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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와 함께 하는 신화 탐구

[레비스트로스와함께하는신화탐구] 감각의 제국, 구체의 과학

by 북드라망 2022. 5. 9.

신화 논리 ② 구체의 논리_감각의 제국, 구체의 과학  

감각의 제국, 구체의 과학  



1. 마들렌 과자, 맛있고도 위대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라는 소설은 과자 한입의 이야기로 유명합니다. 오후 늦게 눅눅해져서 귀가한 아들에게 어머니는 평소 잘 권하지 않던 홍차와 마들렌을 내어 놓지요. 화자는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물게 되는데요,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그때부터 엄청난 시간 여행이 시작됩니다. 갑자기 온 과거가 그를 향해 달려들어 뜻밖의 생각들 속으로 그를 마구 몰아가기 때문이지요. 화자는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으며 생이란 펼쳐내야만 하는 온갖 이야기의 밭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프루스트는 왜 맛과 우발적 회상을 지복(至福)과 연결시켰던 것일까요? 쉬이 날라가 버리는 감각적 인상이 어떻게 충만한 삶을 보장해준다는 걸까요?   

 

프루스트는 기억을 두 개로 구분했습니다. 의지적 기억과 무의지적 기억입니다. 프루스트는 의지적 기억 즉 애써 보관해서 반복 재생산하곤 하는 영광이나 치욕은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무시하라고까지 말하지요. 그런 기억들은 내 인생관에 대한 억지스런 고집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프루스트가 비판하는 ‘의지적 기억’의 참극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루쉰의 「죽음을 슬퍼하며」(1925)를 꼽고 싶습니다. 「죽음을 슬퍼하며」에는 남편이 자신에게 무릎 꿇고 사랑을 고백하던 순간에서 못 빠져나오는 여인 쯔쥔이 나옵니다. 쯔쥔은 결혼과 함께 찾아오는 여러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오직 그 장면만을 반복하자고 요구하지요. 쯔쥔은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 앞에서, 변해가는 사랑 앞에서, 거듭 현실을 부정했습니다. 결국 사랑도 잃고 삶도 버리게 되지요. 프루스트는 ‘내 삶은 오직 이런 것들로만 채워져야 해!’라는 쯔쥔 식의 이상주의야말로 변화로 가득찬 생의 경이를 놓치게 만든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프루스트가 무의지적 기억의 촉발장치로 본 것은 맛이었습니다. 물론 소설에는 맛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 인상들이 차고 넘치게 나옵니다. 완전 감각의 제국! ^^ 프루스트는 왜 감각에 주목했을까요? 감각은 ⓐ신체적입니다. 신체는 매순간 빈틈 없이 다른 물체와 접촉하지요. 장미가 피기 전에는 그 향기를 맡을 수 없고 시내가 흐르기 전에는 그 졸졸거림을 들을 수 없고. 이처럼 신체는 외부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체는 의식 안에서 작동하는 이성적 판단을 초과하는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열려갑니다. 

 

또한 감각은 ⓑ찰나적입니다. 어떤 것과도 영원히 같은 방식으로 접촉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숨 쉬지 않는다면 아예 살 수가 없는데, 이 숨의 대상인 공기는 늘 움직이지 않습니까? 하늘을 올려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기가 생긴 이래 지구의 하늘은 단 한 순간도 정지 상태인 적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지난 45억년 동안 쉼 없이 모습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그 밑에 살면서 쯔쥔처럼 영원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억지인 것입니다. 이처럼 매번 달라지는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마시는 한 숨은 너무나 ⓒ구체적이 됩니다. 어제의 그 숨과 오늘의 이 숨은 비교불가능할 정도로 다르고 또 그만큼 특별하게 고유합니다. 프루스트는 감각인상의 신체성, 일회성, 구체성이야말로 내 유한한 삶이 무한한 관계 속에 있음을 알려주는 지표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2. 보로로족의 카뮈 
레비 스트로스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레비 스트로스가 소개하는 신화들은 전부 감각 인상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오늘은 질병의 기원을 다룬 보로로족의 신화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M5. 보로로족의 신화: 질병의 기원
  ① 아직 사람들이 질병이라는 것을 모르고 고통도 알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소년 비리모도가 남성의 집에 드나들기를 강하게 거부하면서 가족들의 오두막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② 화가 난 할머니는 매일 밤 손자가 자고 있는 동안 얼굴에 올라타서 방귀를 뀌며 소년을 중독시켰다. 소년은 이상한 소리도 듣고 고약한 냄새도 맡았지만 원인을 알지 못했다. 점점 병들고 여위게 된 손자는 어느 날, 의심을 품고 자는 척을 하다가 할머니의 술책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래서 날카로운 화살로 할머니의 항문을 향해 화살을 쏘았고 할머니를 통째로 꿰어 창자를 밖으로 튀어나오게 했다.
  ③ 소년은 개미핥기(tatous), 오콰루, 에노쿠리(enokuri), 제레고(gerego), 비리모도의 도움을 받아 몰래 구덩이를 파서 할머니를 잠자는 장소에 묻고, 흙과 돗자리로 그 위를 덮었다.
  ④ 같은 날 인디언들이 저녁거리를 얻기 위해 독극물 어로 작업을 했다. 여자들은 죽은 물고기를 주우러 어로 작업 장소로 갔다. 비리모도의 여동생은 자신의 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찾을 수 없어서 결국 아이를 나뭇가지에 얹어놓고 떠났다. 버려진 아이는 흰개미집으로 변했다.
  ⑤ 개울가에 죽은 물고기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다른 동료들처럼 물고기를 마을로 나르지 않고 모든 물고기를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배가 부풀어오르기 시작했고, 지독한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⑥ 그녀의 몸은 터져서 그로부터 질병이 빠져나와 마을을 전염시키고 죽음이 퍼져나갔다. 이것이 바로 질병의 기원이다.
  ⑦ 그녀의 두 오빠 비리모도와 카보뢰는 창으로 동생을 죽이기로 했는데, 한 사람은 머리를 잘라 동쪽에 있는 호수에 던지고, 다른 사람은 다리를 잘라 서쪽에 있는 호수에 던졌다. 그리고 둘 다 그들의 창을 땅에다 꽂았다.(『신화학1』, 182~183 참고)


우아하게 홍차와 마들렌 과자를 먹던 응접실 대신에 창으로 할머니를 꿰어 버리는 피칠갑 오두막이라니, 깜짝 놀라셨죠? 자, 보겠습니다. 히키코모리처럼 집 밖을 안 나가는 비리모도씨 덕분에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재미있지요? 비리모도씨는 할머니를 살해하기까지 했는데, 벌은 그 누이가 받고요. 조카는 갑자기 흰개미집으로 변합니다. 신화는 아무튼 상상초월! ^^  

 

M5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비리모도는 이야기 전체의 행위 주체가 아닙니다. 핵심 사건으로 보이는 비리모도의 두문분출과 누이의 과식 사이에 직접 인과는 보이지 않습니다. 신화는 장면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직접 설교하지 않습니다. 문득 출현하는 외할머니, 뜬금없이 대량 살상되는 물고기, 창궐하는 전염병 등등, 사건들 중에 무엇이 클라이맥스에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착한 사람 나쁜 사람 식으로 인물을 계열화시킬 수도 없지요. 좋은 일 나쁜 일을 따로 정하기도 어렵습니다. 

 

M5가 지닌 독특함은 사건 자체보다는 감각인상들에 있습니다. 냄새도 소리도 빛도 질감도 과하기 이를 데 없지요. 방귀 가스로 사람을 중독시키다, 화살로 몸을 꿰뚫다, 창자가 쏟아지다, 흙과 돗자리로 부산히 매장을 하다, 불쑥 흰개미집이 솟아오르다, 게걸스레 먹은 배가 부풀어 터지다 등! 신화는 이상한 소리, 고약한 냄새를 거침없이 들이밉니다. 신화를 향유했던 사람들은 조용한 밤에 이 모든 감각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환기하면서 이야기를 즐겼겠지요? 에버랜드에서 바이킹을 타는 것보다 훨씬 더 정신없고 짜릿했을 것 같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M5에 ‘질병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보로로족은 특히 누가 아플 때나, 마을 전체에 병이 돌 때 이 신화로 의례를 집행했겠지요? 우리도 일단 M5의 주제를 ‘질병과 치유’로 잡고 해석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신화가 말하는 질병의 원인인 무엇일까요? 잘 보면 알 수 있듯이 신화는 창자가 몸 밖으로 나와 썩고 문들어지는 장면을 두 번이나 쓰고 있습니다. 주된 감각인상은 더러움,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은 더러움입니다. 하지만 이 더러움이 근대 위생담론에서 말하는 불결함과는 다릅니다. 보로로족 사람들이 손을 잘 안씻었다거나 청소를 잘 안해서 더러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M5에는 더러움이나 청결함에 대한 어떤 기준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더러운 자는 누구일까요? 무엇이 더러운 일인가요? 신화를 꼼꼼하게 보시면 아실 수 있는데요, 할머니나 비리모도의 여동생이 처음부터 더러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은 결과적으로 더러워질 뿐입니다. 신화의 인과를 개시하는 것은 비리모도입니다. 비리모도가 더러움과 직접 관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리모도가 목욕을 안했다거나 하는 말은 없네요. 비리모도의 잘못은 가족 오두막을 나가지 않았다이고, 신화는 이것을 더럽다고 합니다. 더 읽어보겠습니다. 신화는 비리모도가 가 있어야 할 곳을 제시하지요. 그것은 남성의 집입니다. 신화에서 비리모도의 여동생은 이미 아들을 두고 있는데요, 이 경우에는 엄마가 자식을 버려두고 나오자마자 아들이 흰개미집으로 변하니까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비리모도의 실책이 분명해지는군요. 그는 진즉 결혼하여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몫을 하고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는 조카처럼 아이가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어머니와 가까이 하기를 즐긴 것이죠. 이제 우리는 방귀를 뀌어 비리모도를 벌주는 자가 할머니가 되어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할머니야말로 여성의 집에서 모든 어머니를 대표하는 존재이므로 다 큰 아들을 혼내야만 했습니다.  

 

M5는 때에 맞지 않는 것을 ‘더럽다’고 합니다. 보로로족 사회의 가족 질서라든가 남성들끼리의 역할 배분은 남비콰라족의 그것과는 다르겠지요. 따라서 각 부족 마다의 더러움은 다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겁니다. 그렇지만 이 ‘때에 맞지 않음’을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신화를 공유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이 ‘때에 맞지 않음’은 측정가능한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그 자는 바로 ‘거리’입니다. 비리모도를 향한 할머니의 불쾌는 비리모도가 어머니들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직 어린데 부득이하게 어머니로부터 멀어진 조카는 흰개미집이 되었었죠? 흰개미집을 아들로 두게 된 어머니는 갑자기 게걸스러운 식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M5는 어머니와 기대 이상으로 멀어진 상태도 ‘더럽다’고 보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한 사람이 때를 못맞추자 관계된 사람들 전부가 자기 때를 놓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초여름 장미에게 ‘때를 맞추기’란 무엇일까요? 시계 보고 뿅, 꽃을 피운다! 이런 방식은 아니겠지요. 적당히 오르는 대지의 기운, 서서히 알을 까고 나오는 땅 속 벌레들의 요동, 바람 속에 실려 오는 각종 꽃가루들, 마침 내려주는 봄비, 이런 것들과 최고로 적당하게 함께 함이야말로 ‘때를 맞추기’이겠지요. ‘때’란 내가 정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어린 아이로 있어야 할 때를 거쳐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 때에 이르러야 합니다. 자기가 원치 않아도 말이지요. 자신이 그 성숙의 스펙트럼 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보기 싫어했던 비리모도는 더러움의 유발자가 되었습니다.

 

하여 할머니가 손자에게 ‘너는 더러워!’라고 경고했는데요(이 부분도 재미있지요? 보통 방귀를 뀐 사람을 더럽다고들 하는데 신화는 방귀를 맡은 사람을 더럽다고 하니까요. 신화 속 사람들은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항문으로도 제 뜻을 전합니다. ^^), 손자가 할머니를 죽이고 시신도 막 은폐합니다. 산 자의 오두막에 죽은 자를 묻었으니 생과 사의 거리 자체가 뭉개졌습니다. 그때부터 마을 질서는 급속도로 무너집니다.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자 자연의 질서도 무너집니다. 갑자기 강에 죽은 고기가 넘쳐나지요. 잠깐은 좋지요. 뜻하지도 않은 먹거리가 많아지니까요. 하지만 제 깜냥을 초과하는 잉여는 온 관계를 망칠 뿐입니다. 어머니는 탐욕에 빠져 질병의 화신이 됩니다. 그러므로 전염병이란 온갖 존재들 사이의 거리가 다 무너진 상태, 즉 완전히 더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는 죽음 일반이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기원과 욕망에 집착함으로써 파괴되는 관계가 초래하는 죽음이 더럽습니다. 

 

 

그럼 이 더러움은 어떻게 치유하나요? 맞으면 금방 면역력이 생기는 백신은 없어요. 비리모도는 자신의 형제와 함께 창으로 여동생을 죽입니다. 이 창던지기는 할머니를 죽게 한 화살쏘기와는 본질이 다릅니다. 이번에 비리모도는 누이의 머리는 동쪽 호수에 다리는 서쪽 호수에 둡니다. 죽음에 어떤 자리를 정해주는 장례입니다. ‘몸을 나누어 동과 서에 두다’란 무슨 뜻일까요? 병균으로 오염된 몸을 흩뿌려서 대지를 전염시키겠다는 복수심의 발로일까요? 아니겠지요. 질병이란 거리 조절의 실패이기 때문에 상부와 하부로 나눈 몸을 동과 서로 나누는 행위는 거리 조정을 다시 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쪽에서 뜬 해는 반드시 서쪽으로 진다! 비리모도는 거대한 자연의 주기와 리듬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화 해석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엄마품에 집착했던 비리모도는 방귀를 뀌어준 할머니, 흰개미집으로 변한 조카, 질병 자체가 되어버린 누이 덕분에 자신의 치명적 어리석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자가 됨으로써 우주의 전염병을 치유합니다. 카뮈는 『페스트』(1947)를 썼습니다. 카뮈는 ‘나야말로 페스트균이다!’라는 윤리적 감각만이 창궐하는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건강, 청렴, 순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자기 욕망에 대한 철저한 절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를 덮칠 것은 전염병뿐입니다. 어머! 카뮈 씨는 보로로족이었나봐요! ^^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이 유행병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있다면 당신들 편에 서서 그 병과 싸워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그렇습니다, 리유. 아시다시피 나는 인생 만사를 다 알고 있지요),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피고 있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 그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해이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만한 의지와 긴장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유. 페스트 환자가 된다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그러나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더욱 더 피곤한 일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피곤해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누구나가 어느 정도는 페스트 환자니까요.(카뮈, 김화영 옮김, 『페스트』(민음사), 338~339쪽) 

    


3. 표범으로 말하는 우주적 구체성
M5는 비리모도를 야단친 뒤 낙원을 건설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거리를 잘 조절하는 자, 관계 속 자기 위치(때에 맞음)를 아는 자가 건강하다는 메시지를 ‘더러움’과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러움’은 감각인상이고 또한 사유 단위입니다. 신화는 경험적 범주를 사고의 도구로 삼는 것이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학1』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민족지적인 관찰을 통해 정확히 정의할 수 있고 각 특수한 문화의 관점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날것과 익힌 것, 신선한 것과 부패한 것, 젖은 것과 태운 것 등등의 경험적인 범주들이 어떻게 추상적인 개념에 적용될 수 있고, 개념 도구로 사용될 수 있으며, 명제로 연관시킬 수 있는지를 증명하려는 것이 이 책을 쓰는 목적이다.”(『신화학1』, 93)

 

신화 속 감각적 인상 기호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연유적 맥락을 갖는데요, 레비 스트로스는 구체적으로 기호가 선택되는 수준은 그 부족의 우주론에 근거한다고 보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218쪽에서 인용

이 분류의 핵심은 우주 자연을 범주, 원소, 종, 수로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일단 신화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우주를 크게는 여름과 겨울로 나눕니다. 그 안에서 다시 동서남북의 방위로 구획하고, 또 그 아래에서 세부 방위, 그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 등을 나눕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어떤 인간도 우주 자연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차등적, 계열적, 종합적인 분류의 틀을 사용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구체적인 기호의 선별 작업이 이루어지는데요, 포플러는 하얀색이므로 남서 방향에 둘 수 있으며, 남쪽 계열에 속하기에 여름 식물이 된다는 식입니다. 즉 기호 선택은 전체 틀에 바탕을 둡니다. 

 

신화의 아라앵무새, 표범, 개구리 등은 이런 분류표 상에서 선택됩니다. 선택될 때에는 신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속한 생활세계(숲)에서 필요한 부분이 채택됩니다. 물론 고슴도치 계열의 신화(『신화학 3』, 4부 고슴도치의 교육편)처럼 북미에서 고슴도치가 발견되지 않는 지역에서 널리 퍼지게 된 고슴도치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마 그 지역을 통과한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의 씨앗이 그 장소에 여전히 남아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고슴도치는 그 털 때문에 옷을 만들고 장식하는 최고의 문화적 능력을 상징한다고 해요. 그러니 고슴도치를 모르더라 해도 그 특성에 공감한다면 문화적 코드로 적극 활용했을 겁니다. 

 

신화가 감각인상을 통해 의미를 구성해감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활약자들이 동식물들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야기의 동식물들은 위와 같은 부족적 우주론에서 적극 선택됩니다. 인간이 신화에 출현할 때에도 저 분류의 예외로서가 아니라, 다른 동식물들과 마찬가지로 분류표 상의 어떤 위치성 때문에 선택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M5의 경우 인간과 흰개미집 사이에는 어떤 존재론적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아래에서 읽어볼 M7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과 아라앵무새는 우주론적 분류표에 들어가는 똑같이 동등한 변수들입니다.   

 

인간만이 주인공인 이야기에서는 각각의 출현진들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가 주된 분석의 대상이 되지요.  『죄와 벌』(도스토예프스키, 1866)에 나오는 전당포 노파 살인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외곬수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성격을 파악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화 속 주인공들 대부분은 동물이고, 이들이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생김과 행위 양식 때문입니다. 동식물종들이 한꺼번에 나와서 최고로 적절한 관계를 모색하는 신화는 많은 주인공들과 함께 우주적 관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해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야포-고로티레족의 신화를 읽어보겠습니다. 

 

M7. 카야포-고로티레족의 신화: 불의 기원
㉠ 가파르게 깎아지른 벼랑 꼭대기에 둥지를 튼 아라앵무새 한 쌍에 눈독을 들인 한 인디언이 아라앵무새의 새끼를 훔치려고 했다. 처남과 함께 벼랑으로 갔는데, 매형은 처남이 새알을 집어오게 한 뒤 알이 나무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돌로 변하는 것에 화가 나 그를 나뭇가지 위에 두고 와버렸다.
㉡ 보토크는 암벽 꼭대기에서 자기 배설물을 먹으며 버텼는데 어느날 등에 여러 종류의 사냥감과 활, 화살을 어깨에 메고 있는 얼룩표범을 발견했다. 무서워서 차마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 땅 위에 비친 보토크의 그림자를 발견한 표범이 그를 청해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구운 고기를 주었다. 
㉣ 표범의 아내는 보토크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부부는 보토크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 표범이 사냥을 간 동안 입양 아들을 혐오한 양어머니는 부스러기 고기만을 주었고, 화가 난 어머니는 소년의 얼굴을 할퀴었다.
㉥ 표범은 아내를 질책했지만 허사였고 표범은 보토크에게 활과 화살 쓰는 법을 가르쳐주어 그 어머니를 죽게 했다. 겁이 난 보토크는 구운 고기 한 조각과 무기를 들고 달아났다.
㉦ 다시 마을로 돌아온 보토크 덕분에 인디언들은 표범의 집에 가서 불을 털기로 했다.
㉧ 표범의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인디언들은 불을 훔쳐 돌아왔고 그때부터 그들은 마을을 밝히고 구운 고기를 먹으며 열로 집을 덮혔다.
㉨ 활과 화살, 불의 비밀을 훔쳐간 양자의 배은망덕에 표범은 화가 나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증오를 품게 되었고, 지금 표범의 눈에는 화나서 불타는 눈만 남게 되었다. 표범은 송곳니로 사냥을 하고 날고기를 먹게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구운 고기 먹는 것을 포기했다.(『신화학1』, 193쪽)


불의 기원을 다루는 M7에 따르면, 자연 안에는 온갖 문명이 다 있었으나 인간의 세계에는 어느 것 하나 훌륭한 도구가 없었다고 나옵니다. 심지어 인간은 제 능력으로는 그것들을 만들 수 없어 훔쳐 온다고 하네요. 인간은 도둑질쟁이이다! 잠깐, 해석을 멈추고 이 강력한 비난을 음미해보겠습니다. 정말 그렇죠. 우리는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허락받지 않고 소를 식용으로 삼고, 매일같이 쓰레기를 자연에 뱉어내면서 모르는 척 합니다. 그런데 고기를 익히고 집을 덥힐 때마다 이런 신화를 떠올렸던 사람들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내가 도둑이라는 사실, 자연이라는 부모를 모욕하고 그들의 재산을 털어먹은 배덕자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했습니다. 이들이 자연에 대해 가졌던 부채감의 일상화된 무게가 놀랍습니다.   

 

M7의 주인공은 표범입니다. 표범이라는 이 한 마디로 게임은 벌써 끝났죠. 신화는 ‘표범’하면 떠올리게 되는 강렬한 털빛과 활활 타는 눈빛을 통해 자연의 근원적 풍요로움과 불이라는 문화 코드를 단번에 표현해버립니다. 표범의 힘차고 매끄러운 황금색 털이 인간의 등을 쓰다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등이 할퀴어지는 것만 같고요. 눈 앞의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그 눈빛으로는 정말 고기도 구울 수 있을 테니, 표범의 집이야말로 최고급 레스토랑이겠구나 싶습니다! 여기에는 두 마리의 표범이 등장합니다. 인간에게 무엇이든 내주려고 하는 양아버지-표범과 아들의 탐욕과 배은을 예감하는 양어머니-표범이죠. 표범이라는 기호는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화 속 동물 기호의 구체성은 자연의 생명력을 개념화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큰 미적 즐거움을 줍니다. 

 

도대체 불은 어디서 왔을까? 인간은 언제부터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자연이 주었다’일 것이고, 그 자연을 인격적으로 표상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신화적 사고자들에게는 현실의 표범을 기호화함으로써 단숨에 답을 만드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신화가 동식물종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연속하는 자연 안에서 가장 식별하기 쉬운 요소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야생의 사고』, 214쪽). 우주를 차이 나는 기호들로 포착하기에 살아 돌아다니며 숲의 온갖 존재들과 접속을 거듭하는 동식물이야말로 최고로 적당합니다.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차이가 바로 동식물 ‘종’이니까요. 그런데 동식물종의 기호화는 종들 사이에서 공통형질을 찾아내는 방식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소위 린네 식은 아닌 것이지요. 역동적 무한성을 보유하는 기호이기에 신화에 출현하는 동식물들은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추상화시킨 도표를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신화의 동식물종 특화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감각하는 방식으로, 그 종이 처한 관계의 그물을 포착하여 그 종을 지시하는 방식입니다. 관개체성에 의한 정의이며 그것을 표현해내는 방식은 나의 주관적 감각에 의존합니다. 그러니까 M7의 표범은 현대의 자연학 교과서에 나오는 동물 분류표에서 선택된 관념의 표범이 아니라, 카야포-고로티레족이 사냥하기도 하고 먹히기도 하는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그 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7의 경우 아라앵무새와 표범 정도만 나오지만, 앞에서 살펴본 M5 ③을 보면 소년이 ‘개미핥기(tatous)’, ‘오콰루’, ‘에노쿠리(enokuri)’, ‘제레고(gerego)’, ‘보코도리’의 도움을 차례로 받았다고 나옵니다. 표범과 마찬가지로 이들 동물들도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을에 살지 않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인디언들은 철저하게 관찰해서 동물종 하나하나를 기호로 만들었을 겁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동식물을 포착할 수 있는 이들의 지성은, 소위 ‘문명인’의 눈에는 불모지로 보이는 남 칼리포니아 주 지역의 천연자원을 절대로 고갈나지 않게 한 이유였다고도 하지요. 코아휠라 인디언들이 그 경우입니다. 이들은 60종의 식용식물과 28종인 되는 마취제, 흥분제, 약용식물을 잘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해요. 세미놀족 인디언들은 250종에 달하는 식물들을 구별할 수 있었고, 호피족 인디언은 350종의 식물을, 나바호족 인디언은 500종 이상의 식물을 구별한다고 하는데요. 필리핀 남부의 수바눈족은 1천 개가 넘는 식물 이름을 갖고 있고, 하누누족의 경우는 2천개나 된다고 합니다. 

 

야생의 사고를 발휘하는 이들이 그저 분류의 달인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동식물이 다른 동식물과 관계하는 방식 속에서 동식물의 형태학을 집대성하는 인디언들의 능력도 언급했는데요, 테와족의 언어에는 조류와 포유류의 신체의 거의 모든 부분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초목의 경우 잎사귀의 형태를 나타내는 말이 40개나 되고 옥수수의 경우 각 부분을 나타내는 말이 15개나 된다고요.  

 

너무 과한가요? 인디언들은 왜 이렇게 동식물의 다양한 모습과 그 세부 명칭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자연의 모든 종들은 서로 서로의 몸 여러부분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속하며 삽니다. 곰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봄철 개구리의 습성과 야생화의 개화 방식, 벌들의 생활 주기, 꿀이 맺히는 시기까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숲의 세부에 보이는 큰 관심은 숲의 온갖 관계들에 대한 깊은 탐구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포니 인디언의 하코족은 시내 하나를 건널 때에도 매우 다양한 기도를 준비할 수 있었지요. 발을 물 속에 담글 때, 발을 옮길 때, 발이 완전히 물 속에 잠겼을 때, 다 다른 기도가 필요할 테니까요. 바람에 대한 기도도 몸의 젖은 부분이 어떻게 시원해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구체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주를 파악했기에 야쿠트족은 불임증에는 거미와 흰구더기를, 오세테족은 광견병에 검은투구풍뎅이 기름을, 러시아의 수르구트족은 종기와 탈장에 으깬 바퀴벌래와 닭쓸개를 먹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야생의 사고』, 60쪽). 카야포-고로티레족 사람들은 이 전체론적 질서에 대한 깊은 통찰로부터 ‘표범’의 위치값을 파악해냈을 겁니다. 인디언들이 구체적 사고를 중시했던 까닭은 편집증적 지식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만물이 다채롭게 서로 변용되는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고 싶어했습니다. 

 

 


4. 신체 없는 사고는 위험해!  
신화는 감각기호로 충만합니다. 인디언들은 감각기호를 통해 내가 우주의 전체적 관계망을 이루는 한 부분임을 끊임없이 환기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바로 이 점이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주적 관개체망이라고요? 저에게 ‘관계’라는 말로 떠올리게 되는 ‘외부’란 늘 가족이나 친구 몇몇에 그칩니다. 일기장을 가득 채우는 나날의 번민도 주로 자식이나 남편, 연구실 선생님 몇 분과의 일에 초집중되어 있어서 바람이 불고 꽃이 지는 일 따위는 전혀 관심 밖입니다. 자식과의 관계라는 것도 잘 들여다 보면 ‘수학공부를 시켜야 하는데 어쩌지?’, ‘키가 왜 안크는 것일까?’ 등등 남들 다 하는 모호한 주제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관계를 고민한다지만 육아 매뉴얼만 환기하는 셈이지요. 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관념적인 말들과 숫자뿐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적 삶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은 타인임을 강조해서 설명했습니다. 아렌트는, 우리가 타인과 타인이 속한 장소와 무관하게 허공에 붕 뜬 독아적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 것을 갈릴레오(1564~1642)의 망원경 사용에서(제6부 36장, ‘아르키메데스적 점의 발견’)에서 찾습니다. 아렌트에 따르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나 조르다노 부르노(1548~1600) 등 갈릴레오 이전의 철학가들에게 이미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고 해요. 그런데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통해 그런 철학적 개념을 하나의 사실로서 확증해 줌에 따라, 이전의 사변적 철학들은 ‘사실’로서 그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갈릴레오를 그토록 혐오한 것은 그의 지동성 때문이 아니었다지요. 고대적 진리관이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통해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에 대해 교회는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을까요? 망원경으로 우주를 바라보게 된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개개인의 감각을 통해 지각하고 수용했던 진리(고대 그리스적 의미에서의 관조)와 그 진리의 신이, 갈릴레오의 망원경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도 서양에서의 진리란 바로 내가 육신을 가지고 체화해야 하는 무엇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몸을 가진 저마다에게 구현되어야 할 진리의 모습은 다 달랐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신체 수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교회 공동체도 규율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제시했습니다. 이제 그 망원경을 취한 자는 누구나 우주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죠. 각자가 어떤 몸을 가지고 있건 간에 알아야 할 사실이 똑같아졌습니다. 망원경이란 돈만 주면 누구나 살 수 있는 상품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 안에서 영원하고 고정 불변한 것을 찾았던 인간은 마침내 ‘영원하고 고정 불변한 것을 보여주는’ 그 망원경을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레오는 사변적 관념을 감각적으로 증명하고자 했지만, 그 감각을 측정할 수 있는 ‘자의 의미’를 절대적으로 만든 셈이었죠. 이제 안다는 것은 자기 신체를 떠나야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이 구별되었어요. 감각은 앎의 세계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아렌트는 이렇게 도구의 척도성이 인간 삶에 개입된 시점을 인류가 소외적 삶을 살게 된 분기점으로 보았습니다.

 

신화는 감각을 강조함으로써 내가 우주 만물과 무관하지 않음을 더욱 강조합니다. 신화에서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누구와 함께 있는가를 우주적 질서 파악의 준거점으로 삼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도 자연의 한 존재인 인간이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의 신체가 다른 사물들과 깊고 풍요로운 관계를 맺을 때임을 강조했습니다. 

 

글_오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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