 했던 메이의 선물하기이다.
다섯 번의 선물에는 공통점이 있다. 뜻밖의 건넴이고, 자신을 돌보지 않은 선의 속에서 나온 배려이다. 칸다가 사츠키와 메이에게 우산을 주기 위해 그 자신은 비를 맞는다. 자기도 빼빼 말랐으면서 사츠키는 잠든 동생을 업고 토토로에게 우산을 준다. 샌달을 신은 메이는 자신이 얼마를 걸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엄마에게 옥수수를 주기 위해 길을 나선다. 이 선물들은 모두 선물의 연쇄를 만들며 우정을 낳고 사랑을 완성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함께 손잡고 귀가하는 이들은 칸다와 칸다 할머니 메이와 사츠키였다. 토토로가 건넨 도토리는 헌신과는 무관하지 않냐고? 아니다. 자기가 준 선물에 싹을 틔우기 위해 토토로는 달 밝은 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그 큰 몸이 부르르 떨릴 때까지 주술의 댄스를 춘다.
무엇보다 이 선물들은 모두 작다. 우산도 책가방이나 돈과 같은 것에 비하면 사소하다. 옥수수 역시 밥이나 보약에 비하면 조금 가벼운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것들을 작다할 수 있을까? 장대비가 쏟아지는 하굣길에 넘어진 동생까지 걸려서 집으로 가야 하는 길이란 얼마나 멀까, 4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게 된 옥수수 하나에 견줄 수 있는 것이란 과연 몇 개나 될까? 토토로가 선물한 몇 알의 도토리는, 나중에 얼마나 크고 멋진 나무가 될 것인가?
《토토로》는 한 마디로 작은 것들을 위한 시이다. 캐릭터의 관점에서 전작과 달리 《토토로》는 철저히 아이들의 시점에서 그려진다.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했던 《라퓨타》에서도 파즈와 시타의 적극적인 액션이 대단히 박진감 있었지만, 무스카와 도라와 같은 어른들이 전체 모험의 판을 짜다보니까 아이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어른의 세계에 말려 들어간 형국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압도적인 배경으로 하늘이 나오는 탓에, 날고 떨어지고 하는 존재가 ‘아이들’이라는 점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토토로》는 다르다. 이야기의 구도가 아이들과 정령들 중심으로 짜인다. 더군다나 미야자키는 작품의 관점 자체를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다. 4살의 메이와 11살의 사츠키가 몸을 움직이는 방식이 어떻게 다른지, 그 보폭이며 발동작 머리 생김 같은 차이에 큰 포인트를 두어 그림을 그렸다. 무엇보다 배경을 그릴 때에 시점이 낮은 곳에서 위를 올려다볼 때가 많다. 풍경을 바라보는 자의 눈높이가 낮다는 것을 강조했다 할 수 있다.
《원령공주》를 제작하고 있을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음에 간직된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는 ‘애벌레 보로’였다. 보로는 《Never Ending Man》이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잘 설명되는데, 미야자키는 보로를 그리기 위해 아날로그로 갈 것인지 디지털로 갈 것인지를 크게 고민했었다. 《원령공주》와 《애벌레 보로》가 경쟁했다니 놀랍다. 전자는 숲의 신과 존재의 근원적 증오에 대한 신화적이고 우주적인 통찰을 모티프로 한 반면, 후자는 갓 태어난 애벌레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꾸어 타는 이야기가 주된 테마니까 말이다.
주인공 성격의 농밀함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원령공주는 인간에 의해 버려졌으나 개의 신에게 길러진 소녀, 즉 자연과 인간의 혼종체이며 증오와 사랑 사이에서 온몸이 찢기는 존재로 대단히 신화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애벌레 보로는, 막 태어났을 뿐이기에 성(性)도 없고 타자에 대한 애증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저 제 한 몸 가누느라 바쁘고, 옆 나무로 건너갈 소박한 꿈에 푸욱 빠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원령공주만큼이나 보로가 중요했다. 왜인가?
생각해보니 보로 쪽의 모험이 훨씬 더 아슬아슬하고 박진감있게 펼쳐질 것 같기도 하다. 관객 입장에서 보아도 보로 쪽이 상상의 여지가 더 많으리라. 《원령공주》의 주인공인 아시타카라든가 산의 번뇌와 감정은 소위, 인간인 내가 날마다 겪고 있는 범위에 다 들어와 있다. 그것이 조몬 시대의 이야기이고 정령과 직접 소통하던 자들의 번민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보로는 애벌레다. 나는 그토록 작은 몸집에 게다가 그렇게 많은 발을 갖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태어나 은근슬쩍 그것을 타서 돌아다닌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보로는 어떤 나무에 산다. 인간의 눈에서 보면 한 그루 나무란 갈색의 줄기에 녹색의 잎, 이걸로 땡이다. 하지만 보로에게는 어떨까? 실로 온갖 생물이 다 들어 사는 거대한 우주가 되지 않을까? 그럴진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몸으로 옮기는 보로의 모험은 이 우주에서 저 우주로, 마치 우주복 없이 화성에 도착한 인간 혹은 처음 대지에 발을 디딘 수상식물의 시도처럼 엄청난 이동이 되지 않을까?
우산도 옥수수도 그 자체로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소하다. 이렇게 사소한 것을 그렇게 작은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준다. 그럼으로써 다투었던 칸다와 사츠키 사이에는 우정이 싹트고, 소녀와 나무의 신 사이에는 인연의 길이 닦인다. 작다지만 칸다와 메이에게는 자기의 안위와도 비교되지 않는 큰 것이다. 무엇보다, 비 맞는 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친구의 처지를 이해하고, 무서운 숲길을 똑같이 두려워할 수도 있을 토토로의 상태를 생각할 줄 아는 이는 작지 않다. 그들의 작은 몸은 일상 속 수많은 존재들과 교감하려고 하기에 점점 커지는 중이다. 《토토로》의 우산과 옥수수는 작은 존재들에게 세상이 얼마나 크며, 그 안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란 얼마나 다양한지를 가르쳐준다.
토토로의 구원
애니미즘이란 다른 비인간 존재들도 혼을 소유하고 기호를 가지며 의도를 가진 자기들로 대하는 태도이다(에두아르도 콘,『숲은 생각한다』, 164쪽). 이러한 태도를 확장해가면서 “생명과 함께 창발하는 활기”를 만끽하려는 태도가 곧 애니미즘이다. 하지만 이런 애니미즘은 누구에게나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사태도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애니미스트이다. 그가 애니미즘을 표방한 적은 없지만, 미야자키는 풀이나 나무뿐만 아니라 돌이나 기계에에서도 어떤 혼과 의지, 어떤 정념을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야의 작품에는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활기를 받고 움직인다. 나중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면 무나 바케스를 포함해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 신이라고도 한다. 《토토로》는 정령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예고한다. 그것이 검댕먼지이고 토토로이고 고양이버스이다.
《토토로》의 애니미즘에서 미야자키는 씩씩하고 상냥한 자매가 어떻게 토토로를 만나게 되는지를 강조한다. 한때는 검댕먼지를 만난 적이 있었던 할머니도 고고학에 바쁜 아버지도 이 정령들과 만날 수는 없었다. 작품 앤딩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출발점』에서도 언급하지만, 사츠키와 메이도 아마 더는 토토로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토토로를 만날 수 있는 조건은 어디에 있는가?
메이가 먼저 토토로를 만난다. 먼저 올챙이를 주우려다, 올챙이가 잘 안 잡히자 바케스 같은 것으로 길어 올리려다, 그 바케스의 밑면이 뚫린 것을 확인하다가, 도토리를 발견한다. 도토리 하나, 그런데 또 도토리. 이런 식으로 도토리를 따라가다가 메이는 작은 토토로들을 만나고 쫓아가다가 마침내 큰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① 작은 것에 주의를 둘 수 있는 마음이 토토로를 부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메이도 토토로를 줄곧 만날 수는 없었다. 어쩌다 한 번이다. 두 번째 만남은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다. 이때에는 사츠키가 먼저 토토로와 만난다. 사츠키는 우산없이 출근한 아버지를 마중나갔을 뿐만 아니라, 졸린 동생을 업고 있었다. ② 자기가 아니라 동생과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힘듦을 감당할 때에만 토토로는 나타난다. 나중에 사츠키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리다가 결국 토토로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게 된다. 엄마 아빠도 없는 상황에서 동생까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혼자 고스란히 감당하며, 맨발로 달려서라도 동생을 서둘러 구하고 싶은 그 간절함이 토토로에게 가 닿는다. 정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기 주변의, 자기가 아닌 것에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와 바로 그러한 작은 것들에 헌신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토토로는 만능신이 아니다. 토토로도 고양이버스도 아픈 엄마를 살릴 수는 없다. 자매들과 토토로는 함께 식물의 싹을 틔우기는 하지만(꿈을 통해) 함께 논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를 피하라고 준 우산을 악기로 쓰고, 토토로의 밤일인 싹틔우기를 자매들이 따라하는 것일 뿐. 게다가 토토로는 엄마의 병원에 따라가지 않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타자의 관점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사실 ‘토토로’라는 이름도 메이가 착각해서 부르게 된 것이다. 이 애니미즘에서는 상호주관적으로 서로 공명하지만, 같은 일을 하거나 정서적 공감을 나누는 일은 없다.
이 정령들은 다만 곁에서 함께 한다. 토토로는 빗소리를 즐기고 자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식으로 말이다. 각기 다른 시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함께 산다. 그리고 그 다름 덕분에 자매들은 위로받는다. 비록 더는 토토로를 만날 수 없더라해도, 눈이 내리면 토토로로 눈사람을 만들면서 아이들은 커 갈 것이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늦은 밤에 어쩌면 저 나뭇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높이 솟은 나무 끝에서 토토로가 부는 오카리나 소리일지도 몰라라고 하며 상상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출발점』 어딘가에서 희망이란 함께 나누는 고통이라고 했다. 다양한 문맥에서 해석해볼 수 있겠지만, 『토토로』의 애니미즘이란 ③ 서로의 어려움을 지켜보는 것의 희망이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와 문제가 서로의 음역대에서 공명하는 것. 멋지게 훈련된 오케스트라의 합창이 아니라, 함께 하늘을 날지만 각자의 목소리로 소리지르는 것과 같이 말이다.
왜 메이가 토토로를 만나게 되었을까? 메이는 언니부터 아빠, 엄마까지 가족들 전부를 매일매일 가장 많이 기다렸다. 그런 메이 앞에 나무의 정령이 나타났다. 함께 점심을 먹어주고 놀아줄 아빠나 언니를 기다리다가, 메이는 토토로들과 만났다. 토토로는 간절히 바란 대상이 아니었기에 더 순수한 즐거움을 안겨주었으며, 메이는 토토로의 푹신한 배 위에서 기다림의 노고에 대한 응원을 받았다. 메이가 사랑하는 식구들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토토로도 만날 수 없었으리라. 일상을 충실히 사는 자, 자기가 기다려야 하는 대상을 소중히 생각하는 자, 그런 자들에게 토토로는 나타난다.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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