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6) 증여 만물을 낳는 힘
1. 얏호! 드디어 열대다!
레비 스트로스는 드디어 열대의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앞으로 그는 상파울로 인근 부족 탐사에서 시작해서 점점 더 열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의 순서로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처음 브라질의 열대우림 속으로 들어가면서 정말 큰 기대를 했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티바지(Tibagy)강 양안(兩岸)을 내려다보게 되는 해발 약 1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처음 미개인들과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엄청 실망하고 말지요. 문명이라고는 한 방울도 묻히지 않은 순수한 야만인을 만날 줄 알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상상 속 그런 야만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400년이 넘는 스페인 식민의 역사에서 비롯된 침탈로 남부 브라질의 많은 부족들은 정부의 원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어요. 게다가 슬쩍 보기에도 이들의 생활은 무척이나 열악해보였습니다. 원주민들의 변변치 못한 살림살이는 그들이 정부 당국에 의해 끌려 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순수한 야만인도 아닌데다가 문명의 사악한 손길에 훼손된 그들을 보며 아주 잠깐 가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즉각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이 모든 불행은 브라질 당국의 무책임하고 게으른 행정이 만든 거야! 그런데 그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보니까 빈한해보이는 그들 삶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정부는 ‘문명생활에 적응’시킨다는 목적으로 온갖 문명의 이기들을 부족민들에게 제공했었다고 합니다. 상점, 약방, 학교, 제재소 등. 그리고 들어보니 어떤 때에는 원주민들에게 정기적으로 도끼나 칼, 못, 그리고 의류와 담요 등을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물건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원주민들은 나라에서 준 침대를 부수어 땔나무로 사용해버리고, 주거용으로 제작된 집을 두고도 땅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우유나 고기 등을 제공하라며 보낸 목동은 아예 할 일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주민들은 그런 음식을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빻을 때도 멀쩡한 기계를 놓아두고 손으로 하고 있었고요. 그들은 소위 문명의 이기를 이로운 기술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두 가지 점에서 당황했습니다. 첫째 그들은 확실히 20세기 초반(1900~25년) 무렵에 열대에 광범위하게 나타난 하나의 사회학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갑작스레 문명의 강요를 당한 ‘예전의 야만인들’이었습니다. 서구 문명은 그들이 별로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뒤 곧바로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여 버렸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순수한 야만인이란 유럽식 문명의 활보 아래에서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앞으로 더 들어가게 될 열대 어디에서도 그런 원시의 인간은 없을 거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의 사고를 정지시킨 두 번째 포인트는 서양 제국주의 앞에서도 흔들림 없는 원주민들의 여유와 융통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이빨에 줄질을 하고 장식도 하며 살았지만 정부가 던져 준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자신들의 습속에 이리저리 끼워맞추고 있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집에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돌공잇대도 있지만 동시에 에나멜 칠이 된 금속 식기류라든가, 대량 생산된 싸구려 숟가락이라든가, 몸통만 남긴 재봉틀이라든가가 제각각의 이유를 갖고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그들은 정부에서 나눠준 총을 마치 주물(呪物)처럼 벽장식으로 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간파합니다. 어떤 습속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없다! 원주민들을 보니 과거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 무엇이었습니다. 미래(소위 서구 문명)는 아무리 강압적이더라 해도 이 현재를 바로 장악하지는 못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 습속과 갑자기 들이닥친 미래 생활 사이에서 삶의 양식을 이리저리 뜯어 맞춰보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브리콜라주였지요. 우발적인 필요 앞에서 주변에 쓸 수 있는 사물들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삶의 기예, 브리콜라주 말입니다. 다음회에서 조금 더 말씀드리게 되겠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결국 원주민들의 의식 안에서 과거와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편집되고 구성되는지를 연구하는 것을 자기 필생의 업적으로 삼게 됩니다.
2. 너도 나도 우주의 한 먼지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의 초입에서 만난 인디언들을 보면서 인간 각자가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놀라운 창의력과 능동성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깨달음 때문이었을까요? 이후로 이어지는 레비 스트로스의 원주민 사회 묘사에는 어떤 거리감이 확실히 느껴집니다. 그는 원주민들의 거친 삶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해서 속상해하거나, 객관적인 연구를 위해서라면서 원시 사회를 관음증적으로 관찰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학자로서 또는 유럽의 백인으로서 자신의 관점이 얼마나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계속 의식하면서 대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들 삶의 전체적 인상을 깊이 있게 묘사하기 위해 애씁니다. 자, 우리도 한번 읽어볼까요? 레비 스트로스의 시선 아래에서 밀짚모자를 쓴 한 여인이 맨살에 담요 한 장을 두르고 당당하게 걸어갑니다. 그녀는 발가벗고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느긋이 감자를 불에 굽고 남편을 기다리겠지요. 무엇을 소유했느냐에 따라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려 했다면, 레비 스트로스는 결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 거주자들은 밤낮으로 계속 타오르는 불 주위에 모여 있는다. 보통 남자들은 누더기 셔츠와 낡은 바지를 입었고 여자들은 면으로 된 옷을 맨살에 그대로 입거나 겨드랑이 밑으로 담요 한 장을 몸에 감았으며, 어린아이들은 발가벗고 다녔다. 모든 사람들은 여행 중의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큰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 모자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산활동이며 돈벌이였다. [중략] 그들은 단 하나의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때고 관계없이 달착지근한 감자를 먹는다. 그들은 감자를 잿더미 밑에서 구워가지고, 기다란 대나무 집게로 그것들을 집어낸다. 그들은 엷은 고사리 더미 위에서 아무렇게나 잠자리를 정하거나 옥수수집으로 된 거적 위에서 잔다. 그리고 사람들은 제각기 그들의 발을 불 가까이에 둔다. 그러나 한밤중이 되면, 몇 개의 타고 남은 잿불이나 나무줄기들이 제대로 이어져 있지 않은 벽으로써는 해발 1천 미터의 영하의 추위를 막기에는 미약하다.(『슬픈 열대』, 321~322쪽)
여기서 잠깐 레비 스트로스의 기술이 당대 문화인류학자의 관찰기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열대로 더 들어갈수록 인디언들의 삶은 더욱 가혹해집니다. 그것을 본 백인 인류학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학술보고라며 학술원에 소개했다지요.
내가 마투그로수에서 보았던 모든 인디언들 가운데, 이 남비콰라 무리들이 가장 비참한 듯하였다. 여덟 명의 남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매독에 걸렸고, 한 사람은 허리가 곪아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한 사람은 발에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또 한 사람은 비늘이 생기는 피부병에 걸려 온몸에 퍼져 있었으며, 귀머거리에 벙어리까지 겹친 사람도 한 명 있었다. 그러나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건강한 듯이 보였다. 그들은 해먹을 사용하지 않고 땅바닥에서 그대로 자기 때문에 항상 온몸이 흙으로 뒤덮여 있다. 추운 밤이면 그들은 불을 흩트리고 따뜻한 재 속에서 잠을 잔다. 옷을 입는 경우는 선교사들이 그들에게 의복을 주면서 입으라고 요구할 때뿐이다. 그들은 목욕하기를 싫어해서 피부와 머리털은 먼지와 재로 칠을 한 것 같고, 그들 몸에는 썩은 고기와 생선 쪼가리까지 들러붙어서 그 냄새가 시큼한 땀냄새와 섞여 옆에 다가가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슬픈 열대』, 533쪽 재인용)
그들의 피부병은 삶이 게으르고 비위생적인 탓이며 그들 몸에는 썩은 고기와 생선 쪼가리가 달라붙어 불쾌한 냄새가 난다? 위의 보고서를 쓴 인류학자는 관찰대상에 대한 감정적 거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기분, 자기 비위라는 기준이 ‘객관’의 근거라는 것을 지금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비위생적이어서 잘못 살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는 유럽 학자들의 이런 오만한 인상기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람들을 자신이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슬픈 열대』에서 남깁니다.
어둠이 깃들인 초원에서 속영지의 모닥불이 불타오르고 있다. 엄습해온 추위를 막아줄 유일한 보호자인 모닥불 주위에서, 바람과 비가 두려워 급작스럽게 옆에다 야자수와 나뭇가지로 만들어 꽂아 놓은 허술한 병풍을 뒤로 하고, 그들의 지상의 모든 부를 이루고 있는 빈약한 물건들로 가득 찬 등채롱을 곁에 둔 채, 그들과 마찬가지로 적대적이고 겁많은 다른 무리들의 방문을 받는 땅인 그 땅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꼭 껴안고 있는 부부들, 이때 그들은 서로를 나날의 어려움과 때때로 남비콰라인들의 영혼을 뒤덮는 몽상적인 서글픔으로부터 구원해주며, 위로해주고 또 지주가 되어줄 유일한 사람으로 믿는다.(『슬픈 열대』, 535쪽)
어떠세요? 너무 다르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이 바라보는 원시의 세계에 내부자도 외부자도 아닌 시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시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의미에서 쓰이곤 하는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자연 안의 한 인간이 자연 안의 또 다른 인간을 바라보며 느끼는 애틋한 연민의 시선입니다. 대지 위에 서로 꼭 껴안고 누워서 자는 부부들은 통속소설에 나오는 낭만적인 연애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하고 뻑쩍지근한 이벤트를 하면서 사랑을 고백하지 않지요. 하지만 이들은 엄습하는 자연의 공포, 죽음이 낳는 생의 근원적 불안을 나눕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그 누구도 대신 겪을 수 없는 각자의 불안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디언이든 백인이든, 우주의 한 존재로 잠깐 이 별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겪지 않을 수 없는 생의 고뇌를 통찰합니다. 이처럼 레비 스트로스와 함께 열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삶에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타인과 우주에 대한 이해 이외에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3. 열대의 세례식
열대의 인간들을 이와 같은 인류의 시선으로 바라본 레비 스트로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열대를 통과했을까요? 인류학자이니만큼 현지의 문화를 조사해야 했을 텐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원주민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지요. 남비콰라족 앞의 저 오만한 인류학자와 레비 스트로스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원주민들과 관계를 맺었을지를요.
레비 스트로스는 17장에서 열대의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에 어떤 세례식이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1차적으로는 원주민들과 교류를 트기 위해서, 2차적으로는 그들 문화를 해석하기 위해서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거래를 시도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그에게 물건을 판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발 원하는 물건을 좀 달라고 하자, 돌아오는 대답이 다 이랬습니다. “그는 그것을 만들 수 없다.” “만약 그것을 그 자신이 만들 수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당신에게 줄 것이다. 그 자신도 오래 전 한 노파로부터 그것을 얻었는데, 그것은 오직 그 여자만이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 만약 그것을 당신에게 주어버린다면, 어떻게 그것을 다시 전하겠는가” 그 노파가 도대체 어디 있냐고 묻자 사람들은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 숲 속 어딘가에 있겠지요.” 한 마디로 레비 스트로스, 당신에게는 도저히 줄 수 없겠다는 말입니다.
물건 자체가 지상에서 유일무이한 까닭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레비 스트로스는 그 부족에서 가장 어리고 작은 서너 살 쯤된 소녀와 겨우 거래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그 손녀는 우리가 사고자 하는 모든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었다.”[324쪽] ^^ 이 소녀는 화폐의 가치를 알지 못했으므로 레비 스트로스는 이 아가씨와 오랫동안 흥정 끝에 원래 주기로 한 500레이스(옛 브라질 화폐단위)에다가 다시 400레이스와 브로치 한 개를 더 주고 원하는 물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 큰 백인 어른이 어린 원주민 소녀와 해가 지도록 흙바닥에 앉아 흥정을 하는 풍경이 그려지시지요? 저는 낯선 문화 속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그들 삶을 흔들지 않고 들어가려는 레비 스트로스의 섬세하고 진득한 노력이 느껴집니다.
그건 그렇고요, 그런데 어째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모든 물건들을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 말했던 것일까요? 레비 스트로스가 이 거래에 관해서 더 설명하는 바가 없어서 저도 상상만 해봅니다만, 제 생각으로는 마을 어른들이 레비 스트로스와 아예 교환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거래 즉 등가교환 관계는 화폐를 매개로 상대를 동등하게 만들어줍니다. 어린 소녀와 등가교환에 성공했다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가 앞으로 그 마을에서 갖게 될 위치를 말해줍니다. 부족 안에서 아직 어떤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소녀와 같은, 마을의 어떤 중요한 일에도 자기 입장을 낼 수 없는, 그러니가 마을 안에서 먹고 살 수는 있지만 그들의 일원으로는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즉 그들에게 레비 스트로스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슬픈 열대』에 이와 같은 설명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만, 분명 레비 스트로스는 파악했을 것입니다. 등가교환을 시도해서는 결코 그 문화의 내부 사정을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요. 그 거래 이후에 레비 스트로스는 바로 전략을 바꿉니다. 이 웃픈 거래 장면 뒤에 독특한 만남 한 장면을 쓰지요. 레비 스트로스는 원주민들이 좋아하는 애벌레 코루(koro)를 한번 관찰해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썩어가는 나무에 우글우글 기생하는 희끄무레한 애벌레인데, 원주민들의 애용간식이지요. 하지만 벌레나 먹는 인디언이라며 하도 백인들이 비웃었던 통에 그 누구도 레비 스트로스 앞에서 코루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코루의 실체를 알 방법이 없자, 레비 스트로스는 꾀를 하나 냅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부락에 혼자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한 인디언에게 다가가서 말을 한 것이죠. 저는 정말 코루가 먹고 싶어요~ @.@!!
그런데 왠일입니까? 아마 레비 스트로스도 거의 기대를 못했을 텐데요. 이 사람이 아픈 몸을 이끌고 레비 스트로스를 어떤 나무줄기 앞으로 데려가는 게 아닙니까. 그가 도끼로 한번 내리치자 스윽, 나무줄기 깊숙한 곳에서 수많은 맥관canal이 나타났고 그 가지마다 크림색의 살찐 벌레가 있었습니다. 그 사나이는 레비 스트로스를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요. 뭘 망설이냐는 듯이요. 오, 마이 갓! @.@ 레비 스트로스는 희끄무레한 기름이 흘러나오는 그 벌레를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씁니다. “그것은 버터의 단단하고도 섬세한 느낌과 야자 열매의 과즙 같은 맛을 지니고 있었다.”[326쪽]
레비 스트로스도 벌레를 혐오하는 유럽의 백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열대와 사귀기 위해 자신이 몸으로 익힌 생각 하나를 내려놓았습니다. 벌레도 먹을 수 있어! 사실 내려놓은 것은 벌레에 대한 터부만이 아니었지요. 그는 벌레를 낮추어보는 유럽 문화의 온갖 상식들 전부를 마을 입구에서 벗어던진 셈이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정말로 침착하게 열대와 관계를 맺기로 했던 것입니다.
4. 네 덕분임을 안다
레비 스트로스는 코루를 먹은 이 사건을 두고 자신에게 일어난 ‘세례’라고까지 했습니다. 세례란 특정한 종교에 입문하는 의식입니다. 자신의 유아적인 상식과 태도를 내려놓고 온몸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지요. 그런데 세례는 입문하고 싶은 자가 제 마음대로 치를 수 있는 그런 의례가 아닙니다. 반드시 교단이나 사제가 예비신도를 인도해서 교리에 의거해 그를 종교 공동체로 데리고 들어와야 합니다. 이 코루 의식도 잘 따지고 보면 저 아픈 원주민 한 사람의 호의 덕분에 가능했지요. 인디언 사나이는 한 이방인이 코루를 먹고 싶다는 청을 대가 없이 들어주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 코루를 먹여주었다고 해서 그에게 돌아올 것은 없지요. 심지어 그는 앓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나이는 ‘좋아, 당신이 그렇게 원한다면!’이라며 마음을 냈지요. 조건 없는 선의였습니다. 도울 수 있으면 돕는다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열대의 입구를 다루는 장에서 왜 이 에피소드를 언급했을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교환(등가) 관계와 증여 관계를 대비함으로써 우리가 타자, 타문화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타인의 선의에 기대지 않으면 나는 나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
타자의 선의를 다른 말로 하면 ‘증여’입니다. 열대에 다녀온 이후 레비 스트로스는 인류의 근원적 사고를 계속 연구하게 되는데요, 그는 인류의 정신 과정 자체를 ‘증여’에 의해 작동하는 메카니즘으로 설명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첫 인류학적 작업은 원시부족의 친족관계 연구입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보기에 ‘가족’은 도처의 인간 사회가 제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근본적 제도입니다. 레비 스트로스의 정리에 따르면 모든 가족집단은 다음의 두 관계 중의 하나를 차용합니다.
아버지-아들/백숙부-조카 경우
- 아버지와 아들은 친밀하지만 조카와 외삼촌은 소원하다
- 조카와 외삼촌은 친밀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소원하다
남편-아내/ 형제-자매의 경우
- 남편과 아내는 친밀하지만 아내와 그 형제는 소원하다
- 아내는 그 형제와 친밀하지만 부부는 소원하다
이 기본적인 관계의 틀에서 발견되는 것은 형제, 자매, 아버지, 아들이라는 관계의 기본 항입니다. 이 네 가지 항은 멀거나 가까운 방식으로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거리조정의 법칙을 근친상간의 법칙이라고 봅니다. 근친상간의 금지란 ‘인간사회에 있어 사내가 계집을 획득하려면 이를 다른 사내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고 후자는 계집을 딸이건 자매건 전자에 양도한다’(『구조인류학』; 우치다 타츠루,『푸코, 바르트, 라캉, 레비스트로스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174쪽 참고와 재인용)는 법칙입니다.
위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인류가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까닭은 인륜에 반해서가 아닙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인륜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레비 스트로스가 열대에서 만난 한 인디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네가 네 누이와 결혼한다면 너는 사냥을 누구와 하겠는가?’ 다른 부족으로부터 아내를 얻는다면 처남을 비롯해 처가의 남자들과 함께 사냥하고 놀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얻지 않겠느냐는 것이죠(레비 스트로스,『가족의 역사』참고). 근친상간 금지 법칙이 의미하는 바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도 우리는 늘 내 울타리 바깥의 존재들과 관계 맺으면서 살아가야 한다’입니다. ‘가족’이란 이처럼 울타리 바깥의 공동체와 내가 새로운 관계의 양식을 만들어가면서, 내가 원래 추구했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영속적 장치인 것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친족 관계를 분석하면서 두 가지 관점에 주목했습니다. 첫 번째 포인트는 가족이라는 장치의 목적이 내 부족, 그 안에서의 내 삶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그 유지가 반드시 다른 부족, 다른 존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지요. 이것이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인류는 왜 이런 형식적 장치를 걸어놓고 그 안에 사람을 밀어 넣었던 것일까요? 여기에서 레비 스트로스가 주목한 것은 이 두 가지 제약의 맞물림입니다. A부족 사나이가 아내를 구하려면 반드시 B부족에서 얻어 와야 합니다. 나중에 더 설명드리겠습니다만, B부족은 A부족에게 바로 여성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 교환 관계는 부족들 사이에 약간씩 어긋난 관계가 전개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B부족은 반드시 C부족 혹은 D부족으로부터 아내를 얻어 와야 합니다.
혼인에 의한 여성 교환이라는 점만 보면 이 연대는 등가교환을 지향하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교환되는 것은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자연 안의 만물이 다 그러하듯이 그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습니다. 심지어 쌍둥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등가적일 수가 없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외모도 성격도 능력도 다른 여성들이며, 그들이 낳는 것은 다시 외모도 성격도 능력도 다를 자식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가치가 따로 정해져있지 않은 선물 개념으로 신부를 보내고 받는다고 해야 합니다. 또 혼인이란 다 때가 있는 법이어서요, 필요한 때에 상대 부족에 결연 가능한 여성이 있으리라는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다 A와 B 사이의 직접 교환도 아니게 되고 보니, 전체적으로 보아 결혼에 의한 부족 간의 연대는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등가교환이 아닙니다.
여기서 레비 스트로스는 부족민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부채감에 주목합니다. 여성 교환이란 마구잡이로 이 부족 저 부족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식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부족도 결혼 한번 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속적으로 여성을 주고받을 부족들 관계의 전체적 틀이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A부족에서는 여성을 주었는데 C부족이나 D부족에서 팔짱끼고 앉아서 나몰라라 하게 된다면 큰일이 나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신용을 보증할 혼인 규약이 어떤 범위의 지역 전체에서 통용되어야 합니다. 국가라고 하는 거대한 제도적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인디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레비 스트로스는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발견하지요.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가계를 존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친족 체계에 있어서 어떤 일정 세대에 여성을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생긴 최초의 불균형은 후대에 있어서의 반대급부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안정된 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구조 인류학』; 우치다 타츠루, 앞의 책, 175쪽 재인용)
여성 교환의 표면적 효과는 나와 상대 각 부족에게 하나의 가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각 부족은 영속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필연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기에 사람들은 여성이 교환될 때에 엄청난 심리적 부담감을 갖게 됩니다. 자기 가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여성을 얻은 측은 상대 부족에게, 더 나아가 혼인 관계로 이어지는 여러 부족들 전체에게 빚을 진 셈입니다. 신부를 받은 뒤 입 싹 딲고 희희낙락 하고 있으면 그 부족은 결코 다음 신부를 얻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 혼인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누군가에게 신부를 줄 수 있을만한 존재라는 것을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혼인 관계가 생산하는 보다 본질적인 것은 부채감임을 깨달았습니다. 부채감이란 무엇일까요? 내 삶이 전적으로 타인의 선물에 의존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수많은 관계들의 연쇄 속에서밖에는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 대한 통찰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점을 깊이 받아들인다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수 있을만한 존재라는 것을 입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레비 스트로스에게 코로를 준 사나이가 그토록 선뜻 선의를 보여준 까닭은 그의 성품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의 ‘친절’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는 ‘신부의 제공’과 같이, 누군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야말로 다른 자로부터 뭔가를 받으며 잘 살아갈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레비 스트로스는 세례식-코루를 통해 이런 깨달음을 깊이 새기며 열대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글_오선민(인문공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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