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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나르시시즘과 싸우는 증여의 신화학

by 북드라망 2022. 5. 31.

신화논리② 구체의 과학(2)

나르시시즘과 싸우는 증여의 신화학

 

 

1. 호모 파베르, 만물을 수단화하는 존재?

인류는 언제 출현했을까요? 고인류학에서 인류의 기원을 물을 때에는 몇 가지 기준을 적용시킵니다. ‘직립, 머리크기, 도구, 이빨’(링크) 재미있지요? 이빨 크기와 모양이 왜 들어가는 것이며, 도구와 이빨이 또 무슨 관계이길래요? 더 흥미로운 점은 이 기준들은 순서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출현’ 시점을 잡는 데에는 이빨의 모양보다 직립의 증거가 더 중요하다고 해요. 사실 모든 요점들이 진화론적으로 연결되어 있기는 한데요, 두 발로 서게 된 이후에 자유로워진 두 손을 어떻게 쓸 궁리를 하다가 머리가 커지고, 그 결과 실제로 불을 사용하게 된다든지 돌도끼를 깨고 간다든지 해서 자연물을 더 활발하게 이용하게 되면서 활동 반경이 넓어졌어요. 자 신체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더 많아졌겠지요? 그러다보니 화식(火食)의 다양한 개발이 이루어졌고요 덕분에 질긴 고기를 씹어대던 이빨이 부드러운 고기에 적응하게 되면서 그 크기가 작아지고 날카로움이 덜해졌습니다. 이 기준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면 자유로워진 두 손(직립)의 의미는 도구를 쥐게 된 데에 있습니다. 인류가 인류인 까닭은 즉 도구와 기술을 취하면서입니다. 호모 파베르야말로 인류를 인류답게 하는 특징인 셈입니다.

 

‘도구’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는지요? 저는 ‘목적’이라는 단어가 곧바로 환기됩니다. 도구는 수단이지요. 내 욕망을 실현시키는 수단. 맛있는 요리를 가능케 하는 조리기구,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자동차, 소셜 네트워킹을 가능하게 하는 핸드폰, 더 나아가면 ‘물질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일상을 채워주는 물건들을 사게끔 하는 ‘돈’도 ‘도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수단의 관점에서 도구를 바라보게 되면 모든 ‘도구’는 목적이 실현되면 소멸해버리는, 본질적으로 무용을 향해 진화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 됩니다. 그런 도구와 함께 하는 일상은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어버리는 삶을 낳고 또 낳고 하겠지요. 그런 의미로 인류의 출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아주 괴상한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요, 즉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류는 ‘만물을 수단화하고 삶을 목적에 종속시키기 위해 출현했다’가 됩니다. 아흑! T.,T

 

 

 

2. 활과 바구니

이같이 제가 내려본 생각은 아주 편협한 도구관을 따른 것인데요. 인류학의 여러 연구들을 보면 야생의 인류는 완전히 다른 도구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남아메리카 여러 부족들의 사회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그들은 지배도 복종도 없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요. 클라스트르가 특히 주목한 것은 구아야키족의 활과 바구니입니다. 구아야키족의 청년 남녀는 입사 의례를 통과하자마자 자기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남자 아이라면 활을, 여자 아이라면 바구니입니다. 자기 활과 자기 바구니를 가지지 못한 남자와 여자는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도구를 만듦니다. 평생 그 도구를 가지고 수렵과 채집을 하고 죽으면 바로 그 활과 바구니를 갖고 무덤에 들어갑니다.

 

“9~10세 이른 어린 소녀들은 그들의 어머니가 만든 모형 바구니를 받는데, 이 바구니를 만들 때 소녀들은 주의 깊게 참관한다. 분명히 소녀들은 그 바구니로 물건을 운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런 이유 없이 머리를 숙이고 목을 당기고 걷는 태도에서 소녀들이 곧 닥칠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13세쯤 월경이 시작되어 여자가 되었음을 공표하는 의례가 치러지면, 소녀는 젊은 처녀로 인정되어 머지않아 사냥꾼의 아내가 될 다레daré로 불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새로운 지위를 얻은 후 첫 일로, 그리고 여자가 된 징표로 스스로 자신의 바구니를 만든다. 이들 젊은 남성과 여성은 각각 활과 바구니의 주인이자 얽매인 자로서 성인이 된다. 마침내 사냥꾼이 죽으면 그의 활과 화살은 의례를 통해 함께 묻히고 여자 또한 가장 최근에 만든 바구니와 함께 묻힌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상징물인 활과 바구니가 주인이 죽은 후에도 남아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피에르 클라스트르, 홍성흡 옮김,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학사), 134쪽)

 

이 활과 바구니에는 파네pané라고 하는 금기가 걸려 있습니다. 만약 아내가 실수로 자기 남편 화살에 손이라도 대게 되면, 화살은 효력을 잃고 남편의 사냥 능력은 사라집니다. 한번 잃어버린 능력은 다른 화살로는 대체할 수 없어서, 평생 그는 무능력한 사냥꾼이 되어 마을의 천덕꾸러기로 살아야 합니다. 여성의 바구니에도 마찬가지 금기가 걸려 있습니다. 재미있지요. 구아야키족의 한 남자에게 두 개의 화살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아야키족 여성이 유행 따라 냉장고를 바꾸고 있는 우리 시대의 주부를 보면 뭐라고 할까요? 구아야키족 언니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이들은 자존심도 없어?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다른 사람도 쓰는 그 냉장고를 자기 집에 들인다고?’ 라고 하겠지요. ^.^;;

 

파네는 마을 구성원 전체의 토템이 부여하는 강제적이고 전체적인 금지와는 다른 개념인데요. 주로 성적 역할 배분에 관여하는 임의적 금기 장치입니다. 클라스트르는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듭니다. 구아야키족 남자 두 명이 바구니를 가지고 다녔다는군요. 차추부타와추기는 파네였습니다. 그는 활을 가지지 않았고 가끔 덫을 놓아 아르마딜로나 코아티라는 일종의 곰을 잡곤 했습니다. 덫을 놓는 것은 활을 쏘는 것보다 품위 없는 일이어서 남자라면 손가락질 받을 만했지요. 그는 파네이므로 어떤 여자도 차추부타와추기를 남편으로 맞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또다른 바구니 든 남자인 크렘베기는 덫에조차 손 대지 않았는데요. 그는 동성애자였습니다. 그의 바구니는 어떤 여인의 바구니보다 아름답고 튼튼했고요. 여자 특유의 제스처를 보이며 자랑스럽게 여성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크렘베기는 파네였기 때문에 자신이 동성애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에 맞게 행동했어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그도 처음에는 활을 잡아 보았겠지요. 하지만 계속된 사냥에서의 불행을 그는 곧바로 자신의 도착적 성애와 연결시킨 후, 바구니의 세계로 당당하게 걸어들어갔습니다.

 

파네는 본질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차추부타와추기와 크렘베기의 차이는 그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지요. 사냥을 잘 못하기는 했지만 사냥꾼으로 살고 싶었던 차추부타와추기는 욕을 먹을지언정 덫을 놓고 사는 삶을 선택했고. 크램베기는 여성으로서 자신을 만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구아야키족은 마을 안에서 자기 토포스(topos)를 발견했던 크렙베기는 여성으로 인정했지만, 사회적 역할 배분의 그물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차추부타와추기는 비난하고 욕하면서 사람대접 해주지 않았습니다. 구아야키족의 ‘파네’는 그 사회를 도구를 중심으로 성적 역할 배분을 하기 위핸 설정적 개념이었습니다. 도구에 걸린 금기는 한 인간이 그 사회와 관계맺어야 하는 양식을 명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드리면 구아야키족을 비롯한 야생의 사회는 성에 따른 상보적 관계와 나이에 따른 상보적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원 전체가 고유한 자기 역할을 하게끔 설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철저한 상보성은 사냥꾼이라면 그가 잡은 짐승을 그는 못먹게 하는 식이고, 남자라면 여자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없다입니다. 같은 성 안에서는 자신이 타인에게 수단이 되고 다른 성과의 관계에서도 서로에게 서로가 수단인 채로 존재함으로써 전체 생산을 공유하는 방식입니다. 구아야키족은 구성원 전부가 완전히 타인 의존형으로 사는 것입니다.

 

구아야키족의 활과 바구니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두 가지 점에 놀라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이들 사회에서 한 개인은 그 자신의 고유한 욕망이나 생산물에 따라 평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런 특징과 연결되는 두 번째는, 그래서 이들의 정체성은 자신의 도구로 다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그 여성’을 표현하는 것은 이름이나 업적이 아니고 그녀의 바구니입니다. 도구는 한 사람이 자연물과 관계맺는 고유한 양식의 상징이고 이런 매개적 양식을 갖춘 자야말로 마을에서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받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수단화되는 도구란 없습니다. 역설적이지요, 사회모델은 구성원 각자에게 수단이 되기를 강요하지만 타인의 삶에 봉사함으로써 그는 주체적으로 사회와 함께 완전해집니다.

 

 

 

3. 나르시시즘, 타자 없는 세계를 향한 억지

클라스트르가 설명하는 구아야키족의 도구관을 따라가다보면 도구의 ‘매개성’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호모 파베르라는 점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화식을 하고 직물을 짜며 다른 사람과 친족이라는 관계망을 이루는 식으로 고유한 문화를 만들며 삽니다. 이 모든 것은 ‘매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주자연의 모든 물체와 인간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해석하는 활동 없이 인간적 삶은 없는 셈이지요. 구아야키족은 ‘내가 다른 것과 관계하는 방식이 곧 나!’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매개에 대한 도외시는 ‘나는 곧 나야!’라고 하는 독아론이 됩니다. 그들은 이 독아론을 어리석다며 비판했습니다. 맞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없이 오롯이 존재하는 ‘나’야말로 참되다고 하는 에고이즘은 억지스러워요. 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주제를 부정하는 사고법이니까요.


그럼 매개성을 부정하고, 관계성을 수단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앙드레 바라냑이라는 사람은 인류의 에너지 혁명을 7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고 합니다. ‘제1차 혁명: 불의 획득, 제2차 혁명: 농업·목축의 발달, 제3차 혁명: 금속의 획득, 제4차 혁명: 화약의 획득, 제5차 혁명: 증기기관, 제6차 혁명: 전기와 석유, 제7차 혁명: 원자력과 컴퓨터’(國分功一郞,『原子力時代の哲學』(晶文社), 第4講 2-1 참고) 그런데 7차 에너지 혁명 이전의 모든 단계는 자연의 어떤 물질을 매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에너지원은 본디 태양 에너지가 지구의 물질로 표현된 것을 다시 가공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은 자연에서 몸체를 받은 모든 것은 존재의 근원적 힘의 매개적 표현이라는 의식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고대에는 매개된 온갖 것들에 대한 감사 의식이 늘 있었습니다. 문제는 7차입니다. 원자력은 매개 없는 에너지원을 이용합니다. 원자로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은 지구 바깥에서 일어나는 태양에너지 융합 반응을 지구 안에서 재현하고 있으니까요.


나카자와 신이치나 고쿠분 고이치로 같은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열망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이유를 경제논리에서 찾지 않습니다. 원자력이 고비용 저효율임이 밝혀져도 현대인들은 그 사용에 대한 필요성을 쉽게 버리지 못하니까요.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매개 없는 관계를 지향하고 또 지향하기 때문입니다(國分功一郞, 앞의 책). 시장은 자연의 동식물, 일상의 다양한 물건들, 많은 사람들 등, 한 인간이 접속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 그 연결의 다양한 방식들을 모두 화폐라는 추상적 척도에 의해 매개해줍니다. 구아야키족 사나이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활이었으나, 시장에 길들어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만물을 살 수 있게 하는 돈이지요. 돈은 하나하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화폐를 통해 관계를 해석하는데 익숙해지면 관계라는 말이 품은 무한한 맺음의 양식에 대한 고민을 점점 더 하지 않게 되겠지요. 나 바깥에 자로 잴 수 없는 수많은 존재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을 자꾸 놓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입니다. 외부로 설정된 그 바깥을 수단화하는 사고가 되기 때문에, 자기만이 목적인이고 우주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자기의 욕망과 자기의 성취에만 초집중된 사고에는 타자가 들어설 여지가 없겠지요. 매개장치, 도구성에 대한 고민이 빠진 삶은 타자 없는 삶입니다.

 

 

4.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

이제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신화의 세계는 말 그대로 매개들로 넘쳐납니다. 모든 관계는 중개자를 필요로 하기에, 불을 얻어야 했던 보로로족 사람들은 새둥지를 털며 땅에서 해로 나아가는 도중의 수많은 지점을 통과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중개자들의 독특한 성격을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의성입니다. 즉 두 항의 성질을 모두 갖고 있어서 이편과 저편의 관계를 가깝거나 멀게 만들기에 좋은 것들이 신화의 화소(話素)가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M212. 토바족의 신화, 「꿀에 미친 소녀(1)」을 들 수 있습니다.

 

M212. 토바족의 신화,「꿀에 미친 소녀(1)」
① 수중 신들의 주인에게 사케(Sakhé)라는 딸이 있었는데 꿀을 탐식했다. 꿀에 대한 사케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 마을의 남녀 모두 ‘시집가라!’고 충고했고, 어머니까지 구박했다.
② 사케는 이름난 꿀 채집자인 딱따구리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새들은 딱따구리처럼 벌집을 찾으려고 나무둥치를 부리로 쪼아 뚫고 있었다. 여우가 그들을 돕는 척하며 나무막대로 나무둥치를 툭툭 치는 시늉을 했다.
③ 사케는 딱따구리를 찾아가던 중 여우를 만났으나 붉지 않은 그의 목과, 굴 대신 흙 밖에 없는 그의 자루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딱따구리를 만나 청혼했지만 딱따구리는 열의가 없었다. 소녀는 끈질기게 고집을 부리면서 엄마도 자신에게 시집 갈 것을 종용했다고 했다. 딱따구리는 그 말이 진실되다면 두려움 없이 결혼하겠다고 하면서, 결혼 전임에도 자신의 꿀을 먹고 있는 사케를 참았다. 둘은 결혼했다.
④ 게으른 여우는 꿀을 훔쳤다.
⑤ 딱따구리는 아내를 야영지에 남겨놓고 일하러 갔고, 여우는 갑자기 그녀를 덮치려 했으나, 사케는 임신한 몸이라 덤불 속으로 도망쳤다.
⑥ 딱따구리는 돌아왔으나 아내를 찾지 못했고, 결국 그가 쏜 세 번째 화살을 보고 아내를 발견했다.
⑦ 딱따구리의 아들은 성장하여 아버지의 화살을 알아차렸고, 마침내 헤어졌던 가족은 상봉했다.
⑧ 셋은 아내의 집에 가게 되었고 딸과 어머니는 화해했으며, 처가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던 딱따구리는 멋진 사위로 인정받았고, 이들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용감하여 여우의 목을 자를 임무를 맡았다.

 

주인공인 듯 주인공 아닌 사케 때문에 시작되는 신화이지요. 사케는 딱따구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마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마을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졌다가 다시 마을과 가까워지는 전체적 거리조정을 중재하는 열쇠는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레이디 사케! 그리고 그녀 주위로 딱따구리와 여우가 포진해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토바족이 ‘소녀’나 ‘딱따구리’나 ‘여우’를 그냥 선택했을 리 없다고 보았습니다.


먼저 사케 양을 연구해보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신화는 단지 오락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부족의 우주론을 떠받치고, 중요한 의례의 틀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신화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은 보통 사춘기 청소년들입니다. 토바족에게는 사케가 있다면, 보로로족의 새둥지 터는 사람의 신화 속 주인공은 소년이었어요. 이들은 모두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이후에 상품으로서의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소설’도 주로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제 예상이기는 합니다만, 신화의 세계에서는 주로 소녀의 비중이 높을 것 같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양의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성의 임신 때문이지요. 여성은 일단 사춘기 이후부터 월경이라고 하는 주기성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야생의 사람들은 벌통에서 꿀이 흐르듯, 여성의 몸통이 때에 맞추어 꿀을 흘려 보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를 따릅니다. 조수간만의 변화와 별들의 운행 전부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하늘과 물을 동시에 연결하는 ‘달’이야말로 지상계와 천상계를 잇는 양의적 기호지요. 월경은 이 ‘달’의 리듬을 따르고 있으니, 월경을 하는 여성은 자연 전체의 주기성을 곧바로 드러낼 수 있는 기호가 됩니다.


여성의 양의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 여성은 월경의 기간 동안 남편과 잠자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원래의 부모에게로 되돌아갑니다. 물론 친정집을 잠깐 다녀온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남편과 동거할 때조차 그녀는 원래의 가족 관계로 돌아가 있는 존재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월경은 두 개의 사회체들 사이를 중재하는 기능을 맡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여성이 아이를 낳지요.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이는 그녀에게만 속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남편의 부족과 아내의 부족 ‘사이’에서 무위치적 존재로 한 시기를 보내다가 사춘기에 이르러 그 부족의 친족 관계표에 맞추어 들어가게 됩니다. 위에서 사케의 아들은 딱따구리 아버지보다 용감하다고 나옵니다. M212에서 최고의 중재자는 딱따구리입니다. 입사 전이므로 그의 아들은 중재 능력보다는 자연의 원초적 힘을 더 많이 발휘할 수 있겠지요. 딱따구리와 결혼하기 전의 사케처럼 말입니다. 입사 전에는 보통 엄마와 함께 아이가 여성적 공간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니 사케는 어미로서 마을의 한 인간이 된 뒤에도 한동안 반인반조(半人半鳥) 아들과 함께 자연성을 더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사케 덕분에 알 수 있습니다. 신화는 양의성 높은 기호를 좋아하며, 양의도(兩儀度)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맺는 관계항들의 수입니다. 하여, 최고의 인간-기호는 여성이 됩니다.

 

파우스트는 모든 것을 다 알았던 현자였으나 허무의 늪에 빠져 죽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온갖 모험을 다 하지요. 하지만 마지막에 깨닫습니다. 유한한 이 삶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한한 타인들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인식이 아니라 생성임을. 파우스트는 ‘영원이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한다’고 말합니다. 여성이야말로 인간을 낳고 낳으며 자유로운 땅을 일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밖에선 거센 파도가 미친 듯 제방까지 밀려온다 해도, 여기 이 안쪽은 천국과도 같은 땅이 될 것이며, / 파도가 세차게 밀고 들어와 제방을 갉아먹는다 해도, / 협동하는 정신은 갈라진 틈을 막아버리리라. / 그렇다! 이런 뜻에 나 모든 걸 바치고 있으니, /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란 이러하다. /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 그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다. / 그래서 위험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여기에서는, /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이고 값진 세월을 보내게 되리라. / 나는 이러한 인간의 무리를 바라보며, /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살고 싶다. / 그러면 순간에다 대고 나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 이러한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 지금 나는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괴테, 이인웅 옮김,『파우스트』(문학동네), 365)

 

괴테가 레이디 사케 이야기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한 사람’, ‘한 물건’이 아니라 무수한 관계를 연결하며 또한 낳고 있는 그녀를 칭송했겠지요. 아름다운 삶은 다양한 관계를 누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5. 꿀에 미친 소녀의 증여론

다시 신화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사케가 꿀에 미쳐 있었다는 점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꿀은 자연에서 발효(인간의 농경처럼 벌에 의해 경작된)된 물질입니다. 꿀 자체가 동물성과 인간성을 모두 보유한 물질이 됩니다. 게다가 꿀은 식품이기는 하지만 필수적이지는 않습니다. 안 먹어도 살 수 있는 간식거리지요. 자, 그러니 꿀은 양의적입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조사에 따르면, 이렇게 훌륭한 양의적 물질이기 때문에 남미에서는 꿀이 중요한 부족 의례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케의 지나친 꿀 탐식은 그녀가 마을의 공동 식사 방식과 멀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적 차원에서 보면 사케는 지나치게 자연 쪽으로 가까워지는 중이 됩니다. 이러한 때 마을의 남녀노소는 모두 ‘시집가라!’고 밀어붙이지요. 야생의 공동체에서 아이는 사실 사람이 아닙니다. 거의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는데요, 입사 의례를 치르지 않으면 어엿한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녀에게는 시집이 사회로 들어가는 문턱이 됩니다. 시집가라는 엄마의 채근은 사케로 하여금 자연으로부터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오라는 요청이었던 것이죠.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집 밖으로 쫓겨나야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니 말입니다.


앞에서 구아야키족의 사회 관계가 상보적이었다는 점을 살펴보았지요. 야생의 부족들은 각각 서로 상보하기 위해 족외혼을 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케의 예를 보면, 토바족도 족외혼을 하는 모양이예요. 시집가기 위해 사키는 먼 여행을 떠나야 하니까요. 그럼 왜 딱따구리일까요? 남미 인디언들은 꿀이 나무 안에 흐른다고 생각했다지요. 북미의 메이플 시럽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습니다. 토바족은 왜 딱따구리를 뛰어난 양봉꾼으로 보았을까요? 딱따구리는 닭이나 꿩 같은 순계류(鶉鷄類)가 아니어서 땅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또 날고기를 먹는 독수리나 매처럼 하늘과도 친숙하지 않지요. 딱따구리는 나무에 붙어 삽니다. 동물이지만 식물과 한 몸을 이루지요. 딱따구리 역시 양의적인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연화되어 있는 사케는 딱따구리처럼 훌륭히 중재 역할을 하는 존재와 결합됨으로써 비로소 마을로 돌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우는 이 신화에 왜 필요한 것일까요? 지금 여우는 딱따구리를 두고 사케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③과 ④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케는 딱따구리에게 결혼해달라고 막 조르면서 그의 꿀통에서 꿀을 퍼먹고 있어요. 여우도 몰래 꿀통을 뒤지는 중이지요. 사케와 여우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토바족의 또다른 「꿀에 미친 소녀」(M213)나 그 인근 마타코족의 신화 「꿀에 미친 소녀」(M214, M215)를 보면 전체 줄거리는 비슷한데 여우의 역할이 조금 더 적극적입니다. 여우는 덤불 속으로 도망친 사케 대신 아내 행세를 하며 딱따구리를 속이려 하거든요.


사케와 여우 모두 꿀에 미쳐 있음에도 왜 여우만이 벌을 받는 걸까요? 이유는 확실합니다. 여우에게는 ‘시집가라’고 말해주는 가족이 없기 때문이지요. 꿀에 미쳐 있긴 했어도 사케는 딱따구리 남편이 가족과 이웃들에게 끊임없이 새롭게 꿀을 보충해줄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여우는 자기 외에는 먹일 누군가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M212가 사케와 여우를 대비시킨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케는 나르시시즘을 넘어 증여의 화신이 되기 위해 여우와 다투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탐식에서 증여로!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3』의 부제는 ‘식사예절의 기원’입니다. 이 식사예절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포크와 빨대를 예절의 대명사로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하지요. 하지만 이 작은 물건들이 생물학적이며 육체적인 세계를 매개합니다. 왜 굳이 포크와 빨대가 필요할까요? 이들이 절연체요 변압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도 바로 입에 넣지 못하게 하지요. 요리된 식재료의 온도를 정해주고, 그 전달 속도도 조절해줍니다. 급한 방식으로는 어떤 것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매끼마다 경험하게끔 해주지요. 내가 무엇을 먹고 있고, 누구와 함께 자리하고 있는지 천천히 감각하도록 합니다. 식사예절을 구성하는 수많은 식기들은 겸손한 식탁만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학3』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습니다. 모든 매개된 것들은 ‘감사함’을 가르친다! M212도 가르쳤던 것이지요. 너의 꿀을 준 자가 누구이냐? 이제 너는 무엇을 주겠느냐?

 

“태고로부터 많은 사회의 부와 다양성으로 대부분의 문화유산을 구성한 이후 인간은 금세기에 들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살아 있는 형식들을 집요하게 파괴해왔다. 신화들이 말하는 것처럼 잘 정돈된 휴머니즘(인본주의)은 자신 스스로 시작되지 않으며, 생명 이전에 세상이 있었고, 인간 이전에 생명이 있었으며, 이기심 이전에 타인(타 존재들)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신화학3』, 736쪽)

 

글 _ 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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