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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드라망 이야기 ▽/북드라망의 책들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 저자 인터뷰

by 북드라망 2022. 10. 25.

『대중지성, 금강경과 만나다』 저자 인터뷰

 



1. 선생님께서는 오랜 기간 의학을 공부하고 또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오셨는데, 어떻게 『금강경』과 만나서 책까지 쓰게 되셨는지 독자분들에게 간략히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지난 30년간 서울 시내 같은 장소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내과 의사입니다. 나이 오십일 때 ‘감이당’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감이당’은 공부 공동체로 고전을 중심으로 도반들이 모여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곳이랍니다. 7년 정도 ‘감이당’에서 공부를 이어오다가 2019년에 각자 원하는 고전을 택해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장자 스쿨’ 과정을 참여하게 되었어요. 이때 담임이었던 고미숙 선생님께서 불경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어떤지 제게 권유했는데, 말씀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번개처럼 떠오른 경전이 『금강경』이었습니다. 

 

의사인 제가 어떻게 『금강경』을 만났고 이에 대한 글까지 쓰게 되었을까요? 저는 40대 초 이혼하는 과정에서 여섯 번의 재판을 해야만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괴로웠던 이 시절에 『금강경』을 만났어요. 처음에는 『금강경』을 읽기만 해도 힘든 일이 잘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경전을 독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금강경』의 한 글귀, ‘선세죄업(先世罪業) 즉위소멸(卽爲消滅)’[전생에 지은 죄업이 즉시 소멸한다]이 빛처럼 어두웠던 내 마음을 환히 비추는 일이 일어났어요. 저는 이 구절을 읽고 여섯 번의 재판을 인과응보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언제인지는 모르는 과거 어느 생에 지은 악업으로 지금 불행한 일을 겪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 글귀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저는 『금강경』 독송과 ‘선세죄업 즉위소멸’의 의미에 기대어 슬픔과 두려움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원 운영과 같은 일상을 잘 유지하며 무사히 재판을 끝낼 수 있었어요. 

 

이후 일상에서도 『금강경』 공부가 힘을 발휘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면 ‘아상’(我相)이 작동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냄을 줄이자 삶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읽고 공부하면 불안, 짜증, 분노 같은 감정의 원인이 나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의 매듭을 풀고 자유로워지는 『금강경』의 지혜를 다른 사람들과도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또 글을 쓰면서 『금강경』을 공부하다 보니 우리는 이미 금강의 보물을 지닌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신이 지닌 각자의 보물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금강경』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2. 이 책에서 『금강경』의 대표적인 게송 몇 가지와 함께 『금강경』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계신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금강경』은 한마디로 어떤 책일까요? 
 
『금강경』은 한마디로 ‘번뇌 해결서’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의 매듭에서 풀려나고 싶다면 『금강경』을 읽으시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금강경』은 괴로움의 원인이 우리의 잘못된 인식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인식을 『금강경』에서는 상(相)으로 설명합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은 우리가 분별하여 집착하는 상은 모두 망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망상에 집착해서 ‘너보다 나은 나,’ ‘너보다 높은 지위’에 꼭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괴롭습니다. 『금강경』은 각자가 가진 괴로움이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을 먼저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의 삶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무언가 꼭 되어야 한다는 집착 없이 활발하게 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입니다. 특정한 고집이나 생각에 집착하지 말고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면서 활발하게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금강경』을 읽으면 ‘머무는 바 없는 자비로 이끄는 길’ 위에 서게 됩니다. 

 

구체적 실천 방법으로 『금강경』은 보시를 제시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보시 활용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보시는 재보시로 시작해 법보시로 확장하면서 『금강경』의 지혜를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 최고의 보시라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직접 주는 것(재보시)에서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법보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보시 연습을 통해 지금 조건에서 분별을 내려놓고(응무소주), 활발히 주위와 자비를 나누며(이생기심)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차차 자신의 잘못된 생각의 회로를 알고 그것을 수정하고 스스로 금강의 보물을 지닌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까지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금강경은 ‘번뇌 해결서’일 뿐 아니라 머무는 바 없는 자비를 실천하는 ‘보시 활용서’까지 아우르는 무궁무진한 보물 창고랍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공부할수록 육조 혜능이 말한 ‘우리는 모두 부처’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어요.

 


3. 보통 사람들은 나/너, 좋다/나쁘다 등 여러 가지 상(相)에 얽매여 사는 듯합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무릇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소개해 주셨는데요. 모든 상은 허망하니 분별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살려고 하면, 목표하는 것이 없고 붙잡을 것 없는 삶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이에 대해 “자신의 의식을 이루는 다양한 표상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지성”을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러한 지성이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자신의 의식을 이루는 다양한 표상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지성은 한마디로 부처님이 말한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말 그대로 나 혼자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입니다. 고정 불변하고 단일한 실체로서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내가 있으니 네가 있다고 생각해서 온갖 분별이 만들어집니다. 『금강경』은 이 분별이 모두 망상이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너 없이 따로 존재하는 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는 연기적 조건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금강경』을 읽으면서 연기법과 모든 분별이 망상임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해왔던 인문학 공부 덕분이었어요. 인문학 공부는 의식을 이루는 다양한 표상이 허구임을 배우는 기회였습니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좋다, 나쁘다’라는 전제가 고정불변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시대의 사회에서 학습된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어요, 고미숙 선생님의 ‘근대성 삼부작’ 세트를 배우면서 안락한 4인 가정에 집착했던 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어요.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를 읽으면서 돈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시켜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우주의 구조』 같은 과학책을 통해 지구의 역사와 양자역학 공부를 했고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눈을 떴지요. 『금강경』에서 말하는 ‘모든 상이 허망하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그동안 해왔던 인문학과 과학 공부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분별하지 않는 삶을 살라는 것은 분별을 알아차리고 분별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어떤 목표를 가지는 것은 좋아요. 그 목표를 향해 긴장하지 않고 즐겁게 노력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문제는 이 목표에 집착하거나 ‘이 목표에 도달하지 않으면 불행해’하는 상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받고 괴롭습니다. 사실 세상은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목표에 도달할지, 못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내 생각대로 세상이 되어야 해’ 하는 것이 괴로움이고, 이 괴로움을 겪었던 분이 『금강경』에서 부처님에게 질문하는 수보리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읽으면 내가 집착했던 상을 하나씩 깨면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요. 게임에서 벽돌 깨기를 하듯이 말이지요, 궁금하신 분은 『대중지성, 금강경을 만나다』 읽기를 권합니다.^^   
  

4. 욕망에 얽매인 재물 보시의 흑역사를 고백하셨는데요. 선생님의 고백처럼 우리는 베푼다고 할 때,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이나,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등 여러 마음을 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묘행무주(妙行無住), 머무름 없는 미묘한 활동이라는 말이 더 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머묾 없는 보시, 자아에 매이지 않는 머묾 없는 보시란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비입니다. 자비는 ‘내가 행복해지고 싶듯이 너도 행복하기를,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듯이 너도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자비의 마음으로 보시 연습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내가 베풀었다’, ‘내가 이만큼 해줬다’라는 생각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이잖아요. 기억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생각에 머무는 것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도 변하고 상대도 변했는데 ‘내가 너에게 보시했어’ 하고 자꾸 상대를 보면 나는 과거에 집착한 상태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지금 나의 현장에 집중하는 것도 ‘머묾 없는 보시’를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머묾 없는 보시를 실천할 때 우리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지금 ‘내’가 홀로 있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공기를 빼면 내가 살 수 있나요? 나는 공기와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이 모든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무수한 인연이 작용했습니다. 벼를 심은 농부와 벼가 잘 자라도록 도와준 햇빛, 흙과 비 그리고 벼를 정미하여 준 기계와 그 기계를 사용한 사람, 정미소에서 가게로 배달한 자동차, 이 쌀을 팔은 가게 등 말입니다, 우리는 돈을 냈으니 이 쌀은 당연히 내 것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돈을 낸 조건보다 훨씬 많은 인연이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밥을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보시하는 상황이라서 베푼다고 하지만 사실 베푸는 나와 받는 네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머묾 없는 보시’에 도움이 됩니다. 

 

만약 ‘내가 너에게 보시했어.’하고 생색을 내려는 마음이 올라오면 ‘아! 내가 내 목에 동아줄을 매네.’ 하고 알아차리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생색을 내는 순간은 상대에게 기대가 생긴 것입니다. 기대는 상대가 내가 원하는 데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실제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기대하는 마음이 괴로움이라는 동아줄을 목에 매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고 기대를 내려놓은 훈련을 하는 것도 ‘머묾 없는 보시’를 실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5. 선생님께서 운영하시는 병원에서 ‘목요 점심 인문학 강의’를 열었던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자신의 깨달음에 집중했던 삶에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보살로의 전환이 두드러졌던 사건인 것 같기도 했고요. 이 마음의 전환이 어떻게 일어나게 된 걸까요?
 

『금강경』 글쓰기를 시작한 2019년 장자 스쿨에서 ‘자신의 깨달음에 집중한 삶’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의 삶’으로 마음의 전환이 일어났어요. 고미숙 선생님의 경책 덕분이었습니다. 고미숙 선생님은 처음 제가 『금강경』에 관해 쓴 글을 보시고 자기계발서 정도라며 『금강경』의 지혜랑 거리가 멀다고 계속 지적하셨죠. 도대체 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지요. 그래서 『금강경』을 꼼꼼히 읽으면서 무엇을 놓쳤는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금강경』의  제일 처음에 부처님이 수행 방향을 핵심적으로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보리는 “깨달음에 마음을 낸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부처님께 질문합니다. 부처님의 대답은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도록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깨달아야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相)에 사로잡혀 『금강경』의 부처님 대답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에요. 그래서 친구들의 의견을 묻고 종합하여 나에게만 향해 있던 마음을 세상으로 열어 지혜를 나누는 활동으로 ‘목요 점심 인문학’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요 인문학 강의를 하면서 저는 『금강경』에서 ‘왜 남을 구제하라고 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듯해요. 『금강경』에서 여러 가지 상(相)에 대해 말했듯이 나, 나와 너, 가족과 국가, 생명과 무생물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相)을 만들어서 나의 자식, 나의 연인, 나의 국가를 중심으로 보는 습관이 너무나 견고합니다. 그런데 목요 점심 인문학을 하면서 나와 네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 노병사(老病死)의 길 위에서 걱정을 안고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나와 네가 만나는 환경을 만들도록 남을 구제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상(相)을 깨는 첫번째 수행임을 이야기한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목요 점심 인문학’에서 지혜를 나누다 보니 저는 아상(我相)을 내려놓는 수행이 되어 좋고, 인문학 강좌에 참석하신 분들은 질병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서 좋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순간들이었습니다. 지혜를 배우고 나누는 ‘목요 점심 인문학’이 보살이 되는 첫 실천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후에 진료를 보는 과정도 단순히 약만 처방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과 금강경에서 배운 지혜를 보시하는 현장이 되었어요. 환자를 보는 일상에서 보살 되기로 이어졌습니다.


6. 끝으로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왜 『금강경』을 읽어야 할까요? 아울러 독자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셔요.
 
불교 가르침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금강경』을 읽어야 할까요? 저는 감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괴롭고 불안한 순간들이 있지요. 설령 나는 지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지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완벽하여 스스로 괴롭지 않다고 여겨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런 경우도 우리는 모두 유한한 생을 사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늙고 병들어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떠나 『금강경』을 읽고 공부한다면 이 모든 삶의 과정을 편안(便安)하게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까닭은 『금강경』 공부가 내 앞에 온 문제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번뇌에서 풀려나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져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밖에서 무엇인가를 구하는 경향이 있지요. 이 마음은 자기를 부족하다고 느끼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됩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다 보면 이 생각들이 바로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갈구하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냈던 마음들이 『금강경』을 읽으면서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금강경』이 ‘번뇌를 깨트리는 번개 같은 지혜’를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본래 부처라 밖에서 욕심으로 구한 바가 없음을 『금강경』을 통해 항상 기억할 수 있어요. 그러면 지금의 나를 긍정하고 점차 마음이 자유로워집니다. 

 

또 『금강경』을 읽으면 나에게만 집중했던 마음이 세상을 향해 넓어집니다. 그 결과 일체 만물에 대해 공감하고 날마다 생동감이 넘치는 삶이 됩니다. 이 모두가 『금강경』을 읽고 공부함으로써 일어납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금강경』 읽기를 모두에게 권한다는 것입니다. 『대중지성, 금강경을 만나다』란 책은 제가 『금강경』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책이 계기가 되어 여러분도 여러분의 『금강경』을 만나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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