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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일상의 독재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by 북드라망 2016. 12. 20.

일상의 독재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금연시대인 요즘, 몇몇 회사는 옥상이나 베란다층에 흡연실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팀원들과 차 한 잔하며 이야기도 나눌 겸 아주 가끔 따라간다. 참 묘하게도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는 나오지 않던 정보가 담배와 함께 하는 대화에선 좀 더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런 대화 속에도 우리가 보통 나누는 잡담들의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곧 돌아올 승진 시즌을 앞두고 승진 인원 편성은 어떻게 될 것이며, 또 이번 승진 기준은 어떻게 구성될지, 또 저쪽 부서 이 아무개는 업무처리 스타일이 왜 그러느냐는 둥, 혹시 조그만 정보라도 나올라치면 아주 깊이 빠져 듣게 된다. 


퇴근하여 돌아온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집사람이나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고는 하지만, 그저 뻔 한 이야기뿐이다. 아내는 오늘 집에서 일어난 일들 중 몇 가지 에피소드를 간추려 말해준다. 아이는 제 딴에 기이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과장을 섞어 이야기해준다. 물론 나도 깊이 빠져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가끔은 놀라워하긴 한다. 그러나 지나서 보면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대화는 아닌 듯하다.


최근의 놀라운 정치 상황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뉴스들을 떠들어대며 대통령과 행정부의 무능을 질타하고 비난하지만, 대화는 여전히 뻔하게 전개된다. 그저 뉴스들을 되뇌고 그들을 비난하며 놀라워해주는 게 전부다. 비아그라나 무당 이야기가 나오면 호기심으로 가득차서 정신없이 이야기해대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각자 자기 할 일로 돌아가는 식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이 변화의 기로에 서 있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전혀 우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비난과 놀라움으로 빈말들이 오고갈 뿐이다. 그런 이야기들에는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 있을 턱이 없다. 그것은 갈수록 빈곤해지는 우리들의 정신만 더욱 밝게 드러내 줄 뿐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상태를 현존재의 퇴락(das Verfallen)[각주:1]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아무런 관계도 없이 완전히 고립되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 사람들의 세계 속에 빠져(verfallen) 지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은행이라는 생활세계에서는 은행원으로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면서 다른 사람들(팀원들)과 관계하고, 집에서는 가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면서 다른 사람들(아내와 아이들)과 관계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항상 ‘공동세계’(Mitwelt)이며 우리의 존재는 항상 다른 사람과의 ‘공동존재’(Mitsein)인 것이다.[각주:2]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이 의미를 갖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계에 빠져서(verfallen) 살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일요일 오후 홀로 집에 있을 때 느끼는 고독감은 그 시간 동안 ‘공동존재’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라고도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항변할 수 있다. “아, 나는 그런 고독이 좋아요. 홀로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SNS도 하잖아요. 아니면 홀로 등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 좋지요” 그러나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보자면 게임이나 드라마, SNS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등산의 경우도 등산복과 등산 신발을 차려입고 행선지까지 버스를 이용해 가는 행위를 포함하므로 당연히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물론 다른 행위들에 비해 공동존재의 양상이 덜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도무지 행할 수조차 없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사회책에 나온 그 흔한 공동체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이데거도 이런 이야기를 했군, 할 것 같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렇게 더불어 사는 것을 우리들의 특성으로 지적한 다음, 아주 다른 차원에서 그 문제점을 비판해 들어간다.


퇴락(das Verfallen)하는 '존재의 집'

“현존재는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음으로서 타인의 통치(Botmäßigkeit) 안에 서 있다.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고(ist)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에게서 존재를 빼앗아버렸다(abgenommen). 타인들이 임의로 현존재의 일상적인 존재가능성들을 좌우한다. 이때 이러한 타인들은 특정한 타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느 타인이건 다 그 타인을 대표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오직 더불어 있음으로서의 현존재가 뜻하지 않게 떠넘겨받은 눈에 띄지 않는 타인들의 지배일 뿐이다.”[각주:3]


나는 이 문장에 대해 아주 강한 공감을 느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세계에서는 사람들이 고유한 현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하는 조직이나 규범 속에 숨겨 있는 세속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는 자로서만 나타난다. 은행 팀장인 나는 은행이 요구하는 목적들, 그러니까, 사고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 그래야 승진도 하고, 또 나름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으면서 다소의 행복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집에서도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바람직한 가장의 모습을 추구하면서 아내와 아이들의 불만을 없애야 가정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 성적도 좋고 말썽도 없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면서 획득하는 행복감이자 평화다. 자기 자신보다 항상 다른 사람들의 해석에 의존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그런 다른 사람들(타인)이 특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눈에 띄지 않고 확정할 수 없는 ‘그들’이야말로 그들의 ‘본래적인 독재’(eigentliche Diktatur)를 행한다고까지 말한다.[각주:4]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즐기는 것처럼 즐기며 좋아할 뿐 아니라, 남들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읽고 본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das Man)이 나의 일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지식을 쌓으면서, 또 경험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삶이 점점 풍부해지고 좀 더 확실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기 확신이 커지면 이제는 ‘본래적인 자기’(eigentlich Selbst)를 좀 더 파고들 필요가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해석대로 살아가는 삶이 완전하고 진정한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현존재는 그렇게 사는 것이 최상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파고드는데, 이렇게 되는 이유로 일상성을 규정하는 몇 가지 양식을 분석해낸다. 이 분석 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일상적인 ‘말’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이다. 대부분 말하고 듣는 평균인은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은 채 이야기되는 것을 듣고, 단순히 따라 말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야기되는 것이 사태에 부합되고 근원적인 존재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주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내용은 텅 빈 채 말 그대로만 듣고 전달될 뿐이다. 


예를 들면 직위가 높은 분이 “그 친구 예의가 없어”라고 규정하면, 진위와 무관하게 복제되어 아무런 맥락 없이 소문으로 퍼진다. 사람들은 그런 소문이 왜 발생했는지, 그렇게 발생한 맥락이 무엇인지, 사유와 맥락을 고려했을 때 그것이 진실일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전달할 뿐이다. 그런 말을 ‘빈말’(das Gerede, 잡담)이라고 부르는데, 하이데거는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을 가로 막는다고 본다. 오히려 그런 말들 때문에 우리는 마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모두 완성된 것인 양 착각하기까지 할 정도다. “누구든 긁어모을 수 있는 잡담(빈말)은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는 과제로부터 면제해줄 뿐만 아니라, 무차별한 이해가능성을 형성해준다”[각주:5]

 

이른바 세평이나 세론을 모두 모으면 그것들이 세상의 진실한 모습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안테나를 세운다.”는 속어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테나를 통해 들어오는 세론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이 된다. 이때 안테나는 정보습득의 도구가 아니라, 예속화의 길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예속되기 위해서 정보를 습득하는 꼴인지도.


하이데거는 빈말과 함께 우리를 퇴락으로 이끄는 또 하나의 양식을 드는데, 그것은 ‘호기심’(die Neugier)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볼거리에 자신을 내맡긴다. 영화, 드라마, 스포츠에서부터 문학이나 예술이라고 부르는 것까지, 그들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마주치는 것을 끊임없이 교체하여 흥분을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호기심은 본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것에 대한 존재에 이르기 위하여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기 위해서 보려고 애쓴다.”[각주:6] 이렇게 호기심 추구는 우리의 관심을 분산시켜서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획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이런 빈말과 호기심이 우리를 세상 사람들(das Man)에 예속되어 휘둘리게 만든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본래적 자기(eigentlich Selbst)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 의미에서 보면 하이데거는 자기가 자기로부터 멀어져 가는 모습을 철학적 개념들로 아주 치밀하게 논구해 들어간 셈이었다. 또한 그런 모습을 독재적 통치와 연결하여 바라보았다. 하이데거의 눈으로라면 대통령이나 의회정치에만 독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안에 이미 타인의 통치, 그것도 독재적 통치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탐구는 애초부터 정치적이었던 셈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대통령의 탄핵이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언제나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의 맥락을 끝까지 의심하고 그 의심을 풀기 위해 고투해야 한다. 예컨대 이번 기회에 '박정희 체제'를 무너뜨리게 될 계기를 마련했다는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박근혜를 무너뜨린 여러 원천 중 하나가 역설적으로 '박정희주의'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그게 모든 걸 좌우하진 않았지만, 우리들의 심상엔 무능력한 사람이 통치자였다는 비난이 있는 것이다. 효율과 능력을 중시하는 가치가 박근혜 집단의 무능력을 비도덕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구축된 다른 사람들의 가치이다. 아마도 그것은 오랜 세월 우리들 신체에 빈말과 호기심을 통해 스며들어온 가치들일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들 안에 스며든 박정희 식 통치 안에 서 있는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만일 비선실세가 역량을 지닌 명망가그룹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번지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대중은 직관적으로 박근혜의 무법성을 비판하고 체제 자체를 겨냥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체제를 공격하면서도 그 저항 자체가 박정희체제에 딛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운동의 형용모순이다. 여전히 효율과 능력을 기준으로 돌아다니는 빈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기존 관계를 끊고 다른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를 무너뜨려야만 가능하기에, 그 형용모순이 새삼스럽지 않다. 이제 우리는 이 자기모순을 분명히 인식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다수자가 자신들의 효율과 능력을 추구하며 소수자의 생명을 짓밟는 일을 철폐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지 않겠는가. 자신의 다수성과 싸우는 '자기배려의 정치'는 그렇게 시작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자기(Selbst)가 다른 사람들의 가치에 의해 얼마나 은폐되는지, 그래서 일상의 독재가 얼마나 우리들 안에 들어와 있는지를 엄밀한 개념으로 알게 해주는 정치적 텍스트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글방, 1998, 240쪽 ; 박찬국 지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출판사, 2014, 237쪽. ;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Frankfurt: Vittorio Klostermann, 1977, p. 233 ; Martin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lated by Joan Stambaugh,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 164. 이기상 선생님은 “빠져있음”으로 번역했다. 영문판은 “entanglement”, 즉 “얽혀 듦”으로 번역했다. 박찬국 선생님의 번역어인 “퇴락”은 다소 오해가 있는 번역이다. 잘못 생각하면 도덕적 타락, 심지어 세상이 타락했다는 기독교적인 질타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퇴락은 도덕적 타락을 진술하기 이전의 존재론적 개념이기 때문에 이를 타락으로 여기면 굉장한 오독을 가져온다. 그러나 Verfallen에는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가능성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부정적인 맥락이 분명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를 살린다면 ‘퇴락’이 다른 번역어보다 더욱 명확하다고도 보인다. 이 글에서는 일단 박찬국 선생님의 번역을 따르기로 한다. [본문으로]
  2. 이기상, 166쪽; 박찬국, 171쪽; 독어판, 159쪽; 영문판, 112쪽. [본문으로]
  3. 이기상, 176쪽; 박찬국, 177쪽; 독어판, 168쪽; 영문판, 118쪽. [본문으로]
  4. 이기상, 177쪽; 박찬국, 179쪽; 독어판, 169쪽; 영문판, 119쪽. [본문으로]
  5. 이기상, 232쪽; 박찬국, 233쪽; 독어판, 224쪽; 영문판, 158쪽. [본문으로]
  6. 이기상, 236쪽; 박찬국, 234쪽; 독어판, 229쪽; 영문판, 16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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