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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우주는 의미로 가득 차 있어!

by 북드라망 2022. 4. 25.

신화논리 ①즉비의 논리_‘나는 내가 아니다’ 편

우주는 의미로 가득 차 있어!



intro 
레비 스트로스와 함께 떠나는 신화학 여행! 여러분 드디어 우리의 카누 타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류 무의식의 보고(寶庫)인 신화의 거대한 강줄기를 오르내리는 여행길, 여러분 자기 자리를 이탈하지 말아주세요. 배가 뒤집힐지 모르니까요? 이 무슨 뜬구름 같은 소리인가 싶으시죠? ^^ 왜 카누 여행인지, 왜 자리를 움직이면 안되는지는 차차 밝혀질 텐데요. 우리 여행은 내가 카누의 어디에 앉아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전체적인 공간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우리의 연재도 전체 지도를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을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신화 제작의 형식 논리입니다. 모두 네 가지가 있습니다. ①즉비(卽非)의 논리 ②구체성의 논리 ③전체성의 논리 ④변환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나카자와 신이치가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동아시아)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 분석의 특징으로 뽑은 네 가지이기도 합니다. 저도 이를 따를 텐데요, 나카자와 신이치의 틀에 살을 입히고 분석의 색을 입혀 더욱 재미있게 신화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야생의 사고가 어떤 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살피면서 신화의 철학을 정리하는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둘째는 신화가 주로 다루는 테마들입니다. 신화는 자연학이자 윤리학, 심리학입니다. 크게 보아 신화의 메시지는 ⓐ우주자연의 모습에 대한 기원담과 ⓑ‘토템과 터부’라고 할 수 있는 문화제작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고대적 테마를 탐구하면서 인류의 원초적 욕망과 그 문제 해결 방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신화제작 논리 중 첫 번째 즉비의 논리를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즉비(卽非), 그러니까 ‘이것은 이것이 아니다’ 논리입니다. 잉? 무슨 말장난이냐고요? 아닙니다. ^^ 이것은 대단히 급진적인 우주론이랍니다.  

 



되어야 할 것들로 넘쳐나는 우주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 선불교 문답 같지요? 이러한 논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M393으로 번호붙인 ‘카시나와족의 신화: 달의 기원 1’의 일부입니다.  

 

“나는 무엇이 될까? 머리는 자문했다. 채소 아니면 과일이 될까? 사람들이 나를 먹을 것이다. 땅이 될까? 사람들이 나를 밟고 다닐 것이다. 정원이 될까? 사람들이 파종을 하고 식물이 자라면 이를 먹을 것이다. 물이 될까? 사람들은 물을 마실 것이다. 물고기가 될까? 사람들이 이를 잡아먹을 것이다. 어로용 독극물이 될까? 사람들은 독을 풀기 위해 나무를 자를 것이고 그 덕에 잡은 물고기를 먹을 것이다. 사냥감이 될까? 사람들은 사냥감을 죽이고 나를 먹을 것이다. 뱀이 될까?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혐오하게 되고 나는 그들을 물 것이고 그들은 나를 죽일 것이다. 독 곤충이 될까? 나는 사람들을 물게 될 것이고 그들은 역시 나를 죽일 것이다. 나무가 될까? 그들은 나를 찍어 넘길 것이고 내가 마르면 음식을 만들기 위해 날를 불쏘시개로 사용할 것이다. 박쥐가 될까? 나는 어둠 속에서 당신들을 깨물 것이고 당신들은 날를 죽일 것이다. 해가 되면? 추울 때 나는 당신들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비가 되면? 나는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고 강물이 불어나 당신들은 먹을 풍성한 물고기를 낚을 것이고, 그리고 나는 풀을 자라게 하고 이 풀은 사냥감들이 먹을 것이다. 추위(차가움)가 되면? 너무 더울 때 나는 당신을 시원하게 해줄 것이다. 밤이 될까? 당신들은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이 될까? 일에 열중하도록 당신들을 깨우는 것은 바로 내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 될까? 아! 생각났다! 나의 피로 적들의 길이 될 무지개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들의 아내와 딸들은 피를 흘릴 것이다.”―“그런데 왜?” 두려움에 찬 인디언들은 물었다. 머리는 대답했다. “그냥.”[『신화학3』, 173] 

 

대지에서부터 천상으로 주인공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갑니다. 나는 무엇이 될까? 막 십대의 문턱을 넘어선 저희집 쌍둥이의 고민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풋! 웃음이 납니다. 인류는 고대부터 내가 뭐가 될 것인가가 고민이었나 봅니다. ^^ 

 

그런데 이 ‘되기’의 의미는 사뭇 우리의 청소년들과 다르네요?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와 같은 직능 선택은 ‘된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채소가 될 수도 있고 물고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뱀이 될 수도 있고 박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종(種)을 가리지 않지요. 이뿐 아닙니다. 독극물이 될 수도 있고 해가 될 수도 있고요, 비가 될 수도 있고 추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밤이나 아침이 될 수도 있지요. 스케일이 엄청납니다. 감히 인간의 손으로 붙들 수 없는 바람이나 시간이 될 수도 있다니 말입니다. 주인공이 보기에 우주 자연은 자신이 될 수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기에 어떤 이유도 필요 없다는 점입니다. 그냥!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도. 여기까지 생각이 드니 갑자기 울컥합니다. 되어야 할 것이 따로 없다면 선행학습도 필요 없고, 장래 희망을 찾아서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될 텐데요.   

 

신화는 ‘나’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장면 하나하나를 채우는 것은 수많은 존재들이며, 주인공처럼 보인다 해도 그는 모습을 자꾸 바꿉니다. 변신의 달인들만 나오는데요, 변신을 하지 않는다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몸을 쪼개고 있거나, 구르는 머리로 여기저기 붙으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신체는 부숴지고 합체하며 욕망은 이 모습 저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기에,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자도 대답하는 자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나를 향해 열려 갑니다. 위의 주인공도 ‘자기’라는 것을 따로 갖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는 적의 아내와 딸들에게 피를 흘리게 하겠다고, 무시무시한 저주를 퍼붓습니다. 여기서 ‘피’가 의미하는 바는 월경혈로서 탄생의 주기를 인간에게 부여하겠다는 뜻입니다. 달이 차고 기울 듯이 만물은 생멸을 거듭하니 모든 ‘나’는 영원하지 않으리! 그렇다면 적에게 왜 이런 귀한 이치를 깨닫게 할까요? 적도 나도 자연의 이치를 떠나서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되기의 핵심에는 나를 우주적 차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이 들어 있습니다.    

    
헤테로피아heterotopia를 향해
이토록 충만한 ‘되기’의 장이라니요. 편협했던 제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옵니다. 그런데 다시 주의해 보니 이곳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시련들로 꽉 차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참조 신화로 삼고 있는 보로로족의 신화 M1, ‘아라앵무새와 둥지’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의 시퀀스를 임의적으로 나눠 보았습니다.

 

㉮ 어머니를 강간하고 아버지에게 혼이 나게 된 청년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여 없애기 위해 의례용 딸랑이를 구해오라는 목숨이 달린 미션을 주었는데, 청년은 할머니의 조언으로 파리새, 산비둘기, 커다란 메뚜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매번 딸랑이를 구해 돌아왔다. 
  ㉯ 아들 죽이기에 실패한 아버지는 아라앵무새를 잡으러 가자며 아들을 높은 나뭇가지 위로 올려보내고 사다리를 치워 없앤 후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청년은 다시 높은 곳에서 추락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마술 막대기를 할머니에게 얻어 죽는 것만은 면했다. 그러나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채로 내려올 수가 없어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도마뱀을 가득 잡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그러나 썩은 냄새를 풍기게 되어 독수리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결국 항문까지 뜯어먹힌 뒤 포식 한 독수리들의 도움으로 나무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 청년은 소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인공 항문을 만들어 붙였다. 
  ㉱ 마을로 돌아와서 할머니에게 자신의 생환을 알렸는데,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네 가지 다른 종류의 새와 나비로 변신했다.
  ㉲ 마을에 폭풍우가 쳤다. 오직 할머니 집에만 불씨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 왔고 청년은 부모를 보고는 복수를 결심했다. 자기 동생과 공모하여 아버지를 사냥터로 내몰고 인공 사슴뿔을 만든 뒤 아버지를 들이받아 물고기 밥이 되게 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친어머니까지 죽였다.(『신화학1』, 145~148쪽 참고) 

 

여러 가지가 당황스러우시죠? ‘도대체 얼마나 좋은 일이 일어나려고~’ 했더니 피 칠갑 가족 막장극입니다. 근친상간과 친족살해 테마의 무시무시함은 다른 시간에 더 풀기로 하고요, 놀란 가슴 진정하고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야기의 논리만 보면 ㉮, ㉯, ㉰, ㉱, ㉲, ㉳ 사이에 직접 인과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딸랑이를 구하면 왜 독수리밥이 되나요? 항문까지 뜯어먹었던 독수리는 왜 뜬금없는 친절을 베풀고요? 인공항문이 있으면 왜 집에 도착할 수 있고, 손자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필 왜 네 마리 새와 나비로 변신해야만 할가요? 이 장면들의 내용 전개만으로는 전체 주제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장면 속으로 들어가면 더 곤란해집니다. 사건을 전개시키는 행위자가 청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일은 그가 어머니를 범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시퀀스의 주체는 아버지이고 ㉯의 경우는 독수리입니다. ㉲는 심각하지요. 폭풍우가 치지 않으면 친부 살해라는 생각이 들 리 없으니, 여기서는 비바람이야말로 주체입니다. ‘누가’ 이야기의 주인인지 확정 불가! 

 

이렇게 관계의 범위가 확장되고 자기가 ‘다른 자기’로 몸을 바꾸는 과정에서 청년은 활과 화살을 비롯한 여러 도구의 장인이 되어 갑니다. 신화는 ‘도구’를 관계성의 확장을 이끄는 것으로 정의하나 봅니다. ㉰의 경우처럼 인공항문을 만들어 붙일 수 있을 정도이니, 인공장기를 이식하거나 빅데이터 같은 AI에 의존해서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현대 인간의 진화’가 뭐 그리 대단한가 싶기도 합니다.  

 

자, M1 신화의 최종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 개별 시퀀스로 다시 돌아가보겠습니다.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시퀀스와 시퀀스를 잇는 논리는 무엇일까요? 이미 성년의 문턱에 접어든 청년이 엄마만 밝히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부터 그의 행동 반경이 넓어지지요. 할머니의 도움을 받는 것은 먼 가족과도 친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이후로 그는 많은 새, 도마뱀과 독수리까지 자기 인연을 확장합니다. 저는 포식이든 피식이든 관계의 얽힘이 다층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대목을 ‘인연을 맺는다’라고 해석하겠습니다. ㉱의 경우부터는 아예 그 자신이 여러 새나 나비로 몸을 바꿀 수 있게 되지요. 이제 새나 나비는 더 이상 남이 아니게 됩니다. 

 

M1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네 삶의 반경을 넓히라, 네가 관계 맺을 만한 인연을 만들고 또 만들라’가 아닐까요? 좋은 인연, 나쁜 인연 따지기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화는 오직 인연을 확장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쯤 되면 부모님이 왜 죽을 수밖에 없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란 나를 ‘자식’으로만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성년이 다 된 아들 앞에서 아내를 빼앗긴 것에만 분노했었지요. 신화는 네 마리의 새와 나비로도 변신할 수 있는 아들이 결혼에 집착하는 아버지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는 점을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음미해야겠습니다. 다른 자기가 되지 못하면 물고기 밥이 된다는 것을, ‘다른 자기 되기’란 항문이 찢어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호모(homo)란 생물학적으로 순수하고 질이 같은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화는 지나치게 호모포비아적이지요. 대신 신화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향해 열려 갑니다. 이질적인 자기 되기의 장을 향해서!  


되기의 장, 시련의 장

신화는 ‘자기’를 고수하려는 태도를 대단히 우려합니다. 이러한 ‘고집스런 자기’ 혐오(호모포비아)를 이해하기 위해 야생의 사고에 힘썼던 원시의 부족 사회를 잠깐 방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와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 원시 부족을 연구했던 에드아르도 콘은 『숲은 생각한다』라는 책에서 야생의 ‘자기’ 개념을 적극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콘은 ‘타자란 없다’고까지 주장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콘은 남미 아빌라의 루나 부족을 예로 들고 있는데요. 루나 부족의 금언에는 ‘재규어를 만나면 눈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자기’란 개체적이지 않고 창발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에게 필수적인 것이 ‘혼soul’입니다. 혼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듯 내가 소유한 정신성 같은 것이 아니고요. 타인의 퍼스펙티브(관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숲속에서 재규어를 만났을 때 먹히지 않는 방법은 재규어 앞에 재규어로 나타나기입니다. 즉 인간으로서 재규어 앞에 서는 대신, 마치 재규어인 듯한 느낌을 확실하게 뿜어대는 것이죠. 몇 해 전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게를 잡고 놀았던 적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해물 칼국수’를 먹게 되었지요. ‘귀여워~ 귀여워~’ 예뻐했던 친구들이 빨갛게 국수에 말려 있는 모습을 본 아이들의 공포와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먹을 수 있으려면 그것은 나의 가족, 나의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관점 바깥에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토록 육식을 즐기게 된 것도 동물의 살점이 슈퍼에서 포장된 채 바코드 찍힌 상품으로 나타나서이겠지요. 그러니 루나족의 금언은 맞는 말입니다. 

 

숲속에서 살아가려면 다양한 포식자를 만났을 때 즉각 그들의 관점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평소에 재규어 같은 포식자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그 습성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지요. 숲에서 내가 재규어를 잡아야 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에는 재규어 앞에 상위의 포식자로서 다시 나타나야 합니다. 재규어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로서 그 느낌을 방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혼을 가진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숲의 모든 생태계를 철저히 관찰, 이해한 후에 포식자와 피식자의 퍼스펙티브를 자유롭게 옮겨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혼이란 생래적 개념이 아니라 생득적 개념이며, 소유적이 아니라 분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퍼스펙티브를 잘 옮겨 갔는지 못갔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타자라는 점에서, 관계적 개념이기도 합니다. 

 

야생의 숲에서 혼을 가진 ‘자기’로 살기 위해서는 부단히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 대한 연구와 연습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능력화된 이 혼을 부지런히 관리해야 합니다. 혼이란 양질전환(量質轉換)이 가능한데요, 아내를 임신시킨 남편의 혼은 그 능력이 다해 혼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남편은 숲에서 큰 봉변을 당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이 ‘혼맹(soul blindness)’ 개념입니다. 혼맹이란 타자의 관점을 취할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 눈앞에 재규어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그 재규어의 관점으로 신속 정확하게 이행할 수 없는 상태 말입니다. 능동적으로 퍼스펙티브를 옮겨다닐 수 없다면 먹잇감밖에 되지 않습니다. 콘의 정리에 따르면, 아마존에서 ‘자기’란 타자의 퍼스펙티브에 들어갔다 나오는 식으로 포식과 피식의 그물망 안에서 생명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혼 개념을 따라가다 보면 나 아닌 것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타자란 내가 될 수도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신화가 사고한다
이런 우주론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요? 여기서 신화를 연구하는 데에 있어 어떤 딜레마가 나타납니다. 누가 이러한 신화를 만들었는가를 묻고 답하기 위해서는 그 ‘누구’를 찾아내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화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를 탐구하기 전에 ‘누구’부터 발굴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로로족 신화를 연구하려면 보로로 사람들이 어떤 의례를 하고 살며, 어떤 가옥 구조를 갖고 있고, 어떤 도구를 발달시켰는지 역사 문화적으로 자료 조사부터 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남김없이 조사한다고 해서 그 ‘누구’를 찾을 수 있을까요? 수많은 보로로족 사람들, 그들의 이상들, 그것들을 어떻게 선별하거나 통합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하다면 왕이 나설 때뿐입니다. 신화는 헤테로토피아를 지향하니 특정한 자기의 의도나 목적 같은 것을 거부함이 마땅합니다. 그런 신화가 ‘누구’의 산물일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의 기원을 묻지 않습니다. ‘누가’를 도입하는 순간 그 ‘누구’를 이념화시켜야 하고 그의 의도와 목적을 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를 만든 것은 신화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신화가 사고한다’는 표현도 썼습니다. 주체 없이 사고가 사고한다는 뜻입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언어란 우리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인데, 내가 아니라 언어가 사고한다니요?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학의 임무를 아예 메시지의 차원 이전에 대한 분석이라고 보았습니다. 관념의 언어적 배치가 출현해야 마땅한 그 관념을 정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라는 철학자가 『인간의 조건』(1958)을 썼습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의 세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따져보면 노동하고 작업하며 행위하는 그 ‘인간’은 고대 그리스의 자유인입니다. 아렌트는 폴리스라는 정치 공간에서 탁월한 덕을 실천하는 인간을 기준으로 인간적 삶의 조건을 설명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거나 남성이 아니거나 정상인이 아닌 여러 존재들 혹은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 등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범주에서 빠지게 됩니다. 착한 인간 나쁜 인간을 논하기 전에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가르는 그 선분 자체가 이미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관념들의 작동 방식 안에 갇혀서 사고합니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주어, 술어, 목적어 중심의 언어적 관습 때문에 우주자연과 구별되는 독아적 나를 가정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내가 되기 위해서는 내 언어적 관습을 바꾸는 일이 먼저가 되겠습니다. 이 점에서 레비 스트로스는 맑스를 비판했습니다. 맑스는 너무나 쉽게 ‘실천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실천의 주체도 실천의 대상도 그것을 포착해 내는 관념의 틀이 선재하지 않고는 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래 인용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말하는 ‘매개항’이란 언어적 관습을 의미합니다. 

 

# “마르크스주의는―마르크스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관습적 행동이 직접적 실천에서 나온다고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렸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부구조의 의의를 문제 삼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실천과 관습적 행동과의 사이에는 언제든지 매개항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 매개항은 개념의 도식인데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본질과 형태가 그 도식의 조작에 따라 구조, 즉 경험적이면서 해명 가능한 존재로 구현된다. 나는 마르크스가 거의 손대지 아니한 이 상부구조의 이론을 세우는 데 힘쓰고 싶다. 본래의 의미에서 하부구조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것은 인구통계학, 공학, 역사지리학, 민족지의 도움을 받아서 역사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하부구조 그 자체는 인류학자의 주된 연구대상이 아니다. 인류학은 우선 무엇보다 심리학이라 할 수 있다.”(『야생의 사고』, 206쪽)


레비 스트로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없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거미는 거미의 감각체계가 있고, 새에게는 새의 감각체계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 모두는 그와 같은 퍼스펙티브 안에서 각자의 세계를 경험합니다. 퍼스펙티브란 조건이자 한계가 되겠지요. 인간에게 언어란 그러한 퍼스펙티브를 제공해주는 또 하나의 인식 틀입니다. 


주술의 언어
신화가 다른 자기 되기에 이토록 목마른 까닭은 이 한계를 넘어가는 것 이외에는 더 잘 살 방법이 없어서입니다. 신화는 혼자 간직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주로 의례에서 노래되었지요. 신화는 무문자 사회에서 수다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보로로족의 경우는 통과 의례가 거의 일년 동안 이어지고 대부분 장례식의 시작 부분에 끝나도록 맞추게 된다고 합니다. 부족에서 누가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입사 의례는 노인들 전사들의 건강 상태라든가 기후, 숲 생태계의 변화 등을 고려하면서 세심하게 조율되었을 겁니다. M1의 신화는 이 입사의례 때 부족 남성들에 의해 제의적으로 구현되었어요. M1에서는 부모가 청년에 의해 죽는다고 나오니까, 실제 의례에서도 부족 어른의 죽음은 청년들의 성숙에 따른 결과처럼 해석되었을 겁니다. 마을 청년들은 죽은 자를 대신하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신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이끌었습니다. 주어진 삶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삶을 불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신화는 주술적입니다.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이제부터 우리 각자가 우주에 들어가려고 선언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언어가 인간의 것이 아니기에 가능했습니다. 즉 신화를 말했던 그 언어는 자의적으로 분절해서 약속하고 쓰는 인간적 상징 시스템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보로로족 신화 M292a입니다. 이 신화는 성좌 이름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인디언이 어린 아들을 동반하고 숲으로 사냥을 나갔다. 그가 하천에서 위험한 갈고리오리를 보자 서둘러 죽였다. 배가 고픈 어린 아이는 그것을 구워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 고기잡이를 더 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마지못해 이를 허락했다. 그는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약간의 숯불이 생기자 곧 가오리를 나뭇잎으로 싸서 불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불 곁에 어린 아들을 남겨 놓고 강으로 갔다.
  얼마 후 물고기가 익었다고 생각한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불렀다. 멀리서 아버지는 좀더 참으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그를 다시 불렀다. 짜증이 난 아버지가 돌아와 물고기를 불에서 끌어내 살펴본 다음 아직 익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생선을 소년의 얼굴에 집어던지고 가버렸다.
  뜨거운 생선과 재에 데어 볼 수 없게 된 (장님이 된) 소년은 울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의 울음소리와 떠들썩한 소리가 숲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아버지에게 들려왔다. 아버지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 어린아이는 더욱 심하게 울면서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보카디나무(자보타 나무)의 싹을 움켜쥐고 자신을 데리고 빨리 자라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나무는 곧 자라났고, 반면에 나무 밑에서는 엄청난 야단법석 소리가 들렸다. 그곳에는 신령 코가에(Kogaae)가 있었는데, 이들은 가지 위에 어린아이가 있는 나무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난처(나무 위)에서 어린 소년은 밤중에 별이나 성좌가 떠오를 때마다 신령들이 휘파람 언어로 별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어린아이는 그때까지 모르고 있던 모든 별의 이름을 조심스레 간직(기억)했다. 신령들이 한눈을 파는 틈을 타 소년은 나무가 다시 줄어들도록 빌었다. 그리고 땅으로 뛰어내리기가 무섭게 도망쳤다. 사람들이 성좌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로 인해서이다.”(『신화학2』, 433~434쪽)  


신화는 언어를 둘러싼 세 개의 풍경을 제시합니다. 첫째 많은 물고기를 잡고 있는 아버지를 설득하려는 소년의 말하기. 둘째는 소년의 울음소리와 섞인 떠들썩한 숲속 메아리. 셋째는 신령의 별 이름 부르기. 첫 번째는 인간과 인간의 말하기이고, 이것은 실패합니다. 낚시를 방해하는 아들이 미워 아버지는 뜨거운 생선을 아들에게 그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말 혹은 어린 소년의 말은 불쾌만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말하기는 인간과 숲의 소리가 뒤섞인 것인데, 이 메아리는 아버지를 겁주고 할아버지에게 청원하기를 성공시킵니다. 세 번째 말하는 이는 신령이고 그의 휘파람 언어는 우주와 공명하는데, 이 소리를 간직한 소년은 결국 자연을 움직일 수 있게(나무의 키를 줄이게) 됩니다. 각 언어의 능력을 비교하자면 세 번째가 최고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하는 말이 가장 수준이 낮고요. 

 

우리는 신화가 언어를 우주자연의 리듬을 이끌기도 하고 밀기도 하는 무엇으로 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밤에 의례를 벌일 때, 고귀한 샤먼이 나서서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신화를 노래했습니다. 과연 그럴 듯합니다. 밤 하늘 높이높이로 저 별 너머너머로 울리기를 기원하며 말해지는 이 신화가 수많은 ‘다른 자기 되기’를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신화는 수많은 자기들이 창발하는 장인 우주를 찬미하며 그 일부로서 자기를 내던지려는 사람들의 목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표상의 세 단계를 말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첫째는 이미지, 둘째는 기호, 셋째는 개념입니다.

 

“신화적 사고의 여러 요소들이 지각(percept)과 개념(concept)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각 내용을 그것이 일어난 구체적 상황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개념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사고가 그 계획(project)을 ‘괄호 속에 넣는’(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미지와 개념 사이에 매개체가 하나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기호이다.”(『야생의 사고』, 71~72쪽)

 

기호가 온갖 동식물과 맺는 관계의 해석틀이라면, 이러한 기호로 만들어지고 향유되는 신화란 그러한 동식물과의 관계를 향해 더 넓고 깊게 열리기를 희망하는 노력이라는 의미에서 주술적입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근대 세계를 탈주술화의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베버는 ‘탈주술화(脫呪術化, Entzauberung)’라는 말로 과학적 합리주의 때문에 세계의 신비가 사라진 현대 사회를 비판했습니다. 만사 무의미해졌다는 것이지요.(『직업으로서의 학문』). 

 

그런데 신화 세계에서 주술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를 다시 생각해보면, ‘의미’라는 단어가 대단히 풍요롭게 다가옵니다. 소년은 신령의 휘파람 소리를 듣게 된 덕분에 아버지로부터 멀리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의 ‘멀리’란 단지 자로 잴 수 있는 공간적 거리감을 뜻하지 않습니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관계가 개시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사고하는 신화’가 추구하는 목적이란 신화 앞에 선재하지 않고 신화와 함께 나타납니다. 신화가 목적으로 하는 바는 그 신화를 향유하는 이들이 우주 자연의 전체 리듬장 안에 소외되지 않으며 지상에서부터 천상에 이르기까지 온 말들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신화는 내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나를 바라보면서 우주가 온갖 의미들로 넘쳐난다는 것을 노래했습니다. 신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를 두고 ‘자기답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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