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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회 당선작] 나눔을 모으는 공부

by 북드라망 2023. 5. 26.

나눔을 모으는 공부

(리뷰도서: 『내 인생의 주역』)

2등 한은경

사주가 궁금해 남산을 기웃거린 후, 직장을 다니며 남산강학원에서 공부한 지 여러 해가 흘렀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좋은 성적을 받아 한 단계씩 과정을 밟아가는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왔다. 경쟁을 하고, 노력한 끝에 성과를 맛보는 공부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강학원에서의 읽고 쓰는 공부는 완전 새 세상이었다. 당장의 이익이나 효용에 아등바등하지 않고, 비로소 삶을 가꾸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다.


그러면서도 오래 가지고 있던 습성 탓인지, 이 공부의 장에서도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주기적으로 올라왔다. 세미나에서 멋진 의견을 내놓고, 에세이 발표 때 자신의 한계를 넘어 한 단계씩 나아가는 도반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힘이 빠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올라오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알아차려져 스스로에게도, 삶과 글을 나누고 있는 도반들에게도 참 부끄러웠다. 이 좋은 공부를 계속하려면 이 부끄러움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密雲不雨하는 공부   
『내 인생의 주역』(김주란 외, 북드라망)은 부제에도 나와 있듯이 공부하는 장에서 만난 저자들이 함께 써 내려간 삶과 공부의 실전보고서다. 삶과 공부의 현장에서 각자가 겪는 어려움을 주역의 구절들로 극복해 가는 이야기들이다. 2020년에 책이 나왔을 때도 생활 밀착형 고전 글쓰기에 감탄하며 읽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자들 역시 공부의 장에서 느끼는 여러 어려움들을 토로하는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는 구절이 많지만, 주역에서 나의 최애 구절인 ‘密雲不雨’와 연관된 글들이 이번에도 돋보였다. 잘하고 싶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에 걸려 있어서 그런지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기꺼이 구름을 모을 수 있는 마음(密雲不雨)은 언제 봐도 가 닿고 싶은 감동적인 구절이다.


주역 전체에서 ‘密雲不雨’는 ‘風天小畜’의 괘사와 ‘雷山小過’의 오효, 이렇게 두 번 등장한다. 이번에 『내 인생의 주역』을 읽으면서는 소과 괘가 더 와 닿았다. 저자는 날아가는 새의 비상에 빗대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과욕을 부리지 않는 마음(小過, 위의 책, 427쪽)으로 ‘密雲不雨’가 들어 있는 소과 괘를 설명하고 있다. “재물을 쓰는 데 검소함”과 같은 것은 과도하게 써도 되지만, 과도하게 마음을 내서는 안되는 일들이 있다고 풀고 있다.


남들보다 잘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결국 성과, 성취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부의 장에서 과하게 내서는 안되는 마음이다. 공부에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게 성취인가, 무엇이 공부의 성취인가부터가 문제이다. 결과에 일희일비 휩쓸리면서는 공부를 지속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취를 얻는 장이 아닌 곳에서 결과를 바라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密雲不雨’의 마음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라는 걸 깨달아 가고 있는 과정이 사실은 가장 큰 공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결과를 바라는 마음을 이 정도 설명에서 그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잘하고가 아니라 잘 나누고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거나 승진이나 표창 등의 결과를 얻는 일들은 그것이 순전히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과물을 바라보며 무슨 일을 해 왔다면 자연스럽게 그 성취가 내 것이라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나의 열심과는 상관없이 여러 인연 조건들이 맞아야만 성과가 가능하다면, 그 성취를 목표로 삼고 그렇게 혼자 열심을 내어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密雲不雨’의 바탕에는 겸손이 있다. 겸손의 마음이 바탕이 되지 않는 한 密雲不雨는 불가능하다. 천지 자연의 이치로 인간사를 말해주는 주역이 말하는 겸손은 그저 겸양의 말로 자신을 낮추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의 주역』 지산겸 괘(145쪽)에서 저자는 재물이든 재능이든 많이 가졌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 부분이 그만큼 적어졌다는 말로 겸손을 설명한다. 뭔가가 주어졌다면 그것은 결국 다른 이들의 몫을 빼앗아 내 것을 채웠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가질수록, 성취를 이룰수록 그것을 나누고 잠시나마 결과물을 손에 쥐게 된 나를 겸손하게 낮추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것이다.


密雲不雨할 수 있는 마음은 결국 겸손과 통한다. 구름을 모으는 일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비가 오고 안 오고는 그저 하늘의 뜻이다. 설사 비가 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 인연 조건이 만들어 준 공동의 것이니 언제든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공부가 결국 세상의 이런 이치를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남들과 비교해 좋은 결과물을 내고자 하는 마음, 내 것을 세우고자 하는 마음은 애초에 공부의 장에 들어설 자리가 없다.


공부의 장에서 올라오는 잘하고 싶은 마음이 그래서 그렇게 부끄러웠나 보다. 비를 얻겠다는 마음을 버려야 구름을 모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모으는 구름은 잘하고가 아니라 잘 나누고였다. 잘 읽고 잘 쓰는 글들이 공부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잘 전달하고 나눈 공부만이 쌓여 가는 거였다. 그렇다면? 당장 발제와 에세이를 쓸 때부터 방향을 바꿔야겠다, 여러 인연으로 지금 여기에 온 텍스트를 읽고, 주변에 잘 전달하고 나누겠다는 마음, 그 마음으로 읽고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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