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바람의 예술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특징은 가마 할아범 작업장에 놓인 칫솔까지 그려낼 정도의 디테일과 캐릭터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서사적 박진감이 주는 활력에 있다. 디테일 전체가 역동적이고도 풍성하게 펼쳐지기 때문에 관객은 주인공의 고난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되고, 결말에 이르러 삶에 대한 보다 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떠받치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비전이다. 미야자키는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2023)에 이르기까지 11편의 장편 영화를 만들었고, 그때마다 다른 스타일과 주제로 자기만의 과제를 펼치고 닫았다. 그가 완성된 작품 앞에서 매번 은퇴를 선언했던 것은 작품 속에 자기 고민과 능력을 다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워지고 새로워진 까닭에, 그는 매번 다시 장편으로 복귀해왔다(참고로, 미야자키의 은퇴 선언은 ‘장편영화’ 작업에만 국한된 것이다. 도쿄 미타카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에 들어갈 그림이라든가 그곳에서만 상영하는 단편 영화라든가, 몇몇 잡지에 연재하는 단편 만화 등, 다양한 작업에 대한 열정은 결코 식은 적이 없다. 아무튼 대단한 미야상!! ).
왜 만화영화인가?
그런데 왜 만화영화일까? 디테일의 장인으로 봉준호 감독도 떠오른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부잣집과 반지하를 계층적으로 분할해 치밀하게 세부를 구성했다. 특히 가정부 문광이 남편을 숨겨놓은 지하반공호에는 박사장을 찬양하는 온갖 광고지, 책들, 그리고 쌓아올린 캔은 계층 상승의 욕망을 기겁할 정도로 보여준다. 디테일에 관심이 있다면 미야자키에게는 실사로의 길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연상호 감독처럼 애니메이션(《서울역》(2016))에서 실사 영화(《부산행》(2016))로 양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우도 있다.
미야자키에게 애니메이션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디지털이 광속으로 계발되는 시대에 더욱 손그림의 고집하고 계신데 말이다. 미야자키는 어려서부터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첫 애니메이션 회사 토에이 동화(東映アニメーション)에서는 입사 당시 천재가 들어왔다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찍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당시 그 반에서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소위 입신출세를 포기하는 것으로 친구들 모두가 ‘굳이 왜?’하는 눈으로 의아해했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학습원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지만 곧바로 만화 영화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 화가가 아니라, 만화를! 하지만 만화책이 아니라 만화영화였다.
미야자키가 애니메이션에 기대를 건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영화적 측면에서부터 생각해보면 이렇다. 미야자키의 말에 따르면, 만화책은 언제든 열고, 필요한 곳에서 닫을 수 있으며, 원한다면 머무르고 싶은 장면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미야자키에게 애니메이션이란 돈으로 표를 사서, 컴컴한 극장에 들어가 끝날 때까지 꼼짝 없이 앉아 오롯이 다 보고 나와야 하는 어떤 예술적 체험인 것이다. 미야자키는 ‘읽고 싶지 않으면 읽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것은 선택한다’고 하는 주체의 의지적 선택이 강조되는 시대의 분위기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극장이야 버젓이 현실 안에 있지만, 막이 올라가는 그 시간은 완전히 현실로 수렴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영화 감상을 촉진하는 OTT(Over-the-top), 영화, TV 방영 프로그램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시장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넷플렉스에 지브리 영화가 다 풀린 것은 조금 의외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의 제작비를 벌기 위해, 지브리가 어쩔 수 없이 해외 넷플릭스에 영화 판권을 팔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래도 일본 내의 넷플렉스에서 지브리 영화는 볼 수 없으며, 최신작 역시 어떤 정보도 공개됨 없이 관객의 독자적 판단하에 처음부터 끝까지 알아서 영화관에 와서 직접 볼 것을 권하고 있다.
책이 아니라 영화라니! 미야자키는 참으로 미지를 좋아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모두가 알만한 것들을 향해 지성을 들이밀지 말라고 강하게 주장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한다고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나는 어떤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런 돌발적인 사건과 함께 비로소 당연했던 일상은 흔들리고, 미쳐 보지 못했던 삶의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에는 만화라는 손그림의 문제를 살펴보자. 앞서도 말했지만, 영화라면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실사(實寫映畵; live action film)도 있다. 실제로 미야자키는 《마녀 배달부 키키》(1989)를 제작할 무렵 실사 영화 ‘제작’을 고민하기도 했고, 2023년 지브리 자체적으로는 2007년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작품 《귀를 기울이면》을 실사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야자키 자신은 감독으로서 반드시 애니메이션만을 만든다. 이를 그의 출중한 그림 실력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다. 미야자키가 만화의 영화화를 통해 하려고 하는 바는 무엇일까?
애니메이션은 만화 그림의 연속이다. 일 분에 몇 초 컷이냐에 따라 움직임의 자유도가 결정되는 만큼, 수많은 그림들이 연속을 이루면서 장면의 전체의 역동적 움직임을 이끌어낸다. 문제는 아무리 많이 그려도 현실의 동작을 다 채울 수 없다는 점이다. 만화 영화에서는 그림과 그림 사이에 반드시 빈 공간이 들어간다. 나는 미야자키가 정말 느끼고 싶고 나누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여백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실사 영화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이 ‘공간’은 종이 물질성 사이의 공간적 여백이기도 하고, 감상자의 지각에서는 착각으로 처리될 시간적 공백이기도 하다. 이 ‘사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 지각의 한계이다.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가진 이 틈이야말로 ‘이것만 있을 리 없잖아’ 하는 식의, 현실이란 늘 존재하는 것 이상의 잠재성을 품은 시공간임을 알려주는 증거인 것이다.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연속하는 그림을 작화라고 하는데, 작화는 기본 이미지를 제공하는 원화와 그 원화의 움직임을 보충하는 동화(動畫)로 되어 있다. 애니메이터는 원화에 바탕을 두고 엄청난 넓이와 깊이감을 창조하는 동화를 그려내어, 장면들 사이의 불연속을 연속으로 전화해야만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연속화 과정이 품고 있는 불연속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의 움직임과 활기를 결정하게 된다. 장면에서 장면으로 전환될 때, 애니메이터는 손으로 페이지 사이에 공기를 불어넣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이 공기란 역설적으로 사실 현실의 기묘한 불연속을 증명해주는 장치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은 구석구석 틈이 있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언제든지 난입하고 들입하는 많은 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변형될 수도 있는 세계인 것이다.
바람이 분다
나는 어릴 적 책장에 연속그림을 그리면서 많이 놀았다. 대학에 가서도 이 버릇을 놓지 못해, 수업 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책장 사이로 그림을 펼쳐보며 키득거린 나를 누가 기억해서 잃어버린 책을 찾아주기도 했다. 오호호. 그 책의 제목은 『한국문학통사』다. 사실 책장마다 그림을 그리려면 앞뒤로 계속 연속을 확인해야 한다. 나름 깨알같이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면서도 답답하거나 지루한 줄 몰랐던 것은 왜일까? 미야자키 하야오를 공부하면서, 새삼 책장 사이로 스르륵 펼쳐지며 일어나는 바람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미야자키는 바람을 주제로 많이 그렸다. 비행사의 모험이나 다름 없는 《라퓨타》,《마녀 배달부 키키》,《붉은 돼지》를 떠올려보자. 아예 제목을 ‘바람’으로 삼은 것도 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바람이 분다》. 그의 작품에서 날지 않는 이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단 하나의 예외가 《원령공주》다. 대신 원령공주는 바람처럼 숲을 달린다. 포뇨는 바닷속을 헤엄치니까, 물 속의 비행이라고 할 수 있다). 왜일까? 마땅한 것들로 꽉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여도 대지에는 늘 바람이 분다. 멈춰 있는 것은 없다. 자명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바람과 함께 움직이고 변한다. 그렇기에 미야자키의 작품에서 집을 떠난 주인공들이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만화 영화 자체가 이러한 바람을 품고 있기에, 미야자키의 작품 속 활력은 더욱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볼 문제가 더 있다. 바꾸어 말하면, 애니메이터는 바람 사이의 그 간극을 자기 손으로 매워야 한다. 애니미즘이란 영들의 활력을 주시하는 세계관이며 애니메이션이라는 말 역시 애니미즘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이 활력이 만들어지는 것은 종이와 종이 사이를 매우려는 애니메이터의 의식 속에서다. 그럼, 애니메이터는 현실을 철저하게 관찰해서 1mm의 오차도 없이 그림으로 매울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가?
그렇지가 않다. 미야자키는 이 여백과 대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애니메이터로서 자기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를 이해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그려야 할 그 존재의 동기, 상황에 대한 통찰이 먼저라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디지털화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Never Ending Man》에도 나오지만, 미야자키가 보기에 디지털은 계산 가능한 세계의 복원에 적합하지 그 세계를 움직이는 수많은 모티프들 즉 욕망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한번, 작품에 돌입한 미야상의 마음이 되어 보자. 단지 이 동작과 저 동작을, 신체의 이러함과 저러함 사이의 연속을 만든다고 해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달린다고 해도 단거리 선수와 장거리 선수의 움직임이 다를 것이고, 유치원 아이와 회사원의 움직임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엄숙한지 요란법석인지, 일상적인지, 비일상적인지, 그 인물의 포즈, 무거운지 가벼운지, 즐거운지 죽도록 미친 건지, 쫓는지 쫓기는지, 연령은, 운동신경은……”(미야자키 하야오, 황의웅 옮김,『출발점』(대원씨아이), 60쪽) 주인공이 누군지, 그의 욕망과 처지에 따라 다양함 움직임이 설정될 수밖에 없다. 미야자키는 그에 따라 컷과 컷을 통해 강세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컷에 한 인물만 들어 있는 경우란 거의 없다. 구겨진 칫솔도, 벽에 걸린 그림 한 장도, 바람에 따라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활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장면 속의 무수한 세부들이 갖고 있는 물리적 조건과 심정적 동기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손으로 그리는 애니메이터란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무수한 존재들이 지닌 생의 의지를 포착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생들의 의지란 어디 확인할 곳이 따로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자가 대상 하나하나에 부여하는 동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그린다, 많이 그린다, 계속 그린다
대상 하나하나의 모티프를 이해하기란 세계 전체가 어떤 모습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이해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미야자키는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가?
미야자키 자신도 모르리라. 매번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그도 자신이 무엇을 그릴 수 있을지 몰랐다고 하기 때문이다. 희안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배우의 즉흥 연기에 기대거나, 영화 작업에서 발생하는 창의적 순간을 포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 콘티만을 바라보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스테프를 데리고 도착지도 모르는 그림을 그려, 영화를 만들어낸다. 자신의 세계관이란 그리기 전에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이가 바로 미야자키다. 그럼 어떤 확신에서 미야자키는 스토리보드 없이, 시나리오도 쓰지 않고(스즈키 도시오,『지브리의 철학』, 298쪽) 에니메이션을 만들어나가는가?
미야자키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자기만의 기술에 대해 간단히 정의한 적이 있다. ‘반복해서 그린다, 많이 그린다, 계속 그린다.’ 헉! 반복해서 그리기란 자신이 찾아내야 할 이미지를 발견하기까지 특정한 모티프를 거듭 표현해본다는 의미이다. 많이 그리기란 그렇게 포착한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정교화하는 과정이다. 계속 그리기란 형상 하나가 만들어지고 난 뒤, 그 주변으로 수많은 디테일을 붙여가며 비전으로 꽉 찬 세계를 완성하기이다.
그렇다면 이런 방법을 떠받치는 그의 작화관을 알아보자.
우선, 미야자키는 자신이 그려야 할 그 세계란 펜 아래 있다고 한다. 계획 자체를 따로 만들 여유조차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원작을 써서 각본으로 삼고, 그림콘티를 만들면 시간이 엄청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그림 콘티를 만들어가면서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방식으로 간다. 그림콘티가 계속 수정되는 가운데 드러내야 할 이야기(시나리오)가 모습을 더욱 갖추어가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 자체가 다시 그림 속에서 ‘바람’이 일어나는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이런 그림 콘티란 사실 영원히 완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세계이고, 그 세계의 구석구석을 다 아는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의 여기저기를 다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아무도 없다. 그래서인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압도적으로 디테일을 자랑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신이 그의 피조물을 바라보듯이 아래를 조감하는 듯한 장면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미야자키의 그림에서는 풍경이 그려질 때, 그것이 누구의 눈 높이에서 바라보는 정경인지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토토로》에 나오는 근사한 녹나무도 5살 메이가 한없이 높이 바라볼 때와, 이사 결심을 회상하는 아버지가 여유롭게 바라볼 때, 완전히 다른 크기와 녹색이다.
그런데 펜 아래란 사실 그의 머리 위이다. 우리 각자의 기억은 그것이 아무리 독특해 보여도, 집단 전승된 것으로 상당히 누적되면서 작동한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표면적으로는 직접적인 텍스트 이것저것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여도 실은 그 뿌리는 상당히 넓고 깊다는 점을 강조한다(『반환점』, 228~229쪽). 발상은 나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의 주름에 깊게 새겨진 모든 것이다. 원작이 있거나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뭔가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방아쇠를 당긴 것에 불과하다. 그 방아쇠에 촉발되어 자기 안에 있는 것, 축적해온 많은 풍경이나 표현하고 싶은 사상, 감정이 용솟음치게 된다. 즉 거신병(《바람계곡의 나우시카》)나 가오나시(《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여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캐릭터도 미야자키라는 천재의 머릿속에서 바로 끄집어낸 무엇은 아니다.
미야자키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열어서는 안 되는 자기 머릿속 뚜껑을 여는 일에도 비유한다. 이 뚜껑을 얼면, 삼라만상의 모든 길과도 연결되는 광활한 이야기의 네트워크가 펼쳐진다. 이 네트워크는 완전히 현실이다. 일상의 리얼리티로 완전히 닫힌 정신으로는 절대로 열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또 그리면 열린다. 그런데 일단 그것을 포착해서 그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그려진 그 세계 쪽에서 정합성을 주장해오며 자신을 압박한다고 한다.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려서 만난 그 세계란 허구가 아니라 참으로 있음직한 세계, 정말로 잠재적으로 펜 아래 혹은 각자의 머리 위에서 숨죽이며 깨어날 때를 기다린 세계라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만들 때 그림콘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은 그 이유인데, 그때 도망치면 안 됩니다.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많이 어려워하면 조금 더 안쪽 뇌가 생각해줍니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기억에 없는 과거의 체험이나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이 정도면 납득할 수 있는 그것이 내 능력의 한계라고 보는데, 그런 과정에서 문득 나오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거기까지 자신을 몰아넣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그렇게 하면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실은 영화에 이끌려 만들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모두가 시나리오를 쓰려고 할 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하나 있습니다. 반드시 그 모티프로, 자신 안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부분(머리 위를 가리킨다)에 있습니다. 그걸 찾는 작업이 시나리오를 쓰는 겁니다.”(『출발점』, 127쪽)
그렇다면 그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첫 걸음은 어디서 떼어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출발점』, 138쪽) 미야자키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도 설명한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칼과 창을 지니고 확고한 결의에 찬 남자들은 물러빠진 액스트라는 할 수 없는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노여움에 불타오른 민중들의 달리기, 울음이 터질 듯하면서 집까지 참으며 오는 아이의 달리기,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외길을 가는 헤로인의 절규와 같은 달리기, 어쨌든 멋들어진 달리기,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 약동하는……그런 달리기를 화면 가득히 펼칠 수 있다면 매우 유쾌할 거라고 뼈저리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달리기를 요구하는 작품을 진심으로 만나고 싶다.”(『출발점』, 62쪽)
갑옷을 입고 칼을 든 사나이, 노예움에 휩싸인 민중들, 어떤 이유에선가 눈물을 참고 집 안을 향하는 아이, 이처럼 많은 이들이 각기 다른 이유에서 뛴다. 살아 있는 이들의 온갖 움직임을 관찰하고 또 관찰하게 되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과 그 신체의 한계 같은 것을 함께 생각하게 된다. 미야자키는 인간의 처지와 움직임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관찰에 바탕을 두고 고른 하나의 캐릭터가 특정한 사건 앞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행동할지까지를 논리적으로 추적하게 되면 그를 통해 이 세계의 본질 같은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출발점』, 139쪽). 그런데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보고 싶고 모두가 원하는 그런 세계를 그리려고 애쓰기 때문에 또 그만큼 관심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판타지야말로 리얼하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그리는 것은 가시화되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한다. 이 세계는 미래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리면서 발견하게 되는 그 세계를 완성해서 최종적으로 함께 나누게 될 존재들은, 작품 계획으로부터 몇 년이나 뒤에 존재할 테니까 말이다. 영화를 만들기까지 3~4년 정도가 걸린다고 생각하면, 이 모든 작업은 개봉일이라고 하는 미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그렇다.
미야자키는 작품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늘 공간 헌팅을 간다. 때로는 여비가 부족해서 지브리 굿즈를 새로 기획해 팔기도 했다. 배경이 될 시공간을 발견하는 일은 작가의 펜으로 만드는 공상, 애니메이션 제작에서도 핵심이다. 그런데 정작 유럽이나 일본의 낯서 시골에 가서도 미야자키는 절대 사진은 찍지 않는다고 한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경험을 그리는 것이다. 스즈키 도시오도 탄복하듯이, 미야자키는 아무 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모양이다. 스즈키 도시오와 함께 한 시골 여행의 풍경이, 어느 틈엔가 《원령공주》에 나오는 에보시의 제철 마을이 되어 있고 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그가 창조하는 미래는 과거의 인상으로 빚은 것이다.
미야자키는 오래 바라보며 음미하고 숙고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뜰리에나 스튜디오 책상으로 돌아와서 떠오른 것을 그린다. 지브리 미술관에 가면 미야자키의 작업실을 모형화한 것이 있다. 거기에는 정말 다양한 구름 연구, 각종 병기들을 연구한 책이 많다. 아마 이런 전시물도 미야자키의 계획 아래에 조금씩 바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구서들은 구름이나 기계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지, 애니메이션을 위해 따라 그리기 위한 자료는 아니다. 미야자키가 그린 천공의 성 라퓨타라든가 치히로의 온천장은 ‘상상’이 아니다. 경험한 것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미야자키에게는 철저히 리얼한 것이다. 물론 이런 리얼리티는 있는 그대로의 객관 현실에는 없다. 경험으로서의 실재이고, 그 경험도 한 인간 미야자키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이 개인적이고 특수한 경험으로부터 보편적 장면을 추출해서, 영화를 보는 모두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킨다. 그것도 대단히 과감하게 말이다. 이 결정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고 또 그리는 일뿐이다.
“많이 그리는 것, 가능한 한 많이. 차츰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하나의 세계라는 것은 모순되거나 반발하는 다른 세계를 버리는 것을 뜻한다. 매우 소중한 것이면 그것은 언젠가 다시 쓰일 날을 위해 마음속으로 쏙 넣어두면 좋겠다.
자신 안에서 그림이 기가 막힐 정도로 나오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때를 느낄 수 있다.
그때란 일찍이 자신이 몽상한 그림의 찌꺼기, 조립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 조각의 줄기, 어느 소녀를 향한 동경의 기억, 취미로 깊이 연관된 분야의 지식 등이 각자의 역할을 갖고 하나의 올가미를 짜나가는 것. 당신 안에서 뿔뿔이 흩어져있던 소재가 하나의 방향을 발견하고 흐르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윽고 허구 세계의 원형이 완성된다. 그것이 스테프 전체의 공통 세계가 되어 간다. 그것은 이제 거기에 존재하는 세계다.”(『출발점』, 52쪽)
이렇게 그려가면서 알게 되는 그 세계, 그 세계를 발견하는 일은 시도와 실패의 연속을 덤덤히 감당하는 가운데에서만 가능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왜 디지털을 선택하지 않는가, 디지털은 계산 가능성의 세계이고 계산 가능함이란 그 자로 원형과 모델을 전제해서만 가능하다. 계산에 앞서 구현해야 할 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떠올리면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계산가능성의 근저에 놓인 논리인 것이다. 그런 논리는 실패를 거절한다. 바람이란 모든 실패 위로 날아오르려는 욕망이다. 미야자키는 모든 실패를 기꺼이 품고, 현실 너머의 현실로 날아가려고 한다.
다음주에는 바람 계곡에서 만나요~
이제부터 연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한 작품들을 순서대로 살펴본다. 작품마다 디테일이 집약된 공간을 먼저 분석하고, 전쟁이라든가 우정이라든가 하는 핵심 모티프를 분석한 다음, 애니메이터로서 미야자키의 역량이 집약된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분석해보고 싶다. 오늘 바람의 예술인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으니, 다음주에는 바람 계곡으로 가자! 미야자키가 그리는 썩은 바다(腐海)가 얼마나 원더풀할지 기대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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