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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기쁨이어라, 삶이여, 죽음이여!

by 북드라망 2022. 11. 30.


기쁨이어라, 삶이여, 죽음이여!

 


죽음 충동과 마주하며
쭈뼛거리는 친구들 틈에 있다가 금방 나오긴 했지만, 그 이후로 마음 한 쪽 구석에서 톱니바퀴 하나가 계속 돌아간다. 이렇게 젊은이들뿐인 장례식이라니. 당연히 ‘왜’에 대한 답을 구할 수도, 감히 그 심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을 테다. 그런데도 자꾸만 비슷한 물음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대체 그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체험되었을까? 어떤 색 어떤 톤으로 비춰졌고 무엇이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을까? 반대로, 어떻게 그 동안은 사는 쪽을 택해왔던 걸까? 대답이 나올 리 없는 이 의문들이 한참을 물결치고 나서야 비로소 초점이 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자살률 1위, 우울증 증가, 청년들의 무기력 등의 이야기가 날로 커져도 잠깐 혀를 차는 게 다였다. 잘 아는 얼굴들 중에도 상담을 받고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내 반응은 ‘심각하구나’를 넘어가지 못했다, 부끄럽지만 약간 무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람들 속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나는 우울할 틈도 없다는 식의 반응도 없지 않았다. 그 거리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그 날 이후였다. 하루하루 나를 분주하게 하고 활기를 띠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되물어볼수록,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의존하고 또 존재감을 확인하고 있는 관계, 공간, 건강, 공부가 지금 같지 않아도 나는 계속 명랑할 수 있을까? 거기에 생기는 조그만 스크래치에도 들뜨거나 다운되는 게 나 아니었나? 그것들이 어느 날 드러난다면?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재작년 반강제로 연구실을 쉬게 되었을 때의 공허함을 떠올려보자. 비좁은 반지하방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서 나는 세상을 어떤 색으로 칠하고 있었던가? 무력한 와중에 무언가에 폭력을 가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쳤었다. 만만한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그 낯빛은 저 ‘사회 현상’에서 그렇게 멀리 있는 상태인가? 그리고 너무 쉽게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은가?

 

우울증과 죽음 충동. 이것은 자연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아닌 것에 대한 애착과 결합되어 있다. 소멸을 욕망한다는 것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자기 자신과 주변에 대한 강한 부정의 결과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허망한 정념을 어떤 방식으로든 소화해서 대응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힘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버린다. 이해되지는 않는데 그 힘은 너무 클 때, 우리는 이 상황이 사라지길 바라는 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소멸을 바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 충동은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다.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험 또한 모두에게 있다. 어떤 순간 우리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커지듯 이 역시 불시에 확 일어날 수 있다. 구체적 사건으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고, 호르몬의 작용이거나 운기의 변화일 수도 있다. 클리나멘이 모든 운동의 베이스인 우주에서, 우리는 언제고 생명력의 낮은 문턱까지 갈 수 있다.

 


질문해야 할 것은, 우리는 어떻게 그 순간을 넘어 가는가이다. 덜컥 겁이 나서일 수도 있고, 문득 새롭게 삶의 의미와 서사를 재편해내어서일 수도, 알 수 없는 출처의 의욕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는 문턱마다 죽음 충동을 상쇄시키는 생 충동의 승리를 경험한다. 그래서 또 힘을 내어 살아간다. 그런데 이것으로 충분한가?

두 가지 문제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아무리 죽음 충동이 보편적이며 누구라도 휩싸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시소에 매번 휘청여야 하는가다. 그 강력한 먹구름이 우릴 잡아먹지 않고 이번에도 지나가기만을 바라야 하는 건가? 두 번째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충동은 다소 약해져 있는 것 같다. 흔히 이야기되는 무기력의 만연. 먹여 살릴 가족도, 투신할 신념도, 특별한 소명이나 비전도 없는 우리 세대는 죽음 충동과 맞설 서사가 없다. 그래서 많은 경우 전문가나 호르몬제의 도움을 받는다. 물론 이전 세대가 더 대단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현실적 관계의 폭이 좁고, 접촉이 상당히 차단되어 있으며, 직접 손과 발을 움직이는 활동이 소거된 조건은 같은 충동에 훨씬 더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가족이나 이념처럼 심신을 바칠 목표를 찾아야 할까? 관계를 늘리고 몸을 더 놀려야 할까?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임시방편이며 역효과도 있다. 죽음 충동의 문제는 더 근본적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것이다. 먼저 간 친구에게서 받은 이 과제를 나는 루크레티우스의 자연학으로부터 풀어가 보려 한다.


죽음에의 의욕과 죽음에의 공포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한 챕터를 할애할 정도로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그의 논의를 뒤적이더라도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는다. 그의 포커스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아케론에 대한 저 두려움”(3:40)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미신과 의식들이 낱낱이 비판되며, 심지어는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와 전혀 관련이 없다”(3:380)고까지 말한다. 왜냐하면 죽을 때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며, 살아 있을 때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한 유물론적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논증들은 분명 종교적 환상이나 미신에서 오는 두려움을 헤쳐나가는 데에는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 도리어 죽음을 열망하게 되는 이 집단적 경향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은 이 열망들을 도리어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든다. 죽음-욕망과 죽음-공포는 서로 상반되는 정념이 아닌가?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그리고 자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삶에 대한, 그리고 빛을 보는 것에 대한 미움이 인간들을 사로잡는다, 슬픈 가슴으로 죽음을 택할 정도까지. 이 두려움이 걱정들의 원천이라는 것을 잊고서 말이다.”(3:80)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리어 죽음을 택한다? 역설처럼 들리지만, 이 문장은 루크레티우스가 죽음의 공포를 지적하면서 정말 문제 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는 두려움이라는 정념을 고발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랬다면 대범한 통치자들이나 전사들이 칭송되어야겠지만, 그들의 야망과 권력욕이야말로 가장 강하게 비판되고 있다. 그 욕구들 또한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단순한 겁먹음이나 소심함이 아니라면, 두려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두려움이 문제시될 때 정말 비판받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당위 혹은 갈망이다. 두려움은 이 뿌리 위에 자란 줄기이며, 모든 정념은 잔가지이거나 열매다. ‘빛을 보는 것에 대한 미움’ 또한 그렇다. 있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을 때, 머물러야 할 것이 사라질 때, 피어나는 괴로움이 잘못 익으면 그런 선택이 이뤄진다.

그렇기에 시종일관 지적되는 것은 공포 자체가 아니라 그 공포를 낳는 환상이다. 영혼이라 이름하든 정신이라 이름하든 사라지지 않고 남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짓된 믿음이다. 필멸하는 것들, 그러나 그렇기에 다른 무언가를 낳는 것들의 운동 사이로 슬쩍 밀어 넣어진 불멸성. 오직 이 불멸성에 대한 집착이 고발되어야 할 문제다.

죽음 충동은 무를 욕망하고 소멸을 꿈꾸는 사태다. 이것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어떤 것도 긍정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는 반드시 이곳과는 다른 세계를 향한 표상이 함께한다. 이 세계의 거북함에 대한 반정립 형태이거나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흐릿한 것일지라도, 그 표상은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무를 욕망한다고 할 때의 무는 유를 전제한다. 즉 현존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며, 그 결과 여기가 아닌 어딘가가 갈망된다.

무기력과 우울증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자.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여기엔, 세상은 혹은 나는 이러저러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마음의 마찰이 깔려 있다. 이 어긋남이 적절한 대상을 찾는다면 분노로 표출되겠지만, 선명한 대상을 포착하지 못한다면 안쪽으로 향해 결국 이 세계와 자신을 부정하는 경향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분출이건 수렴이건 그 뿌리는 동일하다.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올가미.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과 죽음을 욕망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하나는 삶에 대한 애착이요, 하나는 또 다른 삶에의 애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기피하는 것이나 갈망하는 것이나 여기서 펼쳐지는 세계 바깥에 강력한 상을 설정하면서 삶에 대한 특정한 가치평가를 단단한 당위로 붙든다는 점은 매한가지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초점이 바뀐다. 루크레티우스가 그리는 세계에서 저 애착은 왜 틀렸는가? 어째서 죽음 충동과 죽음 혐오가 모두 사물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인가? 그렇다. 그것은 여전히 존재함 너머에 설정된 목적을, 작동 바깥에 있는 의미를, 흐름 위에 덧입혀진 고체성을 전제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입자들의 운동’으로 고려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나 타인에게, 어떤 사건이나 세계 자체를 향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혹은 ‘저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운동하지 않기를, 머물러서 지속되기를, 내가 뜻하는 바대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 마땅히 그래야만 함, 이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부당한 바람이다. 자연에게 더 이상 자연이기를 그치라는 요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에 본능처럼 스며든 이 뻔뻔한 의미부여와 당위 설정, 이것이 바로 목적론이다. 사람들 앞에 내보일 만한 대단한 지향점이 있어서 목적론이 아니다. 마음 안에 미세하게 우글거리는 ‘해야 한다’의 목소리들, 중심을 갖는 가치평가들, 크고 작은 표상들 모두가 목적론의 요소들이다. 사물의 본성에 가하는 인위적이고 허구적인 명령. 죽지 않기 위해, 결코 빛을 보는 일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우리 목적론을 고발해야 한다.

 


루크레티우스와 반목적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활용법 중 하나는 이것을 ‘반목적론적 윤리학’으로 읽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이 뜻대로 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연에 자연이 아닌 것을 요구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세 마디로 요약된다. 멈춰라. 건너뛰어라. 사라져라.

우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 것에게 멈추어 영원히 지속되라고 외치게 된다. 사랑을 향해 그리고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향해. 그러나 “모든 것이 끊임없이 흐른다는 사실”(5:280)만이 본질이고 “자연은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다시 만들며, 다른 것의 죽음으로 도움을 받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생겨나기를 허용하지 않”(1:262)는다. 또한 우리는 단계와 법칙을 무시하고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읽고 있지 않지만 갑자기 글을 잘 쓰기를 바라고, 불행을 늘이는 습관을 지속하면서도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신에 의해서조차도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1:150) 이것이 루크레티우스의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다. 그 다음은 도그마화다. 즉 규칙과 법칙에서 어긋나는 변수들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연은 법칙 아래 가둬지지 않고 언제나 돌연변이를 내보내는 실험을 계속한다. “자연은 모든 것을 바꾸고, 뒤집기를 강요한다. (...) 땅은 또한 괴물들도 만들기 시도했었다.”(5:831) 모든 존재는 서로 얽혀 있고 서로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진실로 온 존재를 바깥에서 한정지을 것은 없다.”(1:1001) 자연은 어떤 총계 아래 묶일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편위하는 원자들처럼 울타리를 끊임없이 빠져나가고 있는 전체다.

끊임없이 흐르고 건너뛰지 않으면서도 이탈하는 전체로서의 자연. 루크레티우스의 이런 사유는 고대로부터 자연에 덧씌워온 굵직한 목적론적 사고에 반한다. 신, 인간, 정신이 특권화되어온 신화에 반한다. 가장 먼저 신이라는 질기디 질긴 이야기가 털려나간다. 정확히는 신의 명함들이 떨어져 나간다. 루크레티우스의 세계에서 신은 창조주도 아니고 통치자도 아니고 감시자도 심판관도 아니다. 신은 자연 위에 있지 않고 자연에 속하며,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신이 여전히 신적인 것은, 그가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점 때문이다. 신은 세계의 그 어떤 현상의 원인조차 아니다. 이것을 신들의 몰락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진정한 신성화라고 부르든, 신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다. 그리하여 “자연은 보인다, 곧장 자유로운 것으로, 오만한 주인들 없이, 자체가 스스로 자기 뜻대로 신들 없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으로.”(2:1090) 이와 같은 해방이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영혼과 육체 사이, 인간과 지구 사이, 운동 원인과 물체 사이에 놓였던 선후관계가 사라진다. 무엇도 다른 것의 주인일 수 없다.

 


오래도록 영혼은 몸의 주인이자 목적으로 여겨져 왔다. “영혼은 살아 있는 신체의 원인이며 원리이다. (...) 모든 자연적 신체들은 영혼의 도구들이다.”(아리스토텔레스, <영혼에 관하여>, 2권 4장)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영혼에 부여되었던 특권을 허물었다. 영혼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성장하고, 병고를 겪고, 쇠진해져서 사멸한다. “정신과 영혼의 본성이 육체적이라는 것”(3:161)이 포인트다. 그 역시 원자로 되어있고, 시뮬라크라들에 의해 타격을 받아야만 헤아리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영혼이 마치 마부처럼 우리의 몸을 이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체와 별개로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독자적인 의지는 없다. 정신과 영혼은 절대 지배적인 것도, 특권적인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다른 물체 및 기관들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 받고 영향을 주며 함께 생명을 이어가는 하나의 부분이다. “이것이 손과 발과 눈들이 전체 생명체의 부분으로 존립하는 것에 못지않게, 인간의 부분이라”(3:94-97)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다음으로 인간에게 부여되어온 특권이 허물어진다. 신체에 대해 정신이 그러했듯, 인간은 스스로를 이 땅의 중심이자 동식물의 정점으로 여겨 왔다. 자신이 죽이지 못한 동물이 없다고 생각한 인간들은 무엇이 자신들을 승리하게 했는가 하는 이유를 찾다가, 이족보행이나 엄지손가락, 큰 두개골 등의 특징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성공을 뒷받침하는 요소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보기 위한 눈, 잡기 위한 손’처럼 ‘승리하기 위한 요소들’로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았다. 이런 시각으로부터 다른 동물들을 열등하고 덜 진화된 존재로, 나아가 자신들이 얼마든지 착취해도 좋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동물들은 인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었다. 타기 위해, 먹기 위해, 옷을 짓기 위해 주어진 자원이 되었다. 식물이나 광물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거나 적어도 인간의 점령을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허락하시지 않았는가. 가운데에 있는 열매 말고 마음대로 따먹고 즐겨도 좋다고. 세계는 인간의 것이다! 이 유아적 발상은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의심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물의 본성’을 관찰하고 관찰한 루크레티우스는 하늘을 우러러, 세상이 우리를 위해 마련되지 않았음을 확언한다. 우주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뤄져 있다. 공간은 한정된 경계 없이 사방으로 두루 퍼져 있고, 원자들은 한정된 숫자 없이 “영원한 운동에 떠밀려 심연의 총체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두루 돌고”(2:1055)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성된 다른 모임들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정하여야 한다, 우주의 다른 부분들에는 다른 땅덩이들이 있음을. 그리고 상이한 인간의 종족들과, 짐승의 세대들이 있음을. (...) 하늘도, 땅도, 해, 달, 바다, 그밖의 것들도 유일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헤아릴 수 없는 숫자라는 것이.”(2:1080-1085)


고대의 세계관에서 이것은 상당히 쇼킹한 것이었다. 인간은 세계의 목적도 아니고 정점도 아니며 주인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커다란 창조실험 모형들 중 한 별에 잠깐 형상을 갖춰 살고 있는 하나의 종일뿐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육체의 일부인 영혼이 육체와 함께 스러지듯, 인간도 스러지고 흩어져 또 다른 무언가의 부분으로 되어갈 것이다. 여기에는 선행하는 어떤 목적도 들어설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루크레티우스는 가장 작은 티끌에서까지 목적론의 얼룩을 털어버린다. 어떤 철학자들은 고집스럽게도 ‘원인의 원인’을 물고 늘어진다. 창조주도 없고 통치자도 없다고 치자. 그럼 이 세계의 원자들을 운동하게 한 최초의 원인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원자론의 아버지 데모크리토스는 이에 대한 답변을 남기지 않았다. 아마도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필연인 이상 그런 의미부여는 필요치 않으니까. 하지만 목적론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필연적 운동의 기원을 찾아야 했다. 이 작은 당구공들을 때린 최초의 타격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의 제1원인이자 존재를 가능케 한 주인인 신이 아니겠는가? 사실 이것은, 자연 전체를 다시 초월적 원인 아래 묶어둘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루크레티우스는 필연의 늪도 목적론의 덫을 피해 ‘클리나멘’을 이야기했다. 원자들은 무게와 충돌에 의해 직선으로 운동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아주 미세한 경로 이탈 운동이 일어난다. 이 자동적 벡터변화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원자의 본성이다. 그것은 원자 자체에 내재된,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2:293) 일어나는 운동이다. 바로 여기에 반목적론의 핵심이 있다. 자연은 자연 바깥의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는다.


목적 없음과 기쁨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모든 공포는 영원과 불멸에 대한 환상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허무도 그렇다. 그러나 어떤 것도 불멸하지 않는다. 불멸한다 해도 그건 우리와 아무 관련이 없다. 우리는 다른 모든 사물들이 그러하듯 필멸한다. 클리나멘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은 있다. 어떠한 목적도 선재하지 않고 원자들의 모임과 흩어짐만 있을 뿐 그 무엇도 자체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떤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죽음 충동 아래에서 목적론의 뿌리를 캐내고, 그 허구성을 고발한다는 것이 우리의 행복과는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어쩌면 무목적성은 허무와 더 가깝지 않은가?

나는 왜 이렇게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밝고 명랑한지가 궁금했었다. 고대 시문학에서의 형식상의 의례라고 해도, 왜 하필 많은 신들 중 생명과 잉태의 신인 베누스에게 찬가를 올렸을까? 여기에는 일종의 해방감, 풀려남의 충만감, 자신이 저기 저 올가미에 갇혀 있었음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편협한 당위들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느낌 같은 것.

 

“마치 어린아이들이 떨면서 깜깜한 어둠 속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듯, 그렇게 우리는 때로 빛 속에서 두려워 하니까, 어린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몸서리치면서, 일어나리라고 그려보는 것보다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3:87)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행복은 도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각종 거미줄과 먼지와 곰팡이를 걷어내고 털어내는 만큼 발견하게 되는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한숨 쉬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들 모두가 자연이다. 죽음조차도.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수많은 표상들과 공상들(영원히 살고 싶다는 생각, 죽음 뒤에도 영혼이 남는다는 생각, 그 영혼이 벌을 받을 거는 생각 등)이 우리를 떨게 한다. 가난도, 병도, 배신도, 심지어는 인류의 멸망 혹은 지구의 멸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그리고 이 표상과 바람들은 대부분 반자연적 요구다. 평온함과 기쁨은 더 이상 이 미신들에 초점을 맞추기를 그만두고 그것을 털어버리고 그 올가미에서 빠져나오는 여정에서 얻어진다.

그렇기에 루크레티우스는 노래하는 것이다.

 

“기쁨이어라, 순정한 샘들에 다가가 마음껏 마시는 것이. 기쁨이어라, 처음 보는 꽃들을 꺾고 거기서 내 머리를 위해 진귀한 화관을 구하는 것이 (...) 왜냐하면 우선, 내가 중대한 일들에 대해 가르치고, 종교의 단단한 매듭에서 정신을 풀어내고자 나아가기 때문이고, 또한 컴컴한 일들에 대하여 그토록 밝은 노래들을 얽어내기 때문이다.”(1:930)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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