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만이 날 수 있다
작은 비행기의 큰 꿈
미야자키의 탈것 사랑은 유명하다. 작품마다 독특한 탈것이 등장해서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그중 《라퓨타》를 고려해 비행기 종류만 몇 개 떠올려보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일 년 내내 바람이 그치지 않는 덕분에 주민들 전부가 작은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데, 그 이름이 독일어로 갈매기라는 뜻인 ‘메베’이다. 메베는 이륙과 가속에는 소형 제트엔진이 필요하지만 일단 날기 시작하면 바람에만 의지하게 된다. 메베는 언제든지 날아오를 수 있도록 평소 바람을 잘 관찰할 수 있는 ‘풍향탑’에 주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일인용인데 둘까지는 탈 수 있어서 나우시카는 페지테의 왕자 아스벨을 태웠었다. 이 작고 매끈한 선체는 나중에 《바람이 분다》의 도입부에 지로의 꿈을 통해 잠깐 작은 새의 모형으로 변형되어 나오기도 한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는 프로펠러 자전거가 나오는데, 인력(人力)으로 날게 되어 있다. 톰보가 허벅지가 찢어지도록 패달을 돌리면 조금 붕 날아오르게 되는데, 당연히 발을 멈추면 추락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날기 위해서는 먼저 달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물론 《마녀 배달부 키키》의 최고 탈것은 키키의 빗자루이다. 마법을 동력으로 하기 때문에 톰보의 인력 비행기와 완전히 대비된다. 비행기의 관점에서 보면 키키와 톰보는 경쟁자가 된다.
미야자키의 비행기로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 작품 《붉은 돼지》의 빨간 비행기이다. 사보이아 S-21이라는 기종으로 전 세계 한 대, 시험 삼아 만들었다는 설정이다. 엔진이 조종석 앞날개 위에 있어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나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날아오르면 대단히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지만, 딱 그 이유로 이륙하기가 참 어렵다고 한다. 엔진을 지브리로 바꾸고 공장에서 이륙할 때, 비행사 포로코와 정비사 피오가 엄청 고생한다. 나무가 날아오른다는 이 모티프는 아마 《토토로》에서 나왔을 것이다. 토토로는 푹신한 식물의 정령인데, 장난감 팽이를 돌려 타고 하늘을 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전쟁광인 마법사가 띄우는 군함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최고는 늘 피곤에 쩔어 뒤뚱뒤뚱 걷기만 하던 움직이는 성이, 하울과 소피의 저주가 풀린 덕분에 가볍게 날개 팔로 붕 나는 장면이다. 저주받은 이들이 서로에 대한 헌신을 통해 마음을 활짝 열게 되자, 성도 그 안에 사는 인물들도 모두 가벼워졌던 것이다. 《바람이 분다》에서는 13살의 지로가 꿈에서 새 날개 비행기를 떠올리기도 하고, 26세의 지로가 역시 꿈에서 메베처럼 가볍고 하얀 비행기를 상상한다. 《바람이 분다》가 그리는 최고의 비행기는 아마 지로가 손으로 접은 하얀 종이비행기일 것이다.
이처럼 대략 비행기 종류만 떠올려보았을 뿐인데도 기계에 대한, 비행에 대한 미야자키의 몇 가지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미야자키는 소형 비행기를 좋아하며(이 작은 비행기들은 주로 군함과 대적한다), 재질은 주로 나무이다. 종이 비행기까지 나오는 점에서 이는 아주 분명해진다. 또 엔진의 출력이야 물론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비행은 사람이 힘들여 움직이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주인공들은 이런 산뜻한 비행기로 엄마 잃은 오무를 구하고(《나우시카》), 선물을 배달하고(《키키》), 외로운 아이들을 기쁘게 하며(《토토로》,《붉은 돼지》), 지극한 사랑을 꿈꾼다(《하울의 움직이는 성》,《바람이 분다》). 미야자키의 비행기는 섬처럼 떨어져 사는 사람들을 연결하고, 생김도 운명도 다르지만 함께 살아갈 길이 있음을 하늘길로 시험하는 도구인 것이다.
하늘의 희비극
미야자키 비행의 철학을 집대성한 작품은 《라퓨타》이다. 공개된 포스터 중 하나에는 아래 광산촌을 배경으로 씩씩한 얼굴의 소년소녀가 함께 날고 있다. 《라퓨타》의 하늘은 어딘가에 천공의 성이 숨어 있는 신비로운 곳, 가끔은 사랑스러운 소녀가 두근두근한 모험을 안고 떨어지는 낭만적인 곳이다. 모든 것이 가능할 것만 같은 천공을 보며 사람들은 각기 다른 꿈을 꾼다.
도입부에, 하늘에서 여주인공 시타가 비행석을 목에 걸고 떨어지는 장면 뒤로 장엄하게 오프닝씬이 시작된다. 판화풍의 그림체로 장엄하게 과거가 회상되는데, 먼저 언덕에서 바람개비를 돌려 불을 피우는 사람들이 나온다. 한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불빛을 보는 듯하고, 다른 사람은 불쏘시개로 바람이 가져다준 선물을 조심스레 파헤친다. 그 다음, 바람으로 돌아가는 풍차가 바람 없이도 돌아가는 풍차가 된다. 이때, 풍차는 다른 톱니들과 함께 서로 맞물리며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 있다. 그런 다음 풍차의 힘으로 채굴이 가능해지고, 아마 비행석을 캔 것인지 그 힘으로 엄청나게 많은 연기가 올라오는 공장이 가동된다.
다음 장면에서는 갑자기 하늘로 떠오른 다양한 비행기의 모습이 나온다. 미야자키의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많은 비행기들이 하나의 방향을 보고 날아간다. 노아의 방주 같은 모습이지만 옆으로는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달고 위로는 수직의 프로펠러를 가득 세운 기둥들의 비행기도 있고, 독수리처럼 커다란 두 날개로 나는 것들, 혹은 날렵한 물총새처럼 보이는 것들 등 아주 다양한 종류의 비행기가 등장한다. 그 모든 비행기가 한꺼번에 날아드는 곳으로 커다란 하늘 성이 하나 나타나더니, 그 뒤로 이런저런 모습으로 하늘을 나는 궁성들이 나온다. 바로 다음, 갑자기 거대한 군함이 줄줄이 나오더니 결국 모두 부서져 내린다. 마지막은 다시 바람개비를 옆에 두고 목동인 듯한 소녀가 소와 함께 바람을 맞는 장면이다. 바람개비의 기술사적 전개를 간단히 요약하는 듯한 오프닝은 대지를 떠난 프로펠러의 비극적인 운명을 소개한다.
비행기의 운명은 왜 비극적인가? 사고로 하늘에서 떨어질 수 있어서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비행을 꿈꾸는 이들의 욕망을 하나하나 조사한다. 먼저 광산 마을 사람들을 보자. 더이상 캐낼 것이 없는 대지, 일굴 것이 남아 있지 않은 메마른 대지 위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넉넉한 내일을 꿈꾸지만 답은 없다. 이들에게 광산은 벗어나고 싶은 땅이다. 파즈와 시타가 갱도 안으로 떨어져 헤맬 때, 오랫동안 굴 속에서 생활한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는데 그는 완전한 결정체인 비행석을 쥐고 싶어 손을 부들부들 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쥐기에는 너무도 밝은 빛이라며 두려워하며 비행석 만지기를 거절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돌은 행운도 주지만 때론 불행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조건을 단숨에 초월하게 하는 힘은 제대로 이용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그 과정에서 불행한 일을 계속 겪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거리를 둔다. 광부들의 심리란 척박한 자신의 땅을 안타까워하지만 그렇다고 행운을 바라지는 않는 것. 광부들의 윤리란 정직하게 자기 한계를 계속 보아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행의 비극은 무스카의 운명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라퓨타의 왕족이었지만 멸망 이후 지상에 숨어 든 가문의 후손이다. 그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이유는 자기 발아래 사람들을 두기 위해서다. 기술과 부를 과시하며 타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이가 천상을 꿈꾼다. 이렇게 상공에서 군림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스카처럼 자기 과거를 속이고, 권력자에 아첨하며, 타인의 보석을 훔쳐야 한다. 마지막에 무스카는 라퓨타의 비행석이 폭발하며 내는 빛에 시력을 잃는다. 권좌를 향한 이기적 맹목 때문에 눈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라퓨타》에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사람 중, 가장 괴상하게 그려지는 이들은 해적단이다. 여기서부터 비행은 희극이 된다. 화려한 해적복이 암시하듯 이들이 꿈꾸는 것은 다양한 보석들이다. 이 알록달록 도적들이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해적단의 수장인 도라가 풍성하게 꼰 머리카락을 자랑하며 레이스가 부들부들 달린 옷을 입고 해적질을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해적단은 각자 자기 욕망에 충실하기 위해 돈이 조금 필요할 뿐이다.
이들은 무스카와는 완전히 다른데 무스카가 타인에게 군림할 목적이어서 속이고 죽이는 일을 일삼는 방면, 도라 일당은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 속이지도 않는다. 대놓고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소리치며 달려들고 가볍게 가지고 온다. 이것을 뺏는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 중 누군가가 자기 소유라고 대뜸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대지의 자식인 우리는 모두 그 어머니로부터 뭔가를 받아 받아 쓰고 돌아갈 수 있을 뿐이다. 도라들은 절대로 사람도 해치지 않는다. 이들이 군대와 대립하는 것은 자기 욕망을 소중히 해서다. 그런 까닭에 해적들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다만 응원한다. 그래서 파즈와 시타가 해적이 되지 않고 자기들 길을 가겠다고 할 때 활짝 웃으며 보내준다.
그 다음 하늘을 꿈꾸는 자는 파즈다. 파즈는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은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라퓨타로 향한다. 파즈에게 라퓨타는 삶의 목적이 아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동경하던 하늘을 날아보고, 아버지가 본 것을 다시 바라보며, 천공의 성을 만든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력을 기뻐한다. 그리고 라퓨타를 보았기 때문에 죽게 된 자기 운명까지도 사랑한다. 즉 파즈에게 라퓨타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하나의 길이었다. 파즈의 동반자 시타가 라퓨타를 보고 싶어하는 이유는 호기심이다. 자기의 뿌리를 제대로 보고 새롭게 살길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파즈와 시타에게 하늘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영역이다.
미야자키는 하늘을 향한 희비극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광산 마을 출신인 파즈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높이 생각하고 낮게 난다’이다. 얼마든지 하늘을 향해 눈을 높이 두는 것은 좋다. 하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 발을 땅에 붙인다는 것은 자기 자리를 본다는 것이고, 그 상황 속에서 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광산 마을 사람들처럼 자기 조건을 사랑하는 자만이, 더 나은 내일로 가는 길을 닦을 수 있다. 파즈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아버지, 자신이 사랑하는 시타를 위해 라퓨타에 간다고 하는, 그 조건을 깊이 이해했기에 천공의 마력에 빠져 비극적인 운명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글라이더를 타고 라퓨타에 무사히 도착한 파즈와 시타가 한참을 기뻐 웃는 것을 떠올려보자. 라퓨타는 가져야 하는 보물도 아니고, 도달해야만 하는 목적지도 아니다. 이르렀을 때 느껴야 할 것은 성취감(무스카)이나 허무감(도라)이 아니다. 소년 소녀는 라퓨타가 무엇의 상징이건 간에 그 실체가 어떠하든 간에, 일단 그것이 존재함으로써 추락하는 나를 받아주었다는 데 대해 감사한다.
인간을 잇는 기쁨
하늘을 꿈꾸는 자는 무엇보다 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이 말의 의미를 정리해보자. 일단 미야자키가 날아 오르는 것들을 어떻게 그리는지 살펴보자. 미야자키는 《라퓨타》에서 최고로 다양한 기종을 선보인다. 종류만 해도 엄청난데, 그 특징을 알아보자.
첫 번째는 주목할 점은 동체(動體)의 형태적 다양성이다.《라퓨타》오프닝 씬에는 비행석 덕분에 자유롭게 하늘에 뭔가를 떠올릴 수 있게 된 다양한 비행기들이 나온다. 무스카의 군함에서부터 파즈가 고무줄로 감아 돌려 날리는 장난감 비행기까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비행기를 보면 지금 우리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이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2D 폰이 한참 인기일 때에는 전화기 모양이 다양했다. 그런데 요즘은 갤럭시나 아이폰 모두 외관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기술이 형태적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 문득 야생의 도구관이 떠오른다.
무문자 사회의 민속을 전시한 박물관에 가보면 화살이나 칼 등에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곤 한다. 단지 사냥감을 잡을 목적이라면 도구에 이렇게까지 장식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자신의 인류학 탐사 중간에 유럽 관광객들이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사진을 찍으려다 큰 봉변을 당한 일화를 기록한다. 백인 관광객들이 들이닥친 마을에서 한 인디언 사냥꾼이, 인디언답게 입고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구에 큰돈을 요구했다. 백인들은 ‘짐승처럼 돈 없이 사는 주제에 도대체 뭘 하려고 돈을 달라냐’며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인디언과의 기 싸움에 질 수는 없어 결국 백인들은 많은 돈을 주고 사진을 찍었다. 자존심 상한 한 백인이 그런 김에 화살도 팔라고 했다. 그러나 이때 인디언은 난색을 표하며 팔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하도 조르니까 결국 자신의 사냥도구를 팔았다(피에르 클라스트르, 변지현·이종영 옮김,「제3장 항해 여행의 못」,『폭력의 고고학』(울력)). 이 인디언 사냥꾼에게 화살은 평생 자기가 갈고 닦고 써야 하는 도구였다. 그 자신이 잡고자 하는 것을 대신 잡아주는, 자기 신체의 연장이었다. 이 에피소드를 기록한 클라스트르는 장사치로 보였던 사냥꾼이 화살을 건네 줄 때 보인 아량과 너그러움에 감탄했다.
보통 인디언들은 평생 하나의 활, 하나의 망치, 하나의 바구니만을 갖는다고 한다. 가난해서가 아니다. 한 개의 도구를 다목적적으로 이용하며, 그것을 자기 신체 상황이나 문제 정황에 맞게 바꾸고 다듬어 쓴다. 사냥감을 잡는다라고 하는 똑같은 목표를 갖지만, 각자는 그 자신의 도구를 만들어 들고 숲으로 간다. 가장 자기답게 쏘고 찌르며 숲의 전사가 되어야 하기에, 저마다 독특한 도구를 갖는다. 우리는 어떤가? 공장에서 찍어 나온 도구를 돈으로 주고 산다. 그 와중에 도구의 외관이 점점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그 기계를 사용하는 인간 각자의 능력과 취향이 ‘모두의 능력과 취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야자키는 도구란 그것을 쓰는 인간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고 《라퓨타》의 많은 비행기들을 통해 말한다. 하늘을 꿈꾸는 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꿈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파즈도 자기 방에서 꾸준히 비행기를 만들고 있었다는 점, 키키의 친구 톰보 역시 자전거 비행기를 완성하기 위해 실험을 거듭했다는 점을 다시 떠올려보자.
두 번째로, 비행기들 중에서는 오프닝 씬에 등장하는 플랩터(Flapter)에 주목해야 한다. 플랩터는 해적 도라가 시타의 비행석을 훔치기 위해 몰고 나왔었다. 플랩터는 네 개의 날개가 잠자리처럼 뷩뷩 거리면서 날아가는 2인용 비행기로, 껍데기가 없다. 운전자가 플랩터를 몰 동안 조수가 총을 쏘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창문을 여닫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비행사와 조수의 행동과 대화가 적극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도라의 타이거모스도 껍데기가 따로 없었는데 플랩터도 마찬가지다. 플랩터가 만든 최고의 명장면은 도라가 운전을 할 동안 조수석의 파즈가 하늘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시타를 받아 안는 씬일 것이다.
플랩터는 도라의 죽은 남편이 발명한 비행기인데, 기원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오니솝터에 이른다. 여담이지만 2021년에 개봉한 영화 《듄》에 이 플랩터 같은 비행기가 나온다. 주인공 모자(母子)가 아라카스라는 사막 행성을 비행할 때 쓴다. 오니솝터는 새 모양이라는 뜻의 ‘오니소’와 날개짓이라는 뜻의 ‘프터’가 결합된 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오니솝터를 곤충형으로 바꾸어서 플랩터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작게 윙윙거리는 풍뎅이를 연상시키는 모양이 되었다. 실제 역학으로는 날 수 없다고 하는데, 미야자키는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보면서 플랩터의 비행을 그럴 듯이 구현했다.
플랩터의 핵심은 작다는 데에 있다. 미야자키는 하늘을 나는 자의 도구는 작아야 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라퓨타》에 작은 비행기가 하나 더 있었다는 점도 떠오른다. 바로 타이거 모스의 상부 파수대이다. 이 파수대는 날개를 펼치고 와이어를 뻗으면 정찰용 글라이더가 되는데, 파즈와 시타는 이 글라이더를 타고 라퓨타로 들어간다. 미야자키는 날아오르려는 자는 가벼워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미야자키의 비행관에 큰 영향을 준 비행사는 많지만 그의 비행관에 결정적인 영감을 제공한 인물은 생텍쥐페리(1900~1944), 작품은 『인간의 대지』이다. 중년의 미야자키는 생택쥐페리의 남방우편 경로를 따라 비행을 하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21세에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라테고에르 항공사에 취직해 정기 우편 비행을 담당했다. 그 시대 비행사들은 우편기를 몰았지만 실제로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비롯 정말이지 5대양 6대주를 가르는 항공로 개척에 힘을 쏟았다. 『인간의 대지』는 1939년, 생텍쥐페리가 남아프리카의 사막에서 겪은 조난체험을 바탕으로 말 그대로 ‘인간의 대지’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쓴 작품이다. 비행사가 쓴 ‘대지’ 이야기인 것이다. 생텍쥐페리에게는 하늘과 대지가 과연 무슨 관계였던 걸까?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대지』 서문에서부터 비행의 어려움을 쓴다. 비행은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저항을 통해 자신을 알도록 해주기에 어렵다.
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의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연장이 필요하다. 대패나 쟁기가 필요한 것이다. 농부는 땅을 갈면서 자연의 비밀을 조금씩 캐낸다. 그가 캐내는 진리야말로 보편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항공로의 연장인 비행기를 통해 모든 오래된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생텍쥐페리, 허희정 옮김,「서문」,『인간의 대지』(펭귄), 9쪽)
비행의 가장 큰 위험은 죽을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인간의 대지』에도 핵심 사건으로 생텍쥐페리 자신의 조난이 나온다. 하늘을 날던 비행사는 영문도 모른 채 사막 한 가운데에 처박혀 마실 물도 없이 방향도 모른 채 장장 200킬로미터나 되는 모래언덕들을 돌아다니게 된다. 작품의 전반부가 하늘에서 만나게 되는 온갖 위험들을 다룬다면, 후반부의 이 조난 장면에서 생텍쥐페리는 대지에 속절없이 붙들린 인간의 운명을 천착해 들어간다. 앞의 이야기가 자연의 본성이 갖는 폭악함과 역동성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비행’의 기술이 어떻게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털어낼 수 있는 방법이 되는지를 설명한다면, 뒤는 인간 신체의 나약함과 그 정신의 불완전함을 하나하나 벗겨 보이는 과정이 된다.
마침내 타 죽기 직전, 생텍쥐페리는 인간의 우월감을 다 내려놓게 된다. 인간, 그것은 생명이다. 사막에 밤낮으로 돌아다니는 작은 생명체들과 인간의 근본적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없다! 생텍쥐페리는 대지에서는 산다는 것 외에 존재의 다른 목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인간이 살기 위해 참으로 필요한 것은 인간이며, 오직 그 이유에서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대지의 모든 것들은 똑같이 자기 운명에 묶여 있다. 그런데 또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 각자의 발버둥은 비행사의 이착륙을 통해 연결될 수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이 연결을 위해 비행사는 자기 동체에 많은 짐을 싣고 다닐 수가 없다. 자기 땅을 넓히는 비행이 아니기에 기체에는 자기 짐도 별로 두지 않아야 한다. 점과 점을 잇기, 대지의 여기에서 저기로 잠깐잠깐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것이 비행의 임무 전부여야 한다. 그래서 미야자키의 비행기는 모두 작다. 미야자키는 작은 비행기들로 지상의 많은 운명들이 연결되는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 모든 비극과 희극을 사랑하는 자만이 이런 비행기를 몰 수 있을 것이다.
지상과 하늘의 갭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컸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우애와 연대감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하늘을 정복한다기보다 날면 날수록 대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느끼고 경이감을 갖지는 않았을까요. 어쨌든 기체는 허술해서 떨어지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 아슬아슬한 곳에서 공중에 떠있다는 사실에 고양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매우 많이 죽었습니다. 툴루즈의 비행장 벽에 붙어 있던 순직자 명부를 보면 10년 동안 100명입니다. 우편비행은 시체가 첩첩이 쌓인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젊은이들은 날고 싶었겠죠. 왜냐, 그야 날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분명 느꼈을 것입니다. 세계를, 바람을, 파도를, 그리고 공기를, 공기가 끈적인다거나, 지금은 날카롭다거나 부드럽다거나. 역풍일 때는 낮은 하늘에서 기듯이 지형을 이용해 바람을 피하면서 날았을 테고, 반대로 순풍일 때는 휘파람을 불고 싶어졌겠지요. 게다가 배달하는 우편물은 시시한 다이렉트 메일이나 환전이라고 해도, 인간이 있는 곳을 잇는 기쁨이 있지 않았을까요. 전부 선으로 잇고 싶다는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어디로 가도 인간은 있어요. 산마루의 조금 꺼진 곳에도, 사막에도, 안데스산맥의 맞은편에도. 하지만 아직 아무도 보지 않은, 그들이 본 그즈음의 풍경은 지금의 것들과는 전혀 달랐겠지요. 여러 사람에게 보인 풍경은 점점 마모되어 옅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미야자키 하야오, 황의웅 옮김,『반환점』(대원씨아이), 188쪽)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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