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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하고 인사하실래요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

[청년루크레티우스를만나다] 나는 시뮬라크라들이다

by 북드라망 2022. 8. 9.

나는 시뮬라크라들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존재론



일기, ‘진짜 나’를 찾는 시간
제일 좋아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고민 없이 답할 수 있다. 일기 쓰기다. 더 정확하게 하자면 ‘하루를 마치고 머리맡 스탠드 조명 아래서 시그노 0.38 볼펜으로 쓰는 일기’이지만, 꼭 이렇지는 않아도 된다. 기숙사 세탁실에서도, 군대 화장실에서도, 여행지의 캠핑장에서도 나는 일기를 썼다. 싸구려 볼펜이든 손전등 불빛이든 상관없다. 뭐라도 적을 수 있는 여건만 되면 된다. 열다섯 살 즈음부터 써왔으니 어느덧 십 년이 넘었다. 촌스러운 사무 수첩에서부터 아트박스에서 산 세련된 가죽노트까지 각양각색의 일기장을 열댓 권은 채웠다.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문학이나 글쓰기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써온 걸까?

물론 매일 쓰진 못했다. 빼먹은 날도 많고,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몇 줄만 갈겨 놓은 경우도 허다하다. 올해 들어서는 쓴 날보다 안 쓴 날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핑계겠지만 너무 바쁘다는 게 이유다. 문제는 이렇게 하루 이틀 거르면 괴로워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딘지 좀이 쑤시고 머리가 탁해지는 느낌. 스스로를 방치하는 듯한 기분. 그럴 때면 시간을 들여서 한바닥 정도 끄적이고 싶어진다. 그래봐야 의식의 흐름대로 단어들을 늘어놓는 것이지만, 이건 나름의 리듬을 회복하는 나만의 작은 정화 의식이다. 부유하는 경험들을 추스르고 여기저기 터진 구석을 기우는 작업 말이다.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때가 나 자신에게 가장 밀착되는 순간인 것 같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소중한 의식이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하나의 구속이 되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반복적 행위는 분명 어떤 효과를 낳는다. 일기를 쓰면서 나는 어떤 구심점 같은 것을 만들어 온 것 같다. 흔들리던 팽이가 다시 중심을 잡는 것처럼, 일기장 위에서는 낮 동안 정신없던 사건들이 복기되고 나름의 이름과 의미를 부여받으며 정리된다. 펜으로 한자 한 자 써 내려가다 보면 호흡도 차분해지고 심장도 고르게 뛰는데, 나는 이 순간이야말로 나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른 순간들은 모두 가면이 아닐까? 혹은 임시로 수행하는 역할 같은 게 아닐까? 바쁘게 과제를 하고 있는 표정, 슬픔이나 분노에 휩싸인 상태, 세미나에서 열띠게 떠드는 모습,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거나 헉헉 땀 흘리며 운동하는 순간들은 어쨌든 나의 본모습은 아닐 것이다. 아니었으면 한다. 낮의 들뜸에서 한 발짝 물러나 찬찬히 그 장면들을 돌아볼 수 있는 고요한 순간이야말로 오롯이 나 자신인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십 년간의 일기 쓰기는 부단한 중심 잡기인 동시에 그 중심을 만드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뭘 하고 있건 간에 ‘나는’이라고 말할 때마다 참조되고, 흥분하거나 처질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돌아가야 할 본원.


아닌 척해도 내게는 중심점과의 관계로부터 위계를 나누고 있는, 그래서 어딘가는 흡족하게 보고 어딘가는 질책하듯 흘겨보는 시선이 있다. 나의 어떤 모습들은 내게 참기 어려운 것으로 떠오른다. 외모든, 감정 상태든, 행동들이든 ‘없어졌으면’을 넘어 ‘그게 나일 리가 없어’라고 부정해버리는 면면들이 있다. 순간순간 불쑥 올라오는 치졸한 질투나 짜증, 혹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문란하다 못해 저속한 상상들. ‘원래의 나’라는 원본에서 출발하는 이상 나의 어떤 모습들은 ‘나 같지 않은 나’ 혹은 ‘나이지 않았으면 하는 나’라는 위험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봐줄 만한 것이라면 그럭저럭 같이 가면 되지만, 그보다 못하다면 어쩔 수 없다. 추방하는 수밖에.

최근까지도 나는 일기를 쓰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차분하고 솔직해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솔직하다는 게 뭘까? 그 순간을 클로즈업 해보자. 일단 나는 아무 때나 쓰지 않고 아무거나 쓰지 않는다. 긴장과 정념이 가라앉은 상태에서만 펜을 든다. 일기의 내용은 정제되어 있다. 거기에는 욕설도 날것의 감정들도 없다. ‘분노했다’고 쓰지 분노를 쓰진 않는다. ‘미워해선 안 된다’고 쓰지 미움을 쓰진 않는다. ‘성욕은 뭘까’라고 쓰지 그 다이내믹한 망념들을 쓰진 않는다. 이미 해결된 문제들인 양 한발 물러나 있다. 이것을 두고 솔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아예 일기장에 오르지 못하는 모습들도 있다. 이렇게 은근한 변조와 편집과 미화가 이뤄진다. 그 방식이 아무리 반성적이고 자조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점검하고 교정하고 솎아내고 분리시키기. 이것이 일기를 쓰는 동안, 정확히는 ‘나’라는 존재의 중심을 다잡는 동안 바쁘게 이뤄지고 있는 물밑작업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번듯하고 착실하고 젠틀한 ‘청년 성민호’의 탄생이다. 혹은 그런 이미지의 유지 및 보존이다. 그것이 지속된다면 좋으련만, 문제는 이 기계의 셀프 A/S 작업을 언제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가다. 자꾸 고장이 난다. ‘나답지’ 않은 모습들이 계속 나타난다. 꾸물꾸물 울타리를 넘어온다. 나의 본모습에 대한 규정이 선명할수록 불만족도 커진다.

여기서 그치면 다행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이는 모습 뒤편에 ‘원래의 모습’을 상정하는 이 시선이 내가 아닌 다른 대상들에게까지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상을 벗어나는 나 자신만큼이나, 기대를 저버리는 사람들과 사건들과 세상도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상적인 나’가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어떻게 달아날 것인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아는 사물이 어떻게 그런 사물로 존재하는지부터 질문해야 한다. 이에 대한 루크레티우스의 대답은 바로 환영, 즉 ‘시뮬라크라’(simulacra)다. 환영이라고?

 
시뮬라크라, 존재와 비존재 사이

 

“내가 말하는 영상(eikon)들이란 먼저 그림자들이고, 그 다음으로는 물에 비친 상들과 조밀하며 매끄럽고 광택이 나는 것들의 표면에 이루어진 상들, 그리고 자네가 이해한다면, 그와 같은 모든 것일세.”(플라톤, <국가>, 510a)


시뮬라크라의 존재에 처음 주목한 사람은 플라톤이다. 시뮬라크라(simulacra)라는 라틴어는 그리스어 에이콘(eikon)과 동일한 말인데, 그것은 닮음, 시늉, 흉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판타지(fantasy)이고, 우리말로는 환영, 영상, 모상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포말, 물방울, 신기루 등을 떠올리면 된다. 존재한다고 하기는 뭐한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들. 플라톤은 그림자, 거울이나 물에 비친 상(像), 유령, 아지랑이, 신기루 등을 실재하는 사물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 말을 사용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의 사물들은 그 자신의 원형(本) 같은 것을 모방함으로써 존재한다. 즉 모든 사물은 이데아와 같은 본질을 닮아있고 그것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채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녀석들이 있다. 이데아는커녕 이데아를 모방하는 사물들조차도 제대로 닮으려 하지 않는 녀석들이 있다. 물에 비친 사과는 사과의 색과 모양만 대충 흉내 내고 있을 뿐이며, 거기 있는 듯하다가 곧바로 일그러지고 흩어져버린다. 그림자는 실루엣만 훔칠 뿐이며 아지랑이는 시야를 흐리기만 한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보통 사물들조차 시간 속에서 변하고 불안정한데, 이놈들은 장난이나 치고 있으니! 시뮬라크라는 가짜 중의 가짜, 제멋대로인 악동, 경험적 현상 중에서 가장 불온한 불청객으로 여겨졌고, 참된 세계 안에서 배척의 대상으로 정리되었다. 도처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비실재적이고 쓸모없는 존재, 존재 같지 않은 존재(비-존재)가 바로 시뮬라크라였던 것이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에서 생각해보자면, 차마 일기장에조차 올리지 않는 상태들, 나 같지도 않고 나여서는 안 되는 모습들이 시뮬라크라라 하겠다.

그런데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던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시뮬라크라는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저 개념은 저렇게 무시될 수 없었다. 시뮬라크라야말로 존재의 실상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한 알의 사과는 저 혼자 싱싱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놓여있을 수 없다. 늘 어딘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아침 낮 밤 동안 색과 맛이 달라지고, 풍기는 엷은 향이 달라진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 속에 있는 물체를 퉁 쳐서 사과라고 부를 분이다. 그뿐인가? 그 물체는 우리에게야 맛있는 음식이지만, 사과나무에게는 자식이고 벌레에게는 집이다. 이렇게 사과처럼 비교적 작은 물체조차 결코 하나의 모습이나 하나의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우리가 아는 규정 속에 가둬지지 않는다.

여기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사과는 사과인데 단지 상황 조건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원래 본질상으로는 사과인데 그저 시간과 공간과 인식주체에 따라 불가피하게 변형되어 나타나는 걸까? 이렇게 본다면 이데아와 그 재현물들을 말하는 아카데미아의 구도와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원의 철학자들은 구도를 뒤집어버린다. 쉼 없이 변화하고 흩어지는 불분명하고 미세한 흐름이 먼저이고, 분명하다고 생각되는 사물의 ‘본모습’이야말로 우리가 편의상 나중에 붙인 착각이라고 말이다. 즉 시뮬라크라야말로 존재의 본모습이고 이데아야말로 환상인 것!

 


어쩐지 혼란스럽다. 진짜에서 가짜가 나오는 게 아니라, 가짜에서 진짜(처럼 보이는 것)가 나온다니? 아니, 가짜인 것 같았던 애들이 진짜고, 진짜인 것 같았던 애들이 가짜라니? 이런 말들에 어지러워지지 않으려면 원자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원자들로 이뤄진 세계에서는 진짜냐 가짜냐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불변하는 원자만이 진짜’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모든 것들은 임시적 가설물이고 곧 스러질 가짜다. 그러나 그 순간 그런 모습으로 가설되었다는 사실은 진짜다. 모든 사물은 진짜인 원자들의 엉성하거나 쫀쫀한 결합이며, 그 순간 거짓 하나 없는 진짜다. 그렇기 때문에 나타난 것 사이에는 위계가 없다. 사과나 사과 그림자나 아지랑이나 모두 원자들의 구성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거짓인가? 이 사실에 대한 오해. 즉 나타났을 뿐인 무언가를 보면서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을 떠올리는 정신의 표상들과 편견들만이 가짜다. 한마디로 이데아, 본질, 원본, 맨얼굴, 실체 등과 같이, 지금 조합되고 운동하고 있는 것 너머의 실체를 찾는 생각만이 가짜다.

그런데, 이렇게 말은 잘 하면서도 왜 나는 나 자신에게서나 다른 사물에게서 본모습이나 원본 같은 것을 떠올리게 될까? 우선 왜 마치 변하지 않는 사물들의 상태가 있는 것처럼 그것들이 일정한 형태로 나타나는지부터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사물들은 운동하는 원자들로 되어 있음에도 그냥 흩어져버리는 게 아니라 다음 순간에도 유사한 꼴로 나타날까? 이것은 분명 ‘모든 것이 원자다’라는 말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거기에 입각해,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여기저기서 이러저러하게 마주치고 펼쳐지고 있는지가 설명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고체가 아니라 유동체다

 

“내가 이미, 모든 사물들의 근원이 되는 것들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다양한 형태들로써 차이를 보이며 스스로 영원한 운동에 몰려서 돌고 있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저것들로부터 각각의 사물들이 생겨날 수 있는지 가르쳤으므로, 이제 그대에게 말하기를 시작하겠노라, 저것들과 긴박하게 연결된 것을, 우리가 사물들의 영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존재함을. 그것들은 마치 막이나 껍질 같다고 표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상(像)은, 우리는 이 상이 어떤 몸으로부터 쏟아져나와 떠돈다고 얘기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 몸과 유사한 모습과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4:50)


마치 기초를 가르쳤으니 응용에 들어가겠다는 것처럼, 루크레티우스는 우리가 원자에 대해 배웠으니 이제 그 다음 단계에 들어가자고 말한다. 세상은 원자요, 원자는 영원한 운동 속에 있고, 그 결합이 사물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다. 하지만 그 사실만로는 사과가 어떻게 그렇게 빨갛고 둥근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즉 운동하는 원자로 된 사물들이 어떻게 변하는 와중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는지는 모른다. 여기에는 운동을 보는 다른 차원이 추가되어야 한다.

‘사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사물은 시뮬라크라로 존재한다’는 말은 층위가 다르다. 마치 한 권의 책이 ‘ㄱ, ㄴ, ㄷ…’ 등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뤄졌다는 말과 이런저런 의미의 문장과 문단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의 차이와도 같다. 또는 한 곡의 음악이 도레미파솔라시도로 이뤄져 있다는 말과 어떤어떤 화음들로 구성된다는 말의 차이와도 같다. 가장 적절한 비유는 아마 동영상을 이루는 적녹청 화소와 그것이 모여 이룬 프레임 한 장의 차이일 것이다. 동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소들의 깜빡임일 뿐이지만 그 조합의 진행이 매 순간순간 특정한 이미지를 발생시킨다. 원자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과도 갖지 않는 기본적 요소라면, 시뮬라크라는 그것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어떤 의미나 음정, 색깔과 형태를 구현하기 시작하는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자들로 이뤄진 얇고도 찰나적인 대열 혹은 결 혹은 파도. 그것이 시뮬라크라이며, 도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뮬라크라의 흐름이 우리의 세계를 채운다.

그런데 시뮬라크라는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원자는 영원한 시간 동안 운동해왔다. “기본적인 몸체들에게는 어떤 휴식도 주어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쉼 없는 여러 방향의 운동으로 요동”(2:96)하고 있다. 자연 안의 모든 현상은 그런 원자들의 결합물이며, 다른 것과 결합을 이룬 원자들은 운동에서의 질서 혹은 연합을 만들어낸다. 물론 이 질서는 클리나멘이라는 미세한 경로이탈이 계속 일어나는 덕분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또 회복되기를 반복한다. 얽혀있는 원자들의 운동이 만든 역동성이 사물 내부에서 층층의 진동을 만들어낸다. 타오르는 불은 말할 것도 없고 바위처럼 안정적으로 보이는 물체들조차 그 심층에서의 충돌과 압력 때문에 마치 맥박처럼 ‘웅-웅-’ 떨리고 있다. 이 쉼 없는 운동에 의해서 표면을 이루던 원자들이 순간순간의 대열을 갖춰 떨어져 나가는데, 어떤 학자는 이 광경을 극히 빠른 리듬에 맞춰 축포를 쏘는 것과 닮았다고 말한다.

루크레티우스는 분명 시뮬라크라를 몸체라고 표현하긴 하지만, 상상해보면 그것은 기이한 몸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시뮬라크라 자체를 볼 수는 없다. 그것들은 너무나 미세해서, 원자들이 그렇듯 우리의 감각 수준 아래에 있다. 그뿐 아니라 언제나 줄지어서 흘러가기 때문에 “이들은 낱개로 분리되어서는 관찰될 수가 없다.”(4:81) 하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루크레티우스가 매미 허물 같다고 말한 그것은 무척이나 얇은 석고마스크 같아서 부피도 없고 무게도 없이 아주 빠르게, 거의 빛의 속도로 허공을 날아다닌다. 그 속도를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고 루크레티우스는 아름다운 언어로 말한다. “하늘이 별들로 빛날 때, 물의 밝은 표면이 열린 하늘 아래 놓이자마자, 즉시 창공의 고요한 성좌들이 물 속에서 빛을 발하며 호응한다는 사실”(4:212)을 생각해보자고. 시뮬라크라는 너무 미세해서 공기 중에서 서로 뒤엉켜 변형되고 산란되기도 한다. 게다가 그 대열에도 언제나 클리나멘이 발생하기에 하나의 시뮬라크라는 자신의 앞뒤의 것과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이렇게 본다면 사실 시뮬라크라는 정말로 흐름 운동의 한 찰나, 즉 환영에 가깝다. 물방울, 그림자, 메아리, 이슬, 연기…. 그러나 어느것도 허구는 아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시뮬라크라가 사물의 표면에서 ‘쏟아져 나온다’고 말하지만 이 표현을 사물이 자신의 껍데기를 벗어놓는 것처럼 오해해선 안 된다. 그러면 시뮬라크라가 마치 본체로서 남겨진 알맹이의 껍질처럼 실재의 외피이자 열등한 부산물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미셸 세르는 우리가 루크레티우스적 관점에서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물을 고체로 바라보는 습관을 버릴 것을 제안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자들의 요동에 의해 끊임없이 배열을 바꾸고 있음을 고려해보자. 그렇다면 어떤 사물도 매 순간 동일하지 않은 배열을 빚어내고 있다. 쉼 없는 자리바꿈과 놓임새의 변화가 바위처럼 단단한 물질 속에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차원을 고려하는 이상, 이전 순간과 다음 순간이 동일한 물체는 존재할 수 없다. 즉 고체는 없다. 오직 특정한 비율과 속도와 점성을 가지고 흐르는 유체만이 존재할 뿐이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흐른다는 사실”(5:280)은 분명하다. 모든 것은 흐름이고 폭포고 소용돌이다. 그리고 그런 흐름에서의 순간적 양상들 혹은 단면들이 바로 시뮬라크라다. 사물은 정확히 이런 시뮬라크라의 연속으로만 존재한다.

 

“모든 사물로부터 각각의 것들이 흐름을 이뤄 이동하며, 사방 모든 부분으로 흩어보내지고, 그 흐름에 어떤 지체도 휴식도 끼어들지 않는다. (...) 사물들의 영상들은 어디로나 이동하고, 모든 부분으로 주어져 투사된다.”(4:225)


그러니까 실재라는 것 자체가 시뮬라크라의 연속체 혹은 집적체에 다름 아니다. 화음들의 연주 없이는 음악이 있을 수 없고 프레임들의 투사 운동 없이는 동영상이 재생될 수 없듯이 시뮬라크라의 펼쳐짐 없이 사물은 나타날 수 없다. 이 말은, 사물보다 먼저 존재하고 오히려 사물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시뮬라크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사물이 아니라 시뮬라크라만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물들의 영상, 즉 시뮬라크라가 존재한다고 말할 때 루크레티우스는 사실상 우리가 아는 단단하고 분명한 사물들의 실상이 환영과도 같음을 폭로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원본도 중심축도 모델도 없다. 그것들이야말로 허구이며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직 시뮬라크라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마치 회전하는 휠이나 팽이에 나타나는 문양처럼, 혹은 빠르게 넘어가는 필름 속 운동 이미지처럼, 또는 일렁이는 영상과 환영처럼, 우리가 아는 사물들은 그런 시뮬라크라가 펼쳐내는 작용으로만 존재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시뮬라크라들이다
나 자신을 시뮬라크라로 존재하는 일종의 유체로 본다면 어떨까? 그러고 보면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항상 일종의 고체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유체처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화가 나면 화 자체보다도 평온했던 상태와 비교하면서 더 분노했고, 실수를 해도 미안함보다 내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이 더 컸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매번 다른 태도를 취하고 다른 말들을 하는 와중에도 마음 한 켠에는 ‘나는 이러이러하다,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틀을 세워두고 부지런히 참고하며 살아온 것 같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억의 부산물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시뮬라크라로서의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당장 오늘 하루만을 생각해보자. 흩어져버리는 말소리, 미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표정, 짧아졌다가 또 길어지는 호흡, 습관적인 다리 떨기, 오락가락하는 감정들과 찾아왔다가 또 금방 가버리는 온갖 상념들. 이렇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면면들 외에 나는 어디에 따로 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조차도 내게 표현된 모습일 뿐이다. 가령 오늘 내가 열 명과 세미나를 했다고 해보자. 열 명의 사람들은 각각 나에 대한 기존의 앎이나 관심에 따라, 혹은 그날의 컨디션이나 좌석 배치에 따라 나를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이 열 개의 이미지 중 무엇이 진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내가 아는 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가짜인 걸까? 그것들은 전부 가면이고 오로지 일기장이라는 요물 앞에서 그 순간을 차분히 바라보는 잠옷 차림의 내 상태만이 진짜인 걸까? 그럴 리가 없다. 그 일기의 필자조차 시간과 공간 속에서 흐르고 있는 나 자신의 한 단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쪽팔린 모습이건, 멍청하거나 추한 모습이건, 혹은 누군가에게 어처구니없게 오해된 모습이건, 그 면면들 모두가 나이며, 동시에 그 중 어떤 상태도 진짜 나, 나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사실.

 


일기를 쓰면서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고체화시켰는지가 보인다. 하루를 점검하고, 사건을 정리하고, 몇 가지 다짐을 다소 비장하게 적어놓으면서 나는 흘러가고 있는 내 모습들을 얼마나 거부해왔는지. 그렇다면, 이제 나는 일기 쓰기를 포기할 건가? 그럴 수 있을지, 그리고 그래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해봐야 한다. 반성적 쓰기가 주는 위안에 의존하면서 나를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다른 쓰기는 없을까? 가령 그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날씨가 어땠고 무엇을 읽고 썼는지 등 정말 하루 동안 보고 들은 것들을 담담하게 남기는 것이다. 감상보다도 체험을, 해소나 회복이 아니라 관찰과 기록을 위한 일기라면 어떨까. ‘나’라는 자의식으로 기어드는 일기가 아니라 내가 마주치는 세계를 향해 열리는 일기, 그리하여 나 자신의 시뮬라크라를 발견하는 시간으로서의 일기라면 어떨까.

 

글_민호(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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