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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미야자키 하야오-일상의 애니미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① 공간편 : 변하고 썩는 원더풀 라이프

by 북드라망 2023. 8. 25.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① 공간편 : 변하고 썩는 원더풀 라이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보자. 연재는 매 작품을 다음의 세 수준에서 살펴본다. 첫째는 디테일의 독특함과 그 배경 철학을 다루는 ‘공간편’이고, 둘째는 작품 활력을 이끄는 핵심 테마를 분석하는 ‘주제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야자키 최고의 특기인 독특한 인격들을 살펴보는 ‘캐릭터편’이다. 오늘부터 3주 동안은 바람 계곡을 탐사하게 된다. 먼저 작품 제작을 둘러싼 일화를 소개하고 싶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탄생과정
미야자키 하야오는 1960년대 초부터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기린아로 큰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8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라면 쉽게 기억할 《미래 소년 코난》,《엄마 찾아 삼만 리》,《알프스 소녀 하이디》같은 시리즈에서 생기 넘치는 독특한 그림체로 역동적인 만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가 첫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루팡 3세:칼리오스트로의 성》이다. 이 작품은 TV 만화 시리즈만큼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아니메주Animage》(1978년 5월 창간)라고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잡지의 편집자였던 스즈키 도시오가 미야자키의 대도(大盜) 활극에 주목하게 되고, 《아니메주》의 출판사인 도쿠마 쇼텐의 사장 도쿠마 야스요시의 후원을 받아 액션 넘치는 장편 영화 제작까지 기획하게 된다. 하지만 원작 없는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상당히 부담을 느꼈던 제작사의 문제 제기로 결국 미야자키가 영화화할 만한 원작을 일단 만화로 그리기로 하고 장편 영화화의 프로젝트가 발족했다.
 
미야자키는 1982년 2월,《아니메쥬》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앞으로 만화본은 『』기호로 표시한다)를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가 진행되던 도중, 어느 정도 스토리가 잡혀가는 것을 보고 영화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마침내 1894년 3월 애니메이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개봉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백만 장에 가까운 영화표를 판매하며 초대형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전에 없던 성공을 거두었다. 참고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1994년에 연재가 완료되는데,《토토로》,《마녀 배달부 키키》,《붉은 돼지》등을 완성하느라 중간에 몇 년씩 쉬게 되기도 했지만 미야자키 세계관의 변화를 반영하며 웅대한 서사시로서 종결되었다. 제작 기간의 차이와 미야자키 문제 의식의 변화 덕분에 만화와 영화에 등장하는 나우시카는 성격도 운명도 다르다.
 

이미지 출처 Nausica Wiki

   
대강의 영화 줄거리를 살펴보자. 영화는 “거대한 산업문명이 붕괴되고 천년 후, 녹과 금속조각으로 뒤덮인 채 황폐해진 대지를 독을 가진 균류가 장악했다. 그들은 썩은 바다 ‘부해’라 불리는 숲을 이루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라는 나래이션으로 시작한다. 바람 계곡의 공주 나우시카는 불을 쏘아 부해를 태워 없애려는 어리석은 국가들 사이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 와중에 부해의 비밀을 풀고 벌레-오무의 생명도 구하게 되면서 인간이 썩은 바다와 함께 살 수 있음을 발견한다. 실로 인간과 자연, 생명과 종말이라고 하는 묵직한 주제를 다룬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 제작의 동기로 미야자키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기고 있다. 
 

“나우시카는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우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파이아키아 왕녀의 이름이다. 나는 버나드 앱슬린의 『그리스 신화소사전』에서 그녀를 처음 알고부터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중략] 나우시카를 알게 되면서 나는 어느 일본 설화의 여주인공을 떠올렸다. 아마 옛날 이야기에 나와 있었던 것 같다. 벌레를 사랑하는 아씨라 불렸던 소녀가 있었다. 어느 귀족의 딸이었던 그 소녀는 혼기가 차도록 뛰어다니고,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해서 주위에서는 괴짜 취급을 받았다. [중략]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초, 세이쇼나곤의 시대에 벌레를 사랑하고 눈썹도 밀지 않은 귀족 처녀의 존재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소녀의 운명이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중략] 이번에 《아니메쥬》의 사람들에게 만화를 그려보라는 권유를 받고 들뜬 마음에 자기류의 나우시카를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화근이 되어, 오랜 옛날에 재능이 없어 만화를 단념할 때의 그 아픔을 다시금 곱씹게 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떻게든 이 소녀가 해방과 평화의 나날에 이르러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권 책 날개)


작품의 출발은 벌레 아가씨에 대한 걱정이라는 것이다. 미야자키는 그리스 신화집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 ‘소사전’을 보고 나우시카를 발견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나우시카는 오디세우스를 유혹하는 섬나라 아가씨에 지나지 않는다. 미야자키는 원전 자체에 구애받지 않고, 그녀의 담대한 성격을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랑스러운 벌레 공주와 오버랩시킨 것이다. 미야자키는 어떤 이분법에도 갇히지 않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사람이 아니라 벌레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는 존재가 겪어야 하는 문제를 거시적 차원에서 풀어보기로 했다. 그 결과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실로 인간과 자연을 대비시키는 세계관적 종말론을 직시하는 대서사시가 되었다. 자신의 작은 애호로부터, 대상에 대한 사소한 사랑으로부터, 사회 전체의 역사적 조건을 통찰해내는 미야자키의 능력이 놀랍다. 
 

썩은 바다는 생명을 부르네
미야자키 작품이 다른 애니메이션과 구별되는 점은 확실히 그 디테일에 있다. 모든 물체들이 배경이 되는 공간의 존재 이유에 따라 잘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개별 공간 하나하나는 미야자키가 생각하는 세상에 어떤 모습을 반영한다. 디테일이 계산적으로 철저하게 제시되는 것은 《토토로》부터이고, 이전 작품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라퓨타》는 공상적 이미지를 훨씬 더 강조하기는 한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공간은 크게 세 가지다. 압도적으로 크고, 신비롭고, 아름답게 그려지는 부해(腐海)가 첫 번째고, 뒤로는 부해를 앞으로는 염산 호수를 바라보는 바람 계곡이 두 번째이다. 마지막으로 부해의 진행에 따라 소멸하거나 그에 맞서려고 하는 두 개의 왕국 토르메이카와 페지테가 있다. 미야자키는 불의 문명을 상징하는 이들 강대국은 망가진 잔해만을 보여준다. 그 온전한 형상은 다음 작품 《라퓨타》에서 천공의 성으로 그려보인다.
  
오늘은 두 개의 공간, 부해와 바람 계곡을 살펴보자. 먼저 작품 전체에서 제일 크게 문제가 되는 부해에 대해 알아보자. 부해는 사막화하는 바다를 뜻한다. 만화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 따르면, 천 년 전에 인간이 환경을 정화하려고 만든 장치였는데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곳으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인간이야말로 모두를 위해 정화시켜야 할 독기였던 것이다. 나중에 나우시카는 썩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엄숙하게 깨닫고, 부해와의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 부해 자체는 미야자키가 크림반도 부근의 썩은 바다, 소금 호수의 바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나우시카를 제외한 인간들은 부해가 모든 것을 부패하게 만든다며 공포스러운 악으로 여긴다. 하지만 미야자키가 부해를 통해 말하고 싶은 바는 ‘악’이 아니다. 이 점은 부해가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잘 나타난다. 나우시카가 부해의 주인공인 거대 벌레 오무의 껍질을 발견하고 감탄하기 때문이다. 나우시카는 자신의 칼로 허물을 찔러보면서 ‘징~’하고 맑게 울리는 그 음색에 반하고, 오무 눈 껍데기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그 깨끗함에 감탄한다. 그리고 투명한 그 껍데기를 쓰고 앉아서 흰 눈송이처럼 떨어지는 부해의 포자들을 감상한다. 완벽하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있다. 마스크 없이 몇 분도 버틸 수가 없는 오염된 공기라지만 오무의 허물은 멋지고, 날아다니는 독기의 포자들은 숭고하다.   
 
무엇보다 부해는 신비하다. 나우시카는 사람을 이끄는 메시아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신비를 푸는 이가 되고 싶어한다. 미야자키는 부해의 신비로움을 크게 세 가지 수준에서 보여준다. 첫째, 그는 부해를 거대한 망사로 되어 있으며 포자들이 계속 숨 쉬는 숲으로 그렸다. 부해는 썩어가는 바다이지만 실은 균사의 숲이다. 균류는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주로 균사를 늘려서 영양을 취한다고 한다. 균류는 포자의 발아에서 시작되며 발아관은 서서히 길게 자라서 실모양의 균사가 되고 다수는 더 분지하여 균사의 망상집합 즉 균사체가 된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밖에서라면 이런 균사체는 인간의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미생물(微生物)이라고 불린다. 미야자키는 인간 지각의 임계점에 가 있는 이 존재의 작음을, 인간 따위를 가볍게 압도하는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망의 형태로 그린다. 시작도 끝도 없이 엄청난 규모로 촘촘하기에, 이 또한 인간 지각의 임계를 건드리는 거대함이다. 작은 것들의 거대함, 거대함의 본질적 작음 이 역설이 표현되기에 부해는 신비롭다. 
 

이미지 출처 Nausica Wiki

 
둘째, 부해는 균사의 숲이다. 커다란 포자들이 푸푸 부풀어 오르며 터지는 것이 꼭 동물이 숨 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균사체 속을 돌아다니는 생물들은 날고 기는 벌레지만 물속을 돌아다니듯 유영하는 이미지로 움직인다. 부해 안에서 자유롭고 편안할 때 벌레들은 공기의 저항을 거의 받지 않는 듯이 느긋이 움직인다. 부해가 처음 등장할 때에는 해파리 같은 것이 날아다니기도 한다. 즉 부해는 지상의 숲이지만 깊은 바닷속처럼 그려진다. 생명의 환경이라는 관점에서 대지는 옳고 바다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깨끗한 공기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일까? 인간은 숨 쉴 수 없어 바다가 두렵겠지만, 어떤 생물에게는 청정한 하늘이야말로 공포스러울 수 있다. 인간을 숨막히게 하는 독기라지만 어떤 벌레에게는 문제 없이 상쾌한 대기일 수 있다. 우리가 자꾸 잊어서 그렇지, 지구 대기에 산소가 처음 포함되기 시작했을 때, 그 시절 생명에게 하늘은 독가스로 가득했다.  
 
셋째, 부해는 생명과 기계의 경계를 모른다. 거대한 부해 안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들 중에는 녹과 철도 있다. 초반에 등장하는 거신병 해골의 썩어 문드러짐을 떠올려보자. 영화에서 부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의 산물이라고 되어 있다. 미야자키는 산업혁명의 자멸에 따라 녹과 금속조각마저 썩어간다는 것을 부해의 장엄함과 함께 표현하는데, 생명만이 썩어 문드러질 수 있다지만 철과 플라스틱도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지 언젠가는 부서진다. 인간의 피에 녹아 있는 철이나 거대한 병기에 들어가 있는 철이나 모두 자연의 산물이다. 인간의 수준에서 보면 기계는 활기 없는 사물이 될 테지만, 부해의 수준에서 보면 인간도 기계도 모두 다 썩어 문드러질 분해의 요소일 뿐이다.  
 
미야자키는 신비로운 부해의 본질적은 모습을 그 모래늪 아래에서 부단히 정화가 일어나는 물길로 한번 더 보여준다. 나우시카는 페지테의 왕자를 구해주다가 거대 벌레의 꼬리에 부딪쳐 늪 아래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 부해 밑바닥에서 꿈을 꾼다. 어린 나우시카는 오무 유충을 숨긴 것이 발각되어 혼이 나고, 아버지에게 오무를 빼앗긴다. 오무를 죽이고 싶지 않은 어린이의 마음이 벌레와 인간을 구별해서 생각하려는 왕에 의해 억압당한다. 나우시카는 아버지를 거역해서라도 오무를 살리고 싶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울면서 외친다. ‘오무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부해의 밑바닥에서 나우시카가 이런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부해는 만물을 죽이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나우시카가 울며불며 저항하는 것은 ‘벌레이기 때문에 죽어도 된다’는 명령이다. 죽어도 되는 생명은 없다. 바꾸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된다. 어떤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뻐야 살 수 있고, 부자여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벌레여서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나우시카는 어떤 대의와 명분도 넘어서는, 삶 자체를 긍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나우시카가 이런 꿈을 꾼 까닭은 부해가 생명의 위대함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모든 썩어 없어지는 것은 죽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삶을 꿈꾼다. 부서지고 문드러지면서 온갖 풍파에 시달리는 우리는 개체적 종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죽음이 생명 자체의 죽음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을 낳는 자양분이 된다. 그래서 부해의 가장 밑바닥에서는 물이 흐른다. 나우시카가 이 점을 깨달았을 때, 부해의 늪 아래로 모든 것을 분해시킨 모래가 떨어져내렸다. 나우시카는 기뻐 눈물을 흘렸다.  
 

바람 계곡, 공동체를 살리는 풍차 왕국
두 번째 장소는 바람 계곡이다. 바람 계곡은 늘 부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다. 바람 계곡도 늙은 왕이 지배하지만 토르메이카라든가 페지테와는 조금 다른데, 이들이 불을 최소한으로 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부는 바람을 이용해 산다. 그 힘으로 지하의 물을 끌어 올리고, 바람을 타고 날아 오르면서 결국 부해와의 공존을 모색하게 된다. 
 
바람 계곡의 가장 큰 특징은 우선 바다 쪽으로 계속 펼쳐지는 농지에 울타리가 없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바람 계곡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잘 보면 알 수 있는데, 이들은 포도밭을 비롯해 다른 농작물이 자라는 곳 아래로 길을 만들어놓고 다닌다. 농지가 구획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유지로서 구별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쓰는 ‘길’을 놓아 같이 기르고 돌보는 땅으로 삼는다. 농지 밑으로 사람 다니는 길이 있다는 것. 인간은 대지보다 아래에 있다. 군림하는 자가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바람 계곡인 것이다. 미야자키가 울타리가 없는 땅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원령공주》의 남자 주인공 아시타카의 고향 에미시 마을이다.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농지 아래로 깊이 파인 길로 다닌다. 에미시는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는 사람들의 나라였다.
 
울타리가 없는 왕국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성이 풍차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야자키는 대체로 거대한 건축물 그리기를 좋아해서 ‘성’을 몇 번이나 그렸다. 라퓨타는 천공의 성 이름이었고(《라퓨타》), 센이 행방불명되는 온천 역시 거대한 회사 건물처럼 보이지만 마녀를 왕으로 모시는 성이었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마법사 하울도 움직이는 성을 갖고 있었다(《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들 성은 그래도 최소한의 성곽 같은 것을 갖고는 있다. 그런데 나우시카의 성은 성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바람개비를 돌리기 위한 기둥에 지나지 않는다. 나우시카의 방 창문 밖으로도 멀리 바다가 보이는 멋진 계곡의 풍광이 비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바람개비가 돌아가기 때문에 풍경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나우시카의 방이 높은 곳에 있는 이유는 백성들을 내려다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 바람의 기운을 읽기 위해서다. 왕국을 짓는 이유는 풍차를 잘 돌리기 위해서인 것이다. 즉 공동체가 바람을 잘 맞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풍차는 하이데거도 칭송한 공동체적 에너지원이다. 풍차 자체가 자연발생적인 대기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내 것이다, 네 것이다’ 식으로 쪼개 쓸 수가 없다. 풍차는 공동체가 함께 자연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쓰는 모두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울타리가 없고 풍차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바람 계곡은 여타 왕국과 달리 자타를 구별하지 않고, 이방인을 환대하고, 적군이라도 사자(死者)는 묻어주면서 기린다. 만물의 생멸이 자연의 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마을 사람들은 부해도 거부하지 않는다. 부해를 거부하지 않으니 토르메이카라든가 페지테가 벌이는 전쟁도 그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일어나서는 안돼!’ 하기보다는 ‘그렇다면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지?’라고 서로 물으며 새롭게 할 일을 찾는다. 궁성인 대(大)-풍차 밑바닥에는 나우시카의 연구실이 있다는 것은 이들이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에 힘쏟는 사람들임을 말해준다. 바람 계곡 사람들은 이해하면서, 늘 조건에 맞추어 함께 살기를 고민한다. 이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조금씩 조금씩 살 길을 모색할 뿐 ‘인류의 행복’이라든가 ‘인간의 왕국’ 같은 추상적인 무엇은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바람이 어디 목적이 있어 부는가? 방향을 정해놓고 부는가? 어디서 어떤 바람이 불어오고 왜 멈추는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으니, 우리는 인과의 거대한 장을 다만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미야자키는 바람 계곡을 상징하는 이들을 노인으로 한다. 그것도 혈기 왕성한 노인이 아니라 부해에 의해 썩어 문드러진 손과 팔을 가졌고,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된 할어버지로 말이다. 그래도 노인들은 웬만해서는 놀라지도 않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속에서 판단을 잘 해나간다. 왜 토르메이카 비행선은 무리 지어서 날아오르는가? 그들이 습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우시카를 보좌했던 할아버지 특공대의 판단은 정확했다. 이후로도 할배들은 맨주먹으로 조명탄을 던져 적군을 교란시키고 탱크를 탈환하고, 젊은이들이 여자들과 아이들을 대피시킬 동안 적의 공격에 온몸으로 맞서기까지 한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유머도 넘친다. 오염된 부해로 추락하는 와중에도 왁자지껄 그냥 죽자죽자 하다가, 나우시카가 바지선의 짐을 버리면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에 금방 살려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노인들은 죽지 않는다. 공주를 돕고, 마을을 구하고, 숲을 지키고, 바람을 맞아야 하는 임무가 항상 닥쳐오며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부해의 독으로 썩어가는 몸은 하고, 모두와 함께, 늙지만 죽지 않는다. 이는 나우시카의 아버지 왕-지로가 토르메이카 군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과 대비된다.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마을 노인들과는 또 다르게 벌레는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미야자키는 기계 문명을 부정하지 않는다. 바람 계곡의 샤먼-할머니는 거대한 인과의 사슬에서 누구도 예외 없이 공동의 업을 내리받았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멸망의 한복판에서도 해야 할 일은 넘쳐난다. 몇 백년 동안 자라온 숲을 한 번에 파괴시키는 불과 달리 물과 바람은 천천히 오래오래 생명을 키운다. 물과 바람이 만드는 세월은 살고 죽고의 연속이기 때문에 버릴 것도 구할 것도 따로 없다. 굳어가는 몸을 갖고도 충분히 서로에게 실질적인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들로서 할아버지 특공대들은 멋지다. 그런데 추가로 설명하면, 이후로 미야자키는 할아버지를 그리는 데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노인들은 계속 멋있게 그려지지만 모두 할머니로 나오게 된다. 요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년 7월 개봉)의 스틸컷이 공개되고 있다. 카리스마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도 있어서 미야상의 꽃-할아버지들이 돌아온 것인가 궁금해진다. 
 

바람의 아포칼립스
나우시카가 아기 오무를 구하면서 대지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오무가 푸른 눈을 하고 강물처럼 함께 모여 어디론가 흘러가는 마지막에서 암시되듯 부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해는 더 멀리 더 깊이 썩기 위해 계속 움직이며 나아간다. 토르메이카의 군대는 떠나지만 군함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페지테의 왕자와 검사 유파는 오무를 연구하기 위해 부해 깊숙이 더 들어갈 것처럼 보인다. 바람 계곡 사람들은 나우시카와 함께 나무를 심고, 풍차를 고치고, 아이들에게 비행 기술을 가르친다. 이들이 재건하려고 하는 바람 계곡은 또다시 인간만의 세상을 꿈꾸는 자들과 전쟁을 할 수도 있고, 갑자기 다가온 부해를 마주할 수도 있다. 바람이 모든 것을 허락하듯 어떤 문제도 다시 또 새롭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은 끝없는 길을 간다. 만화판 나우시카는 바람 계곡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다치고 쓰러진 사람들 하나하나를 돌보기 위한 먼 여행을 계속 한다. 오무가 마음을 활짝 열고 나우시카를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해피앤딩 같지만, 바람이 부는 한 끝은 없다. 종말 이후란 없다, 종말 이전도 없다. 나우시카에게는 문제가 있고, 친구가 있고, 바람이 있는 지금뿐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나우시카의 비행 마스크가 떨어진 부해 밑바닥에서 새싹이 돋아난 것을 그린다. 나우시카의 비행은 계속될 것이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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