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오용 :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1. 골랴드낀 씨, 자신의 분신을 낳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은 9등 문관인 골랴드낀 씨가 자신이 만들어낸 분신과의 갈등을 쓴 소설이다. 9등 문관인 뻬뜨로비치 골랴드낀 씨는 넘치지도 빈궁하지도 않게 사는 사람이다. 그는 늘 반복되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 골랴드낀 씨는 시간이 남으면 시장에 가서 쇼핑을 즐기곤 한다. 그는 거짓 흥정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예의와 품위, 교양을 중요시하면서도 정작 교양도 예의도 없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거나 짜증나는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짜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너무 많은 망상을 하는 피해망상증 환자이다. 그의 피해망상증은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면 더 커진다. 피해망상증 환자이기 때문에 불안감이 점점 쌓이면 정신 상태에 문제가 생긴다.
사실 골랴드낀 씨의 피해망상증은 그가 받은 여러 스트레스로 인해 이미 민감해진 상태였다. 하인이 자신을 ‘나리’라고 무르지 않고 ‘골랴드낀 씨’로 불렀다거나, 쓸데없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리다가 상사를 마주쳤는데 인사를 못하고 휙 지나갔던 일 등등.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이 망상증이 극도에 달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골랴드낀 씨가 초대받지도 않은 상급 관리자의 만찬에 허락 없이 몰래 숨어 들어가 구경을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나는 품위 있는 사람이다’를 반복해서 세뇌해 가며 자신은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하고 숨어들어갔다. 그는 만찬을 조금만 구경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결국 만찬 파티에 온 사람들에게 들켜 끌려나오게 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한 음모라고 생각해 비참한 심정으로 만찬에서 쫓겨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 그러다가 결국 피해망상증이 너무나도 심각해져서 가상의 자신, 즉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게 된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자신의 또 다른 가상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분신이 자신보다 더 먼저 집으로 들어가 하인의 시중을 받는 상상을 하게 되고, 불안감에 휩싸인 나머지 그것을 현실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직장에 갔을 때, 그는 자신의 분신이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도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신입사원이! 하지만 골랴드낀 씨와 완벽히 똑같은 신입사원이 들어왔다고 해서 놀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은 사실 골랴드낀 씨의 지나친 망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골랴드낀 씨는 자신의 분신과 친해져 아군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그의 분신은 골랴드낀 씨보다 더 똑똑했기 때문에 한 수 위였고, 결국 골랴드낀 씨는 스스로를 곤란에 빠트린 셈이다. 그의 분신은 똑똑할 뿐만 아니라 대인관계 능력 면에서도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골랴드낀 씨보다 골랴드낀 씨의 분신에게 더 호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골랴드낀 씨의 분신은 골랴드낀 씨의 행세를 하며 골랴드낀 씨가 모르는 대화 내용을 퍼뜨린다. 그런 탓에 골랴드낀 씨는 동료들이 하는 대화 내용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인관계 능력, 대화 능력 등 여러 면에서 자신의 분신에게 패배한 골랴드낀 씨는 자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며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이 꾸고 있는 꿈이거나 상상이기를 바랐지만(그리고 사실 상상이었다) 깨어날 수가 없었다. 그의 지나친 망상 덕분에 그는 한 순간에 폭삭 무너지게 된다. 결국 골랴드낀 씨는 그의 주치의인 끄레스찌얀 이바노비치에게 이끌려 정신병원으로 끌려가게 된다. 『분신』은 골랴드낀씨가 이렇게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엔딩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주로 (진짜) 골랴드낀 씨의 입장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적대감 같은 것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제 3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만 그의 분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랴드낀 씨는 자신이 뒤쳐진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2. 분신의 의미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책의 제목을 『분신』으로 지은 이유는 골랴드낀 씨의 분신이 이 이야기를 좌우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분신’은 무슨 의미일까? 주인공을 타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불행? 하지만 불행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은 골랴드낀 씨가 자초한 일이었다. 애초에 분신을 만든 것이 그였으니까. 그렇다면 불행이랑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불운, 비참이 시작되는 상징? 아니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골랴드낀 씨를 타락하게 했으니 괴로움, 비극, 무기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좋은 상징은 아닌 것 같다. 만약에 골랴드낀 씨가 분신을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질투하지 않았더라면 분신은 좋은 것을 상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골랴드낀 씨가 분신을 질투하고 싫어하니 그의 일부인 분신이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절망에 관한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가상으로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을 보며 절망하고,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며 질투하는 모습이 대부분이니까. 처음에는 판타지소설인줄 알고 그의 분신이 도플갱어인가 싶었는데 그저 불안함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인격을 가진 자신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분신을 본 순간 기겁한다. 자신의 분신이 마치 자신인 양 행동하기 때문이다.
수수께끼의 사나이는 골랴드낀 씨의 집 앞에 멈춰 서서 노크를 했다. 그러자 뻬뜨루쉬까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두려워하고 예측해 왔던 모든 것들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 있었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낯선 사람은 외투에 모자까지 쓴 채, 골랴드낀 씨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마주보고 있었는데, 입가엔 미소를 띠고 약간은 인상을 찡그려 가며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골랴드낀 씨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은 온통 쭈뼜 곤두섰고 공포로 인해 아무 감각도 없이 그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스토예프스키, 석영중 옮김, 『분신』77쪽)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자신에게만 보이는 가상의 인물과 자신이 지어내는 스토리 때문에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꼴이라니!! 정말 내가 본 책의 인물 중 다이스케 (나쓰메 소세키가 쓴 『그 후』의 주인공) 다음으로 이해가 안가는 인물이었다. 다이스케와 골랴드낀 씨 모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내용보다는 골랴드낀 씨의 내적인 생각에 더 많은 신경을 썼기 때문인지 책을 읽는 내내 좀 혼란스러웠다. 이 책에는 골랴드낀 씨가 자신의 감정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답을 해, 말아? 아는 체를 해야 하는 거야, 뭐야, 이거?' 우리의 주인공은 엄청난 고민에 빠져 머리를 짜내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고 놀랄 정도로 나와 닮은 다른 사람인 척할까?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쳐다봐? (같은 책, 15쪽)
골랴드낀 씨의 대사 중간 중간에 더듬거리는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내가 지금 읽는 부분의 내용은 이것이 맞는지, 골랴드낀 씨는 이런 상황에서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등등 여러 생각이 들었다. 중간 중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한 줄이라도 건너뛰고 읽었을 때는 뒷이야기를 전혀 알 수가 없는 책이었다.
3. 쌓여가는 억울함
나는 처음에 골랴드낀 씨의 불행은 그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면서부터였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분신이 만들어지면서부터 여러 가상의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만약에 그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기 전에 불행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분신을 만들었을까? 그가 자신의 분신을 만든 이유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내기 전부터 불행했다. 그 때가 언제였을까? 상사 딸의 파티에 초대받지 못했지만 갔다가 들켜서 끌려나왔을 때일까? 하인이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골랴드낀 씨’라고 불렀을 때? 아니면 별로 돈도 없으면서 마차를 타고 멋을 부리며 다니다 윗사람한테 들켰을 때였을까? 쭉 나열해 보니 골랴드낀 씨가 불행하게 느꼈던 적은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왠지 골랴드낀 씨가 한 번에 갑자기 확 불행해질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캐릭터상 일이 일어나도 뭔가 차차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금 수치스러웠지만, 그 수치스러움이 여러 번 반복되며 생기는 바람에 결국 분신을 만들기 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국 앞에서 말한 모든 상황이 조금씩 쌓인 것이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정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내지만, 한 번에 빡 쌓아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느리게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면서 화와 억울함이 쌓여서 그 엄청난 결과가 만들어진 것 같았다.
골랴드낀 씨는 죽임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골랴드낀 씨는 지금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재가 되어 날아가고만 싶었다... (69쪽)
불쌍한 골랴드낀 씨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으니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지옥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 걸까?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 것은 물론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했으니, 정말 지옥 중의 지옥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분신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진다며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진짜 골랴드낀 씨를 뒤쫓아 다니면서 나 또한 덩달아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인공 골랴드낀 씨 앞에 나타난 또 다른 골랴드낀 씨의 존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도플갱어, 분신, 가짜 골랴드낀 씨, 가상의 골랴드낀 씨... 등등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보았는데 여전히 그의 ‘분신’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신은 분명 골랴드낀 씨 자신이 원해서 만들어낸, 자신과는 전혀 다른 (좋은) 성격을 가진 가상의 인물인데, 막상 그의 분신이 나타나니 그는 자신보다 뛰어난 분신을 보며 ‘비열하다’라고 표현했다. ‘나보다 뛰어난 것이 있어선 안 된다’라는 자기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런데 왜 골랴드낀 씨는 자신의 분신을 만들었을까?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 아마 시작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내가 이랬더라면...’으로 시작해서 가상의 자신이 점점 현실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진짜 현실로 데리고 왔다!
하지만 골랴드낀 씨는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분신을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가 다재다능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의 분신을 더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골랴드낀과 그의 분신은 어떤 점에서 다른 걸까? 둘인 걸까, 아니면 하나인 걸까?
4. '나'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나도 가끔씩 나의 분신이 있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완벽한’ 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모든 과목에서 완벽한 점수를 받고, 정말 하는 행동 하나하나도 완벽한 나!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모두의 눈에 완벽해 보일 수는 없다. 누군가의 눈에는 문제가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 없는 완벽한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안에 나를 빙의시키는 상상을 하는 것은 나름 재밌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기만 했다. 골랴드낀 씨의 문제는 정도가 지나쳐서 상상을 넘어 그 상상 속의 분신을 현실로 데리고 오면서 부터이다. 아니, 사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분신을 현실로 데리고 온 골랴드낀 씨가 먼저 문제였다. 가상의 인물을 현실에 도입시킨다는 것 자체가 살짝 미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알기로 도플갱어(분신)을 본(?) 사람들은 주로 정신에 문제가 생기거나 일찍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골랴드낀 씨도 이런 경우에 속하는 것 같았다.
상상을 하는 것까지는 좋다고 느낄 수도 있다. 착각이긴 하지만 한 순간이라도 완벽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완벽한 나의 모습을 보고나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나는 더 비참해진다. ‘아, 왜 나는 이 정도도 하지 못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며 후회가 밀려온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잘못해서 분신을 생기게 했다간 골랴드낀 씨처럼 큰일 나는 수가 있으니. 골랴드낀 씨가 조금이라도 억압에서 벗어나 행동하려 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행동이 좀 과했던 것 같다. 솔직히 분신까지 만들어내는 건 좀 너무 극단적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좀 깨끗하게 하고 나름 좋은 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정신병원으로 가다니, 골랴드낀 씨가 좀 안쓰러웠다.
나는 '나'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나의 분신을 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나이기 때문에 진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여러 나의 모습들이 있다. 착하고, 나쁘고, 슬프고, 어쩌면 안타까운, 황홀한 여러 나의 모습들. 이 여러 모습들도 어찌 보면 나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들은 어느 한 순간 나를 이루는 감정일 뿐, 이것 자체를 '나'라고 부르기엔 혼자서 '나'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저 나의 여러 모습들 중 한 구성원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골랴드낀 씨와 그의 분신도 하나라고 생각했다. 골랴드낀 씨를 진짜 '나'라고 한다면 골랴드낀 씨의 분신은 '나'의 일부분인 것이라고. 나는 골랴드낀 씨와 그의 분신을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골랴드낀 씨와 그의 분신을 아예 다른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가 하나밖에 없다는 가정 하에, 그의 분신은 나에 포함되거나 아예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에 그의 분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니, 내가 여럿으로도 보이고,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나이지만 계속해서 자라기 때문에 변한다. 그렇다면 ‘나’는 변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걸까? 5살의 나와 60살의 나는 같을까? 겉모습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 우상, 정신연령 등 여러 것들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5살이건 60살이건 ‘나’는 똑같은 ‘나’인데? 꼭 시각적으로 보기에 완벽히 똑같아야 ‘하나’로 인정될 수 있는 걸까? A라는 나무가 있다고 하면 A나무는 온전한 하나이다. 하지만 A나무는 매일 모습이 바뀐다. 꽃이 피기도 하고, 잎이 무성해지기도 하고, 잎이 시들어서 조금 떨어지기도 하고, 아예 헐벗은 나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A나무는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걸까? 그렇다면 온전한 하나였던 A나무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내가 온전한 하나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온전한 ‘이것’이 아니라 그저 변화하는 겉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나’가 없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라면, 아예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없는 것이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일까? 꼭 눈에 보여야만 존재하는 것일까? 사과가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사과가 없다고 했지만, 사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분명 없는데 있다??? 그래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계속해서 변한다. 이것이 한 사물의 모습이다. 나도 똑같다. 계속해서 변화하고, 내가 살고 있는 조건들도 변화한다. 그러면 딱히 나라고 할 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비록 허무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 있는가 없는가, 같은가 다른가, 그리고 하나인가, 아니면 여럿인가에 대해 내린 결론은 ‘나는 나라고 할 것도 없다’였다.
글_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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