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숲을 나와 신화의 심연 속으로
안녕하세요. 저는 동서고금의 동화가 품고 있는 태곳적 지혜를 탐구하는 동화인류학자 달님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레비 스트로스 선생님을 모시고 여러분께 흥미로운 신화의 세계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
첫 회에서는 제가 신화학의 광대한 세계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서
제가 동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든 것은 독일 민담수집가인 그림 형제(Jakob Grimm(1785~1863), Wilhelm Grimm(1786~1859))가 모은 『그림 형제 민담집-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덕분입니다. 그림 형제의 민담집에는 재투성이 아셴푸텔이나 백설공주 등 별스러운 주인공들이 많이 나오지요.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복구 불가능한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책이나 원망에 빠져 있기보다는 발밑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주의를 기울이는 존재들입니다. 마녀든 장화 신은 고양이든 가리지 않고 함께 만드는 운명!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부모를 떠나고, 더 깊이 헤매기 위해 적을 만들자! 저는 제 욕망이나 성취에 급급해하지 않는 주인공들의 씩씩함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동화를 읽다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그동안 내가 나를 마치 빈 그릇인 듯 바라보았다는 것을요. 그 안에 정보, 경험, 물건 등 일단 뭔가를 채우자싶어 얼마나 바빴는지를 말입니다. 친구 덕분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엄지공주라면 그런 허덕임은 조금 유치하다고 말해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훌륭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찾고 배우는 사람으로 살리라! 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처의 옛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니 조금 흥미로운 지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비슷하다~’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신데렐라입니다. 계모의 구박을 받으며 부엌데기로 매일같이 아궁이 옆에서 새까매지도록 일을 해야 하는 소녀가 있지요. 그녀들은 유리 구두 한 짝을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과정에서 왕자님을 만나 팔자를 고칩니다. 하야모토 다카시는 고대 이집트에서 유럽까지, 나아가 중동에서 극동까지 신데렐라 모티프가 넓게 퍼져있다고 말했습니다(하야모토 다카시,『신데렐라 내러티브』) 그런데 이 모티프를 보다 확장해보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조력자를 만나 팔자를 고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러시아의 V.Y.프로프가 모든 민담이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영웅서사의 프레임을 갖고 있다는 논증을 하기도 했습니다(V.Y.프로프,『민담의 역사적 기원』(문학과 지성사)).
모티프만이 아닙니다. 소재적으로도 공통점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신데렐라는 왜 하필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이야기가 전승되던 지방이 유리공예로 유명했던 것일까요? 그림동화만 해도 ‘신발’에 관한 에피소드가 많이 나옵니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대표적이지요. 고양이는 왜 하필 장갑이 아니라 장화를 선택해서 인간의 마을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신발 생각을 하다 보니 또 한 분의 유명한 주인공도 떠오릅니다. 바로 비극계의 큰형 오이디푸스 님이시죠.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로부터 아침에는 발이 네 개, 오후에는 발이 두 개, 저녁에는 발이 세 개인 존재를 푸는 수수께끼를 받습니다. 음~ 발의 개수가 문제로군요. 답은 사람이었죠. 사람이 일생 동안 발의 개수를 바꾼다는 이야기는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만듭니다. 어릴 때와 성인일 때, 그리고 노인일 때 우리가 대지와 맺는 관계는 이렇게나 다릅니다.
그렇다면 신데렐라도 좀 다르게 읽힙니다. 신발 한 짝이 없는 사람은 대지에 한쪽 발을 끌면서 걸을 테니 발의 개수가 1개가 됩니다. 신발을 얻은 덕분에 고양이도 발의 개수를 바꾸며 인간이 되지요. 옛이야기에서 인간이나 동물은 계통분류표의 어느 한 점을 차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대지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정의되고 있습니다. 앗! 그러고보니 오이디푸스의 아버지는 라이오스 왕이셨죠. 라이오스라는 이름이나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발에 결함이 있는’, ‘부상한 상태인’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나카자와 신이치,『신화, 인류 최고(最古)의 철학』, 183쪽). 둘다 ‘절뚝거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을 썼던 셈이니, 그들을 신데렐라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
그런데 오이디푸스에게 이 신발은 비극으로 가는 입구가 됩니다. 존재란 본디 발의 개수를 바꾸며 살아간다는 통찰에 이른 오이디푸스가 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까요? 그는 왕자였다가 숲속의 산책자였다가, 다시 왕이 되었다가 오르락 내리락 운명의 부침을 겪은 끝에 반-영웅이 됩니다. 만물의 본질을 깨달은 덕에 비천한 삶과 고귀한 삶을 번갈아 살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오이디푸스가 어떤 존재인지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핑크스도 심상치 않은 존재입니다. 사자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이처럼 이야기 속에서 신발은 존재의 위상을 바꾸는 장치로서 큰 역할을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발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다면 인류에게 존재가 자리(위상)를 바꾸는 문제는 중요한 화두였던 모양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동화의 뿌리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가 절대로 놓칠 수 없었던 공통의 화두가 있었다는 확신적인 확신도 들었습니다. ^^ 그래서 재투성이나 신발을 소재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무의식을 탐구해보기로 하고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 나섰습니다. 바로 길가메쉬 서사시입니다.
비켜라 길가메쉬, 이제부터는 무문자 사회란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보다 1200년이나 앞선다고 하는, 기원전 2000년 무렵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서사시입니다. 이 길가메쉬 서사시는 저의 동화인류학에 큰 변곡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선 신발이라는 장치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점은 동화 속 씩씩이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 “광활한 땅 위에 있는 모든 지혜의 정수를 본 자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경험했으므로 모든 것에 능통했던 자가 있었다. [중략] 그 비밀스런 청동 잠금 장치를 열어보라. 그리고 청금석 토판을 꺼내서 크게 읽어보라. 길가메쉬가 가혹한 운명을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읽어보라. 모든 왕들을 압도할 정도로 거대한 풍모를 지닌 그는 우루크의 영웅이며 사납게 머리 불로 받아버리는 황소로 앞쪽에서는 선봉장이며 뒤쪽에서는 동료들을 도와주며 행군한 자다. 강력한 방패막이로 병사들의 보호자다. 홍수가 몰고 오는 격렬한 파도여서 바위로 된 벽조차도 파괴한 존재다. 루갈반다의 자손인 길가메쉬는 최고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존경받는 야생 암소의 여신 닌순의 아들로 참으로 경이롭다. 그는 산길을 연 자며 산비탈에 우물을 파낸 자다. 바다를 건너 넓디넓은 대양을 횡단하여 태양이 뜨는 곳으로 여행한 자다. 영생을 찾기 위해 세상 끄트머리를 탐험한 자다. 오로지 그의 힘 하나만으로, ‘멀리 있는 자’ 우트나피쉬팀을 만난 자다. 홍수가 휩쓸어버린 신성한 곳들을 되돌려놓은 자다. 어느 누구를 그를 당당한 왕권과 비교할 것인가? 어느 누가 길가메쉬처럼 ‘짐이야말로 진정한 왕이다!’라고 말할 것인가?”[김산해,『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휴머니스트), 65-68쪽]
대단하지요? 아무튼 길가메쉬는 금수저다!입니다. 길가메쉬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이룹니다. 그는 기승전결 자기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힘씁니다. 끝내 죽음을 무릅쓰고 저승을 다녀오지요. 온 세상 사람이란 사람, 나무란 나무, 정령이라는 정령은 다 괴롭힌 끝에 지상 최고의 명예를 얻는 겁니다.
당황스럽게도 저는 길가메쉬에게서 열심주의자인 저를 보았습니다. 목표를 설정하고, 얻기 위해 분투하고, 인정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목적론자의 모습 말입니다. 근대문학 안에는 이런 주인공들이 많지요. 자본의 시대 첫 소설이라고 칭송되는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5.20.~1850.8.18.)의 라스티냐크가 대표적입니다(『고리오 영감』(1835)). 그는 파리를 발 아래 두겠다면서, 세상을 자기 욕망을 실현시킬 도구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혼자 남은 라스티냐크는 묘지 꼭대기를 향해 몇 걸음 옮겼다. 그리고 그는 센 강의 두 기슭을 따라서 꾸불꾸불 누워 있는, 등불들이 빛나기 시작하는 파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방돔 광장의 기둥과 불치병자 병원의 둥근 지붕 사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들어가고 싶었던 아름다운 사교계가 있었다. 그는 벌들이 윙윙거리는 벌집에서 꿀을 미리 빨아먹은 것 같은 시선을 던지면서 우렁차게 말했다.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발자크, 박영근 옮김,『고리오 영감』(민음사), 396쪽]
세상을 무릎 꿇게 하고 싶은 라스티냐크의 탐욕스런 시선이 느껴집니다. 최초의 한국 근대 소설이라고 하는 이광수 『무정(無情)』(1917)의 이형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식 군은 입신출세하기 위해 과거 은인과의 약속쯤은 껌인 듯 씹어버리는 정 없는 사나이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1812년부터 1822년까지 그림 형제가 수집한 여러 이야기 다음에 나와야 하는 주인공이 기원전 수메르에 있었다니요?
비밀은 ‘문자’에 있었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칭송받습니다. 그 까닭은 기원전 2000년 무렵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석판에 쓰인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림 형제가 수집한 이야기들은 애초에 기록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민간에서 줄기차게 전승되던 것이었습니다. 고대 수메르의 문자는 쐐기문자로 알려져 있고, 근대 국민국가의 언어는 대부분 표음문자로 정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쐐기문자이든 표음문자이든 문자의 어떤 속성이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목적 지향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인류가 왜 문자를 만들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인류에게는 문자 이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무문자사회에서 문자사회로의 진보로 설명하는 연구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와다 준조 같은 인류학자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원시 부족들에게서 발견되는 반-문자 의식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문자란 인류의 진화에 반드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가와다 준조,『무문자 사회의 역사』). 왜냐하면 문자란 읽어야 할 것과 아닌 것, 읽을 수 있는 자와 아닌 자를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의식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문자는 위계에 따른 차별을 작동시키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인류 의식의 기원을 탐구한 줄리언 제인스 같은 인류학자도 마찬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지요. 줄리언 제인스는 고대 인류는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까지 주장합니다(줄리언 제인스,『의식의 기원』). 왜냐하면 만물의 이치를 통찰적 직관지(直觀知)로 파악하기에 힘썼던 사람들이라면 쓰인 날짜와 쓴 사람이 확정되는 글쓰기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주란 부단히 생멸하는 장입니다. 문자란 그 활발발한 현장을 과감하게 싹뚝 끊어내어 화석화시키고 말지요. 가와다 준조나 줄리언 제인스의 설명을 따라가자면, 인류는 문자를 통해 의식의 무문자성을 끊임없이 억압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길가메쉬의 영웅담은 그림 동화에 비교하면 정말로 근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가메쉬와 달리 신데렐라나 오이디푸스는 자기 삶에 어떤 목적도 부여하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는 모험만을 거듭하지요. 아,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쓴’ 이야기가 아니냐구요? 그렇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문자화했는가입니다. 길가메쉬는 왕의 역사를 필요로 한 고대 제국의 서사시였고요. 소포클레스(Σοφοκλῆς Sophoklē̃s; BC497~ BC406년)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운명애를 노래한 비극 작가였습니다. 문자를 사용하더라 해도 자의식에 빠지지 않으면서 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문자의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칭성을 사유하는 신화적 사고
동화의 넓고 깊게 뻗은 뿌리 찾기란 결국 무문자 사회의 생태학과 심리학에 대한 탐구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 사고의 근원적 형태에 대한 공부로서, 자의식에 빠지지 않는 글쓰기를 고민하게 합니다. 제가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11.28.~2009.10.31.)의 『신화학』을 만난 것은 바로 그 문턱에서였습니다. 무문자 사회를 탐구한 책을 찾다가 이루어진 만남이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로 1930년대 후반과 40년대 초에 남아메리카를 현장 연구했습니다. 이때의 연구를 바탕으로 1949년 박사학위 논문 『친족의 기본구조』를 출판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생 부족의 친족 관계를 상징기호적 의사소통 체계로 다루었습니다. 즉 ‘구조’로 보았습니다. ‘구조’라고 해서 ‘부족 사회에는 부동의 관계 형식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었고요. 인간과 그의 이웃, 하나의 부족과 다른 부족, 그 부족과 우주 자연 사이에 기본적으로 ‘교환형식’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야생의 각 문화가 취하는 교환의 기본 형식을 ① ‘여성의 교환’에 의한 친족조직, ② ‘부(富)의 교환’인 경제 관계, ③ 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의사소통적 교환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세 가지의 교환이 상보성(互酬性)에 따라 작동해서 한 인간의 생활태도를 결정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야생의 삶은 구조적이다!’라는 메시지는 발표 당시 큰 충격을 주었을 겁니다. 그때까지 유럽 인류학은 남아메리카의 여러 부족들을 문자도 못 쓰고, 그러니 역사도 없고, 덕분에 문명이나 국가를 이룰 수도 없었던 미개인들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날의 생계에 급급한 비천한 종족들이라는 것이죠. 이에 대해 레비 스트로스는 그들이 문자를 갖지 않았던 것은 문자가 만드는 위계가 역동적인 현실의 삶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며(『슬픈 열대』, 28장 ‘문자의 교훈’), 역사라는 것도 겨우 왕이나 신하가 주인과 노예로서 굴종적으로 의존하는 통치사에 불과하고(『야생의 사고』, 제9장 ‘역사와 변증법’), 문명이나 국가에 대한 이미지도 지나치게 생산량만 기준으로 한 관념이라며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1962년 어떤 인간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그 자리와 우주 전체의 관계를 이해하기에 힘씀을 예증하기 위해 『야생의 사고』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인종적 편견에 찌든 ‘야만’이라고 하는 단어를 넘어서기 위해 ‘야생’이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또한 박사 논문에서 사회 제도적 측면인 친족을 다루었던 것과 달리, 곧바로 ③의 문제 즉 의사소통에 있어서의 구조성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인 이상 인류의 사고 방식은 근본적으로는 같음을 논증하기 위해서였지요. ①과 ②의 경우는 표면적으로 너무 차이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인류 공통의 지성을 논증하더라 해도 가시적으로 설득력을 얻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야생의 사고란 ‘대칭적 사유’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어느 사려 깊은 원주민의 말을 빌어 우주 자연 속에 제 위치를 찾고자 하는 균형감각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적인 곧 야생적인 사고방식임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성스러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자리에 위치해 있음이 그것들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제자리를 일탈했다고라도 생각하게 되면 우주의 전체 질서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것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자리를 지킴으로써 우주의 질서 유지에 공헌하고 있는 셈이다.”(레비 스트로스, 안정남 옮김,『야생의 사고』(한길사), 62쪽)
야생의 사고란 이렇게 작동한다고 합니다. 우선 모든 인간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자기 삶을 한 구간 더 밀고 나가야만 하니까요. 인간뿐이겠습니까? 자연의 모든 존재는 나를 먹이고 살릴 것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야생의 사고는 이러한 만물 평등의 인식을 바탕으로 시작됩니다. 그런 다음, 문득 홀연히 창발하고 만 자기로서 우주 만물의 조화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발밑에서부터 천상의 별 무늬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존재케 하는 만물의 온갖 관계를 파악하지 않으면 무엇이 유익한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사고는 이렇게 전체적 사유를 가동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현실의 이미지를 사고의 도구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도구화된 이미지를 ‘기호’라고 하는데요(『야생의 사고』, 71~72쪽), 기호는 전(全)-우주적 대칭성을 고려해서 선택됩니다. 높음이 있다면 낮음이 있어야 하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여기서 레비 스트로스가 소개하는 무문자사회의 신화 하나를 맛보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인디언 여자가 숲에서 뱀을 만났다. 뱀은 그 여자의 연인이 되었고 그녀는 뱀의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청년의 모습이었으며 매일 숲으로 가서 어머니를 위해 화살을 만들었다. 밤에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갔다. 여자의 오빠인 외삼촌이 비밀을 알게 되어 여동생에게 숨을 것을 지시했다. 뱀 청년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뱀은 할아버지 뱀에게 도움을 청했다. 할아버지 뱀은 화살을 만들어 아버지를 쏘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밤에 빛으로 변신해서 활과 화살을 갖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에 도착하자마자 무기를 산산조각 냈고 그것이 별이 되어 있었다. 모두 잠들어 있었다.
거미 한 마리가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거미는 나이를 먹어도 죽지 않게 되었다. 옛날에는 인간과 동물이 나이를 먹어 오래되면 서로 피부를 교환했다. 그러나 이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M79,「테네테하라족의 신화:단명2」; 레비 스트로스, 임봉길 옮김,『신화학1-날것과 익힌 것』(한길사), 332~333쪽의 인용자 요약)
레비 스트로스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신화myth’라고 합니다. 신화라고 해서 그리스의 신처럼 인격화된 능력자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위의 이야기는 인간의 ‘단명’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이처럼 신화는 개구리나 식물의 발생과정에 대한 설명, 만물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띄게 된 이유에 집중하는 기원담입니다. 딱 알 수 있는 것처럼 ‘개구리’나 ‘거미’는 실제 현실에 존재하는 바로 그 놈이라기보다는, 그 놈을 이미지로 한 어떤 생각의 단위로 작동합니다.
먼저 ‘자기’라는 문제부터 해석해보겠습니다. 이 신화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지요. 젊은 인디언 여자가 아들을 잃게 된 이야기이기도 하고, 뱀-청년의 조실부모 이야기이기도 하고, 인간의 필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거미까지 등장합니다. 왜일까요?
과감하게 뱀-청년을 주인공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좀 황당하지요. 청년은 이종교배의 산물일뿐더러 나중엔 별이 되니까요. 어머니도 뱀 할아버지도 자기 육신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위의 신화는 몸을 바꾸는 변신이란 신화에서는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까지 합니다. 동물과 인간은 피부를 교환하는 존재! 자, 이러니 주체의 욕망이나 성취 같은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겠지요.
도대체 하늘은 왜 나오고, 뱀은 왜 별이 될까요? 기호가 꼭 이런 방식으로 선택된 까닭은 어디에 있나요? 뱀은 지상에 가장 밀착된 존재이고, 별은 천상에 가장 밀착된 존재입니다. 위의 이야기는 뱀이라는 기호로부터 시작되고 천상의 기호인 별을 뱀에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잠깐, 고대 그리스에 다녀오겠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본질을 깨우쳤기에 근친상간과도 같은 금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지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근친상간은 좋은 일이다’ 혹은 ‘나쁜 일이다’가 아닙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에 자식은 자식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학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은 오이디푸스처럼 만물을 통찰할 수 있는 자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물에 대한 치우침 없는 통찰을 위해 그는 고정된 자기 자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이디푸스가 낳아준 아버지에게는 살인자가 되고 길러준 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되었던 것은, 고유한 자기 위치를 없애야 했던 오이디푸스의 운명이었습니다.
위의 신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뱀과 사랑을 나누고, 자식과 사랑을 나누는 식으로 몇 차례나 위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 인디언 여인은 사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자라고도 가정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뱀-아버지와 인간-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도 저도 될 수 없는 뱀-인간이야말로 누구보다 사냥에 뛰어날 테지요. 그런데 지상에 그러한 자가 버젓이 뱀-인간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뱀-인간을 중심으로 과도한 치우침이 일어나겠지요. 그러므로 뱀-인간은 지상을 떠나 천상으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신화는 뒤로 갈수록 여인보다는 뱀-아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쏩니다. 왜일까요? 어머니는 제 위치를 지키기 위해 자식을 버리라는 인간-오빠의 말을 따릅니다. 그런데 아들은 인간계에 속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버려야 한다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는 뱀-아버지도 인간-어머니도 따로 취하지 않고 소중한 자신의 부모로 받아들입니다. 지극한 효심의 뱀-아들 덕분에 인간과 뱀은 서로 적대하지 않으면서 친족이 되어 지상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지요. 지상에서의 사랑과 복을 버리고 하늘로 떠난 그의 명예는 말 그대로 ‘빛납니다’. 이처럼 무문자 사회의 신화란 ‘기호의 대칭적 배치’와 ‘우주 자연의 전체론적 관계’를 통찰하는 인식론이라는 점이 레비 스트로스의 주장입니다.
눈뜨면 없어라, 나라는 존재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통해 남아메리카의 여러 부족들의 관습과 취미, 일상 태도를 면밀히 조사하여 관개체적(關個體的)으로 사고하는 그들의 노력을 자세하게 밝혔습니다. 『신화학』은 그런 민족지적 연구를 바탕으로 아메리카의 무수한 신화들을 분석해서 공통의 모티프, 원초적 메시지를 추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야생의 사고』출간 전후로 본격 전개되었을 이 작업은, 2년 뒤 64년에 1권『날것과 익힌 것』으로 결실을 맺기 시작합니다. 65년에 2권인『꿀에서 재로』가, 68년에 3권『식사예절의 기원』이 나옵니다. 그리고 71년에 마지막 권 『벌거벗은 인간』이 출간됩니다(한국어 번역도 임봉길 선생님께서 2005년에 1권을, 2008년에 2권을, 그리고 작년 2021년에 3권이 번역되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42세 되던 1950년에 『슬픈 열대』라고 하는 자신의 인류학 탐험기를 출간했습니다. 『슬픈 열대』는 파리에서 남아메리카로 떠났다가 귀환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책의 마지막을 뜬금없이 챠웅이라고 하는 미얀마의 한 불교사원에서 끝내지요. 그는 절 마당 한편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한 존재로서 살아감을 깊은 명상을 통해 깨닫습니다. 인류학 탐사는 그를 고유한 한 사람이 아니라, 무수한 관계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로 느끼게 했던 것이죠.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나는 머릿속에 밀집되어 있는 수백만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사회와 그 사회에 하나의 로봇으로서 봉사하는 나의 내체(內體) 간의 투쟁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자기라는 것은 타기해야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와 ‘무’ 사이에서 발붙일 곳이 없다.”(레비 스트로스, 박옥줄 옮김,『슬픈 열대』(한길사), 743쪽)
27살이 되던 1935년에 브라질 상파울로로 떠나는 배 안에서부터 시작된 레비 스트로스의 여정은 71년이 되어서야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는 반생에 걸친 연구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낯설어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기 고집하지 않는 씩씩이들은 동화 속에만 있지 않았어요. 저는 『신화학』을 공부하면서 옛이야기, 민담, 즉 동화의 심연을 헤매면서 어떤 모험을 하게 될지를 예감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를 통해 레비 스트로스가 탐구했던 인류의 태곳적 지혜를 마구마구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다음 회에서, 우리 또 만나요!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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