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외톨이라도 괜찮아
세상과 섞이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품격이 다른 외톨이
여자가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면? 거기다 소주까지 곁들인다면? 무슨 몹쓸 사연이라도 있는지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눈길에 뒤통수가 뜨끈해지곤 했다. 예전과 달리 언제부터인가 혼자 밥을 먹으면서 찍은 사진들이 SNS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아한 식당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을 놓고 시크하게 고독을 즐기는 설정 샷들은 혼자라서 여유 있고 행복하다고 과시하는 듯하다. 21세기의 달라진 풍속도로 꼽혔던 ‘혼밥’과 ‘혼술’은 어느덧 식상할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이 끝없이 페이스북과 유투브에 연출하는 멋진 나만의 삶은 외톨이가 되는 것이 두렵다는 웅얼거림으로 들린다. 사실 외톨이라는 말에는 평균적인 삶과 멀어지는 초조함과 외로움, 부적응의 음습한 그림자가 어룽거린다.
하지만 소세키는 ‘외톨이’를 상식적 통념과 다르게 사용하는 용법을 보여준다. 소설 『태풍』을 읽으면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같은 단어가 반복해서 눈에 들어온다. 꼼꼼히 세어보니 소세키는 외톨이라는 단어를 서른 네 번이나 썼다. 풍성한 어휘력과 정밀한 묘사력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세키가 왜 이렇게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썼을까.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소세키는 런던 유학을 갔을 때 자신이 ‘오백만 기름방울 위에 혼자 떠있는 물방울’과 같다고 표현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하는 고독한 외톨이의 모습이다.
이 소설에는 두 유형의 외톨이가 나온다. 첫 번 째 유형은 소신 있는 자발적 외톨이다. 도야 선생은 가난한 문학자이다. 30대 중반의 가장인 그는 글품을 팔아서 호구지책을 마련하고 있다. 처음부터 직업이 없었던 건 아니다. 7년 동안 정규직 교사도 해봤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세 곳의 중학교를 전전했다. 처음 부임한 학교는 큰 석유회사가 지역사회의 돈줄을 쥐고 있는 곳이다. 도야 선생은 ‘돈과 인품’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연설을 했다가 사단이 났다. 회사 임원들과 학교가 합세해서 건방진 놈이라고 도야 선생을 쫒아낸다. 두 번 째로 간 학교는 석탄공업지대에 있었다. 여기서도 도야 선생은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다가 비생산적인 인간 취급을 당한다. 도야 선생이 교직에 정착하지 못하고 밀려나는 장소가 석유, 석탄산업의 중심지인 것은 근대 산업혁명을 주도한 산업에 의해 사회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는 타지 사람을 배척하는 시골학교였다. 어느 날 옛날 영주를 지냈던 지역유지가 수업을 참관하러 왔다. 지역의 지체 높으신 귀족이 왔는데 도야선생은 수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 이게 탈이 났다. 권세가 앞에서 굽실거리지 않다니 일개 교사가 건방지다고 사람들은 비난한다. 이는 메이지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봉건적인 계급질서의 구태를 보여준다.
도야선생은 교사 노릇에 질려버렸다. 그는 교직을 버리고 잡지와 신문에 글을 쓰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비정규직으로는 목구멍에 풀칠하기가 어려우니 아내는 바가지를 긁는다. “당신처럼 고집이 세면 밥 먹고 살기 힘들어요.” 도야선생도 자기가 사회와 섞이지 못하는 완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외려 그는 세상에 녹아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만일 자신이 세상에 용해되려고 한다면 그 순간, 자신은 완전히 소멸되어버릴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신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외톨이가 된 사나이, 도야선생은 세속에 저항하며 독야청청 살아갈 수 있을까?
또 다른 유형은 사회로부터 강제로 밀려난 외톨이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 다카야나기는 번역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다. 고향에 있는 홀어머니에게 생활비도 보내드려야 하는데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다. 그는 부자 친구를 따라 난생 처음 음악회에 가보고 양식당에 가서 스테이크도 얻어먹지만 어딜 가나 주눅이 든다. 설상가상 폐결핵까지 걸려서 기침을 한다. 삶이 지지리 궁상이요, 짠내 나는 청춘이다. 다카야나기는 세상사람 모두가 자신을 따돌린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사회를 냉혹한 경쟁터라고 원망한다. 다카야나기는 무사히 세속에 합류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두 명의 외톨이를 연결해주는 나카노는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난 청년으로 다카야나기와 절친한 사이다. 두 청년은 각각 도야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다.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소설을 읽는 재미가 다르다. 사회경제적으로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금수저와 흙수저 청년을 비교하며 읽을 수도 있고, 비슷하게 빈곤한 처지에 놓인 청년과 중년을 비교해서 읽을 수도 있다. 나로서는 후자의 분석틀에 끌린다. 두 사람은 사회와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닮지 않았다. 어째서 외톨이가 되는가. 스스로 외톨이의 길을 선택한 사람과 부득이 외톨이의 길로 내몰린 사람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런 질문을 따라가면 우리는 소세키라는 작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자기본위의 개인주의’에 가서 닿을 것이다.
약자의 원한감정 vs 강자의 자존감
도야선생과 다카야나기, 두 사람 모두 가난한 외톨이지만 삶의 품격이 다르다. 이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다카야나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고 있다고 원망한다. 자신을 외톨이 병에 걸리게 한 것은 세상이다. 청년은 “돈이 없다. 시간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힌다. 분하고 억울하다”고 세상을 저주한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데 세상이 잔혹할 따름이다. 그는 외톨이가 된 게 억울하고 괴롭다. 이에 비해 도야 선생은 외롭지 않다. 그는 돈과 명성을 따라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과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번민하는 것은 모순이다.” 타인의 인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가는 외톨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존엄한 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두 외톨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니체가 말하는 “힘 의지”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니체는 자기 안의 수많은 욕망이 힘겨루기를 한 결과 어떤 힘이 승리하는지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했다. 능동적인 힘을 구사하는가, 반동적인 힘을 구사하는가, 긍정적인 힘을 발휘하는가, 부정적인 힘을 쓰는가. 능동적인 힘은 자기로부터 구성되는 힘이다. 출발점이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욕망하고, 자신이 결정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구성해간다. 이에 반해 반동적인 힘은 타자로부터 구성되는 힘이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질시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거나 방해하는 식으로 행동한다. 능동적인 힘은 긍정으로 표출되고 반동적인 힘은 부정과 짝을 짓는다.
다카야나기가 돈이 없어서 글을 못 쓴다고 말하는 것은 니체 식으로 보면 부정적이고 비겁한 약자의 행동이다. 약자는 누구 때문에 내가 뭘 못한다고 변명하면서 부정적인 힘을 쓴다. 다카야나기는 자신이 현재 괴로운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사까지 동원한다. 그가 일곱 살 때 우체국 직원이었던 아버지가 공금 횡령으로 구속되었다. 아버지는 감옥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다카야나기는 자신은 죄인의 자식이라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하소연한다. 폐병도 유전이고 죄악도 유전이고, 자신에게만 불행의 종합세트가 태생적으로 주어졌단 말인가. 이렇게 모든 인과관계를 자기중심으로 재조립해서 타인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이 약자의 특징이다. 모든 것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면 필연적으로 원한감정이 나온다. 약자는 나만 못하는 건 억울하다고, 다른 사람도 못 했으면 좋겠다고 끌어내린다. 약자의 원한감정으로는 자기 존엄성을 구현할 수가 없다.
도야 선생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카야나기에게 아버지의 과거가 어떻든 다 핑계라고 일축한다. 삶은 과거에 있지 않으니 지금부터 꽃을 피우라면서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말고 문학자의 길을 가라고 격려한다. 정정당당하게 창작에 매진하라고 권하는 도야 선생의 내면에는 강자의 윤리가 살아있다.
여러 학문 중에서 문학자가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웃긴 것은 당사자들조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나쓰메 소세키, 『태풍』, 노재명 역, 현암사, 2016년, 100쪽)
도야 선생은 문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다른 학문 같으면 비참한 형편에서 연구가 불가능하지만 문학은 다르다. 문학자는 인간 세상의 풍파와 장애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든다. 인생의 본질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한다. “나는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그 결과가 악명이 되든, 오명이 되든, 아니면 광기가 되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좋아서 나의 글을 쓴다는 것. 인생의 본질과 만나기 위해 기꺼이 고통과 궁핍과 고독을 맛보는 자가 문학자이다.
도야선생은 남들로부터 괴짜라고 힐난 받는 게 두렵지 않다. 명성이나 물질적 보상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옛날부터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은 외톨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론 아내에게 바보취급을 당하고 하녀에게도 비웃음을 사지만 괘념치 않는다. 그의 고고한 태도는 강자의 존엄성을 보여준다. 다카야나기는 도야 선생과 대화한 후 “갑자기 자신이 넓은 세계에 끌려 나온 듯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만의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서 자유의식을 맛본 것이다. 도야선생도 청년과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하하하 웃는다. 외톨이끼리의 훈훈한 교감은 삶을 변화시키려 하고 있다. 약자의식에 찌들어 있던 청년이 깜짝 놀랄만한 능동적인 힘으로 급변하는 사건이 소설의 클라이막스에 기다리고 있다.
자기 본위의 진정한 개인주의
외톨이는 소세키가 “자기본위의 개인주의”를 일컫는 또 하나의 별칭이다. 개인주의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짜증이 나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겠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하는 독자도 있겠다. 자유시장경제가 잠식한 요즘은 개인주의가 지나쳐서 이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파렴치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고 몰상식한 진상고객 때문에 몸서리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불쾌감이 떠오를 것이다. 혹은 개인주의는 세상을 도외시하는 현실도피자가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다.
소세키가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의 틀에 갇힌 좁은 개념이 아니다. 자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동시에 타인의 자유도 존중하는 가치관이다. 도야 선생은 자기본위의 개인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야 선생은 차가운 바람이 맹렬하게 불어오는 날 연설을 하러 간다. 1906년 도쿄시의 전차요금 인상을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사람들이 구속되었는데 도야 선생은 구속자 가족을 돕기 위해서 연설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겁에 질려서 “사회주의자라는 오해라도 받게 되면 곤란하다”고 극구 말린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면 색깔론으로 몰아가는 풍토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도야선생은 “오해받아도 상관없어. 국가주의고 사회주의고 알 게 뭐야? 그저 올바른 길을 걸으면 됐지.” 라고 초연하게 대답한다. 도야 선생은 국가주의라는 거대한 표상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그의 개인주의 사상은 위험천만해 보인다. 하지만 약자를 돕고 사회정의를 몸으로 실천하는 도야 선생을 이기주의자라고 폄하할 수 있을까, 국가주의가 필요 없다고 하는 그를 안온한 현실 도피자라고 비웃을 수 있을까. 그의 개인주의는 소설 제목이 상징하는 대로 거대한 태풍에 맞서는 행보이다.
메이지 시대는 국가와 천황에 대해 절대 복종을 강요받는 사회적 풍토였다. 전체주의적인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사상의 자유는 억압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당파를 결성해서 맹목적으로 움직인다. 당파에 휩쓸려 금력과 권력에 팔려가지 않으려면 지극히 용기 있는 도덕과 책임 있는 지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14년에 소세키는 <나의 개인주의>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다. “사실 우리들은 국가주의자이기도 하고 세계주의자이기도 하고 동시에 개인주의자이기도 합니다.”(『나의 개인주의』, 70쪽) 라고 말했다. 소세키는 개인의 자유가 있어야 개성이 발전하고 각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지론을 펼친다. 단독자 개인으로 흩어져야 자유롭게 자기 길을 간다. 장작개비는 힘이 없어 보여도 다발로 모이면 강한 힘을 발휘한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면 개인주의는 세계를 결속시킨다. 소세키의 사회의식은 도야 선생에게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소설의 상당부분이 <현대 청년에게 고함>이라는 계몽적인 연설내용으로 채워져 있어서 덜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회적 모순을 표출하는 능력이 소세키의 매력이다. 도야 선생은 일종의 블랙리스트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의 책이 출판되는 걸 막는 은밀한 세력이 있다. 도야 선생은 435쪽이나 되는 장문의 <인격론>을 썼지만 빛을 보지 못하고 사장될 판이다. 그의 글은 금력과 권력을 휘두르는 부자들을 공격하며 인간성의 소중함을 지키고자 한다. 도야 선생을 정탐하는 자들은 나카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다. 하필 도야 선생의 친형이 그 회사에 다닌다. 형은 도야 선생이 책 출판을 포기하게 하려고 뒤에서 빚 독촉을 사주하고 연설을 못하게 방해한다. 형 자신은 동생을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본의 아니게 자본가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된다. 적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고나 할까? 도야선생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악역을 뜻밖에 친형이 맡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면 소세키의 사회의식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선악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배경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혼란스럽게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결말은 매우 인상적이다. 나카노는 결핵에 걸린 친구에게 요양을 가라고 서슴없이 100엔을 내준다. 다카야나기는 각혈을 하면서도 요양을 포기하고 친구에게 받은 돈으로 도야 선생의 빚을 갚아버린다.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난다. 다카야나기가 도야 선생의 원고를 나카노에게 가져다준들 책으로 출판될 수 있을까? 다카야나기는 살아서 자기만의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다카야나기가 변할 거라는 것은 예감할 수 있다. 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외톨이였지만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다. 아니 외톨이라도 괜찮다. 이제 그는 약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저주하지 않고 자기 방식의 개인주의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자유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이자 큰 책임이라고 했다. 고독하게 살아가는 정신에 대한 탐구를 읽으며 나 역시 시류에 휩쓸려서 살지는 않는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유롭고 품위 있게 외톨이의 삶을 누릴 태세가 되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글_박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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