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의 테마 - ② 가족
가족, 증여의 길목
답 없는 사이, 가족
2022년 칸국제영화제 초청작 《브로커》를 만드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은 가족 이야기를 많이 다루시지요. 저는 《어느 가족》(2018)이라는 작품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버림받은 아이를 주워다 기르는 부랑자 가족 이야기인데 정말 이상한 집안 풍경이 나옵니다. 할머니와 부부, 딸이나 아들 모두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을 뿐더러 도둑질을 가르치거나 앵벌이를 시키면서 착취 비슷이 생활을 꾸려가고요, 그렇지만 밥을 꼭 함께 먹거나 바다로 휴가를 가는 등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주기도 합니다. 저마다 밝힐 수 없는 사연을 가지고 이용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면서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나가는 사이인 거지요.
감독님의 다른 작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는 신생아실에서 자식이 바뀌게 된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어떤 관계도 당연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저는 두 영화를 보면서 가족이란 ‘함께함을 만드는 사이’라고 정의내리게 되었습니다. 혈연이어야 한다거나, 사랑으로 뭉쳐 있어야 한다거나, 사회경제를 책임지는 단위가 되어야 한다거나 등등,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각자가 저마다의 정의를 만들어가는 일이겠지요. 《브로커》도 낯선 이들이 모르는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이 되는 과정을 다루는 모양인데요, 감독님도 가족에 대해 많은 정의를 내려보고 싶으신가 봅니다.
‘가족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란 고레에다 감독님만의 질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의 질문입니다. 가족 없이 죽을 수는 있어도 가족 없이 태어날 수는 없지요,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평생 누군가와 함께 공간을 나누고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고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를 가족의 이미지로 가지고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겪는 사건이 우리의 욕망과 품성을 만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 오늘은 신화가 ‘가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별을 사랑한 사나이
뉴스에 신화의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거예요. 어머니를 강간하려는 아들, 자식을 잡아 먹으려는 어머니가 줄줄이 이어질 테니까요. 『신화학』에서 소개되는 이야기들은 모두 가족 잔혹극입니다. 신화는 왜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걸까요?
신화에 나오는 가족의 특징 몇 가지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야 합니다. 남녀의 혼사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다루는 신화로는 아피나이에족의 M87을 꼽을 수 있습니다.
① 야외에 누워 있던 홀아비가 별을 사랑하게 되었다.
② 별은 개구리의 형상으로 그 앞에 나타났다가 젊고 예쁜 여인으로 변했고, 마침내 그와 결혼했다.
③ 마을 사람들은 원예농업을 몰라서 야채 대신 썩은 나무를 고기와 같이 먹고 있었다.
④ 별은 고구마와 이냠(igname: 열대산 참마)을 가져와 남편에게 먹는 법을 가르쳤다.
⑤ 남자는 아내를 호리병박에 감추어 놓았으나 막내 동생이 그녀를 찾아왔고 이때부터 가족들은 함께 지냈다.
⑥ 별은 시어머니와 목욕을 하던 날 사리그로 변해 옥수수 이삭이 주렁주렁 달린 큰 나무를 알아차릴 때까지 노파를 괴롭혔다.
⑦ 사리그로 변한 별은 ‘여기 썩은 나무 대신 먹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고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이삭을 땄다.
⑧ 다시 여자로 변해 시어머니에게 옥수수 케이크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
⑨ 새 음식에 기뻐한 사람들은 돌도끼로 옥수수 나무를 찍어 넘기기로 결정했다.
⑩ 그러나 숨 돌리려 사람들이 잠시 쉴 때마다 나무의 찍은 홈은 다시 메워졌다.
⑪ 더 좋은 도끼를 가져오려고 두 청소년을 마을로 보냈는데, 도중에 소년은 사리그를 잡아 구워 먹게 되었다. 사리그는 금지된 음식이었으므로 그들은 식사가 끝나자마자 등이 굽은 노인으로 변해버렸다.
⑫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나무를 잘랐고, 별은 벌목술과 농장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⑬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신화학1』, 346~347쪽 참고)
M87은 표면적으로는 결혼 이야기인데,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아래 ⑨를 경계로 서사적으로 분절되는 문명담론입니다. 전반부는 결혼의 조건과 의미를 다룹니다. 결혼의 조건은 무조건 족외혼입니다. 이것은 결합하는 신화 속 남녀가 서로 이종(異種)이라는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표범-남자와 인간-여자 같은 식인데요, M87에서는 인간이 별과 결합합니다. 헉! 별은 광물 아닙니까? 음. 그러고보니 과연 옳습니다. 최초의 세포는 초기 지구의 부글부글 끓는 진흙 웅덩이에서 탄생했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지구 심부에서 가스가 나올 때 흙탕에 수막이 형성되었다가 터지곤 했을 텐데, 터지지 않고 남게 된 작은 수포들 안에서 유기분자가 합성됨으로써 세포의 역사가 시작된 거지요(링크). 진흙 웅덩이로부터 태어난 세포. 그러니까 신이 인간을 진흙으로 빚었다는 고대의 말씀은 옳았던 거예요. 이럴 정도니까 생물이 광물과 결혼하는 테마는 매우 그럴 듯 해 보입니다.
M87은 이 이종성을 다종(多種)적이라고도 말합니다. 홀아비는 변신하는 별과 결혼합니다. 그의 신부는 개구리와 사리그(설치류)이기도 해요. 홀아비는 물가와 들판과 하늘을 처가로 두는 셈이지요. 결혼과 함께 그는 막강한 뒷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온 자연이 다 그를 사위 삼는다는 것 아닙니까? 사위사랑 장모사랑, 이제 동네 씨암탉은 다 그의 몫! ^^
여기서부터 우리는 신화가 가족에 부여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화는 ㉮ 만물과의 결합을 통해 자연의 어떤 것과도 근친성을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지요. 인간은 별과도 가족을 이룰 수 있으니까요. 신화는 우리 손끝과 발끝을 스치는 모든 것이 어쩌면 내 가족일 수 있었다는 감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별과 결혼한 홀아비에게는 좋은 일밖에 없습니다. 아내는 원예농업을 몰랐던 남편에게 고구마와 이냠(뿌리 식물)을 소개했고 먹는 방법도 가르쳐주지요. 먹는 방법이라고 하니 캐는 방법을 알려준 것 같은데요 즉 도구의 사용입니다. 맨손으로 긁어내기보다는 나뭇가지나 돌 등을 이용하게 했겠지요. 혹은 예의를 갖추어 먹게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별-아내와 함께, 남편의 마을에는 원예 농업과 식사 예절이 들어가게 됩니다. 결혼이란 우주의 여러 힘들이 우리 각자의 세계로 밀려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셈입니다. ㉯ 증여의 회로가 열리는 것이지요.
이 통로를 ‘증여’라고 부르는 이유는 남편이 별-아내에게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아내가 온갖 방식으로 몸을 바꾸며 그의 가족에게 선물을 준다는 점 때문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의 자연과 문명의 결합을 다룰 때, 신화가 문명을 표범이라든가 별처럼 위대한 모습으로 그린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위대한 모든 것, 이치와 질서에 대한 우주적 앎은 인간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연에 이미 있는 것이고,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켜 차후에 발명하게 된 무엇이 아닙니다. 신화는 바로 이런 자연과 근친관계에 들어간다고 함으로써 그 막대한 힘을 받는 것에 ‘네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서야’라며 당위를 붙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해석이지요. 하지만 가족이 된 자연이기 때문에 함부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감각 또한 갖게 됩니다.
다시 읽어나가겠습니다. ⑥에서 별이 시어머니를 ‘괴롭혀’ 옥수수 이삭이 주렁주렁 달린 큰 나무를 알려주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문명의 이식이란 무척 고단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며느리가 옥수수 케이크 만드는 법까지 전수했다고 하니 이 결혼으로 마을 사람들 전부가 재배술에서부터 고급 요리에 이르기까지 이롭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이르려면 고생을 해야 합니다. 공짜 밥은 없으니까요. 결혼이란 나는 모르는 것,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 하는 일이고 그 과정은 늘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의 의미는 이렇게 또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결혼은 ㉰ 우주자연의 힘을 증여받기 위한 ‘노력’이다.
이 지점에서 조금 더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식민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외부에서 강제된 문화니까요. 며느리가 동물의 모습을 하고 시어머니를 겁주며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문명화과정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신화는 19세기 제국주의의 역사까지 갈 것도 없이 문명화의 고통을 짚고 있는 셈입니다. 내가 아닌 남이 나에게 주려는 것을 고통스럽게 받기도 하고, 나 또한 그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면서 가족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식민화의 역사에서와는 달리 신화에서는 이것이 홀아비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리고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 결혼에는 위험이 늘 뒤따른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신화의 전반부입니다. 증여로서의 결혼에 따른 주의점으로 넘어가기 전에, 인류학에서 관찰한 족외혼에 대해서도 조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신화 속 족외혼의 다중성은 열대 부족에서 종종 발견되는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잠깐만요. 잘 생각해보면 원시의 일부다처나 일처다부는 마을의 인구 분포상 불가능합니다. 한 남자가 많은 여자를 데리고 살면 그 공동체에는 결혼할 수 없는 남자들이 많아집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차오르는 성적 긴장과 불평등 때문에 공동체는 안정을 헤치게 될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일부다처라고 해도 서로서로 중혼이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지요. 그럴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가족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일부다처라 해도 친권자 의식이 강해지지는 않겠지요. 중혼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면 말 그대로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게’ 됩니다. 여담입니다만, 인류의 진화를 모성대행의 양육방식에서 찾고 있는 세라 블래퍼 허디 선생님의 연구에 따르면, 정자와 난자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진다는 상식을 알 수 없었던 부족의 어머니들은 임신이 된 순간부터 마을의 훌륭한 전사, 멋진 사냥꾼과 서둘러 결합하려고 했다네요? 아이를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려면 다양한 능력을 일찌감치 고루 주입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요(세라 블래퍼 허디,『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 5장 「진짜 홍적세 가족 여러분, 앞으로 나와주시겠어요?」). 저는 이보다 심한 조기 교육은 처음 보았습니다. ^^;;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연구에 따르면, 보통 일부다처는 부족장에게만 허락되는 권한이라고 합니다. 족장은 마을 사람들의 복지에 큰 관심을 두어야 하니까, 사람들은 그의 많은 아내가 족장이 다 나설 수 없는 모든 공공 서비스에서 활약하기를 기대한다고 합니다(피에르 클라스트르,『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제2장 「교환과 권력」). 일부다처제는 족장이 수많은 처가를 부양할 의무를 떠맡는다는 의무이면서, 그러한 의무를 통해 부족민 전부에게 다양한 사회적 혜택을 돌려주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족장의 결혼은 증여의 구심력과 원심력을 작동시키는 장치였던 것이죠.
증여의 크기, 가족의 무게
레비 스트로스는 아피나이예족뿐만 아니라 팀비라족(M88), 크라호족(M89), 카야포족(M90~M92)에서 발견되는 재배식물의 기원 신화가 M87과 형태적으로 매우 비슷함을 지적합니다. 결혼은 자연이 허락한 문명을 부족 세계에 들여오는, 증여의 길이 열리는 계기입니다. 이제 M87의 후반부로 가보겠습니다. 신화의 결혼담이 ‘증여’의 관점에서 경계하는 것은 탐욕입니다. ⑨을 보면 새 음식에 기뻐한 사람들이 돌도끼로 옥수수 나무를 찍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탐식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증여받았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자연의 힘을 마구 갈취하려 합니다. ⑩에서 보면 도끼질이 멈출 때마다 나무에서 새살이 올라왔다고 하는데요, 차고 넘치는 자연의 힘을 여기서도 알 수 있는데 인간은 이렇게 솟아오르는 생명력을 굳이 꺽어 소유하려고 합니다. 왜, 옛날 이야기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가만히 두면 매일 아침 황금알을 낳아 줄 텐데, 그 뱃속을 째서 다 꺼내 갖겠다는 욕심 때문에 거위를 죽여버리는 바보 이야기 말입니다.
신화는 그런 바보들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사리그를 구워 먹은 두 소년의 운명을 통해 알 수 있지요. 사리그란 별-아내의 다른 모습이므로 부족 내에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소년들의 사리그 섭취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증여받았는지를 잊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소년들은 마을의 자식들인데, 그러므로 이것은 자식에 의한 부모 살해도 됩니다. 이런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늙어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의 기원 신화들에서 보았던 ‘단명 신화’의 흔적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이든 재래식물이든 증여받은 것에 대한 탐욕은 인간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인간의 유한한 생은 자연의 무한한 증식력을 모욕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이 모든 어리석음을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별은 다시 벌목술과 농장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네요? 신화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 자연의 자애심을 이렇게 포착하는 거지요. 하지만 영원할 순 없습니다. 별은 결국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도 않고 청년들이 사리그를 먹지도 않았다면 인간은 계속 새롭게 문명을 증여 받을 수 있었겠지요. 신화는 인간이 단지 몇 가지밖에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을 끝에서 지적합니다. 자연이 줄 수 있었던 더 아름다운 것들은 영원히 하늘에서만 반짝이게 되었습니다.
탐욕이란 결국 확보된 증여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로 토바족의 꿀에 미친 소녀 이야기(M212)도 볼 만합니다.
ⓐ 수중 신들의 주인에게 사케(Sakhé)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꿀을 너무 좋아해 이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 요구가 지나쳐 사람들은 그녀에게 ‘시집가라’고 충고했고, 그녀의 어머니까지 딸을 야단치며 시집가라고 쫓아냈다. 어린 소녀는 꿀 채집자인 딱따구리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 딱따구리는 벌집을 찾으려고 나무둥치를 부리로 쪼아 뚫고 있었는데 여우가 그를 돕는 척했다. 하지만 여우는 그저 나무둥치를 툭툭 칠 뿐이었다. 사케는 딱따구리가 있는 곳을 알아내었고, 도중에 여우를 만났다. 그러나 여우의 목은 새처럼 붉지 않았고 그의 자루에는 꿀 대신 흙이 들어 있었다.
ⓓ 사케는 여우를 지나쳐 딱따구리에게 갔으나, 딱따구리는 부모가 결혼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끈질기게 여우를 설득해 ‘엄마는 혼자 살고 있고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딱따구리는 “만일 네 엄마가 이런 의도로 너를 보낸 게 사실이라면, 나는 두려움 없이 너와 결혼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네가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너와 결혼할 수 있겠니? 나는 바보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딱따구리는 사케가 꿀을 먹는 것을 꾹 참았다.
ⓔ 여우는 계속 꿀을 훔치며 돌아다녔다.
ⓕ 딱따구리가 아내를 야영지에 홀로 남겨두었는데 그때 여우가 나타나 여자를 강간하려고 했는데, 잉태하고 있던 그녀는 덤불 속으로 도망갔고 여우는 모욕을 느꼈다.
ⓖ 딱따구리가 돌아왔을 때 여우는 그의 아내가 어머니를 따라 갔다고 거짓말을 했고 동물의 우두머리였던 딱따구리는 그녀를 찾으라고 명령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했다. 화살을 여러 번 쏘았는데 딱따구리가 쏜 세 번째 화살이 아내가 있는 장소에 떨어졌다. 그동안 태어나 성장한 아들은 아버지의 화살을 알아차리고 가족은 상봉했다.
ⓗ 야영지에서 할머니는 자신의 딸이 가족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고 놀랐으나 사위는 장모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자신은 필요한 것이 없고 맥주도 원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볼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손자는 딱따구리의 상속자가 될 것이며 또 다른 아이들을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 딱따구리는 여우에게 복수하러 갔다. 여우는 딱따구리의 아내가 이유없이 자신을 무서워했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선물로 딱따구리를 회유하려 했으나 딱따구리는 이를 거절했다. 아버지보다 용감했던 아들은 딱따구리를 포박하고 목을 잘랐다.(『신화학2』, 154~156쪽)
사케는 꿀에 미친 소녀입니다. 꿀이란 꼭 필요한 식품이 아니라 사탕이나 케이크처럼 굳이 먹지 않아도 되는 디저트죠. 소녀가 가족들에게 계속 꿀을 요구한다는 것은 식구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힘쓸 때, 혼자 쾌락에 빠져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꿀은 자연에서 가공된 최상의 문화적 음식입니다. 사케가 꿀에 혼자 빠져있다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증여된 것을 나누지 않으려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사케는 엄마가 쫓아내서라도 시집을 가야만 했어요.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은 없지요, 가족을 통해 들어온 증여의 힘은 마을 전체에서 순환되어야만 하니까요.
사케는 역시 동물의 왕 딱따구리를 남편감으로 꼽았네요. 족외혼입니다. 이 결혼담은 삼각관계의 모습을 보입니다. 사케는 여우와 남편을 두고 경쟁합니다. 그런데 사랑 싸움이 아니고 꿀 싸움입니다. 사케와 여우는 성질이 비슷하죠, 둘다 욕심꾸러기이고 기회만 있으면 꿀을 훔칠 테세입니다. 딱따구리가 사케의 청혼을 따지고 들 때 그녀가 허락도 안 받고 꿀을 훔쳐먹던 장면을 떠올려 보셔요(ⓓ). 이는 여우가 딱따구리를 속이며 대충 나무둥치를 치는 행동을 했던 것과 같습니다(ⓒ). 여우는 자기가 딱따구리네 가족인 것처럼 속이려 했던 거지요. 여우도 사케도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방법을 안 가릴 테세입니다. 그러니 딱따구리가 야영지에 아내를 남겨두었을 때 여우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했던 것은 사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녀로부터 꿀을 빼앗기 위해서였다고 해야겠지요.
딱따구리는 왜 여우가 아니라 사케를 아내로 선택했을까요? ‘엄마가 나를 버렸다’라고 하는 사케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죠. 이때 딱따구리가 주의를 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거짓이 없을 것, 그리고 가족을 원할 것! 사케가 했던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말은, 나는 가족을 이루고 싶어! 라는 의미였습니다. 딱따구리는 그 진실을 너그러이 받아들였고 사케가 꿀 훔치는 것까지 용인했습니다. 반면 여우는 가족이고 뭐고 오직 제 욕심 채우기에 바빴기에 벌을 받는 거지요. 사케가 인간이어서 딱따구리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화에서는 인간과 동식물이 동등한 지위를 갖습니다. 다만 신화는 가족을 이루지 않으려는 자, 증여의 고리를 열지 않으려는 자를 경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딱따구리의 성품에 대해서도 말씀 드려보고 싶습니다. 딱따구리는 현명합니다. ‘나는 바보가 아니야!’ 그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는 바라는 것이 없어요. 나는 맥주조차 필요치 않습니다. 나는 나를 돌볼 수 있어요.’ 그렇습니다. 딱따구리가 만약 ‘자연을 보호하자!’고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깜짝 놀라지 않을까요? 나는 동물의 왕이야, 자연의 정령이야, 고작 인간인 네가 나를 어떻게 보호할 수 있지? 사리그를 잡아 먹고 꿀에 미쳐 있기를 좋아하는데? 신화 속 동물의 왕은 인간과 뭔가를 교환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대등한 사이가 아니니까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자식입니다. 딱따구리보다 어리석고 아는 것도 없고요.
사케는 딱따구리에게 정직함으로써 증여의 회로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었고, 덕분에 마을은 풍요로운 꿀을 계속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꿀에 미친 소녀의 신화는 남아메리카에 두루 분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꿀에 미친 소녀를 이야기하는 마타코 신화(M216)에서는 소녀를 ‘흰 피부와 대단히 예쁜 소녀’라고 묘사하는데요, 문두루쿠 지방의 우주 생성 이론에 따르면 만월은 특히 피부가 대단히 흰 젊은 처녀의 변신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M87에 나오는 아름다운 별을 ‘달’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 M87에서는 문명의 화신이었던 별이, M216에 오면 어리석은 인간의 대표자로 되네요? 흥미롭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신화의 기호는 객관적 사실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관계적으로 선택됩니다. 그래서 개별 신화를 얼마든지 유사 신화와 조립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M87과 M216을 둥글게 엮어 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케가 달로 변신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딱따구리와 결혼한 뒤, 사케는 바뀝니다. 딱따구리의 아들을 부족의 자식으로 키우게 하는 위대한 어머니가 되지요. 욕심쟁이 소녀는 마을 전체의 문화 수준을 높일 수 있을 정도로 위대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신화 속 가족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가족을 만드는 이유가 내 행복을 위해서만은 아니구나 싶습니다. 사리그를 잡아먹던 청년이나 여우가 될 순 없어요. 가족은 자연의 자식으로 인간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길 하나를 만들게 하는 고마운 관계입니다. 그런 길 하나를 모색할 수 있다면, 우리가 맺는 많은 관계는 가족의 이름을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 _ 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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