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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자족(自足)이라는 이름의 풍요

by 북드라망 2022. 11. 2.

자족(自足)이라는 이름의 풍요

 


스톱, 피터팬 코스프레
돈에 대한 생각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겠지만, 진지함의 정도로 따져보면 나는 돈을 우습게 여기는 편이다. 타고나길 저렴한 취향 때문인지 공동체 환경에서 자라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돈의 위력을 잘 몰랐고, 돈 쓰는 것을 버는 것만큼이나 내켜하지 않는다. 물론 한창 학교 다닐 때, 특히 알바를 할 때는 넉넉히 용돈 받는 애들이 부러웠지만 그때뿐이었다. 돈이 뭐 대수인가? 조금 벌어 조금 쓰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게 내 신조였다. 그래서 내게 낯설고 거북했던 것은 모든 가치가 일단 쉽게 많이 버는 데 있는 것처럼 구는 분위기였다. 입시-학점-취업-승진의 코스는 꼭 그 목적을 위해 짜인 것 같았다. 치솟는 서울살이 비용이 그 코스를 정당화해주는 듯했고, 광고창과 SNS를 채우는 온갖 신상품의 향연은 그 뒷배였다. 가장 힘 빠지는 건 그 대열에 휩쓸려서 어울리지도 않게 돈돈 거리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였다. 그렇기에 연구실에 나와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는 놀람과 함께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다. 돈에 대해 다른 말을 하고, 먹고사는 일을 소비에 내맡기지 않는 곳이라니! 연봉이나 적금, 청약, 투자 등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돈의 중력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질척한 필요의 늪에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적은 돈으로 공부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했고, 삼 년 간 그렇게 살았다.

“나 돈 많아!”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물어올 때면 나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갑부라는 뜻이 아니라, 충분하다는 의미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연구실 활동비로 월세 내고, 핸드폰비 교통비 하고, 세미나 도서를 사도 대충 몇 만원이 남았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한턱 쏘기도 했다. 아프거나 사고가 나면 어쩔 거냐는 형의 우려는 흘려 넘겼다. 아직 젊고, 위험한 짓 안하니까, 뭐. 지금은 문제될 거 없다. ‘지금’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지금 나는 홀몸이고, 매일 나가 공부할 곳이 있다. 당장 옷을 사지 않아도 된다. 밥을 함께 해먹는다. 몸 누일 방이 있다. 아픈 데 없다. 그래서 돈이 필요 없다. 있으나 없으나 비슷하게 살 것 같고, 더 있으면 오히려 뭐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괜히 번다하기만 할 것 같다. 안 그래도 충분히 바쁘고 좋은데.

 


이런 생각으로 나는 종종 세대불문 불어대는 투자 열풍을 비웃었다. 뭘 모른다고 생각했다. 돈에 매이지 않는 내가 그들을 이긴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몸 누일 곳 하나 있으면 그만이고 그런 소박한 생활이 더 멋지지 않느냐고. 여기에 내가 배우는 것들을 슬쩍 끼워 넣기도 했다. 에헴, 철학은 자고로 재물을 멀리해야 하는 법! 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이렇게 외치면서(속으로), 나는 언제까지고 내가 피터팬처럼 살 줄 알았다. 이런 관념이 딱딱해져서 은근 자부심이 되어갈 무렵, 내 신변에 변화가 찾아왔고 나는 이 어설픈 ‘안빈’(安貧)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루크레티우스는 사랑 앞에서 “재산은 흘러가버리고, (...) 머리띠와 두건이 되고, 희랍식 외투로, 그리고 엘리스와 케오스 산 옷감으로 바뀐다”(4:1130)고 경고했었다. 다행인지 내겐 흘러갈만한 재산은 없지만, 연애라는 사건은 나의 충분함을 사뿐히 뒤집어버렸다. 돈 많다던 말은 쏙 들어갔다. 늘어난 엥겔지수 때문만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밥 먹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누가 되었든 간에, 내 인생 행로에 동반자가 있을 수 있겠다는, 막연하게 미뤄두었던 경로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나처럼 생각하고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럴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남이 이어질 때 자연히 떠올리게 되는 ‘앞날’을 두고 본다면, 지금 나의 처지와 이 자기만족은 이마를 짚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자의식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아, 내가 불안을 주는구나.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머리가 띵했다.

지금까지 내 모든 계산에 전제된 것은 ‘이 한 몸’이었다. 앞서 말한 충분함은 물론이요,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 둘 수 있었던 것도 까짓 거 몸뚱이 하나 건사하면 된다는 전제 덕분이었으니까. 그런데 몸뚱이 하나가 아니라면, 그것도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나 같은 취향과 신체가 아닌 존재가 더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심플하던 계산식은 복잡해진다. 생활하는데 드는 비용도 늘 것이고, 지금까지처럼 침침한 방구석이 아니라 '집'이 필요할 것이다. 아아, 집……! 이건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장벽이었다. 거기 부딪히자 낯선 근심이 마구 밀려들었다. 커다란 아파트들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도 하고, 저게 맞는 건가 묻기도 했다. 재산이 기준인 사람들을 미워도 했다가, 돈을 우습게 여겼던 내 철없음을 비웃기도 했다. 그래, 벌긴 벌어야 하는데 어떻게?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하나, 다시 취준 사이클로 돌아가야 하나? 하지만 나는 공부가 하고 싶은데. 그럼 책을 잔뜩 써내야 하나? 그럼 좋겠지만 역부족이다(글 한 편에도 이렇게 쩔쩔매는데!). 아님 많이들 하는 투자나 코인? 오 제발.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다. 지난 몇 달간 돈, 연애, 미래, 집, 공부, 만족 등의 단어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여지껏 무심했던 태도를 꼬집기라도 하듯 말이다. 며칠 앓기도 했다(인과성은 확인 안 되지만). 역시 달콤함의 뒷맛은 쓰디쓴 법인가.

뾰족하게 해결된 것도 없고 아직도 심난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된 지금, 이 사단에 대해 한 가지 진단만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연애든 돈이든 공부든 자기 평가든, 이 문제들을 마주함에 있어서 기준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초점을 맞출 데가 없으니, 누군가의 말에, 어떤 이들의 평가에, 혹은 나 자신의 자격지심에 이리저리 휘청거렸던 것이다. 근데 이때의 초점이란 무엇인가? 루크레티우스에게서 배우고 다른 모든 철학에서 배운 바대로라면, ‘기쁘게 산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용어로는 쾌락이다. 맞다. 기쁘게 살기 위해서 공부도 시작한 것 아니던가. 연애도 돈도 집도 마찬가지의 척도 아래서 생각되어야 한다. 많아야 한다 혹은 적어야 한다는 이항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조건이든, 그것들을 경유하면서 나 자신의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맑게 웃을 수 있는가만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바라고 있는, 의심하면서도 필요하다고 느끼는 물질이나 상태가 정말 나를 영혼의 쾌락으로 이끄는지, 어느 수준에서까지 그러한지, 어떤 표상들이 그 수준을 못 보게 하는지 정신 붙들고 짚어볼 수 있어야 한다.


다다익선이라는 망상
최근 놀랐던 것은, ‘일단 뭐라도 많이 있기만 하면 좋겠네’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내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평소 나는 그와는 반대로 말해왔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을 인용해가며, 행복은 많은 것을 누린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해왔다. 약간의 지성만 발휘해 봐도 다다익선이란 명제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재벌들이나 연예인들의 프로포폴 중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토록 많은 음식과 서비스를 누리면서 깨끗한 집에 사는 우리에게도 우울증과 화병이 만연하니 말이다. 이미 이천년도 더 전에 루크레티우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설사 불그레한 자주 염료로 직조된 그림 위에 그대가 눕는다 해도, 서민의 직물 위에 누워야 할 때보다 뜨거운 신열이 더 빨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2:35)라고. 대단하진 않지만, 내가 물건이든 관계든 뭔가를 소유했을 때만 떠올려 봐도 기쁨은 잠깐이고 곧이어 비교심리나 잃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자라나곤 했음을 기억할 수 있다. 많을수록 좋다는 관념의 허황됨은 이토록 자명하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잖은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것이 넓을수록, 이제 사방 온 방향으로 더 많은 알갱이들을 흩어서 자신으로부터 내어보내”(2:1135)는 법이니까. 그런데, 왜 나는 이 자명한 이치를 잊는 걸까? 그럼에도 좀 갖추는 게, 넉넉한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은 언제인가? 신변의 변화를 겪을 때, 지치고 피곤할 때, 불확실한 우연이나 수고를 없애고 싶을 때다. 이런 피로함으로 미래를 상상할 때 다다익선이 정당화된다.

‘미래를 대비한다’는 말만큼 다다익선을 옹호하는 것이 있을까? 젊은이도 늙은이도 심지어 어린애도, ‘앞날’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우선 두둑하게 준비하고 보는 게 옳다고 여기는 것 같다. 입시, 취직, 결혼, 집, 양육, 노후, 혹시 모를 사건사고 등의 ‘중대사’들은 축적과 투자를 허용하고 또 종용한다. 저 앞날에 대비하여, 우리는 열심히 벌거나 ‘N포’를 선언한다. 열정 쪽이든 체념 쪽이든, 자신의 현재 처지를 결여로 규정한다는 점은 동일해 보인다. 미래라는 그 살벌한 이름. 나름 자부했던 나의 충분함이 갑자기 뭘 모르는 어린애의 치기로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이름 앞에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한번 따져보자. 이 미래라는 그림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누가 그려 넣었고 어떤 근거 위에 놓여 있는가?

가령 나는 ‘집’이라는 표상 앞에서 겁을 집어먹었지만, 그 막연한 ‘필요’를 뜯어보면 구체적으로 질문되고 답해진 부분은 거의 없었다. 언제 필요한가? 어떤 종류의 집이어야 하는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거기서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 당장 살 것도 아니다. 최소 몇 년 뒤의 일일 것이고 그때는 동반자가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이 고약한 서울 집값도 계속 이렇지 않고, 일본처럼 거품이 빠져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자가가 아니어도 전월세나 공공주택이 있고,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주거형태도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 아닌 곳에도 집은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짚어보면, 집이라고 해서 반드시 벌벌 떨어야 하는 것도 닥치고 벌기만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집이라는 문제만 해도 구체적 사안들이 이렇게 대충 뭉개져 있는데, 우리가 대비하려는 중대사들은 어떠한가? 온통 질문되지 않은 추상적 이미지와 추측으로 싸여있는 건 아닐까? 마치 우리의 몸, 관계, 취향, 건강, 사회, 환경이 그때도 같을 거라는 듯, 어떤 것은 미뤄 짐작하고 어떤 것은 대강 전제해 놓은 건 아닐까? 그 근거를 들여다보면 잘해봐야 빈약한 경험이거나 소문(‘카더라’)일 텐데, 그런 두루뭉술한 이미지로서의 미래를 위한다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미래가 우리의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우리 것이 아니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45쪽) 에피쿠로스학파에게 미래는 이중적인 것이다. 미래는 오겠지만, 우리의 예상대로 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세계는 시뮬라크라의 파도들로 존재하며, 그 안에서 원자들은 끊임없이 제 경로를 이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를 예상하고 두려워하며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을 무시한 발상이다. 미래는 본질적으로 현재 우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즐기라거나, 앞날을 방치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 여백과 함께 도래하는 미래를 준비하면 얼마나 할 수 있으며, 그 방법으로 ‘더 많은 재산’이 적합하냐는 거다. 루크레티우스의 대답은 ‘노’다. 간단하다. 앞서 말했듯 재산 자체가 마음의 신열을 식혀주지는 못하니까. 쾌락주의의 유일한 윤리는, 우리의 쾌락을 방해하는 것들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지금 우리 영혼을 동요시키는 공포와 분노와 탐욕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그것들과 전면 대결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미래는, 이렇게 매 순간을 기쁨 쪽으로 한 발 인도하는 일련의 작업에 의해 준비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작업에는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자족의 역량

 

“그들은 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본성은 자신을 위해 다른 것을 외쳐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육체에서 고통이 떨어져 사라지는 것 외에는, 그 마음에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즐거운 감각을 누리는 것 외에는! 그러므로 육체의 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본다, 고통을 제거하는 정도, 그리고 많은 기쁨을 펼쳐줄 수 있는 정도의 것을. 또한 본성 자체는 이따금이라도 그보다 더 은혜로운 것을 구하지 않는다.”(2:16-23)


어라? 어쩐지 낯이 익다. ‘아주 조금이 필요할 뿐’이라는 말만 놓고 보면, 얼핏 ‘없이도 잘 산다’는 나의 신조와도 일치하는 것 같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엇비슷할 뿐이다. 여기에는 미묘하지만 중대한 차이가 있다. 면밀히 해부해보면, 내 충분함에는 미세한 불만족이 녹아 있다. 일단 ‘나는 뭐가 없다’라는 전제가 출발점이고, 그럼에도 멀쩡하다는 일종의 반발심이 흐르고 있다. 어딘지 뻣뻣한 긍정. 차선을 택한 듯한 느낌. 이런 반응적인 만족이었기에 이리도 쉽게 흔들렸던 것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가 보여주는 만족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최선의 선택이고 무언가가 모자라거나 어떤 바람을 단념한 상태가 아니다. 그의 소박함은, 놀랍게도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리는 삶의 결과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사실 이것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왜 아주 많은 철학자와 스승들은 검소하게 살았는가? 부처님, 장자, 스피노자, 니체, 일리치 등 지고한 기쁨의 길을 보여준 자들은 왜 하나 같이 소유와 축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까? 기쁨과 소박함은 어떤 관계에 있는 걸까? 가진 게 별로 없는데, 어떻게 더 충만할 수 있을까? 대체 왜 쾌락의 추구가 언제나 절제의 양상으로 귀결되는 걸까?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쾌락의 전문가 에피쿠로스에게 물어야 한다. 역사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장 단순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 에피쿠로스 자신은 편지에서 말한다. ‘나는 약간의 물과 약간의 빵으로 족하다.’ ‘나에게 항아리에 저장해둔 치즈를 보내다오. 내가 원할 때, 성찬을 벌이도록.’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고 말한 사람은 위와 같은 사람이었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에피쿠로스의 생애> (<쾌락> 120쪽에서 재인용))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모든 쾌락은 우선 그 자체로 선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쾌락들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다준다.”(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8) 또한 육체적 수준에서의 쾌락은 추위나 굶주림 등의 필수적인 욕구만 채워지면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바뀔 뿐이다.”(에피쿠로스, <중요한 가르침>, 18) 쾌락의 본질이 이러하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들로는 쾌락을 향유할 수 없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거나, 베누스를 발산하거나, 지위가 상승하거나, 재산을 쌓는 등 우리가 열심히 추구하는 즐거움들은 형태만 달라진 것이거나 곧 더 큰 괴로움으로 상쇄될 휘발성 쾌락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쫓을 것이 아니라 일단 그것의 발생과 소멸 전반의 생리를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쾌락주의의 실천은 하나다. 사려 깊은 ‘숙고’(phronesis), 즉 우리의 욕망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적합한 행위를 선별하고 계산하라는 것.


많은 재산의 소유와 관련해 ‘쾌락 계산’을 시도해보면, 몇 가지가 걸린다. 우선 얻기가 쉽지 않다. “자유로운 삶은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 <바티칸 소장 문헌>, 67) 무척 동감이 간다. 언뜻, 주식이나 코인 투자는 해당되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실시간으로 오르내리는 그래프에 심혈을 졸이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노예도 그런 노예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어찌어찌 재산을 얻었다 해도 좀처럼 만족에 이르기가 어렵다. 한편으로 풍요 속에서는 우리에게 정말 얼마만큼이 필요한지 실험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많음’ 옆에는 언제나 ‘더 많음’이 존재하기에 새로운 비교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기이한 불만족은 우리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밥을 굶거나 거리에 나앉을 일이 없는데도, 심지어 다이어트와 성인병이 유행인데도, 모두가 위를 올려다보며 더 많이 갖지 못해 분해하는 불행한 풍경. 나 역시 그 한 구석에 있다. 이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느끼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다.”(에피쿠로스, <바티칸 소장 문헌>, 68)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런 분석으로부터 ‘없는 것이 더 선하다’는 식의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본말전도다. 사실 에피쿠로스는 금욕적 삶을 강요하지도, 사치스러운 삶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도한 고행이나 지나친 소식(小食)을 비판했다. 목적을 망치는 부적절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대로 ‘자기 배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을 가장 맑고 단단한 기쁨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섭생과 사유를 신중하게 분별하고 선택하기를 촉구하는 것. 에피쿠로스가 한 일은 그뿐이다. 목적은 언제나 우리 자신 안에서의 만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족(autarkeia)을 큰 축복으로 여긴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적은 것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우리에게 많은 것이 없다 해도 적은 것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사치물이 가장 적게 필요한 사람이 그것에서 최대의 쾌락을 얻는다. 단순한 맛이 우리에게 부자의 식사와 같은 쾌락을 준다. 필요한 사람이 빵과 물을 섭취할 때 최고의 쾌락이 생긴다. 우리가 사치스럽지 않고 간단한 식사에 익숙하게 되면 정말로 건강해지고, 필수적인 생활방식에 대한 우리의 접근 태도에 확신을 같게 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사치를 드물게 접하고 변화에 두려움 없이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47)


자족할 수 있음이란 정말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우리에게 드물고 귀한 역량이다. 이런 역량은 풍요 속에서는 일궈지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꼭 빈곤 속에서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자족은 적응이나 순응이 아니다. 단순히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많든 적든 부족함도 과함도 없는 수준에서 ‘즐길 수 있음’이 포인트다. 꼭 '적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적은 것으로도' 자신의 행복을 영위하는 데 걸리는 것이 없음. 그럴 수 있는 한 그는 어떤 미래, 어떤 변화도 ‘두려움 없이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 이보다 더 자유롭고 강한 인간이 있을까? 이제야 왜 가장 행복한 자들이 사치와 소유에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는지가 이해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세상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생생하게 맞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절제와 간소함이 그들 자신의 행복의 조건이자 결과였기 때문이지 않았겠는가.

  

새로운 부유함

 

“누구든지 참된 이치에 따라 삶을 방향 잡고자 한다면, 평온한 마음으로 검소하게 사는 것이 인간의 큰 부이다. 그에게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기 때문이다.”(5:1107)


읽을수록 생각거리를 남기는 구절이다. 루크레티우스는 별 생각 없이 적었을지도 모르지만, 문장 구석구석이 점점 난해하게 다가왔다. '참된 이치에 따라 삶을 방향 잡는다'는 것은 뭘까? 어떻게 ‘평온함+검소함’이 큰 부일 수 있을까?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는 건 참된 이치대로 방향을 잡은 사람 얘기일까, 아니면 보통 사람도 포함되는 걸까? 더 나아가, ‘인간의 큰 부’나 ‘조금의 부족함 없음’은 뭘 말하는 걸까?

돈이라는 문제에 대해 난생 처음으로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한 번도 나 자신의 부유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충분하다고 느끼긴 했어도, 그보다 앞서 늘 뭘 못 갖췄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작은 계기 앞에서도 내 신경은 오직 나의 ‘없음’에 맞춰졌다. 무엇이 부족한가에만 조명이 비춰지니 평온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넘어야 할 장벽이 무척 높다는 생각이 이르자 마음은 출렁출렁 했다. 원망도 해보고 자책도 해보고, 공부하는 삶을 의문에 부쳐보기도 했다. 중심도 비전도 없이 표상들과 자의식에 휩쓸렸던 거다. 잘 됐다. 내 심지와 그릇의 크기가 아주 잘 드러났으니까. 엎어진 바로 이 자리에서 나는 루크레티우스가 남긴 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차근차근 만들어가야 할 듯하다. 내 삶의 방향은 무엇일지, 나의 부유함은 무엇인지, 어째서 나는 결여가 없는지.

루크레티우스는 말한다. “그대는 항상, 없는 것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들은 무시하니, 삶은 그대에게 완전치 못한 것으로 즐기지 못한 것으로 지나가고”(3:957) 있다고. 왜 지금까지 나는 내게 무엇이 있는지가 아니라 없는지에 대해서만 주목해왔을까?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게다가 그 없는 것이 정말로 현재의 내 기쁨을 막고 있는가? 아니다. 시야를 넓혀서 가려졌던 측면을 본다면, 그 없음이 도리어 더 다양하고 풍성한 관계를 가져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태어나고 자란 교회 공동체에서 이곳 규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들의 도움을 받아왔고, 얼마나 많은 북적이는 식탁에 앉아왔던가. 이것은 결코 많은 재산은 해줄 수 없는 종류의 경험이다. 내가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릴 수 있었던 데에는 나의 적게 가짐이 정말 중요했다는 걸, 이제 조금 알겠다. 그렇다면 물어 보자. 이게 정말 적은 건가? 서로 돕고 돌보는 인연과 연결을 불러오는 부족함이 정말 부족함인가? 이제 부유함에 대해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생각해야 할 때다.

 

글_민호(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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