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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신화의 테마 ⑦ - 가족은 치유한다

by 북드라망 2022. 7. 25.

신화의 테마 ⑦ - 가족은 치유한다

과 가족 



개구리가 될 테야!  

친구가 곧 아이를 낳습니다. 재치있으면서도 듬직해서 주변을 편안하게 해주었기에 훌륭한 엄마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어질고 느긋하게 육아를 해나갈 예비엄마에게 응원을 보내면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합니다. 가족이란 ‘누구’를 만나 ‘누구’의 부모가 되는 문제라기보다는 타인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줄 것인가하는 과제를  껴안고 살아가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역시 작지 않은 가르침을 줍니다. 신화가 가족을 이루는 방식은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가 「개구리왕자」(『그림형제 민담집』(현암사))에 익숙하기 때문이지요. 공주는 개구리 씨의 신부가 됩니다. 왜 개구리일까요? 양서류이기 때문이지요. 물에서도 살고 뭍에서도 살고. 극단적으로 달라보이는 두 세계 사이를 필요에 따라 옮겨 다니는 존재라서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옛이야기가 권하는 배우자는 자기 욕망을 고집하기보다는 그때그때 조건 속에서 능숙하게 제 자리를 옮길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남아메리카 신화들 중에는 별과 인간이 결혼하는 이야기도 있지요.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영역을 확장하자며, 이 마을에도 속하고 저 세계에도 속하는 사람으로 살라며, 신화 속 주인공들은 별과의 사랑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화가 말하는 가족은 ‘만물과 근친적 관계를 맺게 해주는 소중한 네트워크’입니다. 나는 반드시 창발하는 힘들의 장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꿀에 미친 소녀의 운명이 말해주듯 자기 욕망만 붙들고 사는 일은 ‘나는 고립될꺼야!’라는 주장이고, 혼자가 된다는 것은 숲에서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살기란 ‘인간과 동식물과 은하와의 관계 속에 있다’와 동의어입니다. 신화는 그 관계의 장 전체를 가족이라고 하니 그 안에서 떳떳해지려면 ‘나’는 반드시 열린 마음으로 성숙해져야만 합니다.

 

 

장인이 필요해    
오늘은 가족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보겠습니다. 신화는 내가 맺어야 하는 관계는 밤하늘의 별에까지 뻗어 있다고 하지요. 별-결혼담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의 근친성이 갖는 절박한 의미가 좀 더 드러납니다. 셰렌테족의 신화 M138을 보겠습니다. 인간이 금성과 결혼합니다. 하여간 스케일이 어마무시~ ㅋㅋ  

 

① 금성(남성)은 인간의 모습으로 사람과 함께 살았다. 그의 몸은 상처(궤양)로 덮여 있어서 고약한 냄새가 났고 파리떼까지 웅웅거리며 그를 맴돌았다. 모든 사람이 코를 막았고 그를 자기들 집에 초대하기를 거부했다.
② 인디언 와이카우라는 이 불행한 사람을 맞이하여 새 돗자리를 주며 공손히 질문했다.
③ 금성은 길을 잃었다고 답했다.
④ 와이카우라는 오두막 안에서 처녀인 딸의 벗은 넓적 다리 위에 금성을 앉히고 조심스럽게 더운물로 그의 상처를 닦는 수술을 했고 금성은 나았다.
⑤ 밤이 되자 금성은 와이카우라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었는데, 와이카우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금성은 태양이 서로를 죽이고 아이까지 학살한 인디언들 때문에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우선 비둘기 한 마리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⑥ 와이카우라가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금성은 와이카우라의 딸을 범했고, 사위를 자처하며 보상을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와이카우라는 거절했다. 
⑦ 금성은 잡은 비둘기의 뼈로 가족이 탈 방주를 만든 다음 큰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⑧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곧 물이 마을을 덮쳤으며, 빠져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었다.(『신화학 1』, 474~475쪽 참고) 


주인공은 금성입니다. 신화는 동식물과 인간을 대등한 존재라고 보는 이상으로 광물(금성)과 생물(인간)도 동등하게 바라봅니다. 우주 안에 특별히 중요한 자도 특별히 못난 자도 따로 없으니 선과 악이라는 구분이 여기서부터 무너집니다. 금성은 왜 소녀와 결혼을 할까요? 길을 잃었다고 하니, 일단 그 역시도 관계로부터 빠져 나온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M138은 이 상태가 병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리를 못찾는 상황이야말로 아픈 것이다! 잠깐 옆길로 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새끼 키운다고 온갖 검색 다해 책 사고 학원 보내고 하는데도 점점 더 마음이 초조했습니다. 엄마라는 위치에 있지만 역할은 정보가 대신하게 한 탓이지요, 공부시킨다며 부산을 떨었지만 길 잃은 상태나 다름없었던 거예요. 어쩌면 금성 씨도 저처럼 ‘내가 별인데, 얼마나 고상하고 대단한데~’라고하면서 옆 사람이 어떻게 생긴줄도 안 보고 고개 빳빳이 돌아다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금성 씨 이야기로 돌아오면요, 별이 장인 덕분에 하늘로 돌아가게 되니 이때 결혼의 의미는 ‘치유’가 됩니다. 결혼에 있어 해피엔딩은 스위트 홈에서 둘이 깨 쏟아지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아픈 이를 치유해 제 자리를 찾게 해주는 계기일 뿐입니다. 과부가 된 아내는 어쩌라구요? 아니, 별이 하늘에 저렇게 많은데 뭔 걱정입니까? 어디서 또 하나 떨어지겠지요. ^^ 

 

 

신화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금성이 와이카우라의 딸을 범하는 장면이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가 딸 의사도 안묻는다고?’ 그런데 이런 당황함은 제가 자유연애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화는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레비 스트로스도 강조하고 있지만 결혼담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만물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혼사의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금성은 손가락질받던 자신을 무조건 환대한 와이카우라에게 고마움을 표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인 것이죠. 와이카우라가 거절해도 금성은 사위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공짜 밥은 없다!’라고 하는 원칙을 재실행시킴으로써만 금성은 관계의 장으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금성에게 가족이란 아내가 아니라 장인을 얻는 일이었던 거예요. 

 

하나 더! M138은 결혼과 질병 모티프를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금성이 와이카우라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도 그의 불행을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고통받는 이방인을 모욕했습니다. 그럴 지경이니 서로 간에는 어땠겠습니까? 옆집 아이까지 학살할 정도였습니다. 금성의 상처가 깊어진 것은 저밖에 모르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대목이 참 놀랍습니다. 금성이 아픈 것은 마을 사람들의 편협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나의 상처는 내 잘못이 아니라 타인의 과오로 생깁니다. 결혼은 바로 이런 조건을 치유하는 방법인 거예요. 금성은 장인과 그의 딸을 구하고 하늘로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다 죽고 말지요, 그런데 그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이제 새롭게 마을을 일굴 일이 남게 되었으니까요.  
    

 

무지개 뱀을 조심하자
결혼의 의미가 치유이니 신화가 설명하는 ‘질병’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M138에서 질병의 원인은 사람들 사이에 예의가 없어진 까닭이었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만 붙드는 의기양양 오만함이 문제였어요. 남아메리카에서 이러한 상태를 상징했던 것은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는 이중의 의미를 가집니다. 비가 그쳤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질병을 비롯한 온갖 자연재해의 책임자로 취급됩니다. 재미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지개를 보면 오늘은 운이 좋다며 기뻐했는데, 남아메리카에서는 재수없음의 상징이라니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일곱 빛깔로 찬란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역겨울 정도로 불쾌한 것이 만사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화를 읽으면 진부한 내 감각이 산산히 박살나는 신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럼, 무지개의 이중성을 분석해보겠습니다. 팀비라족은 무지개가 비를 만들어내는 두 마리 수쿠리주(sucuriju) 뱀의 아가리에 자신의 발 양끝으로 버티고 서 있으면 비가 그쳤다고 생각합니다. 무지개가 사라졌을 때 뱀장어와 비슷하게 생긴 두 마리 물고기가 천상의 못에 숨으려고 하늘로 올라가는데요, 이 물고기들은 다음에 세찬 비로 지상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신화학1』, 467쪽 참고). 팀비라족만이 아니라 남아메리카 전역에서, 더 나아가면 세계 도처에서 비의 신을 뱀과 연결시키는 신화가 많이 발견됩니다.

 

뱀은 종종 두 개의 머리를 갖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800년까지 지금의 맥시코 지방에서 있었던 자포텍(Zapotec) 문명에서는 코키요(Cocijo)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의 신, 번개의 신, 우주창조의 신이었는데요, 재규어의 머리에 갈라진 뱀의 혀를 갖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 애보리진의 신화에는 무지개 뱀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신은 하늘의 수원을 지상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요(‘네이버 지식백과 ‘무지개 뱀’(종교학대사전, 1998. 8. 20.)). 북부 오스트레일리아 아눌라Anula족은 파랑새가 비와 관계가 있다는데, 이 새를 토템으로 삼는 부족은 비를 만들기 위해 뱀을 산채로 잡아 특정한 연못에 빠트렸다가 꺼낸 뒤, 나무줄기를 무지개 모양처럼 만들어 뱀 위에 세운다고 합니다(제임스 프레이저,「제5장 날씨주술」,『황금가지』(을유문화사, 201쪽)). 

 

왜 사람들은 비의 신을 뱀의 형상에서 보았던 것일까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뱀이 중요한 단백질원이어서 생명의 원천과 연결시켰다고 합니다. 그럼 레비 스트로스의 설명을 따라가보면 어떻게 될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의 기호가 양의적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해석을 따라 뱀이 물의 신이 된 것을 그 양의성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개구리 씨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척추동물인 고래는 바다 위에서 걷지만, 무척추동물인 뱀은 땅 위에서 헤엄치지요. 좌우운동하는 뱀의 움직임은 물속 생물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또 뱀은 변태하지요. 허물을 벗는다는 점에서 곤충의 생태를 닮았고요. 뱀의 양의성을 포착하면서 만든 기호가 두 머리 뱀입니다. 아즈텍 문명의 물의 신 탈랄록Tlāloc 역시 재규어와 왜가리, 뱀, 조개 등 다양한 형상으로 조합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즈텍 문명은 두 머리 뱀 형상을 즐겼다고도 합니다. 두 개의 뱀 머리가 뱀의 양의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뱀이 비의 신일 수 있는 까닭은 이 양의성을 한 몸에 구현한다 즉 ‘상반된 두 성질을 잇는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듯이 말이지요. 

 

무지개는 이 비의 흐름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고유한 색깔로 즉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하늘과 땅을 잇기에 문제가 됩니다. 그 찬란한 일곱 빛깔은 제 독특함만 강조하는 맥락 없는 아름다움이기에 비난받습니다. 남미의 가이아나부터 차코 지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무지개가 하늘에서 먹을 것을 못 찾아 굶주리면 카리브 인디언을 병들게 하기 위해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무지개가 누군가 죽일 사람을 찾는 반항적인 신령이라고 생각해, 무지개가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내면 바로 오두막 속에 몸을 숨겼다고 합니다(『신화학1』, 467참고). 차코 집단의 빌렐라족은 사납고 고독하며 다색의 살인적인 뱀(무지개)으로 변하는 새 사냥꾼 신화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번에 우리가 읽었던 보로로족의 신화 M5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M5는 남성의 집에 드나들기를 고집했던 청년 비리모도가 할머니의 노여움을 사서 방귀 공격을 받다가, 할머니를 꼬챙이로 꿰고 시신을 잠자는 장소에 몰래 묻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때 청년은 개미핥기의 도움을 받아 시신 은폐를 했어요. 이후로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비리모도의 누이가 어로 작업에서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할머니에게 아이를 맡기려고 했으나 대답이 없었죠. 결국 누이는 자식을 나뭇가지 위에 얹어놓고 가야했습니다. 이렇게 버려진 아이가 흰개미집으로 변합니다. M5에서는 개미핥기와 흰개미집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높이 솟은 흙더미 개미집이 강조됩니다. 개울가에는 죽은 물고기들이 가득했는데, 누이는 물고기를 마을로 나르지 않고 게걸스레 먹습니다. 한정 없이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배가 터져 질병들이 빠져나옵니다. 그녀는 마을을 전염시켰고 사람들에게 죽음을 주었습니다. 신화는 두 오빠인 비리모도와 카보뢰가 창으로 동생을 죽여 그 머리는 동쪽의 호수에, 그 다리는 서쪽의 호수에 잘랐다고 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질병의 근원은 비리모도의 누이, 자식을 버린 어머니, 탐식하는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왜 탐식을 하게 되었나면 비리모도가 남성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즉, 어머니 치맛폭에 싸여 유아적 애착 관계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야단치는 할머니를 되려 죽임으로써 비리모도는 마을의 문화적 관습을 무시하고 친족 사이의 법칙도 거부했습니다. 존경의 마음으로 치러야 할 장례도 없이 집 안에 시신을 매장하는 큰 실수를 하기도 했지요. 자연과 문화 사이의 관계,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다 파괴되었고 이것이 누이를 식인귀로 만든 원인입니다. 그러니 이때에도 전염병은 마을의 관습을 무시하고 제 욕심만 차린, 마치 꿀에 미친 소녀처럼 자기만 생각한 누군가에 의해 벌어진 사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년의 악행을 도와준 개미핥기와 엄마가 버린 탓에 개미집으로 변한 아이들에게서 강조되는 이미지는 개미집입니다. 젖은 흙으로 도기를 빚을 수 있기 때문에, 신화의 기호 중 개미집의 마른 흙은 문명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상태를 가리키게 됩니다. 자식을 버린 어머니는 문명 이전의 야만적 힘으로 완전히 복귀해버린 마을의 처참한 상태를 보여주는 셈이지요.  

 

전염병은 누이의 오라비가 그녀의 몸을 나누어 위쪽인 머리를 동쪽 호수에, 아래쪽인 다리를 서쪽 호수에 던짐으로써 끝이 나는데요. 누이 육신이 분리되어 동쪽과 서쪽이라는 방향이 호수의 물이라는 기호로 재결합되기에, 이는 비의 신인 두 머리 뱀의 경우처럼 만물 전체가 제 모습으로 연결되었음을 뜻합니다. 누이의 몸에서 터져 나온 질병은 죽음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덕분에 새로운 소통의 길이 모색되었어요. 그러므로 질병은 우주 전체의 관계 맥락과 잘 어우러지지 못한, 누군가의 치우친 욕망을 제 자리로 돌려 새로운 소통이 일어나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무지개는 그 자체로는 죽음이 시작된다는 기호로 나타나지만, 그때부터 사람들은 관계의 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하고 새롭게 관계의 실을 잇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금성의 결혼도 마찬가지지요. 신화의 세계에서 말하는 대규모의 죽음은 어떤 치우침이 발생했음을 알리는 기호입니다. 이 사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존재는 와이카우라와 같이 사심 없이 타인의 고통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뿐입니다. 와이카우라에 의해 회복되는 관계, 그것이 치유의 의미인 것입니다. 결혼은 관계의 새열림이므로 그 망에 걸리게 되는 모든 이들에게 생기로운 순환의 활력을 줄 것입니다.   

 

인류사 최고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석기 농업 혁명은 동물의 가축화와 식물의 단품종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한 종을 인간의 목적에만 맞게 전유한다는 점에서 동등한 관계맺음의 장에 치우침을 가져왔습니다. 재배술 역시 식물 생장의 리듬을 인위적으로 조율하고 경작을 위해 풍경을 조작함으로써 인간적 삶에만 무게를 싣는 삶을 온누리에 강요했습니다. 신석기혁명과 함께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인구 밀집도가 낮은 사회, 다종다기한 생명관계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전염의 경로가 여기저기서 차단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화가 말하는 전염병과 인간의 편의에 따라 우주만물의 질서를 조작하는 단계에서의 전염병, 둘 모두 원인은 같습니다. 내 욕심만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신화는 그런 자기중심주의를 치유하기 위해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많고 많은 가족들
인류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정리에 따르면, 가족은 독특한 두 개의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레비 스트로스,「서문」,『가족의 역사』). 그것은 수직의 축과 수평의 축입니다. 수직의 축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생물학적 계승을 목표로 하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그의 자식을 핵으로 하는 모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끌림은 생물학적 계승이라고 하는 자연종의 본원적 욕구를 따르는 것이기에 여기서 가족은 자연의 보편 법칙을 따릅니다. 

 

 

이 지점에만 주목하면, 가족이 다른 가족들과 나아가 그 너머에 존재하는 사회라는 차원과 대립함은 당연합니다. 굳이 산업문명과 함께 공적 영역에서 중단없는 생산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탓에 사적 영역으로 고립된 개인주의적 가족(한나 아렌트, 3장,『인간의 조건』)까지 갈 것도 없이 수직적 연속에 초점을 맞추면 가족은 기본적으로 사회와 대립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Marshall Sahlins는 『석기시대 경제학』(1974)에서 가족제 생산양식을 분석한 적 있습니다. 살린스는 원초적 풍요사회라는 개념으로 잉여생산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파악했는데요, 살린스는 여기에서 수직적 모델로 가족의 의미를 한정시켰습니다. 원시의 부족장이 겉으로 보면 많은 아내를 거느린다든가 다른 부족과의 교역을 빌미 삼아 자기 집에 재화를 쌓아두는 것처럼 보이더라 해도, 개개인은 철저히 자기 가족의 생계에 초점을 맞추어 살기 때문에 ‘공동의 잉여’ 생산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니 사람들은 족장이 자기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면 얼마든지 그를 떠나 자기에게 도움이 될 다른 부족장을 찾아갈 테지요. 제임스 C. 스콧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라고 하는 권력구조가 자명해보이지만 인류사의 구석구석은 자율적 삶을 위해 지배체계 바깥으로 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고 합니다(『조미아, 지배받지 않는 사람들』참고). 살린스와 제임스 C. 스콧이 강조하는 바는, 국가가 되었든 민족이 되었든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행복을 좌우하는 일은 인류사의 보편 상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출발은 늘 자기의 생계요, 자율적 삶이었다는 것이지요. 살린스에게 원시의 가족은 제 고유한 욕망에 충실한 최소단위의 집합체였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수평축을 덧붙여 가족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레비 스트로스,「서문」,『가족의 역사』, 9쪽). 가족이 수평적 확산을 목표로 한 인간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렵채집의 사회에서건 농경 사회에서건 많은 경우 인류는 외혼제를 선택했습니다. 내혼제를 선택하는 경우는 극도로 카스트가 발달한 신분제 사회, 친족중심으로 재산을 양도하는 부권제 사회였지요. 외혼제란 구성된 가족을 파쇄하는 장치입니다. 각각의 가족 중 한 사람을 내어 놓도록 강제하는 것이 외혼제이니까요. 신화에서 근친상간의 금지가 주 테마인 것도 외혼제가 가족 관계의 핵심적 형태였음을 말해줍니다.  

 

끊임없이 가족을 해체해서 분산적으로 확장시키는 수평축 가족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공동체의 형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의 형성입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정리에 따르면 출산과 양육에서 가족은 사회와 대립각을 세우게 되지만, 자식을 낳기 위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가족은 해체되어 다시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본질적인 것이 수직축이냐 수평축이냐 하는 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개별 문화가 재생산되는 작동의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수직축의 목표와 수평축의 목표를 염두에 두며 수만 가지 방식으로 가족의 형태를 계발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 간의 친밀함이라든가 유대의 정도를 따질 때에도 ‘남편과 아내, 그들의 자식’과 같은 삼각형만으로 따질 수 없습니다. 사랑과 소유물의 저수지로서의 가족이란 인류사의 수많은 모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외혼제와 모거출계의 가족구성이 일반화되어 있는 문화라면 M5의 신화처럼 결혼하지 않으려는 비리모도를 할머니가 야단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많습니다. 데릴 사위의 형태로 살아가야 하는 모거제 사회의 성인 남자들은 자기 집에 처남이 찾아올 때면 왠지 불편함이 느껴져 집 밖을 배회한다고 합니다. 인도의 나야르족Nayar은 모계제여서 남편은 자유롭게 애인을 두고 아내에게 종종 은밀한 방문자처럼 들른다고 합니다. 아버지로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요. 그의 아들은 아버지와는 소원한데 삼촌들과는 깊은 육친의 정을 나눈다고 하지요. 우리 눈에는 부자가 서먹하다면 뭔가 집에 문제가 있게 보이지만, 다양한 가족 형태의 맥락에서 보면 이해못할 상황도 아닙니다. 

 

인도의 아삼Assam 지방과 아프리카에서는 젊은 남녀가 사실상 난교 상태에서 생활하는데 결혼은 성적으로 자유분방했던 그 기간을 지나, 반드시 애인이 아니었던 사람과만 해야 한다고 해요. 각 마을의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가 이웃 대다수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결혼을 했다지요. 에스키모족이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사회에서 종종 아내를 빌려주는 일이 있다고들 합니다. 이 경우도 가족은 사냥에서 잡은 것을 가져오는 남자와 채집해서 얻은 것을 가져오는 아내의 결합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마을의 아이들은 ‘어? 저 분이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잖아?’ 하는 마음으로 어른들을 보지 않았을까요? 아이들은 부지런한 어머니 덕분에 많은 아버지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세라 블래허 퍼디,『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참고).

 

가족 형태에서 수직축에만 특권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지요. 반드시 생물학적인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 가족 형성의 필수가 될 필요도 없어요.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조사에 따르면 남아메리카의 한 부족에서는 종종 동성애 커플을 볼 수 있는데요. 어떤 이가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인데 사냥에 소질이 하나도 없었나 봐요. 그래서 마을 아가씨들 그 누구도 그와 결혼하지 않으려 했지요. 아가씨들은 자신이 만약 아들을 낳는다면 뛰어난 사냥꾼이 되어야 하는데, 그처럼 무능한 사냥꾼과 결혼한다면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여성의 삶을 허락했습니다. 어떤 처녀보다 바구니를 잘 짜는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남자 사냥꾼의 부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어요. 그가 가족을 이룬 것은 수평축의 확대 속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분석하는 야생의 신화들은 가족을 수평축의 확대라는 점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너의 관계를 어디까지 확대할 것이냐, 막힌 관계의 지점을 뚫는 치유로서의 가족이 신화에서는 최선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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