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라퓨타 : 천공을 향한 나무의 꿈

by 북드라망 2023. 9. 18.

라퓨타 : 천공을 향한 나무의 꿈 


아이들은 자란다
1984년 예상 밖의 성적으로 크게 인기를 끈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의 제작은 미야자키를 완전히 탈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덕분에 다양한 기획이 머리에 새로 떠오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은 《나우시카 2》를 제안했지만, 미야자키는 같은 문제를 두 번은 다루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우시카의 작품화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엄청난 흥행수익으로 어떤 일을 할까 생각하다가, 선배인 다카하타 이사오가 환경문제를 고민하며 만들려고 하는 《야나가와 수로 이야기》의 제작비로 쓰기로 했다. 하지만 너무나 꼼꼼했던 다카하타의 작업 속도가 마련해둔 제작비를 상회해버렸고 역으로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도 되어버려 미야자키는 과감하게 《라퓨타》를 잡지《아니메쥬》에 제안하게 된다. 이것이 1984년 12월이다. 


이때 미야자키는 《이웃집 토토로》,《원령공주》,《게드 전기》(나중에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영화로 만들게 된다)의 기획안도 갖고 있었다. 미야자키가 《라퓨타》를 선택한 까닭은 《나우시카》의 결말이 너무 종교적이 되어서였다. 결정적으로는 영화관에 아이들이 너무 많이 관람하러 왔던 것을 보고서였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앞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와글와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나우시카》의 큰 흥행이 아이들 덕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미야자키는 그들을 기쁘게 하는 영화를, 단순 활극으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심정으로 미야자키가 내놓은 기획서는 다음과 같다. 이후에 미야자키는 매번 지브리에 자신의 작품을 제안할 때 이런 기획서를 쓰게 된다. 그리고 이 기획서에 바탕을 두고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작곡가 히사이시 조 또한 영화음악을 구상하게 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고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라면, 파즈는 초등학생을 대상의 중심으로 한 영화다. 나우시카가 냉정하면서 선열한 작품을 지향했다면 파즈는 유쾌하면서 피와 살이 느껴지는 고전적 활극을 지향하고 있다. 파즈가 지향하는 것은 젊은 관객들이 마음껏 즐기고, 기뻐하는 영화다. 웃음과 눈물, 진심이 가득한 솔직한 마음, 현재 젊은이들이 가장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사실은 관객들 스스로 느끼지 못하더라도 가장 원하는 마음과 마음의 교류, 상대에 대한 헌신, 우정, 자기의 신념에 따라 굽히지 않고 나아가는 소년의 이상을, 이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더욱이 오늘날의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이다.”(『아트북 지브리시리즈 라퓨타』(학산문화사), 9~10쪽)


아이들이 마음껏 기뻐하는 영화! 그런데 상대에 대한 헌신, 우정, 자기의 신념을 향한 불굴의 의지라니? 아이들이 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멸망하는 인류사를 배경으로 하고, 영웅도 악당도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식으로 복잡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권선징악적이지가 않다. 가족이나 친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면서, 저주로 팔이 찢기고 팍삭 늙어버리기까지 하는 등 온갖 끔찍한 상황 속을 담대하게 걸어가는 주인공들이 나오므로 초등학교 저학년생 아이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결국 완성된 《라퓨타》도 지구 멸망을 감당하는 소년소녀의 활극이 되었다. 과연 어린이에게 맞는 영화일까?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린이라서 이해 못할 이야기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미야자키는 중요한 이야기는 남녀노소 누구나가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리지만 삶이란 복잡하고 힘든 것이라는 점을, 어떤 수준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열 살을 살고 간 사람과 칠십 살을 살고 간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이른 것도 없다, 늦을 것도 없다. 광활한 생명의 길 위에서 바라본다면, 이해해야 하고 배워야 할 것은 저마다에게 다른 무게이지만 같은 메시지로 다가올 것이다. 지구가 멸망할 때, 어린이라고 무사하겠는가? 그런 관점에서 보니 《라퓨타》는 고아인 소년소녀가 세상의 이치를 배우며 꿈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출처 - 다음 영화

 

 
광산, 자율의 골짜기 
《라퓨타》도 나우시카처럼 배경, 주제,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배경이다. 《나우시카》는 오무가 거대한 두 줄기 강물처럼 함께 어디론가 흘러가는 수평적 이미지로 끝난다. 미야자키가 《라퓨타》(1986. 8월 개봉)에서 실험하는 것은 수직적 공간이다. 땅속 깊이 내려가는 광산 마을과 하늘에 떠 있는 성과 비행기들! 이 사이로 소년소녀가 떨어져 내리기도 하고 날아 오르기도 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몇 가지 풍경 속에서 관찰하게 된다. 


먼저 광산에서 시작하자. 미야자키가 공간을 수직 배열하고 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비행석을 달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주를, 한 소년이 광산 아래에서 가볍게 받아 올리는 장면이다. 소년은 아름다운 소녀가 반짝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에 감탄한다. ‘뭔가 신비하고 즐거운 일이 벌어질거야!’ 파즈에게 하늘이란 무궁무진한 모험과 즐거움이 가득한 시공간이다. 소년이 들어가 있던 땅속은 어떤 공간인가? 광부가 파고 내려가는 지구의 심층부는 밤하늘 별처럼 반짝이는 푸른 광석(비행석)들이 있고, 하늘에는 하늘대로 빛나는 별이 있다. 그러므로 《라퓨타》에서는 깊이와 높이가 같이 공명한다. 높이와 깊이를 채우는 물질들은 모두 빛난다. 


그런데, 미야자키는 높이가 아니라 깊이 쪽에 훨씬 더 가치를 부여한다. 그것을 광산 마을의 세부가 말해준다. 광산 마을이 처음 등장할 때, 햇빛이 쏟아지며 파즈가 나팔로 아침을 연다. 모두에게 공평히 아침이 주어지는 세계이다. 광산 마을의 가장 큰 특징은 ① 브리콜라주적이라는 점이다. 갱도 자체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뚫었다가 막았다가 했던 듯하고, 작업장도 여기서 꾸려졌다 저기서 풀어졌다 했던 듯하다. 누군가가 전체를 한꺼번에 기획해서 설계한 광산은 아니다. 광부들이 사는 마을은 광산으로 떨어지는 벼랑을 끝으로 하는 평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멀리서 보면 십자형으로 계획을 세워 지은 듯 보이지만, 세부를 들여다보면 가게와 집이 편의적으로 마련된 곳임을 알 수 있다. 파즈의 집은 어떤가? 천공의 성을 꿈꾸는 소년의 집인만큼 마을 외곽의 버려진 봉홧대 같은 곳에 벽돌 등을 올려 쌓은 집이다. 판자로 군데군데 덧대어진 집 내부에는, 버려진 광산의 집기나 건물 자재가 있다. 그 안에서 고아 소년은 비행기를 연구하는 작업실과 식사 자리, 잠자리 등을 마련해 놓았으며, 지붕으로 쓰는 옥상 기둥에 비둘기 집까지 마련해 두고 있다. 


브리콜라주라는 것은 우발적 필요와 우연적 조건에 따라, 그때그때 주변에 놓인 것들로 즉흥적으로 물건 등을 만드는 기법을 뜻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인류의 이야기 만들기 기술이 기본적으로 브리콜라주라고 했다(『야생의 사고』). 사람들이 수다로 이것저것 말하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즉흥적으로 마음에서 떠오르는 심상들을 이리저리 조합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핵심은 다양한 필요들을 긍정하고, 주어진 조건을 참신하게 바라본다는 점에 있다. 파즈의 동료 광부들은 땅을 파들어가며, 그 안에서 자신들이 캐어 올릴 것이 무엇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즈의 집을 비롯해서 광산 마을 전체가 브리콜라주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그때 살아가면서 필요한 공간을 적절하게 만들고 붙이고 떼고 다시 만들며 지낸다. 이 전체가 누군가의 지휘 없이 서로 힘을 모으는 식이다. 이는 저마다 자기 판단에 따라 시타와 파즈를 보호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대장님은 해적이 아이들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팔을 걷어붙이고, 석탄 트레일을 조종하는 아저씨는 군대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한다. 부모 없는 파즈는 자기 힘으로 먹고 산다. 가게에서 다른 어른들처럼 야식을 사서 돌아올 때 그 걸음은 마을의 한 일원으로서 당당하다. 물론 부모가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어른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제 몫을 다한다. 이럴 정도이니 광부들이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각자 자신이 그때그때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광부들은 명령을 기다리지 않는다. 복종하기보다는 자율적으로 서로 돕는다.  


광산 마을의 두 번째 특징은 ② 광산의 여기저기를 복잡하고 불안한 철로가 연결한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로는 침목이기에 위태롭다. 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만큼 만들기도 어렵지 않으리라. 침목(枕木)들은 사람이 하나하나 만들었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 서로 다른 이유에서 각자 침목을 이어붙였을 것이다. 침목으로 연결된 철로 자체가 어지러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방향이 따로 없는 그 철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파즈와 해적들, 탱크가 서로 벌이는 추격씬에서 철로가 이리저리 연결되었다 떨어졌다 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선로의 방향은 누가 무엇을 나르느냐에 따라 자유자재이다. 게다가 이 선로 위에는 장갑차부터 자동차까지 무엇이든 오를 수 있다. 또, 싸움 때문에 부서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선로 자체의 연약함은 이 연결성 자체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말해준다. 선로의 불안정함과 연약함이 역동적인 활력을 선사하는 셈이다.  

 

출처 - 다음 영화


철로가 만들어주는 긴장감과 에너지는 광산 마을 사람들이 곤궁하지만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입부에 야근을 해야 하는 파즈가 고기 완자를 사러 가는 식료품 가게가 나온다. 빵을 굽는 커다란 화덕 밖으로 오른쪽에 술에 취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하지만 실제로 가게 안은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으로 가득하다. 이들이 아주 맛있게 먹을 것을 사고 나누는 모습은 라퓨타를 정복하고 싶은 악당 무스타의 화려하지만 맛 없어 보이는 혼밥과 대비된다. 


광산 마을의 건강함은 궁핍함에도 불구하고 파즈가 비둘기를 돌보고, 채소를 키운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망가는 도라 일당에게 누군가 화분을 던진다는 것도 재미있다. 사람들은 살기 어렵다지만 화단에 꽃을 키운다. 저마다 자율적으로 먹거리를 만들 줄 알고 각자의 취향은 존중된다는 뜻이다. ③ 일상을 가꾸는 저마다의 지혜가 살아 있는 마을인 것이다. 파즈의 아버지는 어떤 마을에서 사기꾼이라는 말을 들으며 죽었다. 아마 파즈는 그 동네에서 쫓겨 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 마을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파즈가 이방인이라는 점은 그의 집이 마을 외곽에 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광산 마을은 이런 이방인 고아 소년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하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풍차를 동력으로 하는 왕국을 다루었다. 《라퓨타》는 석탄을 동력으로 하는 마을을 다룬다. 그리고 라퓨타 자체는 철의 문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류 동력원(動力源)의 역사는 풍력 다음에 석탄, 그 다음을 철이라고 한다. 미야자키는 동력원에 맞추어 사회 관계를 분석했던 것일까. 바람 계곡은 자연력에 의존하기에 순응적인 사람들이 왕이나 공주의 지도를 따라 협력한다. 석탄을 캐어 먹고 살아야 하는 공동체는 훨씬 더 자율적으로 살길을 모색한다. 미야자키는 광부들의 브리콜라주식 광산 마을을 보여주면서 이들이 단지 겨우겨우 석탄을 캐어 먹고 사는 이들이 아니라, 철로를 깔고 연결하고 부수고 다시 잇는 등의 일을 하는 기술자로 묘사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광산 마을을 구상하게 된 것은, ‘라퓨타’가 거대한 기계문명의 최후를 상징한다는 점에 착안해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으로 로케이션 헌팅을 가서였다. 미야자키는 배경이 되는 이미지를 찾아서 영국 웨일스 지방의 광산촌을 방문했다. 그는 거기서 폐허가 된 광산의 흔적들을 보고 문명의 무상함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광산노동자들의 끈끈한 연대의식에 큰 감동도 받았다고 한다. 자기 땀으로 대지를 적시며 가족과 친구를 먹여 살릴 것을 만드는 노동자. 폭력을 동반한 권력은 탐하지 않고, 탐욕에 절어 있는 테크놀로지는 바라지도 않고, 오직 자율적으로 함께 살 길을 찾는 공동체! 미야자키는 이 광산 마을을 알뜰하게 그림으로써 라퓨타라고 하는 왕국의 허상을 꼬집는다. 

 

"영국의 광부 노조가 일자리와 지역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싸운 모습에 감동했어요. 그런 집단의 강인함을 영화에 담고 싶었습니다. 광산과 장비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죠. 산업의 골격은 그대로인데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었죠."(마이클 리더·제임스 커닝햄,『지브리 스튜디오에선 무슨 일이?』, 24쪽)

 


천공의 성-문명의 무덤
‘라퓨타’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하늘의 성이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는 걸리버 여행기와는 아무 상관 없이 작품을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쓴 초고에는 라퓨타에 대한 설명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 제3부 ‘라퓨타’에 그린 하늘의 섬에는 모델이 존재했다. 플라톤의 잃어버린 지리지 「천공의 서」에 기록된 라퓨타리치스가 바로 그것. 라퓨타리치스는 옛날 지구상에 거대 기술문명(현대는 두 번째다)이 번영했을 때 전쟁을 피해 하늘로 도망친 일족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고도로 발달한 문명생활 끝에 라퓨타인들은 생명력을 잃고 점차 인구가 감소하여, 기원 전 500년 경에 갑자기 발생한 돌림병으로 멸망했다.
  라퓨타인의 일부는 지상에 내려와 모습을 감추고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불명.
  라퓨타의 궁전은 텅 비고, 왕의 귀환을 기다리는 로봇들이 지키고 있다. 하지만 기나긴 세월 동안 점점 영토는 파괴되고 이제는 그 일부만이 공중을 떠돌 뿐이다. 섬은 언제나 저기압의 근원인 구름더미에 가려져, 편서풍과 함께 이동하므로 지상에서 목격된 예는 한번도 없다.
  또한 현대 기계문명 이전, 핵에너지조차 마음대로 다루던 문명이 지구상에 존재했다는 설은 현대에도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다. 인도의 민족서사시 「라마야나」나 「마하바라타」를 근거로 특히 인도에 그 설을 믿는 사람이 많다.”(미야자키 하야오,「천공의 성 라퓨타 시나리오 초고」,『지브리 아트북 라퓨타』, 172쪽)


라퓨타에 대한 이런 설명은 전작《나우시카》의 오프닝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도입부에 전사-유파가 폐허가 된 어느 왕국을 둘러보고 나오면 바로 장엄한 서사시적 분위기의 테피스트리가 나오는데(이 테피스트리도 미야자키가 하나하나 다 그리셨다고 한다), 두 번째 것에 하늘을 나는 배가 나온다. 단순히 배가 아니라 2층 집을 얹은 듯이 되어 있는데 《나우시카》가 거대한 산업 문명이 붕괴하고 천년이 지난 뒤의 이야기이니까 《라퓨타》는 바로 그 붕괴되어버린 문명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 오프닝 씬을 통해 라퓨타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알아보자. 먼저 하늘의 성을 상징하는, 더 멀리 날아가기 전의 원-라퓨타는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진 성으로서 계층적이다. 모습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인 지구라트를 연상시키는데, 성 자체가 방어적으로 해자(垓字)로 둘러싸여 있다. 성을 하늘에 띄우는 중심에 비행석의 힘이 있고, 비행석을 둘러싼 비행체 돌들이 있으며, 이 전체를 수조처럼 감싸는 물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나무가 자란다. 기능적으로 배치된 듯하고, 꼭대기에 잘 깎아 놓은 정원은 인공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이로써 이 성이 수직적 위계 질서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왕국으로서의 ① 라퓨타는 계급적이다. 이렇게 잘 조직된 설계는 광산 마을의 브리콜라주식 스타일과 대비된다. 무스카는 라퓨타 왕실의 후손으로, 폐허가 된 왕국이라도 그곳의 왕이 되고 싶어한다. 계급사회에서 출세를 못하는 남자의 억울한 눈빛이 무스카의 그것인데, 라퓨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계층적 삶에 짓눌려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스카는 불쌍한 로봇을 마구 부리고 필요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비행석을 비롯해서 닥치는 대로 훔친다. 자기가 옳고, 자기만 마땅하기에, 함부로 뺏고 다치게 하며 제 마음대로이다. 과거, 그의 가문은 루시타 계열보다는 서열이 낮았을 것이기에 비행석을 가질 수 없었고, 그는 열등감으로 복수를 기획했다. 계층적 사회에서는 옳은 것이 높지 않고, 높아야 옳은 것이 된다. 그런 계층성의 압박 아래에 놓이게 되면 사람은 시선을 늘 위로만 두어야 하기에 한도 없이 열등감에 시달리게 된다. 라퓨타는 아마 무스카 같은 사람들을 동원해 성을 높이 높이 쌓아 올렸을 것이다.   

 

② 이 계급성은 군사적이다. 중간에 나오는 지상의 왕국 군인들의 티디스 요새와 라퓨타가 닮았기 때문이다. 둘 모두 성벽을 갖고 있고,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다. 오프닝 씬에는 라퓨타의 과거가 소개되는데,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그 시절 하늘에는 각각의 성들이 떠 있었으며 모두 무기고를 갖고 있었다. 무스카도 분명히 말한다. 라퓨타란 하늘에서 군사력으로 군림하던 성이었다고. 

 

생각해보면 끔찍하다. 시타와 파즈가 처음 내리는 정원, 새들이 알을 까고 거신병이 꽃을 키우는 그 정원, 건조한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가득하고 수목이 우거진 그곳을 떠받치는 것이 막강한 군사력이라니 말이다. 말끔하고 깨끗하고 정돈된 이 자연은 수많은 전쟁과 광폭한 약탈의 결과인 것이다. 자연이란 뭘까? 자연은 정돈을 모른다. 사실 라퓨타가 망한 뒤로도, 풀은 계속 자라고 물고기는 진화하고 새는 날아오르지 않던가. 미야자키가 깨끗하게 정돈된 자연에 대한 이미지를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다음 작품 《토토로》에서도 확인될 것이다.   

 

미야자키는 평등한 공동체 같은 것을 꿈꾸며 라퓨타를 비판하지 않는다. 광산 마을에는 대장이 있고, 어머니들이 있고,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며 함께 산다. 라퓨타의 계급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스카처럼 모두가 같은 욕망만 키우고 살기 때문이다. 무스카는 일인자인 시타를 질투하며, 일인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한다. 왕이 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시타를 어리석게 생각하면서까지 말이다. ③ 라퓨타에서 그려지는 계급은 다층적인 위계가 생기롭게 조직되는 사회가 아니라, 실은 모두가 똑같은 능력과 욕망을 갖길 원하는 일원적 세계인 것이다. 

 

라퓨타는 멸망한다. 그런데 멸망하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무스카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라퓨타를 구해야 한다며 시타는 멸망의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천공의 성이 모두 무너지는 것은 아니었고 기계문명의 외피를 두른 이 계층적 외곽 부분만 부서져 내렸다. 기계의 껍데기가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자, 그동안 자라온 라퓨타의 거대한 뿌리가 드러났다. 멸망이라지만 인간의 종말일 뿐 비행석과 나무의 끝은 아니다. 그리고 갑갑한 철갑과 성곽이 사라지자 라퓨타는 더 높이 날아오르게 된다. 허공으로 멀리 멀리 날아간 라퓨타는 거대한 뿌리를 쫘악 펴고 바닷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해파리처럼 천공에 둥실둥실 떠 있다. 

 

시타가 멸망의 주문을 외우기로 결심한 것은, 천공의 성은 인간에게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타의 고향 곤도와에서 전해지는 노래에 따르면 인간은 땅에 뿌내리지 않고서는 살지 못한다. 땅과 함께 바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천공의 성이란 지상에 붙들린 운명에 대한 자각과, 그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라퓨타가 완전히 파괴되지 않음은, 땅을 떠날 수는 없지만 하늘을 꿈꾸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한 조건(한계)과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야자키는 이러한 지상(인간의 조건)과 천공(인간의 꿈)을 함께 구현한 존재를 라퓨타의 거대한 나무로 그린다.  

 

출처 - 다음 영화



타이거 모스-욕망의 풍선
천공의 성 라퓨타가 멸망과 탄생의 역설을 품은 성배이고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면, 하늘을 나는 자의 꿈을 다르게 현실화시킨 것이 해적단의 비행선 타이거 모스이다. 모스? 그러니까 나방인데 거대한 나방이다. 마마와 그의 많은 아들들로 조직된 이 해적단은 나중에 《붉은 돼지》에도 나오는데, 마마 대신 아들들이 엄마 이상으로 화려한 외모를 자랑하며 약탈에 나선다. 외모가 화려하다는 점, 다양한 크기와 빛깔로 반짝이는 보물을 원한다는 점은 이들이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욕망은 무스카처럼 허황되거나 억지스럽지 않다. 

 

해적단의 비행선이 천공의 성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자. ① 우선 라퓨타가 돌과 금속을 주재료로 하는 것과 달리, 비행선은 주로 천으로 만들어졌다. 전함 골리앗보다 약하지만 바람을 이용하기 때문에 더 높은 고도에서 무역풍을 타며 다양한 전술을 쓸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 맘마의 비행선이 바람을 좋아하는 점은 비행선의 조종실이라든가 주방이 외벽으로 감싸져 있지 않고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 방식으로 뚫려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처럼 미야자키는 날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다양한 높이에서 온갖 바람을 겪어야 한다고 본다. 두꺼운 철갑 안에 숨어서는 안 된다.

 

② 두 번째 특징은 타이거 모스가 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곤충을 닮았다는 점인다. 그래서 조종실인 머리가 위에 있지 않고 앞에 있게 된다. 머리야말로 바람을 헤치고, 돌진하며, 전망하는 자리인 것이다. 머리는 군림하지 않는다. 실제로 해적단에서 제일 배짱 좋고 모험심 강한 사람은 할머니 선장 도라다. 도라는 시타를 구하기 위해 화염에 쌓인 성으로 돌진하면서 장성한 아들들에게 ‘너희는 엄호나 해!’라고 씩씩하게 명령한다. 

 

③ 세 번째 특징은 타이거 모스에서 가장 부각되는 공간이 모두 살림과 관련된다는 점이다. 첫째로, 조종실에서 도라의 집무실 겸 침실을 지나 주방으로 가는 길에 빨래가 걸려 있다. 미야자키의 이후 영화에서 빨래를 말리는 장면은 하나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빨래란 무엇인가? 입었다 벗는 것. 입은 채로 한 일 덕분에 더러워졌지만 다시 새로워져서 입을 사람을 또 일터로 보내는 물건이다. 빨래가 하늘에서 말려진다는 것인 이 해적단이 나날을 새롭게, 그것도 생활하면서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빨랫줄에 걸린 옷들을 보자. 빨래는 일단 남자 것과 여자 것이 구별되어 걸려 있다. 그런데 같은 줄에서 대장인 도라와 신입인 시타의 옷은 동등하다. 해적들의 빨랫줄에 걸린 커다른 팬츠와 러닝 셔츠를 보자.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으니 모두의 옷일 수 있겠다. 속옷과 겉옷이 나란히 걸려 있고, 다양한 위치에서 일하는 각자는 옷을 같이 입을 수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해적들은 선장을 모시지만, 모두가 동등하게 서로를 대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림과 관련된 두 번째 공간은 주방이고, 주방은 빨래 이상으로 중요하다. 전작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는 워낙 바쁘고, 매일매일을 하늘에서 쉬지 않고 날아야 했기에 앉아서 뭘 먹을 시간이 없었다. 나우시카의 주식은 치코 열매인데, 쓰지만 엄청 영양이 많았다. 나우시카는 에너지바 같은 것을 먹고 그렇게나 일을 많이 했던 것이다. 미야자키는 그런 주인공의 운명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일까? 《라퓨타》의 타이거 모스에서는 음식을 만드는 것부터 나눠 먹는 것까지가 엄청 자세히 나온다. 

 

주방의 세부 특징을 보면, 해적선에서는 하루에 5끼를 먹는다고 하니 당연한데 엄청나게 많은 식재료가 쌓여 있다. 감자도 엄청 많아서 해적들은 ‘감자 깎는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며 시타와 파즈를 반기기까지 했다. 5번의 리듬이 워낙 숨가쁘다보니 설거지나 재료 정리가 잘 안되어 있었는데, 시타가 주방장이 되고부터는 예쁜 시타를 보기 위해 몰려들어 함께 일하게 된다. 미야자키는 라퓨타의 보물 때문에 해적선을 수리하고 움직이느라 힘이 많이 들었던지, 모두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는 것을 강조하다. 사실 도라 일당은 해적선에서뿐만 아니라 파즈의 집을 점령해서도 자기들의 식재료를 이용해 엄청나게 먹어댔다. 이들이 파즈의 식재료를 쓴 것은 확실히 아닌데, 왜냐하면 파즈는 시타에게 딱딱한 식빵과 계란 후라이 하나를 겨우 대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라 일당은 해적들이지만 누구나의 아무것이나 훔치지는 않는다. 이런 점도 막무가내로 제 욕심을 채웠던 무스카와 대비된다. 많은 욕망을 모두 긍정하지만, 어떤 영토에도 그것을 허락받을 필요를 못느끼는 이들은 아나키스트이다. 이들은 오직 자기 삶에 충실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도라 일당과 무스카는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 하늘에서 잘 내려오지 않는다. 이들에게 하늘이란 자신들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곳이다. 무스카는 혼자이고 도라는 아들들과 살지만, 둘 모두에게 광산에서와 같은 공동체는 없다. 미야자키가 《라퓨타》에서 보여주는 세 개의 공간은 어렵지만 대지에 발 붙이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인간의 조건과, 버릴 수 없는 천상의 보물에 대한 환상을 보여준다. 시타와 파즈가 이 세 개의 공간을 통과하면서 ‘높이 생각하고 낮게 살아가라’고 하는 비전을 갖게 된다. 작품 마지막에 파즈와 시타는 곤도와로 방향을 튼다. 누군가의 고향에 들르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곤도와에서 둘이 결혼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파즈는 더 많은 곳을 경험하고, 보다 새로운 삶을 찾아보기 위해 이 땅에서 저 땅으로, 계속 몸을 옮기는 비행을 계속할 것이다. 다음주 ‘비행’이라는 주제 편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자.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