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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by 북드라망 2022. 10. 5.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좋지 아니한가?
원래 이 글은 전혀 다른 내용일 뻔했다. <청.루.만>의 주제들을 짜던 3월까지만 해도, ‘사랑’과 관련해서는 진한 한숨이 묻어 있는 전개가 예정되어 있었다. 공부와 연애의 병행 불가능성에 대한 한탄, 그럴수록 커지는 환상, 깊어지는 슬픔, 그리고 거기에 초연해지는 기술 따위를 쓰려 했다. 맨날 늘어놓던 지겨운 투정과 성과 없는 자기 최면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침침한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땐 거의 포기 상태였고, 별자리상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 거라는 말도 그냥 웃어넘겼었다. 나를 방해하지 마라. 열심히 공부해서 티 없이 청정한 수행자의 길을 가려니까. 슬픔을 밀어내고 겨우내 마음을 추슬렀을 즈음, 불현듯 핑크빛 봄이 찾아왔다.

‘꿈★은 이뤄진다’는 말이 진실이었나? 꿈만 꾸던 일이 일어났다. 가족들은 놀랐고 친구 놈들은 쉽사리 믿어주질 않았지만 가장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나는 연애를 시작했고 공부를 포기하거나 줄이지도 않았다. 같은 책을 읽고, 머리 맞대고 글을 쓸 수 있는 연애가 가능할 줄은 정말 몰랐다. 물론 고대하던 밤산책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게 이래도 되는 건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혹시 방해되지 않느냐고? 우려했던 부분이지만, 솔직한 대답은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거다. 성욕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전에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회의나 불만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하는 일에 응원을 받고, 배운 것들을 도란도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큰 힘이 된다. 지난날의 모든 것에 감사함이 든다. 이제 더 바랄 게 없다. 다 이루었다.

물론 걱정은 있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말들이 떠올랐다. 즐거움을 경계하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 사랑은 집착이고 폐쇄적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그래서 수시로 ‘변할 거다, 민호야’라고 되뇌어 보긴 했지만, 대단한 효과는 없었다. 더 강력한 마음의 소리가 울린다. 시방 뭐시 중헌디? 아무리 겁쟁이여도 그렇지, 나중에 힘들까 봐 지금 한 발 빼겠다는 건 너무 찌질하지 않은가? ‘애별리고’(愛別離苦)로 결론 나더라도 좋을 때 맘껏 좋아해 보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이렇게 지금을 변호하고 싶어진다. 전에는 ‘암 그렇지’하며 끄덕이던 경고들이 듣기 싫고 왠지 반감까지 든다. 확실히 들떠있긴 하다.

더할 나위 없는 이 행복 안에서,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발견하고 그걸 지켜보는 존재가 있었으니, 나의 사부님 루크레티우스다. 그는 다른 어떤 정념보다도 사랑이라는 정념을 경계했다. 심지어 사랑이 질병이요 죄악이라고까지 말했다. 전에는 그런가보다 했지만 이제는 조금 더 불편하게 다가온다. 아유,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까? (사랑의 미약 때문에 미쳤다는 소문이 진짜인가?) 두려움, 분노, 탐욕, 슬픔과 같이 우리를 위축시키고 괴롭게 하는 부정적 정서들에 비하면 사랑은 훨씬 더 아름답고 행복하고 유익한 감정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저렇게 엄하게 규탄받아야 할까?

우선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이 시종일관 인간의 지복을 향한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사랑은 분명 쾌락이지만, 뭔가에 푹 빠지는 데서 오는 그 달콤함은 영혼의 평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루크레티우스는 다른 정념과 그 표상들을 반박할 때마다 ‘정신의 이치’를 사용한다. 원자론의 원리로부터 기존의 학설들을 논증하고 미신들을 무화시킨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는 그런 방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왜? 효과가 없어서 아닐까. 논리와 이치와 증명을 내세워 논박하고 입증한다 하더라도 그게 들릴까? 사랑과 사랑의 표상은 인간을 귀먹고 눈멀게 한다. 사랑만큼 마음을 들썩이고 시야를 좁히는 감정은 없다. 가장 진하고 선명한 이미지, 가장 질기고 끈적한 동일시, 가장 뻔뻔하고 자의적인 당위를 동반하는 감정. “사랑 속에는, 그대가 눈의 빛을 가리고서도 파악할 수 있을 헤아릴 수 없는 질병들이 있다. 그러니 미리 깨어 있어 주의하고, 내가 가르친 방법에 따라, 걸려들지 않게 조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4:1145)

하지만 어쩐담? 지금이야 좋아라하며 뭐가 문제인지도 못(안) 보고 있지만, 나는 이미 질병의 한 가운데에 영락없이 얽혀든 처지다. 이제 남은 건 괴로워질 일뿐인가? 수행과 지복은 틀려먹은 건가? “하지만 그대가 얽히고 발이 묶였다 해도 그 적을 피할 수는 있다, 그대 스스로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면.”(4:1150) 다행히 아직 희망은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내가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귀를 닫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정신만 차린다면 완전히 휩쓸리지 않을 수는 있다고 말한다. 마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말이다. 뭐라도 해보자. 어떻게 이 놀랍고도 소중하고도 또 위험한 국면을 화상을 입지도 입히지도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그렇더라도 나 자신을, 혹은 상대를, 나아가 세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 과정을 겪어갈 수 있을까?

 


베누스의 단단한 매듭
인정한다. 지금은 정말로 내 인생 그 어느 시기보다 달콤하다. 그러나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세상 어디에 이렇지 않은 연애가 있을까? 시작은 다 달고, 다 뜨겁고, 다 아름답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떤가? 눈물 섞인 파국이거나 지난한 인고의 세월 아닌가. 그 정도면 다행이다. 서로를 증오하거나 해치는 지경까지 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세상 노래와 이야기의 팔 할은 사랑이지만, 그중 대부분은 이별과 괴로움의 호소임을 기억하자. 왜 거의 모든 사랑이 권태 아니면 상처로 귀결되는 걸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언젠가 나도 내뱉게 될지도 몰라 겁나는 저 유명한 대사는 쓰라린 마음을 잘 담고 있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부당한 말이다. 사랑은 원래 변한다. 변하니까 시작될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우리는 유독 사랑이라는 정서에 엄격한 것 같다. 분노나 두려움이 줄었다고 깊이 상처를 받는 사람은 없다. 사랑 앞에서만 인간의 비일관성을 원망하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신체 조직의 단단한 구성조차 매일 매순간 다를진대, 극히 미세하고 민활한 원자들로 된 마음은 오죽할까? 만난 것은 흩어진다. 이것은 자연의 대진리다. 따라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따질 때, 우리는 생겨나고 있고 생겨났기에 사라지는 것들에 영원하기를 강요하는 셈이다. 이는 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무리한 요구다. 봄날은 간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런 반자연적인 요구를 하게 되는 걸까? 왜 사랑이라는 정념은, 스스로 영원하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이렇게 집요하게 일어나는 걸까? 우선 다른 정념들과 달리 사랑은 물질적 근원을 갖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도 우리 몸에서 가장 진하게 응축된 요소들로부터.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성년이 되었을 때 우리의 지체들에서는 수많은 씨앗들이 생성된다. 그 씨앗들이 정해진 자리에서부터 힘줄을 타고 우리 몸의 생식하는 부분으로 모이면, “맹렬한 욕망이 지향하는 곳을 향해 그것을 쏘아 보낼 욕구”(4:1045)가 사지를 격동시키고 들쑤신다. 이러한 결합 및 분출에 대한 열망, 즉 잉태하고 생식하고자 하는 근원적 충동을 일러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비너스)라고 부른다. 주의할 점은, 루크레티우스에게 베누스 자체가 문제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열매 맺게 하는 자연의 창조적 힘으로 간주된다. 심지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자체가 베누스를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과 신들의 즐거움이시여, 생명을 주시는 베누스시여, 당신은 하늘을 미끄러지는 별들 아래 배들을 나르는 바다와 곡식을 가져오는 땅들을 그득하게 채워주십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목숨 가진 것들의 모든 종족이 수태하며, 생겨나 태양빛을 보러 오니까요.”(1:1)

전체 자연의 베누스는 유한한 개체에게서는 성욕으로 발현되는데, 그때 그것은 단지 역동적 에너지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특정한 대상을 향하며, 결합에서의 “쾌락을 예고하기 때문이다.”(4:1056) 즉 성 에너지는 언제나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는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우리는 이 에너지에 이미지와 의견들을 덧붙인다. 아름답다, 좋다, 또 만나고 싶다, 갖고 싶다, 계속 이대로이고 싶다 등등. 이런 판단들에 베누스가 묶이고 고일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떠올리고 상상하면서 갈망하게 된다. 이런 상태를 일러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의 단단한 매듭”(4:1148)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우리의 베누스다. 그리고 여기서 아모르라는 이름이, 여기서 처음 베누스의 저 달콤함이 방울져 가슴속으로 듣고, 또 냉기 어린 근심이 뒤따른다. 왜냐하면 그대가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있다 해도, 저 이의 영상이 곁에 머물고, 달콤한 이름이 귓전에 맴돌기 때문이다.”(4:1060)


베누스에서 아모르(에로스)가 나오고, 에로스는 화살을 쏘아 사람을 돌게 만든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마치 감염된 것처럼 반복재생되는 특정 시뮬라크라만 다발을 수신하게 된다.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그 사람의 얼굴, 웃음, 목소리, 몸이 떠오르고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어떤 기분일지, 나를 생각하는지 궁금해진다. 좋을 것 같다고? 물론 처음엔 좋다. 하지만 달콤함과 냉기 어린 근심은 한끝 차이다. 만약 그 사람에게서 웃음이 사라진다면, 슬퍼하거나 아파하기라도 한다면 어떨까? 혹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를 미워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떠나가게 된다면 어떨까? 그때는 저 선명한 시뮬라크라들이 끔찍한 쓴맛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가장 강한 쾌감을 주는 사랑이 가장 강한 고통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표상은 견고한데 만물은 구부러지고 흩어져 버리기에 우리는 상실감을 면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괴로움은 사랑이 변질되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사랑과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는 면인 것 같다.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이 쾌락의 샘 한 가운에서 어떤 쓴맛이 솟아서, 바로 꽃들 가운데서 목을 조른다”(4:1134)고 단호하게 말한 것이다.

조금 착잡하다. 하지만 뭐, 과보를 받고 감당하면 되지 않겠는가. 좋았으니 그만큼 힘들기도 하겠지. 들떠서 올라갔으면 곧 그만큼 내려가야 하는 법이니까. 이렇게 초연한듯 말해도 좀 겁이 난다. 다툼이든, 권태기든, 바람이든, 이별이든 실제 내게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아찔아찔하다. 그런데 이것들이야말로 들뜬 내가 허공에서 내려와 맞이하게 될 친구들이다. 그때 내가 통과하게 될 정념의 파노라마를 가늠해보고 싶다. 대체 어떤 병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왜 사랑은 질병인가?
우리는 표상 때문에 보이는 대로조차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고착된 시뮬라크라들이 끊임없이 감각의 정보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제멋대로 보기’의 끝판왕은 사랑이다. 사랑의 그물에 걸린 자는, 요정이니 여신이니 백마 탄 왕자니 하며 상대방에게 갖고 있지도 않은 장점을 부여한다. 흔히 우리는 ‘콩깍지’라고 표현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눈이 멀어버린 끔찍한 환각이라고 말한다. “검은 여자는 ‘꿀빛’이라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여자는 ‘꾸밈없다’고, 키 작고 왜소한 이는 ‘알짜배기 순수 소금’이라고, 덩치 크고 우람한 이는 ‘감탄을 자아낸다, 위엄 있다’한다. 벙어리는 ‘얌전하다’ 한다. 기침으로 거의 죽은 여자는 ‘여리다’한다. (...) 이런 종류의 다른 것을 다 말하려면 길고 긴 작업이 될 것이다”(4:1160-1170) 만약 그가 정신을 차리면, “거기서 자신의 우매함을 저주할 것이다, 자신이 그녀에게, 필멸의 존재에게 허용해 마땅한 것 이상을 부여했음을 그제야 볼 터이니.”(4:1184) 우리의 사랑은, 숨 쉬고 먹고 싸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거기 덧씌운 이미지를 향할 뿐이다. 우리는 표상을 사랑하고 표상을 탐닉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생성을 부정하며, 감각되는 것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환상을 좇는다.

 

“마치 목마른 사람이 꿈속에서 물 마시길 꾀하나, 그의 사지에서 열기를 꺼줄 수 있는 물은 주어지지 않고, 그는 음료의 영상을 좇으며 헛되이 애쓰고 타는 불길 가운데서 마시면서도 목마른 것처럼, 꼭 그렇게 베누스는 사랑 속에서 영상으로써 사랑에 빠진 자들을 희롱하고, 그들은 눈앞에 보면서도 자신들의 몸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손으로써 부드러운 사지에서 무엇하나 벗겨내지 못한다. (...) 그들은 탐욕스레 육체를 부딪고, 입의 타액을 서로 섞으며, 이로써 입을 누르고 숨을 헐떡인다, 헛되이.”(4:1097-1105)


물과 빵에 대한 욕구는 쉽게 충족된다. 우리 몸에 흡수되어 정해진 자리가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열망은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표상에서 비롯되는 연정과 갈망은 다른 물질을 흡수한다고 해결되는 욕구가 아니다. 상대가 방출하는 시뮬라크라는 “우리가 그걸 더 많이 가질수록 가슴이 더욱더 무서운 욕망으로 불타게 되는 유일한 대상이다.”(4:1090) 그렇기에 사람들은 끝내 붙들어둘 수 없는 것을 붙들어 보고자 예로부터 사랑 앞에 화려한 약속과 맹세를 덧붙여온 것 아닐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갈증, 결코 충족되지 않는 허기. 이것이 루크레티우스가 진단하는 사랑의 해악이다.

다행히 내게는 이런 정도의 대책 없는 증상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이뻐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결점 있고 미숙한 인간으로 보이고, 애정이 솟지만 그렇다고 폭발적이지도 무제한적이지도 않다. 할 일이 밀려 바쁘고 피곤하면 데이트가 슬쩍 부담되기도 한다(사실 연애와 공부는 항상 순탄하게 병행되는 건 아닌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미화하고 싶고 내 기대와 바람대로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다. 루크레티우스가 묘사하는 것처럼 과격하지는 않아도, 그 근저에는 공통적인 성격이 있다. 바로 소유의 열망이다. 없는 것은 갖고 싶고, 가진 것은 잃고 싶지 않은 바람. 여기에서 질투, 근심, 실망, 미움, 오만 등의 온갖 선물세트가 딸려온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열정은 소유의 바로 그 순간에도 불확실한 방향으로 출렁이고 확신하지 못하니 말이다.”(4:1078)

 


소유의 본질은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맘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배타성에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다른 놈이 너를 나만큼 좋아한다거나, 네가 다른 놈을 나만큼 좋아한다는 것이 화가 나고 괴로운 일이 된다. 너는 나의 것이어야만 하는데! 하지만 이미 말했듯 우리의 신체와 베누스의 욕망은 결코 그런 당위나 약속 같은 관념에 가둬지지 않는다. 가둬질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많은 약속이나 제도도 필요 없었을 것이며, 로맨스든 불륜이든 다이내믹한 사건들도 없어야 할 것이다. 베누스는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와 여기저기로 뻗친다. 이런 이탈이 자신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잘 알아서일까, 우리의 의심과 번민은 쉼이 없다. 혹시 나 말고 다른 놈이 있나? 저놈과는 어떤 관계지? 이런 불안은 무척 미세하고 빈번해서, 아무 개연성이 없어도 늘 깔려있는 것 같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내게도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너넨 여자친구가 알바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1박2일 계곡 놀러 간다면 보내주냐?” 한 친구가 묻는다. 물론 남자들이 섞여 있다. 전에는 쿨한 척하거나 정의로운 척하면서, ‘그래도 보내줘야지’ 혹은 ‘에이 안 되지’하고는 쉽게 말했다. 애초에 깊이 생각할 의지가 없었거나 배아파서 그냥 나오는 대로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정말로, 대학시절 친했던 남자 선배를 오랜만에 만나려 한다는 여자친구의 말이 마음에 걸릴 줄은 몰랐다. 겨우 이 정도에 걸린다는 사실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특히 휴가 나온 군인이라는 사실과 제법 훤칠하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이런 거구나. 계곡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오. 드문드문 오는 카톡을 확인하며 여친의 술자리가 끝나길 기다리던 친구의 퀭한 눈이 갑자기 선명해진다(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나도 퀭할 것 같다. 보통 심난하지 않을 것 같다. 반대로 내가 술자리에 있다면 상대방도 편치 못할 것이다. 갑자기 갈 만한 술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준다. 하지만 모임이든 여행이든 비슷한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텐데, 그때마다 서로 속이 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걸까?

게다가 사랑의 구석구석에도 깨알 같은 비교와 계산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사랑을 위해 영혼을 바치거나, 루크레티우스의 경고처럼 재산과 평판을 탕진해 버리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각종 어플의 도움을 받는 우리 세대의 만남은 얼굴, 키, 학벌, 직업, 집안, MBTI 등을 쇼핑하듯 꼼꼼히 따지고 시작되지 않던가. 서핑을 하다보면 버젓이 떠 있는 ‘나 정도면 교사 만날 수 있을까?’라는 적나라한 광고 문구가 잘 보여주듯, 자신과 상대에 대한 평가와 비교가 계속된다. 그것은 순전히 사회적이다. 밥을 사거나 선물을 하는 등 일상적인 순간에도 공평성이 미덕이 된다. 만족의 경계선은 단순히 둘의 여건의 차이에 의해 그어지지 않는다. 평균이 개입된다. 다들 해준다는데, 이 정도 해줘야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나는 조금 어렵다. 돈도 그렇고 지위나 취향에서도 별 볼 일 없는 나로서는, 밥값은 낸다 해도 아무래도 미래나 안전이라는 영역에서는 언제나 자격지심이 있다. 이 자격지심은 사실 정서적인 차원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고백하자면, 오래도록 내게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야 단념하고 별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기도 쉽지 않을까. 돌려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대한 불안은 주는 것도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고딩시절부터 용기가 없는 성격 탓을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철저한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들뜸 아래 자리 잡은 망설임과 염려도 거기서 기인한다.

 

교환의 방식이 아닌 사랑을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다르게 생각해보자. 나는 왜 내 기대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돌아와야만 한다고 여길까? 뭐가 돌아오건 안 오건 간에 내 본 적 없는 마음을 내었다는 것 자체로 전부인, 덕분에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자신을 체험했다는 사실로 충분한 그런 사랑은 없을까? 그렇기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들, 실망이나 상처라고 느끼는 상황들이 스스로의 사랑을 부정할 이유가 되지 않는 그런 사랑은 정말 불가능할까?

 
사랑의 우정화, 도반-되기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어떻게든 이점을 찾아보려 했으나 루크레티우스에게 사랑은 피하거나 어서 벗어나야 할 수렁일 뿐이다. 그 쾌락 자체가 외부 대상에 의존하며, 대상이 바뀌면 언제든 뒤집힐 준비가 된 조건부 쾌락이기 때문이다. 커다란 쓴맛이 숨겨진 단맛인 것이다. 결코 영혼을 혼란에서 구해내지 못할 쾌락, 에피쿠로스는 그것을 ‘동적인 쾌락’이라고 불렀다. 흐르는 베누스의 충동을 막아 고착시키는 한 그것은 정적일 수 없다. 그래서 현자는 사랑을 피한다. 나는 현자도 아니고, 사랑을 피하지도 못했다. 사랑이 그런 것일 수밖에 없다면, 그 자리에서 다른 걸 해볼 수는 없을까? 사랑에서 ‘정적인 쾌락’에 가까운 다른 무언가를 고안해볼 수는 없을까?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게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우정의 관계다. 이것은 단지 친한 친구라는 의미보다는, 함께 배움을 닦아가는 동지들 사이의 독특한 감정이다. 그들은 “밤낮으로 함께 성찰함으로써, 그와 나, 즉 우리는 역동적인 공생의 방식을 정립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공생 속에서 그의 영혼과 나의 영혼은 참된 학설들의 샘물에서 길어 올린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중단 없는 원자들의 흐름으로 서로 투과될 것이며, 그리하여 서로의 원자적 조성에 항상 더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장 살렘, <고대 원자론>, 142쪽) 우정은 사랑보다는 훨씬 냉정하고 거리감이 있지만, 서로를 가두지 않고 같은 것을 함께 배워간다는 점에서 더 가깝기도하다. 말은 쉽게 하지만, 이것은 상대에게 부여해왔던 환상과 독점적 소유욕을 걷어내야만 가능한 것이다. 애정에 기반한 기생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지복에 기반한 공생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내 상태로서는 감도 잘 안 올 정도로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목표는 크게 가지라고 배웠으니 한번 꿈을 꿔본다. 물론 이것은 사랑과 우정, 애인과 도반을 모두 다 갖고 싶다는 욕심이어서도 안 되고 억지로 애정을 참겠다는 성급함이어서도 안 된다. 다만 이 관계와 여기서의 경험들을 철학을 시작하는 계기로 삼을 수는 있지 않을까? 루크레티우스의 말대로, 정신만 차리면, 안 하던 생각을 해보고 나 자신과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묻고 배우는 시도는 가능할 테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의 사랑은 변할 거다. 먼 훗날이건 조만간이건, 이쪽에서건 저쪽에서건 혹은 양쪽에서건, 갑자기 혹은 점진적으로 변할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좋기만 한 지금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개월 전과 다르고 미세하지만 매일매일 똑같은 마음이진 않잖은가? 지금 이 강렬한 정념도 곧 힘을 잃을 거다. 시간 속에서 그 틀을 벗어나는 모습들을 볼 테고 묶인 베누스의 매듭 역시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뇌어도 돌아서면 잊어먹는다. 하지만 어떻게 결론나더라도 슬퍼할 일이 뭐 있는가. 내가 준 만큼이 돌아오지 않아도, 내 바람과 다른 곳에 이르더라도 억울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나는 완전히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말을 하고, 다른 고민과 다른 생활을 하는 나를 경험할 수 있었다. 또 이렇게 전에는 생각해볼 일조차 없었을 사랑에 대해 배우고, 그 문제를 어설프게나마 물고 늘어질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지 아니한가!

 

 

 

글_민호(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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