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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표상은 영혼을 잠식한다

by 북드라망 2022. 9. 6.

표상은 영혼을 잠식한다



정념이라는 불, 표상이라는 장작
내 나이 스물여섯, 이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내가 겪는 모든 괴로움의 팔 할은 한 쌍의 표상에서 생긴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될 너’와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될 나’. 이것이 소용돌이 같은 마음의 소란을 휘젓는 쌍두마차다. 가만 생각해보자. 분노나 억울함에 휩싸일 때, 미움이나 시기심이 일어날 때, 두려움이나 가책에 시달릴 때 그런 정념들의 불에 기름을 끼얹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해야만 하는’ 너와 나라는 표상이다. 물론 여기서의 ‘너’는 사람이기도 하고 사물이나 사건이기도 하다. 나는 가족, 친구, 학인, 애인, 선후배, 스승, 정치인 등의 사람들에 대해 각양각색의 이미지와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피부, 몸매, 병, 돈, 코인, 자연재해, 판데믹, 전쟁 등의 사물이나 사건 각각에 대해서도 그것들이 어떠어떠하고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깨알 같은 판단과 의견을 가지고 살아간다. 타일처럼 빼곡히 들어찬 이런 표상들은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져 있기도 하지만, 시시각각 크고 작은 균열이 생긴다(세상은 유체니까!). 그럴 때마다 벌어진 틈새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피는 것은 저 강력한 주문이다. ‘아아, 결코 이래서는 안 되지!’

정념에 휩싸여 있을 때 그 바닥에는 언제나 상대나 나에 대한 의견, 판단, 기대, 평가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나로서는 정말 값진 수확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눈만 뜨면 마음속에서 일렁이며 춤추는 근심, 두려움, 미움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어쩌면 꿈속에서도). 어떤 말이나 표정이나 상황은 내게 깊이 박혔고, 그것을 곱씹으며 분노하거나 끙끙거리거나 삐지곤 하는 내 모습이 너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괴로움을 증식시키는 토대가 다름 아닌 내가 덧대고 있는 표상들임을 확인했을 때 시원하다 못해 기쁘기까지 했다. 드러나는 말, 표정, 행동이 문제가 아니다. 그 자리에 덧붙는 ‘그런 네가 어떻게, 이런 나에게 감히’라는 잉여적 생각들이 문제였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병 자체보다도 병에 대한 생각들 때문에 더 많이 앓는다고.

 



물론 이 사실을 발견했다고 갑자기 인간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정념의 문제에 꽤 진심이었던 것 같다. 지난 삼 년 동안 내가 쓴 세미나 에세이나 규문톡톡 연재글의 모든 주제가 내 마음의 동요와 관련된 것이었다. 어설픈 명상이나 일기의 목표도 ‘마음의 평화’라고 할 수 있었다. 나름의 실천들과 더불어 나는 내게 일어난 분노나 두려움이나 슬픔의 중심에 어떤 생각들이 들어앉아 있는지 찾아내려 했고, 꽤 절실했던 노력은 이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것 같다. 전처럼 장작을 계속 던져넣진 않는다. 물론 화가 치밀고 겁에 질리고 우울해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내가 또 이 상황은 이래야 한다고, 저 사람은 저래야 한다고, 나는 이래야 한다고 그냥 믿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채는 습관이 약하지만 유용한 브레이크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브레이크만으로 충분할까? 당장의 표상을 찾아내는 일이 계속되면 약간 지치게 되거나 자칫 잘못 자기 반성적으로 되는 것 같다.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저래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 혹은 ‘어쨌든 내 생각이 뭔가 틀렸겠지’라고 냉소적으로 덮어버리거나, 잘못된 표상을 계속 갖게 되는 원인을 나 자신으로 돌려버리는 식으로. 하지만 다음 순간 정념은 또 찾아오고, 거기서 틀린 점을 발견하고 부정하기만 하는 일은 어쩐지 힘이 빠진다. 이것이 지금 나의 상태다. 표상이 문제인 것은 알겠는데 단지 그것을 매번 거부하는 일 말고는 뭘 더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상태. 그런데 이것은 마치 구석에서 발견되는 벌레들을 계속 잡기만 그것들이 어디서 어떤 경로로 들어오고 자라는지 따져보지 않는 꼴이다. 게을렀던 건지 몰랐던 건지 나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부엌이고 침대 밑이고 들어내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나는 사람을, 사물을, 사건을, 그리고 나를, 그러니까 세상을 ‘이래야 한다’는 새장 속에 가두고 있을까? 그래 봐야 단 몇 번 경험에 비추어 추론한 의견과 관념들 아닌가? 우리가 보았던 시뮬라크라로서의 세계를 상기해보자. 모든 것은 필름이나 스냅사진의 영상처럼 변화의 낱장들로만 존재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뮬라크라들로서 나 자신이 본모습 같은 것을 숨기고 있지 않듯, 다른 사람들도 지금 내가 보고 듣고 있는 표정이나 말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사물들도 지금 이 빛과 공기와 공간과 더불어 감각되는 방식이 진짜고 그런 모습 너머에 변하지 않는 원본 같은 것은 없다. 시뮬라크라들 중에는 동일한 것이 없다. 그 자체가 변화 중인 복합체의 한 단면이자, 그것을 이루는 원자들은 이미 자기 경로에서 이탈하는 운동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실체 없이 존재하는 것이 세계의 실상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물살 같은 세계를 표상으로 격자화하고 고체화하는 걸까? 왜 사물들이 다음에도 우리가 아는 대로의 그것이어야 한다고 여기고, 그렇게 강요할까? 정념이라는 불을 지피는 장작인 표상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가?

 

감각에는 오류가 없다

 

“우리가 도시의 네모진 탑들을 멀리서 볼 때, 자주 그것들은 둥근 것으로 보이게 된다. 모든 각이 멀리서는 무뎌 보이기 때문이거나, 혹은 오히려 그 각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되고, 그 자극이 사라지며, 그 타격이 우리의 시야로 미끄러져오지 않아서인데, 이는 영상들이 많은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동안, 공기가 잦은 충돌로써 그것을 둔해지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4:352-359)

 

네모진 탑이 멀리서 보았을 때 둥글게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착시현상이라고 부른다. 착시라는 말 자체가 오류나 기만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마치 눈이 우리를 속이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의 이성적 추론은 감각의 정보를 교정해주어야 할 척도로 등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서도 저 탑은 사실 네모진 탑임을 상기하고 지금 보이는 둥근 모습은 틀린 지각이라고 여긴다. 네모진 탑만이 팩트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는 다르게 말한다. 둘 다 팩트다. 여기에 오류는 없다. 네모진 탑도 둥근 탑도 각각의 자리에서 눈에 그렇게 감각되었다는 점에서는 위계 없이 진실이다. 두 시지각 사이에는 “항상 같은 정도의 신뢰성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어떤 시간에든 이들에게 보인 것은 진실이다.”(4:498)

 

감각이란 무엇인가?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그것은 접촉, 즉 원자들의 타격이다. 정확히는 외부의 시뮬라크라와 우리 자신의 시뮬라크라의 마주침에 대한 반응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 저 탑도 시뮬라크라들의 연속체로 존재하면서 사방으로 시뮬라크라를 방출하고 있다. 시뮬라크라를 음파나 전파 같은 파동이라고 생각해보자. 매질을 타고 전달되는 파동은 그 모양은 유사하더라도 흘러가는 동안 계속 자신을 이루는 성분을 교체하며 나아간다. 그렇기에 가까이서야 그 선명하고 일정하게 잡히겠지만 멀리서는 잡음이 끼고 처음의 명료성을 잃은 채로 수신될 것이다. 감각에서 일어나는 일도 정확히 이와 같다. 전파가 그러하듯 탑에서 나온 시뮬라크라는 여행하는 동안 변화를 겪는다. 시뮬라크라는 아주 얇은 막의 형태이기 때문에 대기 속의 방해물(빛, 안개, 바람)에 의해 쉽게 닳거나 손상되며, 그것을 이루는 원자들의 클리나멘에 의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다. 그렇기에 탑에서 나온 시뮬라크라는 단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결국 우리는 제자리에 서 있어도 미시적인 차이로 꿈틀거리는 유동체를 보고 있는 셈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가까이서 보는 탑과 멀리서 보는 탑이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같은 탑을 잘못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 거리에서 그 탑은 그렇게 모서리가 무뎌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 날씨 그 햇빛 아래서 탑은 다른 빛깔로 존재하고, 그걸 보는 자의 신체 상태에 따라 또 다른 양상으로 감각될 것이다.

 

“황달에 걸린 사람이 보는 것은 무엇이든 노랗게 된다, 그들의 몸으로부터 노란색의 많은 씨앗들이 사물의 영상들을 향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많은 것들이 섞이기 때문이다, 접촉을 통해 모든 것을 창백함으로 칠하는 것들이.”(4:335)


황달 환자에게 탑은 노랗게 존재할 것이다. 각진 탑, 둥근 탑, 노란 탑. 이것들은 전부 진실이다. 무엇이 무엇과 어떻게 마주치느냐에 따라 탑은 그렇게 여럿의 그림자와 가면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주침이 전부다. 이 마주침들을 담아내는 것이 감각이다. 감각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의 실상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감각은 진실하다. 하지만 감각에는 한계가 있다. 눈은 원자나 시뮬라크라 각각을 보진 못한다.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을 다 담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감각의 관찰범위를 넘어선다. 아니, 그런 비가시적인 것이자 개념으로서 요청되었다. 감각은 “각각의 개별적인 입자를 지각하지 못하게 버릇되어 있으며, 오히려 전체적으로 우리 몸 속에 갑자기 타격이 생겨나는 것”(2:260)을 느낄 뿐이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는 것은 유사한 시뮬라크라들의 타격이 축적되어 일으키는 효과다. 그렇기에 빨간 것은 그 자체로 빨갛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붉은 옷감이 작은 부분들로 뜯겨나갈 때 그렇게 되듯, 자주색도, 월등히 빛나는 진홍색도 한 올 한 올 나뉘면 모두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그대는 이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씨앗까지 내려가기도 전에 작은 조각들이 모은 색깔을 숨결로 내보낸다는 것을.”(2:830)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감각의 신빙성이다. 감각이 효과에 불과한 것이라면, 즉 우리에게 감각되는 것이 감각되지 않는 작용들에 의해 만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감각을 믿어도 되는 걸까? 빨간 게 빨갛지 않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답한다. 믿어도 된다고, 믿어야 한다고. 다만 다른 방식으로 믿어야 한다. 우리는 보통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의 실체성을 가정한다. 즉 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그러하다는 전제를 부여하고, 그 전제를 믿는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는 ‘감각된 그것이 사실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각되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이것이 나의 눈과 빛과 경험과 공간 등 여러 조건들과 더불어 이 순간에 이렇게 드러난 것임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감각에 대한 믿음이 다음 순간의 감각을 믿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감각은 변화를 담아내고, 따라서 감각을 믿는다는 것은 매번의 그 변화의 경험들을 믿는다는 것이다.

 


사실 감각은 사물을 분별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유용하거나 더 많은 경우에 들어맞는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이성의 역할이다. 이성은 서로 다른 다양한 감각적 인상들을 추려내고 형식화하여 일관되게 소개한다. 빨간불이 들어올 때는 길을 건너선 안 되며, 태양은 이백 걸음 떨어져 있어 보여도 사실은 훨씬 더 멀리 있다. “이런 문제는 결국 정신의 추론이 분별하여야 한다. 눈들이 사물의 본성을 알아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4:38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각이 추론보다 더 열등하거나 그 자체로 오류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든 추론이 뿌리로 삼고 있는 것은 감각이다. 빨강이 그 자체로 빨갛지 않다는 이해도 옷감을 해체했을 때 색이 사라지는 관찰로부터 온다. 어떤 관념도 신체를 통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렇기에 루크레티우스는 감각을 부정하고 추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머리를 거꾸로 발 둘 곳에 놓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추론이 거짓된 감각에서 생겨나서 감각들에 대항하여 발언할 수 있을 것인가, 추론은 전부 감각에서 생긴 것인데? 이 감각들이 진실하지 않다면, 추론도 모두 거짓된 것이 된다.”(4:480)

그래서 우리는 용감하게 감각을 믿어야 한다. 감각을 믿는다는 것은 아무런 추론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지혜롭게 추론하기 위해, 즉 하나의 판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지금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세계 구석구석의 가장 섬세한 변화들까지 관찰함으로써 추론해낸 가장 고차원적 개념이 원자와 클리나멘과 시뮬라크라 아니던가. 그것들은 분명 개념이고 추론이지만 우리의 감각을 근거로 한 것이며, 그를 통해 변화하고 운동하는 세계를 효과적으로 설명해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상적 추론은 어떤가? 그것은 감각의 정보로부터 형성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각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다. 우리의 관념들, 의견들, 판단들은 사물을 유체가 아닌 고체로, 시뮬라크라가 아닌 동일자로 보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도 같았던 적이 없는 것들을 언제나 본모습, 원본, 평균, 정상이라는 필터를 끼고 바라본다. 감각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필터링을 멈추는 것이다. 격자들을 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미 미세하게 일어나고 있던 다른 마주침들이 고려되고, 다른 관념이 형성될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그렇다면 감각이 보여주는 증거들로부터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추론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은 운동한다.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만들어지고 소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생성의 실상을 부인하는 방식의 생각들, 즉 전에 그랬던 것이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의견들, 동일함과 불변함을 전제하는 관념들과 표상들조차도 필히 생성된 것일 테다. 대체 어떻게 그런 착오가 이토록 빈번하게 생겨나고 있는가? 우리의 정신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시뮬라크라와 표상의 메커니즘

표상은 감각이 보여주는 유동체로서의 세계에 정신이 부여하는 고체적인 틀이다. 우리의 정신은 변화하는 세계에 왜 그런 것들을 추가하는가?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표상 자체는 감각과 대립되는 기원을 갖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표상도 접촉, 즉 시뮬라크라들의 마주침에 의해 생긴다.

시뮬라크라의 특징 중 하나는 투과성이다. 어떤 시뮬라크라들은 “너무나도 성긴 조직을 부여받은 채 보내져서, 어느 사물이든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4:180)다. “이것들은 그 조직에 있어서, 눈을 차지하고 시각을 일깨우는 것들보다 훨씬 더 섬세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몸의 조직이 성긴 부분으로 뚫고 들어가, 안에서 정신의 섬세한 본성을 자극하고 감각을 일깨우니 말이다.”(4:728) 이 섬세한 시뮬라크라들이 신체의 조직을 통과하여 정신과 영혼의 원자들을 두드린다. 이 타격에 의해 정신은 이미지와 관념을 형성한다.

영혼은 열기, 바람, 공기, 이름 없는 원소들로 조성되어 있다. 이것들은 신체의 조직보다 부드럽고, 가볍고, 빠르다. 그렇기에 마치 ‘거미줄이나 금박처럼’ 훨씬 더 쉽게 서로 들러붙고 합성된다. 이 특징 때문에 정신과 영혼을 이루는 시뮬라크라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증식될 수 있다. 따라서 감각된 실재의 상들로부터 그와는 무관한 형태로 잘려나가고 또 덧붙여진 이미지들이 형성된다. 켄타우로스 같은 것이 그 예다. “말과 인간의 상이 우연히 만났을 때, 우리가 전에 말했듯, 그들의 미세한 본성과 섬세한 조직 때문에 그것이 즉시 쉽게 붙으니 말이다. (...) 이와 같은 종류의 다른 것들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4:745) 사실 나는 이것을 매일 확인하는데, 꿈을 꿀 때 혹은 명상을 하겠다고 앉아 있을 때 뭉게구름처럼 머릿속을 채워가는 온갖 망념과 공상들이 그것이다. 서사도 없고 맥락도 없고 경계도 없이 뒤섞이는 시뮬라크라들의 폭포.

이렇게 엉뚱한 방식으로 연결짓고 엉뚱한 방식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신이라면,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수많은 표상들도 이런 요란한 합성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이유는 반복에 있다. 우리는 어떤 자극이 몇 번 유사하게 일어나면 그것은 ‘원래 이러하다’라는 식의 의견을 형성한다. 그 의견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정신에 그러한 흔적을 상쇄할 만한 다른 시뮬라크라들의 타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성의 법칙대로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반대 증거가 영혼을 때리지 않는 한, 한번 생겨난 흔적은 정신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생되면서 그 틀을 유지한다. 부딪히고 혼합되고 굳어짐. 하나의 표상은 이렇게 형성되고 지속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표상은 어떻게 작동할까? 다시 말해 표상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정신의 활동에 개입하는 걸까? 루크레티우스는 가설을 제안한다. “우리가 지각하는 한 시점 안에, 그러니까 목소리 하나가 발설되는 순간에, 이성이 그 존재를 확인해주는 많은 시간들이 숨어 있어서, 바로 이것 때문에 어떤 시점, 어떤 장소에서건 각각의 영상들이 즉시 준비된다고 보는 것”(4:800)이 어떻겠느냐고. ‘이성이 그 존재를 확인해주는 많은 시간들’이란 말이 조금 헷갈리지만, 반복에 의한 기억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위에서 말했듯 정신은 몇 번 유사하게 감각된 현상에 대해 거푸집과 같은 틀을 형성한다. 그래서 무언가가 지각되자마자 곧바로 그 표상이 것이다. 따라서 탑은 멀리서 둥글게 보여도 네모진 탑이고, 아예 보이지 않는 밤에도 네모진 탑이고, 다른 장소에서 떠올리더라도 네모난 탑이어야 한다. 감각이 전달하는 사물의 파노라마는 이런 식으로 편집되고 재단된다. 표상은 매순간마다 사물들의 무수한 면면들 위로 얼굴을 들이밀어 전달을 방해한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조차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섬세해서, 보려고 애를 쓰는 것들 이외에는, 정신이 정확하게 분간할 수 없다. 그래서 정신이 그것을 향해 스스로 준비하고 있던 것들 이외에는, 있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 나아가 정신 자체가 스스로 준비하고, 있게 될 것을 기대한다, 각각의 사물을 따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그래서 그렇게 된다.”(4:805)


하나의 영화를 봐도 모두가 다른 장면을 기억하고, 한 사건을 겪어도 각자의 인상대로 진술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지 능력이 떨어지거나 팩트를 파악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상들, 즉 ‘정신이 스스로 준비하고 있던 것들’ 이외에는 모두 가지치고 솎아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존재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엇이 놀라운가, 정신이 자신이 몰두해 있는 사물들 이외의 다른 것들은 잃어버린다 해도? 더욱이 우리는 작은 표지들로부터 아주 큰 것을 추측하며, 스스로 기만의 속임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4:815)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작은 표지들이다. 이 미세하고 다양한 표지들을 크고 뻣뻣한 것으로 퉁치거나 스킵해버리지 않고 사람과 사건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음이 감각을 믿을 수 있음이다. 표상들의 횡포를 멈추는 법은 하나, 작은 표지들을 더 많이 자신에게 다가오도록 하는 일이다.

 
보는 법을 배우기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것은 눈으로 하여금 평정에, 인내에, 그리고 자신에게-다가오게-놔두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 특정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억제하고 격리하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니체, <우상의 황혼>, 책세상, 138쪽)


표상은 습관이다. 형성된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대체자 없이 반복재생됨으로써 굳어진 반사작용이다. 그것들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내보내는 틀에 박힌 이미지로 인해 나는 보이는 대로조차도 보지 못한다. 습관이라 함은 무슨 의미인가? 늘 새롭게 재생되는 세계를 익숙한 것으로 만드는 반복이다. 루크레티우스 철학의 핵심은 원자 외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상은 변화 중인 모든 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 영원성을 가장하는 표상들에 맞서 그것을 헐겁게 할 실천들을 고민해보려 한다. 

우선 내게 표상들이 강하게 작동하는 그 지점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나름의 절실함과 명상 덕분인지 이것은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정념 및 표상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활성화되는지를 뜯어보기.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뤄보는’ 일, 즉 사물의 본성의 차원에서부터 반박해보는 일, 달리 말해 이성의 역량을 발휘해보는 일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내게는 ‘피부가 좋아야 한다’는 귀여운(?) 수준의 표상만이 아니라, 돈, 성, 국가, 건강, 죽음을 둘러싼 두껍고도 단단한 표상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모든 표상들은 성벽처럼 견고해 보여도 흐르는 강 위에 놓여있다. 나는 이 커다란 벽에도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계란 던지기일지라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병법서 삼고 글쓰기를 전술 삼아 하나하나 줄로 갈 듯 파다 보면 언젠가 금이 갈지도 모를 일 아닌가. 

 

 

글_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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