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세 가지 얼굴 : 나우시카, 오무, 거신병
캐릭터란 무엇인가?
미야자키의 독창성이 최고도로 빛나는 부분은 상식을 뛰어넘는 캐릭터 창조에 있다.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거대 벌레와 뼈와 살을 가진 거신병의 《나우시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닮은 또 다른 거신병의 《라퓨타》, 나무의 신이지만 푹신하며, 뿌리의 힘을 북돋우지만 하늘을 나는 토토로의 《토토로》를 떠올려보자. 마녀이기보다는 패션 리더가 되고 싶은 고독한 사춘기의 《마녀 배달부 키키》가 있고, 파시스트가 되느니 차라리 돼지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돼지의 붉은 모험,《붉은 돼지》가 있다. 어디 그뿐인가? 캐릭터로서는 토토로와 쌍벽을 이루는 얼굴 없는 정령 가오나시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어떻고, 나이가 고무줄도 아닌데 늙음과 젊음을 오가는 소피의 청소 이야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또 어떤가? 마법을 포기하고 그저 평범하게 인간이 되어 늙어 죽기를 선택한 물고기 포뇨의 이야기도 있다(《벼랑 위의 포뇨》).
여기서도 단 하나의 예외가 《바람이 분다》다. 생명과 반생명의 경계를 가볍게 넘으며 온갖 방식으로 마법을 겪는 독특한 캐릭터가 하나도 없는 작품이 《바람이 분다》이다. 미야자키 스스로가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들었기 때문인지, 이 작품에서 환상적인 것은 모두 꿈으로 처리되어 있다. 캐릭터도 지극히 역사적인 성격만 부여받고 있다. 물론 매번이 미야자키에게는 최후의 작품이었겠지만, 특히 《바람이 분다》에서 독특한 캐릭터 창조하기를 포기한 이유도 차차 알아보자.
미야자키는 하나의 사물, 동식물, 인간, 신, 어떤 존재도 특정한 성격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어린이라서, 여성이라서, 이러저러한 조건에 처해 있기 때문에. 특정한 방식으로 정체성을 찾고, 뭔가 확실한 자기 자기를 고집하는 이들은 미야자키 세계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다. 모두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 살아가야 할 숲과 바다를 바라보며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찾으며 산다. 그래서 5살 메이도 그 나이로서는 쉽게 감행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하게 이웃 마을의 병원에 계신 엄마를 위해 혼자 옥수수를 들고 길을 나선다.
전세계 민담을 분석한 러시아의 신화학자 V.Y. 프로프는 캐릭터란 이야기를 유형화시키는 장치라고 분석한 바 있다. 주인공과 적대자, 증여자, 조력자, 공주, 파견자, 가짜주인공 등에 어떤 전형이 있어 나이, 성별, 지위, 겉모습을 통해 변화무쌍한 사건의 리듬을 중재하며 주제를 향해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이다(프로프, 황인덕 옮김,『민담형태론』제6장~8장 참고). 이야기 분석가인 오쓰카 에이지(오쓰카 에이지, 선정우 옮김,『캐릭터 메이커』(북바이북))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주인공의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이런 주변 캐릭터들의 능숙한 조합에 의해 빛을 발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미야자키의 캐릭터는 다르다. 미야자키의 주인공은 특정한 서사 유형을 따르지 않는다. 적대자가 악인도 아닐 뿐더러, 조력자 역시 주인공들의 발목을 잡기 일쑤다. 선악을 할당받은 이들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도 착하지 않다. 굳이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주인공을 정의해보자면, 그들은 한결같이 ‘자기 안에 내재된 능력을 무궁무진하게 꺼내어 쓰게 되는 자’이다. 그 자신도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를 모를 그런 능력들을 말이다. 미야자키는 자기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용감히 운명을 향해 돌진하는 모험가를 사랑한다. 그가 창조한 모든 캐릭터는 각자에게 내재한 고유한 능력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립된 독특한 생명들이다.
그와 관련되는데, 『네버 엔딩 스토리』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원작과는 좀 달랐지만. 그 속에 용이 나오는데 굉장히 알기 쉬운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이게 정말 시시한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쪽이 우리에겐 훨씬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요컨대, 인간이 의인화해 가장 이입하기 쉬운 걸로 하면 할수록 시시해지는 겁니다. 좀 더 그런 틀을 넘은, 혹은 틀을 넘는다고 하기보다 예전부터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인간보다 훨씬 거대한, 간단히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 힘 같은 것에 대한 동경이 아무래도 처음부터 있어요. 이건 제게만 있는 게 아니라, 반복하고 반복해서 선조들로부터의 기억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라서. 아무래도 저 자신도 자연이란 걸 생각할 때, 그런 것으로서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뭔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자연이란 것은 터무니없는 힘으로서 인간의 선이나 악을 넘은 거대한 존재로서 있어요. 우리가 그런 자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네버 엔딩 스토리』를 보면 그들의 시점이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시시해요, 용이라든가, 거기에 나오는 거대한 돌거북이 술에 만취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눈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이었다면, 그 거대한 생물이 돌 속에서 나타났을 때 감동을 했을 텐데, 그게 주정뱅이에 디즈니랜드의 인형처럼 만든 얼굴로 나오는 걸 보면, 그 녀석들의 자연관은 얼마나 협소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를 볼 생각이 사라지고 말죠.(미야자키 하야오, 황의웅 옮김,『출발점』(대원씨아이), 523쪽)
미야자키 캐릭터의 주변성과 괴물성
《나우시카》뿐만 아니라, 미야자키의 캐릭터들은 크게 주인공, 주변 인물, 괴물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단 ‘주변성’과 ‘괴물성’에 대해서 조금 설명하고 싶다. 주변적이라는 것은 출연 분량이나 비중이 낮은 경우를 말한다. 중심 줄거리야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따지고 보면 나우시카도 자기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국 사이의 전쟁에 자기 철학 때문에 말려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작품-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주변적이다. 즉, 미야자키는 주변 인물에게 중심 이야기의 주변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조건과 이해가 다 있기 때문에 전체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진다. 덕분에 결론은 슬프지도 해피하지도 않다. 따지고 보면 해피앤딩이라는 것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만 그렇게 느껴지는 일이 아닐까? 계모의 입장에서 백설공주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산다는 것이 어찌 기쁠 일이겠는가? 미야자키는 중심 줄거리와 무관하게 캐릭터를 따라 다각도로 분기시킨다. 덕분에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는 저마다의 삶이 마주하는 어려움과 즐거움을 종합하면서 삶의 신비에 다가가게 된다.
괴물성은 원한을 품고 죽어가는 맷돼지로부터 저주를 받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을 쓸 수 있게 된 아시타카를 떠올리면서 만든 부류이다. 아시타카는 숲의 저주를 받아 온갖 생명들의 에너지가 증폭된 몸이 된다. 엄청나게 빠르고 강력한 힘으로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두에게 필요 이상의 힘을 가해 그들을 죽여버린다. 아시타카의 몸에는 그런 힘을 쓸 때마다 붉은 화상이 번져갔다. 미야자키에게 괴물이란 통제불가능한 힘을 소유한 존재이다. 자기 죽음에 원통해 하며 타인을 원망하는 자, 자기의 삶은 마땅하고 타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 그들은 괴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원령공주》의 아시타카는 중요한 주변인이다. 주인공 원령공주는 어리석은 인간과 싸우지만, 아시타카는 자기 힘을 절제하기 위해 분투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버리다가는 모두를 죽여 없앨 수 있다. 그 과정에 자기도 붉은 화상을 입은 몸이 되어 끔찍한 존재가 된다. 나중에 《원령공주》 분석에서 조금 더 다루게 되겠지만, 이런 괴물의 모습은 기계문명에 도취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한다. 과도하게 에너지 의존적으로 살게 되어 통제불가능한 원자력까지 소유하게 되어버린 지금이야말로 저주받은 맷돼지신의 나라가 아닐지?
오무는 고뇌한다
미야자키가 《나우시카》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살아라!’이다. 이 작품에서 생명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캐릭터는 오무와 거신병, 그리고 나우시카다. 차례대로 살펴보자.
오무는 그런 것들의 집합입니다. 커다란 무언가를 그리고 싶었을 때, 파충류나 포유류가 사는 세계는 너무 알기 쉬워서는 안 돼요. 다른 생태계가 생겨났을 때에는, 파충류나 포유류를 기술적으로 어떤 형태로 바꾸었을 때, 어차피 지금까지의 파트를 모은 것뿐이잖아요. 그래서 곤충이나 절지동물 쪽이 조합하면 뭔가 알 수 없는 게 되기 쉽다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감정이입할 수 없는 형태로 만들려고 해서요. 벌레가 싫은 사람은 많으니까, 대립하는 생태계를 표현하기에 알맞을 거라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꿈틀거린다는 글자가. 전쟁 전 복자(伏字)가 많은 책을 친구가 빌려 와서, 에도가와 란포인데 복자가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괜히 안절부절못해서 그 글자를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무(王蟲)란 말 그 자체는 왕의 벌레랄까, 『Dune』의 샌드웜이나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오옴’이란 불교언어 등 그 부분을 섞어서 ‘커다란 벌레니까 오무다’ ‘다리가 많으니 벌레가 3개다’ 등 애당초 출발점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그렇게 보여주느냐 하는 것으로 ‘성충이 되면 어떻게 될까’ 등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말이에요.(『출발점』, 524쪽)
만화 『나우시카』에 따르면 오무는 오염된 세상을 치료하기 위해 옛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종이다. 거신병과 기원이 같다. 미야자키는 초반에 나우시카가 오무의 허물을 발견하는 장면을 길게 그린다. 길이가 70~80미터나 되보이는 압도적으로 큰 몸체에 수많은 눈을 가지고 있고, 흡사 공벌레처럼 껍데기를 겹쳐 오므렸다 펼 수 있는 듯이도 보인다. 단단한 철갑이 오무라들었다가 펴지고 하는 등의 동작은 거신병보다 오히려 더 기계적이다. 나중에 미야자키는 오무의 이런 움직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오무는 굼떠 보이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 오무의 허물이 묘사될 때, 얼굴 앞쪽으로 나 있는 발들 역시 날렵하면서도 우아하다. 마치 잘 달리는 육상선수의 다리를 세라믹 본으로 뜬 것처럼 나오는데 큰 몸집과 달리 민첩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처음에 나우시카는 오무의 허물을 찔러보기도 하고, 그 눈 껍데기 하나를 떼서 유리 우산처럼 덮어쓰고 부해를 관찰하기도 하며 천천히 명상하는 시간을 보낸다. 살아서 움직인다면 도대체 어떤 분위기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이 거대한 생물과 나우시카의 첫만남이 서정적이고도 평온하게 그려진다는 것은 앞으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끝은 아름다울 것임을 예고한다. 영화 전체에서 나우시카는 먼저 오무의 외양에 감탄하고 나중에는 그 친절한 성정에 감사하게 된다.
오무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적이라는 점이다. 오무는 철갑을 두른 듯한 거대 괴물처럼 보이지만 매우 예민해서 금방 긴장을 하거나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신속하게 사태를 판단하고 상황을 이해한다. 오무는 인간과 같은 표정은 없지만 많은 눈으로 자신의 상태를 보이기도 하고, 그 창을 통해 세상의 복잡함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오무는 교감 능력이 대단해서 풍요로운 정서를 가진 나우시카와 즉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나우시카는 벌레 피리로도, 인간의 언어로도,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오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오무끼리는 즉각적이고 전체적인 방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이들의 무리 생활은 공감각적인 것이다. 나우시카의 능력도 특별하지만 오무 쪽의 지능은 더욱 대단하다.
분해의 상징이자 자연의 압도적인 파괴력을 상징하는 오무는 섬세한 지성과 풍부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겉으로는 생명의 상징인 것처럼 보여도, 기원을 따라가보면 그는 인공배양된 하이브리드로서 순수히 자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미야자키는 생명의 순수성 같은 것을 고집하지도 않고, 자연과 인공물을 대비시키지도 않는다. 미야자키가 보기에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은 없다. 만물이 서로 관계하면서 살고 죽는 장이 있을 뿐이다. 미야자키의 이런 생명관이 거대한 수준에서 그려지는 것은 《벼랑 위의 포뇨》이다. 《포뇨》에는 곳곳에 쓰레기가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물고기 포뇨가 인간이 되는 기본 줄거리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 보임에도 말이다. ‘물고기에서 인간으로의 진화’를 떠받치는 것이 온갖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라는 것은 미야자키의 생명관을 잘 보여준다. 쓰레기라지만 도대체 누구의 쓰레기인가? 모든 것을 썩게 만들어서 무용한 것으로 돌리는 오무의 정화 능력이 과연 모두에게 부당한 일이 될까? 만물을 생하게 하고 멸하게 하는 자연이라는 평면은 부정을 모르고 모든 것은 원료로 삼아 변용을 일으킬 뿐이다. 흔히들 《나우시카》를 포스트 아포칼립스적이라고 한다. 아포칼립스란 종말 대재앙을 말한다. 오무는 마지막까지 정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결말에서 오무는 바람 계곡으로 향하는 방향을 틀긴 했지만 다시 먼 곳으로 움직임을 계속한다. 그러나 이런 오무 덕분에 만물은 다시 태어날 것이며, 그 와중에 인간이 죽어 없어질 뿐이다.
《나우시카》를 필두로 해서 미야자키는 멸망의 이미지를 즐겨 그렸다. 바로 다음 작품 《라퓨타》에서는 아예 멸망을 외치는 주문까지 나온다(“바루스!”). 하지만 실제로 쾅 하고 모든 것이 깨끗하게 소멸해 순수하게 새로 시작하는 상태를 그리지는 않는다. 《바람이 분다》에서 비행기 설계사 지로는 자신의 비행기가 살육 무기로 쓰이고 그 어떤 조종사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하지만 지로의 멘토 베를리니는 그것이 꿈꾸기를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인간의 실패, 한 집단의 과오, 이 모든 것과 함께 생명은 다시 또 거듭날 것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의 이런 생명관에 영향을 준 것은 미나마타 천이다(『출발점』, 303쪽). 1956년 일본의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서 유기수은이 포함된 조개 및 어류를 먹은 주민들에게서 집단적으로 발생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메틸수은은 인근의 화학 공장에서 바다에 방류한 것이었다. 유기수은에 중독이 되면 온갖 기형이 일어나는데 혀, 입술의 떨림, 혼돈, 그리고 진행성 보행 실조, 발음장애 등이 나타난다고 한다. 사지 말단부에서 곰지락운동(chorea, 근육의 불수의적 운동장애)이 나타날 수 있고 감정의 변화 및 행동장애도 일어난다. 초기에 무기력, 피로 등으로 시작하지만 이후 심한 우울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이 세상에 알려지자 정부는 미나마타 천을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그렇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고 내버려진 채 몇 십년이 지난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수은으로 오염된 미나마타만에서 어업이 금지되자, 일본의 다른 바다에서는 볼 수 없을 정도의 물고기 떼가 몰려오고 바위에 굴이 엄청 붙게 되었다. 모두 오염된 생명이었다. 미야자키는 인간이 먹을 수 없지만, 인간이 뿌려놓은 죄악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생명체들을 보고 경악과 감동을 동시에 받았다고 한다. 미야자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선악이 없는 세계관은 이 첫 영화에서부터 개진되는데, 수은으로 오염된 생명도 제 힘껏 살기 위해 분투한다는 점에서 깨끗한 바다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존재는 아닌 것이다.
몇 년 전에 플라스틱을 분해하는 세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왜 아니겠는가? 자연이 왜 플라스틱만 내버려두겠는가 말이다. 오염수 방류가 확정되었다. 아무 걱정할 것이 없다. 생명은 오염수와 함께 진화를 거듭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틀어지고 말라 죽어갈 내가 문제이지 생명 그 엄청난 힘에게는 아무런 해가 될 것이 없다. 나우시카가 사랑한 거대한 오무는 바로 그런 생명의 웅장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무자비해 보이는 오무도 자식을 잃으면 슬퍼하고 누군가가 제 새끼를 위해 몸을 바치면 고마워한다. 오무의 분해력은 모두가 망하는 길을 닦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통을 슬퍼하면서도 장엄한 생명의 운동에 자신을 내맡기는 담대한 운명애를 표현한다.
『나우시카』에서 나우시카는 생명이 모두 고뇌한다는 것을 깨닫고, 이 거대한 번뇌의 장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도 생명은 끝이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을 이해하고, 마침내 자기 소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한다. 바로 그 메시지가 ‘살아라!’이다. 나우시카가 말하는 ‘살아라’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 생명력의 확장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생명의 무궁무진함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분해되고 썩어가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살린다. 이 점을 잊지 말고, 살! 아! 라!
《원령공주》에는 한센병 환자들이 나온다. 그들은 몹쓸 병에 걸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며 신음한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그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운명에 처해 있지만, 살아가야 할 이유란 적지 않다고. 그 이유란 모두 타인들, 나 바깥의 풀과 곤충이 준다고. 모든 것과 내 삶이 함께이기에 나는 죽을 수 없고 죽지 않는다.
거신병은 헌신한다
미야자키가 《나우시카》에서 탄생시킨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캐릭터는 거신병이다. 만화본에 따르면 거신병(巨神兵, giant god warrior)은 고대의 기계 문명이 인류를 통제하려고 만들었지만, 7일간 그 불로 모든 문명을 불태운 뒤 그 자체도 무참히 스러져 오무에 의해 분해의 긴 과정을 밟게 된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과거 거신병 중 하나가 페지테 왕국 아래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 오염 없는 대지를 꿈꾸는 인간들이 부해를 불태우는 무기로써 서로 다투어 갖고자 하는 대상으로 나온다. 작품 끝에,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채로 태어나 마구잡이로 불을 쏘다가 육신이 다 무너져서 흘러내리는 것으로 그 끝을 보여준다.
《나우시카》에서 온전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이 거신병도 튼튼한 뼈와 함께 부드러운 피부를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크샤냐의 명령에 그토록 순종적인 것으로 보아 본디는 친절하고 착한 존재임을 예상하게 해준다. 실제로 『나우시카』에서 오무는 부화된 뒤 처음 만난 나우시카를 엄마로 생각하며 따르기도 한다. ‘보호’받고 싶어하고 ‘헌신’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거신병과 오무, 나우시카는 그 본성이 닮았다.
미야자키는 이 거신병을 시작으로 이후로도 거대한 기계 이미지를 충실히 연구·표현했다. 미야자키가 좋아하는 기계의 계열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거대 로봇형이고 다른 하나는 비행기이다. 거대 로봇형은 거신병에서 라퓨타의 정원사 거신병에 이어,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다양한 표정을 갖고 사지도 자유롭게 움직이는 형으로 발전한다. 거인인 것에서 시작해서 거인의 형상을 한 집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비행기형은 역시 라퓨타에 등장하는 해적들의 다양한 탈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회사 이름의 원조가 되는 이탈리아 엔진 ‘지브리’를 달고 붉게 날아오르는 《붉은 돼지》의 비행기를 거쳐, 마지막에 《바람이 분다》의 제로센까지 이른다. 중간에 거대한 나무 정령이 팽이를 타고 아이들 태워 날아오르는 《토토로》도 제작되는데, 오무가 그렇듯이 생명과 기계의 경계를 따로 두지 않았으므로 토토로도 로봇은 아니지만 거신과에 속해 《나우시카》 거신병의 계보를 잇는다고도 할 수 있겠다.
미야자키가 큰 것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벌레를 크게 만든 오무의 형상을 보라. 세상 작은 것이 벌레라지만 그것은 도대체 누구의 입장에서 작은가? 오무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해서는 크고 작음을 따로 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 《바람이 분다》에서도 설계사인 지로가 꿈꾸는 것은 그저 크기만 한 비행기가 아니라 고등어를 닮은 날렵하고 작은 비행기다. 작중 지로의 멘토인 이탈리아 설계사 베를리니의 말에 따르면, 커야 한다면 그것은 가족과 친구를 한꺼번에 즐겁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토토로가 그토록 빵빵하고 푹신해야 하는 이유도 인간을 제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토토로는 풍성한 식물의 생장력을 상징하면서도 포근하게 어린 것들을 품어주기 위해 그토록 큰 몸이 필요하다.
기계의 태생적 관점에서도 미야자키의 기계관을 따져볼 수 있다. 하나는 탄생설, 다른 하나는 조립설이다. 먼저 탄생설에 대해서 알아보자. 《나우시카》의 거신병은 천 년 동안 지하에 잠들어 있었다. 그 부활의 과정을 보면 마치 생명체처럼 태 안에서 꿈틀꿈틀 숨을 쉬는 듯하고, 실제로 전사 유파는 그것을 ‘살아 있다’고 표현한다. 바람 계곡에서 토르메이카의 군인들은 탄생을 준비하는 거신병을 인큐베이터에서 돌보듯이 키운다. 라퓨타의 거신병들도 알처럼 생긴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다. 이들 로봇은 기계이지만 동물들처럼 태(胎) 안에서 태어난다. 이러한 점은 《붉은 돼지》에서 붉은 비행기가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나폴리의 피콜로-비행공장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과도 닮았다. 그 공장은 어머니들이 정성을 다 해서 뭔가를 태어나게 하는 듯이 보이고, 덕분에 공장 한 구석에서 보모처럼 아이를 흔들침대에서 재우는 붉은 돼지는 자연스럽다. 돼지의 비행기가 파시스트들 몰래 공장에서 날아오르는 장면,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바람을 타게 되는 비행기의 꿈틀거림은 아기 비행기의 출산 장면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거대한 기계 인간-집인 성은 태어나지 않는다. 불의 악마인 캘쉬퍼가 이리저리 필요한 물건들을 아무렇게나 붙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캘쉬퍼가 마법사 하울의 심장이고 하울의 마음에는 온갖 욕망이 가득했기에, 이 기계-집은 정신없이 욕망을 조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울의 성은 태어나지 않고 조립되었다. 기계의 탄생을 조립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바로 전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거대한 기계-공장인 온천장은 생물처럼 화력을 받아 움직이면서 쉴 때는 쉬고 한다. 거대한 온천장은 일꾼들의 숙소와 이발소까지 갖추고 있고, 손님들을 위한 식당과 다양한 욕장 등을 구비했을 뿐만 아니라, 마녀의 오피스까지 갖춰져 있으니 역시 다양한 이해가 얽혀 조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의 조립에 관해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작품은 《바람이 분다》이다. 여기서 지로는 비행기를 낳지 않는다, 설계한다.
그럼 기계 발생의 차원에서 탄생과 조립(설계)이라는 관점은 각각 어떤 메시지를 만드는가? 우선 《나우시카》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탄생설에서 미야자키가 강조한 것은 기계의 심성이다. 거신병이 워낙 강력하게 불을 내뿜어서 잘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태어난 거신병은 주인인 크샤냐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고 할 수 있다. 명령을 잘 듣고 주인을 기쁘게 하려 한다는 점에서 순하고 헌신적이다. 만화판에서는 거신병이 나우시카를 엄마라고 부르며, 나우시카를 만족시키기 위해 불을 사용한다고도 한다. 미야자키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인공물이든 일단 태어났다면 거기에는 마음이 들어가 있다는 점을 미야자키는 강조한다. 태어난 기계들은 미야자키의 애니미즘을 잘 보여준다.
조립된 기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기계의 조립에 여러 가지 욕망이 함께 말려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설계사인 지로가 집중하는 것은 ‘회전 나사’이다. 비행기 전체의 틀, 형태역학적 장점 이런 것들이 아니라 바람의 저항을 줄이고 동체의 무게를 잘 잡아 지탱할 수 있는 작은 나사가 지로 고민의 핵심에 있었다. 나사란 비행기에 들어가는 온갖 부품들을 연결시키고 지탱시키는, 그저 부분이지만 없어서는 안될 결정적 요소다. 지로는 나사의 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 미야자키는 조립된 기계를 통해, 조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부분부분이 가진 다른 욕망과 물체적 조건을 조율하는 능력임을 강조한다.
《바람이 분다》 초반에 지로는 자신의 꿈에서 비행을 하며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지로도 베를리니와 마찬가지로 가족과 친구를 즐겁게 해주는 집 같은 것을 만드는 꿈을 꾸었다. 가족과 친구라 해도 모두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한, 저마다 제각각인 사람들이다. 설계된 비행기, 조립된 기계는 이런 다양한 입장과 처지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 비행에 필요한 것은 오직 모든 것을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는’ 회전 나사이다. 베를리니 자신은 조정사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지로가 근시로 설정된 것은, 기계에 대한 미야자키의 이념이 어떤 먼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조종이 아니라 인접한 것들을 다각도로 ‘연결하기’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우시카》에서 강조하는 거신병의 본질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자. 거신병은 화염을 쏘는 능력을 지녔다. 너무 일찍 태어나 몸이 덜 굳은 채로 화염을 쏜 까닭에 두 번 정도 크게 발포한 뒤 덜 뭉쳐진 진흙처럼 쏟아져버린다. 이 이미지를 만든 것은 안노 히데야키로, 저 유명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감독이다. 당시 막 영화계에 입문한 안노의 능력을 눈여겨본 미야자키의 전폭적인 지지로 그는 거신병의 최후를 그릴 수 있었다. 미야자키도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토르메이카의 황녀 크샤냐의 말에 따르면 거신병에게는 불도 물도 소용없고, 부활된 이상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거신병이 상징하는 것은 불의 문명이다. 이는 도입부에 거신병 여럿이서 화염에 쌓인 건물들 뒤로 나란히 걷고 있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다. 도대체 거신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불의 문명을 움직이는 동기는 무엇인가? 황녀 크샤냐를 비롯해 페지테 왕국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있었다. 크샤냐는 오무의 집 한가운데에 들어와 마구 총을 쏠 생각을 했다. 페지테 군인들은 자기 나라 공주 옷을 입고 그들을 향해 무기 없이 날아오는 나우시카를 보고도 총을 쏘았다. 이들은 모두 압도하는 상황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그저 총을 휘두른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이런 판단 능력의 미숙함은 무엇 때문인가? 이들은 모두 인간만의 나라를 꿈꾼다. 그 단순한 사고가 상황의 구체성을 못보게 하는 것이다. 총을 쏘며 그저 자기 방어에 급급한 것이 인간중심주의자들의 행태다. 거신병은 그 자신의 판단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해결할 능력을 잃은 자들이, 변하는 세상사를 직접 겪을 엄두를 못내고 일단 목적에 방해되는 것을 없애는 것이 최선이라고밖에 생각할 줄 몰라 발명하게 된 괴물이다.
데우스 액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는 말이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쓰인 연극 기법의 하나로 만사의 해결책을 뜻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지 못하는 자들이 즐겨 찾는 만능 열쇠를 가리키는 말다. ‘부활한 거신병은 막을 길이 없다, 이미 일어난 전쟁은 돌이킬 수가 없다.’ 이것이 크샤냐가 계속 했던 말이다. 일어난 일과 벌어질 일에 대해 자기 자신이 뭘 할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거신병을 원한다. 토르메이카와 페지테의 군인들 모두 자기 선택과 책임을 방기하기에 초조했다. 답을 찾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서두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신병은 어머니의 자식, 인간의 새끼, 자연의 산물로서, 자기 죽음을 통해 생명 자체에 헌신한다. 주인의 말을 듣기에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거신병이야말로 우주의 명령 자체에 귀기울이며 초조함 없이 제 할 일을 하는 자다. 미야자키는 이렇게 질서에 순응하는 자의 큰 마음에서 애니미즘을 읽는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도구란 수단의 연장이라고 느껴지지만, 기계는 인간에게 무제한으로 헌신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겁니다. 그건 생물이라고 하면 너무나 단순하지만, 그래도 생물의 원형에 해당하는 걸 만들고 있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 뭔가 인간 마음속의 가장 고결한 것, 헌신이나 자기희생 등 최근에는 유행하지 않지만 역시 인간을 감동시키는 뭔가는 굉장히 단순한 겁니다. 복잡한 것 위에 태어나지 않고 좀더 사물 그 자체가 갖고 있는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이 세계에선 돌멩이든 뭐든 오히려 그쪽이 갖고 있어요. 음악도 그렇고, 우주에 있는 걸 인간은 그저 형태로 만들 뿐. 별이나 바람이 갖고 있는, 듣는 사람이 없어도 계속 나오는 전파나 진동을 인간이 받아들여 음악으로 만들 뿐이예요. ‘음악은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겁니다. 이런 걸 쓰다 보면요. 그러면 기계는 한 방향으로만 제한 없이 복잡해지는 건 좋아하지 않으니까, 퇴행하는 일도 역행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면 기계라는 것에 영적인 게 깃들 수도 있진 않을까. [중략] 기계가 지닌 신기함에 일종의 애니미즘적인 힘을 느끼는 인간 쪽이 좋아요(『출발점』, 528).
나우시카는 사랑한다
오무이기도 하고 거신병이기도 한 존재가 나우시카다. 나우시카 주변 캐릭터는 세 계열로 정리된다. 먼저 대립자로, 토르메이카 왕국의 황녀 크샤냐가 있다. 두 번째는 조력자로, 나우시카를 돕는 전설의 전사 유파, 그리고 계곡의 할배들, 페디테의 왕자 등이 있다. 바람 계곡 이야기 이후 조력자는 주로 할매들만 나오게 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에서 어떤 할배가 나오실지 아직 모르지만, 일단 할배단은 《나우시카》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분해자 갑충-오무와 역시 거대한 발사자 거신병이 있다. 이야기 안에서는 오무와 거신병이 대립하지만, 캐릭터의 외관만 보면 둘 모두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크고 통제불가능한 힘을 지녔다는 점에서 괴물성의 상징들이 된다.
먼저 주인공 나우시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나우시카에 대해서는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시작하고 싶다. 미야자키는 보통 몇 개의 포스터 도안을 제시하는데(《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직 하나다), 지브리가 《나우시카》의 공식 포스터로 내건 것은 ‘바람 계곡으로부터 날아오르는 나우시카’와 ‘거센 바람을 맞으며 먼 곳을 오무와 함께 응시하는 나우시카’가 있다. 우노 츠네히로는 미야자키의 서사가 ‘소년이 서사를 만나다(Boy meet girl)’ 스타일이며, 소년이 소녀를 만나 각성하는 줄거리에 기반한다고 지적한다(우노 츠네히로, 주재명·김현아 옮김,『모성의 디스토피아』(워크라이프)). 하지만 《나우시카》부터 《벼랑 위의 포뇨》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의 관심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상호 헌신이다. 나우시카가 사랑을 나누는 이는 페지테의 왕자가 아니라 벌레다.
나우시카는 바람 계곡의 공주다. 미야자키의 다른 캐릭터들과 비교했을 때, 나우시카의 가장 큰 특징은 능력이 엄청나다는 점이다. 맨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날렵하고 작은 비행기를 타고 멋지게 부해로 날아간다. 그러니까 그녀는 비행사다. 하지만 나우시카는 풍차를 고치는 기술자이기도 하고, 왕국의 지하에 실험실을 차려 놓고 부해를 연구하는 과학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언어의 달인인데, 작은 피리 하나로 화가 난 벌레를 진정시키기도 하고 오무와 촉수와 피부를 맞대어 직접 대화하기도 한다. 그녀가 전쟁을 막는 방법도 말로서이다. ‘피해!’ ‘멈춰!’ ‘너를 다치게 해서 미안해!’ 미야자키는 다양한 캐릭터를 그리며 존재의 여러 능력을 성찰했는데, 특히 언어야말로 모든 존재가 지닌 능력 중에 최고라고 한다. 미야자키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나중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확실하게 설명되겠지만, 언어는 나우시카처럼 말하는 것이다. 인사하고 사과하고, 진솔하게 기쁨과 슬픔을 터뜨리기!
나우시카 능력이 다양하다는 점은 그녀가 무기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통해서도 알아볼 수 있다. 나우시카는 칼을 오무 껍데기 재질을 파악하는 도구로 쓰고, 총은 오무 허물에서 눈 부분 떼어내는 폭발장치로 쓴다. 그녀에게 무기는 관찰하고 분해하는 도구이다. 나중에는 이마저도 쓰지 않고 맨몸으로 전장을 돌아다닌다. 전사이지만 그녀가 싸우는 대상은 토르메이카의 적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싸움이기에 살생 무기는 필요치 않다.
다시 나우시카로 돌아오자. 나우시카가 이토록 많은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녀가 아버지를 계승하지 않아서다.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왕이었다. 그가 왕일 수 있었던 이유는 ‘벌레와 인간은 함께 살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어서다. 왕국의 경계를 확정하는 자, 관계의 척도를 만드는 자이기에 그는 왕이다. 그런데 나우시카는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오무도 사랑하기에 아버지의 뜻과 방식을 계승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몰래 벌레의 땅 부해를 연구하기까지 한다. 부해를 연구한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이해하겠다는 것이고, 그 안에는 인간과 동식물, 기계를 포함해 모든 것이 연구대상으로 들어간다. 다양한 것들이 함께 맞물리며 살고 죽는 이치를 탐구하려고 하기에 나우시카는 바람과 인간이 만나는 풍차의 역학에 대해서나 분해자의 필요와 불필요가 무엇인지를 능숙하게 알아간다. 나우시카는 척도가 아니라 만물의 작용에 관심 있기에 아버지같은 왕은 될 수 없다.
나우시카의 능력을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다. 계곡의 샤먼은 새끼 오무를 살리고 그 가족들 품으로 돌려주기 위해 목숨을 던진 나우시카의 행동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우시카는 자기 사람들을 복된 낙원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 자신이 눈앞의 누군가를 구하며 살기 바쁘다. 게다가 타인에게 자신처럼 헌신하라고 종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토록 강력한 돌봄에 대해 어떤 자의식도 없다. 눈앞에 있는 것을 살리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점을 깊이 의식할 뿐이다. 그래서 나우시카의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어머니와 같은 사랑이다. 나우시카는 또래 남자아이들과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페지테의 아스날은 부해를 연구하고 싶은 나우시카를 이상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부해의 심연에서 과거로 돌아가 새끼 오무를 감추어 보호하려던 나우시카의 어린 시절을 보면, 나우시카의 무릎 밑에서 아기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다. 어린 나우시카는 품고 지키려고 애쓴다. 생명을 향한 이해와 헌신이 나우시카 사랑의 본령인 것이다. 이는 만화 『나우시카』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그려진다.
나우시카의 이런 사랑이 이후 미야자키의 트루 러브관의 바탕이 된다. 미야자키의 사랑꾼들은 자기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 나우시카가 분해자로 살아야 하는 오무를 존중하는 것처럼, 그들은 타인의 삶을 존중하며 그들의 운명을 품는다. 지브리의 러브 스토리가 늘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만남을 다루는 것은 사랑해야 하는 존재들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이더라도 거인과 난쟁이(《마루 밑의 아리에티》)가, 청년과 노인(《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사랑한다. 작은 시내의 신과 소녀(《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돼지-인간과 인간-여인(《붉은 돼지》), 고양이와 인간(《고양이의 보은》)이 사랑한다. 이와 같이 광범위한 스케일의 러브 스토리의 포문을 연 것이 바로 《나우시카》다.
미야자키나 스즈키 도시오는 이토록 큰 짐을 진 나우시카를 생각하면 가슴이 묵직해진다고 했다. 원래 미야자키는 영화의 끝을 돌진해오는 오무들을 홀로 두 팔 벌려 맞이하는 나우시카 모습으로 끝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과도하게 열린 결말이 상업 영화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결국 죽은 나우시카가 황금 벌판 위에서 부활하는 것처럼 그리게 되었다. 그런데 나우시카가 강렬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임무는 다시 풍차를 고치는 것이다. 이 영웅은 다시 부해를 연구하고 계곡에서 아이들에게 바람 타는 법을 가르친다. 바람이란 만물의 변화무쌍함을 상징하기에, 바람을 탈 줄 아는 자는 만물과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다. 생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자, 그의 이름은 나우시카!
글_오선민(인문공간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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