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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우정, 마주침을 맞이하는 윤리

by 북드라망 2022. 11. 15.

우정, 마주침을 맞이하는 윤리

 


친구...라구요?
언어에 실체가 없다는 말이 이런 걸까? 규문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몇 가지 단어의 의미를 이곳의 맥락에 맞게 고쳐 생각해야 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역시 ‘공부’였다. 여기서의 공부는 성적이나 평가와 무관했고, 지식습득보다는 함께 읽고 쓰는 작업으로부터 자신의 생각과 감수성을 변화시키는 수련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에세이’나 ‘세미나’와 같이 내가 알던 상식과는 다르게 쓰이는 말이 몇 개 더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새 용법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다. 그런데 좀처럼 그런 전환이 잘 안 되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친구’다.

친구라는 말이 혼란스럽기 시작한 것은 이란 여행 도중이었다. ‘소-생 프로젝트’에서 떠난 여행에서, 어느 날 저녁 채운 선생님께서 ‘민호 너도 이제 우리 친구니까’ 뭔가를 말하라고 했다. 친구? 옆을 둘러보니, 이십대 형님 둘, 이모뻘 그리고 어머니뻘 되는 ‘선생님’들이 앉아 계셨다. 낯설었다. 내게 친구라면 우선 동갑내기거나 한두 살 터울의 또래여야 했다. 적어도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에 나왔던 외계인 ‘지토’를 알아야 했다. 나이 문제는 그렇다 치고, 친구라면 낄낄거리면서 농담도 하고 코드도 잘 맞아야 할 텐데, 두 형님들에게조차 마음을 터놓게 되지는 않았다. 취향도 경험도 노는 법도 상당히 달랐다. 세대도 다르고 감성도 다른 이런 관계를 친구라고 칭하니, 말이 좀 튀었다. 그럼 기존의 내 친구들은 뭐라 하나? 언제 만나도 어색함이 1도 없고, 보자마자 엉덩이를 때리며 아무말 대잔치를 시작할 수 있는, 이 십년지기 ‘부×친구들’이 내겐 친구라는 말에 어울리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규문에서 친구라는 말이 사용될 때마다 어색함을 느꼈다. 연구실 동료라고 하거나 혹은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의미 그대로 식구라고는 할 수는 있겠지만, 연장자도 있고 친밀감으로 뭉친 사이도 아닌데, 친구는 좀 그렇지 않나?

그런데, ‘친구’란 뭘까? 새삼 의문이 든다. 정의를 내려 본 적도 없고 내릴 생각도 없지만, 만약 지금까지처럼 ‘경험을 공유하며, 언제든 편하게 함께 노는 또래’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제 나는 친구가 없다. 어느새 졸업하고 멀어져서 이제 일 년에 한 번도 만나지 않게 되었다. 혹 오랜만에 모여 사는 얘기를 나눠도 오래된 추억에 새 소식 하나를 더할 뿐, 서로의 삶에는 개입하지 않고 담백하게 흩어진다. 친구였던 이들이 모두 ‘옛 친구’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친구라는 말에 대한 연구실의 낯선 용법을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친구’는 나이와 성향을 가로지를 뿐 아니라,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천차만별인 사람들을 연결 짓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는 상사와 부하직원이거나, 선생과 학생이거나, 연장자와 연소자로 구분되었을 관계를 우정의 관계로 만들어주는 요인은 무엇일까?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밥을 먹는 것? 이건 직장동료나 가족 간에도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활동이 밥과 장소를 유지하며, 친구라는 말의 폭을 확장시킨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공부를 하는데 왜 친구가 필요한가? 그것도, 세대나 출신이나 경험이 달라서 거리감을 주는 낯선 사람들이. 혼자서 하거나 아카데미처럼 자격이 검증된 사람들만 모아두면 훨씬 낫지 않은가? 이것은 공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직결된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 친구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고대에도 친구에 대한 낯선 용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자가 있었다.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스승이자 유서 깊은 우정 공동체의 대표인 에피쿠로스다. 그의 정원에는 노인, 청년, 여성, 귀족, 노예, 심지어 매춘부까지도 들어와 철학을 배웠다. 그들은 서로에게 모두 친구였다! 어떻게?

 

 


행복의 뿌리로서의 우정
‘너의 삶을 숨겨라’라는 가르침을 아주 잘 실천했던 루크레티우스와는 달리, 정작 그렇게 가르쳤던 스승 에피쿠로스는 상당한 ‘인싸’였다. “그의 친구들은 너무 많아서 모든 폴리스들로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0권)고 전해진다. 쇠락해가는 아테네 한쪽에 정원 공동체를 꾸렸던 에피쿠로스. 그는 비록 정치적인 활동은 일체 하지 않았지만 평생 친구들과 함께 살다가 친구들 속에서 죽었다. 그 친구들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이 세계의 참된 이치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성별도 계급도 출신도 문제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루머와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비방자들의 몫이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을 되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자들과 더불어 기쁨의 길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 이것이 모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윤리적 문제였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정신적·신체적 기술들이 고안되어 왔지만, 에피쿠로스의 제안은 간명하다. 우선, 친구를 만들어라!

 

“전 생애의 행복을 위해 지혜가 마련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27)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일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저 튼튼한 우정의 관계를 형성하기다. 이것은 우리에게 좀 낯설다. 재산과 스펙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행복을 위해 친구 사귀는 일을 최우선으로 설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 부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우리는 친구관계를 접게 되더라도 학업이나 직장을 위해 터전을 옮긴다. 왜냐, 그것들이 행복의 핵심 조건이니까. 경제적인 기반, 공인된 자격, 병 없고 사지 멀쩡한 몸 등의 여건이 먼저 세팅되어 있어야 행복의 조건이 마련된다고 믿는 것이 우리다. 이것은 고대에도 일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우정에 앞서는 것은 없다. 재산도, 지위도, 건강도, 심지어는 철학함 자체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열매이지 뿌리가 아니다. 이 조건들 모두는 우정의 힘에 의해 충족될 수 있고, 사실상 그 관계 위에서 고안될 때라야 가장 적절한 수준으로 추구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경험상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한다는 가정 위에 세웠던 계산이다. 주거, 배움, 유흥, 건강 등 모든 문제를 각자가 짊어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한 우리는 “일생 동안 생계 수단을 모으며”(<바티칸 소장 문헌> 30)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이상 늘 필요한 것이 가득한 불만족의 상태, 즉 행복과는 거리가 먼 자리에 놓일 뿐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높낮이를 가진 존재들이 연결된다면, 우선적으로 각자의 물질적·비물질적 능력을 나눌 수 있다. 노인과 아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고, 지혜와 재산과 힘이 순환될 수 있다. 친구의 존재가 요청되는 일차적인 지점은 여기다. “우정은 유익성으로부터 시작된다.”(<바티칸 소장 문헌> 23) 우정은 혼자일 때 겪어야 하는 곤경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귀중한 상호부조의 체험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 이상의 것을 주는데, 그건 바로 자신이 세상에 혼자 맞서고 있지 않다는 감각이다. 에피쿠로스가 명쾌하게 요약하듯,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바티칸 소장 문헌> 34) 이 감각으로부터 우리는 마음의 밑바닥을 채운 두려움에서 한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더더더’를 향해가는 갈망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어느 정도가 충분함인지, 얼마만큼이 우리 본성에 걸맞는 기쁨을 주는지를 ‘함께 한다’는 경험 위에서 숙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충만감을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러므로 육체의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본다, 고통을 제거하는 정도, 그리고 많은 기쁨을 펼쳐줄 수 있는 정도의 것을. (...) 집이 은으로 빛나고 금으로 반짝이지 않는다 해도, 금박 입힌 들보들이 키타라 소리를 되울리지 않는다 해도, 그렇더라도 흐르는 물 가까이 부드러운 잔디밭 높직한 나뭇가지 아래 친구끼리 드러누워 큰 비용 없이도 즐거이 몸을 돌볼 터이니.”(2:20-32)


그렇다면 다시, 친구란 무엇일까? 먼저 친구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존재로 다가오지만, 그 영향력은 가시적인 원조행위 너머의 힘으로 작동한다. 그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기운차게 살아가고 있음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활력이 있다.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와도 같이, 그 힘과 더불어 우리는 용기를 얻고 스스로를 왜소하게 느끼기를 그친다. 모든 걸 혼자 감당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 그런 작용을 하는 존재로 친구를 이해한다면 스승도, 아이도, 심지어는 죽은 자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나 자신을 전보다 더 복합적인 존재로, 다시 말해 더 강하고 명랑한 존재로 느끼게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따라서 우정의 중요성을 모르고 거기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가 아니거나 행복해지길 바라더라도 지혜롭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자라고 에피쿠로스는 단언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득 궁금증이 든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자연에 입각해서 추론해냈으며, “가장 중요한 사실들의 원인을 정확히 발견하는 것이 자연학의 역할”(에피쿠로스,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정과 친구에 대한 강조도 그럴 것이다. 우정이라는 관계 방식의 중요성은 어떤 자연학적 통찰로부터 도출되었을까?
 

우정이라는 윤리의 자연학

 

“고귀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현명함과 우정에 신경을 쓴다. 이들 중 전자는 사멸하는 선이고 후자는 불멸하는 선이다.”(<바티칸 소장 문헌> 78)


현명함은 사멸하고 우정은 불사한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현명함이야 시대와 집단 속에서 변하기에 사라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정도 마찬가지 아닌가? 영원한 우정 같은 게 있다는 걸까?

우정이 현명함을 비롯한 덕목들과 다른 점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소유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누구도 우정을 홀로 지니고 있을 수는 없다. 너의 지혜, 그의 강인함, 그녀의 아름다움이란 말은 가능하다. 하지만 우정은 이런 단수 소유격에 담기지 않는다. 우정은 언제나 우리의 혹은 그들의 우정일 수밖에 없다. 우정은 ‘사이’에서 이뤄지는 사건이다. 그리고 ‘사이’는 어디에나 있다. 이전에도 있어 왔고 이후에도 계속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정의 불멸성을 푸는 핵심이다.

우리는 보통 사이라는 영역을, 개별적인 것이 다른 개별적인 것과 만날 때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보면 정확히 반대다. 개별적인 것의 그 개별성 자체는 원래 그렇게 규정되어있는 게 아니라 매번의 만남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A’는 ‘pple’ 앞에 붙느냐, ‘KORE’ 뒤에 붙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세미나에서의 나는 운동장에서의 나와도 다르고 여자친구와 있을 때의 나와도 다르듯이, ‘A와 B’에서의 A는 ‘A와 C’에서의 A일 수 없다. A는 무엇‘과’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되고, 동시에 그 ‘무엇’ 역시도 다른 뭔가가 된다. 그러니까 A는 없다. B도 없고 C도 없다. 매 순간 도처에서 도처로 가지를 뻗어가는 ‘와(과)’만이, 즉 ‘그리고’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사이’만이 지속된다. 개별적인 것은 바로 이 영원한 ‘사이’를 통과하고 있는, 일렁이는 시뮬라크라로서만 잠시 그것일 수 있을 뿐이다.

 

“이제 그대는 알겠는가? (...) 어떤 것들과 어떠한 놓임새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간에 어떤 운동을 주고받는지가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같은 것들이 서로 간에 조금만 변화해도 불도 나무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1:907-912)


이처럼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의 얽히고설킴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얽히고설키는 사건을 자연학적 차원에서 ‘마주침’이라고 한다. 마주침은 단순한 충돌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루크레티우스의 클리나멘 개념을 환기해보자. 모든 원자는 타격과 무게에 의해 끊임없이 충돌하며 운동하지만, 그 운동을 타동적 기계 작용으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원자 자체에 내재해 있는 미세한 비껴남이다. ‘정해지지 않은 장소,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 어떤 이유도 없이 일어나는 이 작지만 능동적인 벡터 변경 사건은 원자 자신의 운동 패턴에 아주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이로부터 원자는 이전과는 다른 양식의 충돌, 타격, 속도, 놓임새를 만들고, 예정되지 않았던 것들과 만나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다. 이것이 마주침이다. 극미한 궤도 이탈로부터 늘 만나던 것들이 아니라 미지의 것들을 만나는 사건이자, 동시에 미지의 것이 되어야 하는 사건. 그 사건이 우주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놀랍게도 이는 현대물리학의 분석과 매우 흡사하다. ‘약간의 편차’, 그것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

 

“특히 흥미로운 문제는 초기 우주의 균일한 밀도에서 나타나는 약간의 편차의 크기이다. 그 편차에서 처음에는 은하들이 태어났고, 그런 다음 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입자의 속도에 약간의 불확실성이나 요동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초기 우주가 완전히 균일할 수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다.”(스티븐 호킹,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까치, 179쪽)


마주침이라는 무규정적 사건의 불멸성. 이게 원자들의 자연학이 말해주는 이치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마주침은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자연적 사건이지만, 그 예측불가능성과 변화무쌍함은 우리에게 보통 슬픔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하는 것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사람도 사물도 사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일단 두렵고 싫다. 우리가 그토록 위험을 싫어하고 안정을 갈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 오랜 친구들, 안락한 가족의 품에 머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상황이, 삶이, 우주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도처에서 마주침이 밀고 들어온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일이 외부에서뿐만이 아니라 내부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클리나멘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은 원자 차원에서부터 미지의 것을 만나기를 갈구하는 의지를 내재하고 있다는 것. 아무리 가던 길을 편안히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처럼 보여도,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주 작더라도 순간순간 옆으로 새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본능이다.

물론 그럴수록 꼭꼭 부여잡을 수도 있다. 즉 이 크고 작은 이탈의 계기들을 있는 힘껏 제거하고 아늑한 곳에 눌러 붙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대개 온 청춘을 다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하도록 배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 비껴남과 마주침이 우주적인 사건이라면, 더구나 사물의 본성이라면, 오히려 나를 변환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익숙한 것을 떠날 기회로, 그래서 내가 경험한 적 없던 나를 체험하는 기회로 말이다. 자기보존본능을 가진 유기체인 이상 낯선 것은 원래 두렵고 버겁다. 그러나 본디 그 생명을 만들고 살려온 것은 외부이고 타자다. 이 사실을 거듭거듭 기억하는 일은 용기를 준다.

자연에 대한 이런 통찰로부터 따라 나오는 윤리는, 마주침이라는 우발적 사건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전환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역량으로 삼는가이다. 우정의 윤리는 여기서 기인한다. 여기엔 나와는 결코 포개어지지 않는, 그래서 나를 예상치 못한 자리에 데려다놓을지도 모르는 상대와 얼굴을 맞대겠다는 시도가 있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게 우정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우선 실험이다. 해오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마주할 것인가 하는 태도와 자세의 실험. 우툴두툴하고 껄끄러울지도 모르는 상대와. 그렇기에 우정은 ‘만나면 좋은 친구’와 사이좋게 잘 지내는 문제일 수가 없다. 모든 접촉이 마주침인 것은 아니듯, 관계라고 해서 전부 우정인 것은 아니다. 늘 동일한 표상과 정념을 재생산하고 같은 패턴을 반복케 하는 관계는 우정일 수 없다. 학교나 군대, 회사나 가족 안에서의 관계가 우정이 아닌 이유다.

“우리는 우정을 위해서 모험을 해야 한다.”(에피쿠로스, <바티칸 소장 문헌> 28) 우정은 탈주 없이는, 마주침에 대한 긍정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때문에 우정은 무엇보다도 행복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자들, 스스로를 약하게 만들어왔던 오랜 습관과 표상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고자 하는 자들의 것이다. 비록 그 시도들은 두터운 관성에 비하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고 굼뜨겠지만, 그 여정은 비슷한 긴장과 질문을 품고 있는, 그러나 출발한 자리는 가지각색인 사람들과 만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성격도, 나이도, 출신도 다르지만, 자기 삶을 자기 손으로 돌보겠다는 비전만은 공유하고 있다. 그 비전 아래서, 꺼내 본 적 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가진 걸 나누고,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하며, 전에 없던 자기 자신이 되어갈 것이다.

  

‘사우’(師友)들의 공동체
간혹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그것도 이런 표정 이런 톤으로, 이런 살가운 대사를 치고 있다니! 참 낯설다. 머리를 처박고 책을 보는 거야 경험이 있다 해도, 사람들 앞에서 아는 것 모르는 것 끌어다가 내 의견을 떠들어대고, 부끄럼타면서도 세미나를 홍보하고, 잘 모르는 선생님들에게 식사하고 가시라고 말 붙이는 모습을 발견하면 좀 신기하기도 하다. 특히 온라인 세미나에서 한 분씩 성함을 부르고 먼저 안부를 묻는 일은 나로서는 낯간지러워서 절대 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걸 잘하는 사람을 보면 참 재주 있다고 부러워하면서도, ‘능청스럽군(즉 가식적이군)’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 보면, 쑥스러움을 이기고 그렇게 할 때 예기치 못한 미소나 감사 인사가 돌아오거나 재미난 농담이 시작되었고,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아졌다.

연구실에 나온 지 4년이 지나서야, 그리고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의 가르침을 헤집고 나서야, 그토록 낯설게 들렸던 ‘친구’라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동창-친구는 추억을 공유하는 자들이었다. 몇 년 뒤에 봐도, 너는 내가 아는 너고 나는 네가 아는 나다. 익숙하다. 그렇기에 나를 다른 곳으로, 다른 모습의 나로 데려가지 않는다.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편안하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어떤 촉발이나 화학작용이 없는 미끈한 관계라는 거다. 반면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이 선생님-친구들은 처음부터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매해, 매 세미나마다 새로운 분들이 오신다. 각기 다른 일상, 사유, 열정을 가지고서 모인 이 관계에서는 늘 긴장이 흐른다. 그 긴장이 기울고 참에 따라 와하하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묵직한 충고가 꽂히기도 한다. 물론 이 관계는 편안하지 않다. 부담되고 껄끄러운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이 만남이 지탱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움이다. 밀어주고 당겨주는 이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을 이해하고 자신을 닦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종용하기 때문이다. 같은 견해, 같은 표상, 같은 습관에 머물지 않도록 말이다. 말이든, 글이든, 표정이든, 아우라든, 친구란 그런 힘으로 작동하는 존재다. 바로 그럴 때, 친구와 스승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뭘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매번 배움이라는 마주침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렇게 보면 나는 온통 스승-친구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동양 사상에서는 이런 ‘사우’(師友)야말로 최고의 관계라고 했다고 한다. 복도 많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란 무엇인가?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는 것. 연중무휴 스승이자 친구로 가득한 공부공동체는, 아름다워 보일지 몰라도(그게 사실이라도) 매일매일이 다이나믹하다. 질투나 삐짐 등으로 관계가 삐걱이기도 하고 할 일이 태산처럼 느껴져 벅찰 때도 많다. 공부하러 모이긴 했지만 서로 간에 날 선 코멘트, 자의식, 뒷얘기가 없지 않다. 사건사고가 겹칠 때면, 특히 나 같이 속 좁고 근기 약한 사람은 리듬이고 뭐고 깨져버려서 골골골 앓고 만다. 에피쿠로스 공동체도 이러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내부자와 외부자들로부터 비방하는 기록과 찬미하는 기록이 엇갈리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람 사는 곳인 이상, 더구나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곳인 이상 그곳도 사건들이 터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부처님의 승가(僧伽) 공동체라고 안 그랬던가. 중요한 것은 그런 해프닝들을 없어져야 할 장애로 부정하지 않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마주침이다. 어쩌면 부담과 부침을 겪지 않아도 이상할 것이다. 단번에 거기에 초연해지길 바라는 것도 환상이다. 다만 당장 내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배움을 위해, 외로울 새 없이 이 이상한 친구들 속에서, 정신없이 이십대를 보내 가고 있음이 생각보다 행운이라는 사실을 까먹지 않도록 종종 되짚어보는 일이지 않겠는가?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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