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영원회귀는 두 번 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by 북드라망 2017. 2. 28.

영원회귀는 두 번 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집안은 전통적인 루터교 가정이었다. 니체의 선조들은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독일로 도망친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니체의 선조와 가족들은 한 지역에 정착해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니체가 훗날 “프로테스탄트 목사가 독일 철학의 아버지”라고 했던 것은 자신의 집안 내력으로부터 유래한 주장인 셈이다. 물론 목사인 아버지가 서른여섯 살(니체의 나이 네 살)에 요절하면서 위기가 찾아오지만, 다행히도(?) 외할아버지인 욀러 목사의 영향 속에서 그 전통은 어린 니체에게 계속 이어진다. 열 네 살의 어린 니체가  아침 4시에 일어나고 저녁 9시에 정확히 취침하는 포르타 기숙학교의 생활을 견뎌낸 것도 이런 전통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니체는 「고향 없이」라는 제목의 시에 자신은 고향이 없기 때문에 독수리처럼 자유롭다고 썼다.[각주:1] 자신의 선조나 가족과 달리 니체는 전 생애에 걸쳐 한 국가나 한 가정에 정착해 살지 않았다. 그는 유럽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스스로를 ‘훌륭한 유럽인’(gute Europäer)이라고 불렀다. 혹자는 건강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거의 본능적으로 ‘정착’을 피해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비단 지역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바그너와 관계도 이와 동일한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1865년 헌책방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난 이후로 쇼펜하우어주의자인 바그너를 숭배하게 된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바그너와 트리브셴에서 보냈던 나날들에 구름 한 점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바그너를 아버지처럼 따랐다(바그너와 니체의 아버지는 같은 해 태어났다). 그러나 훗날 바그너와 헤어지며 니체는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자, 보라! 바그너는 한 사람의 혁명가였다. 그는 독일인한테서 도망쳤었다. (중략) 독일인들은 선량하다. 바그너는 결코 선량하지 않다....[그러나] 내가 바그너를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점은 무엇인가? 그가 독일인에게 응해주었다는 점 ㅡ 그가 독일제국적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 독일의 손이 닿는 한, 독일은 문화를 타락시킨다.”[각주:2] 


니체는 사유와 도덕에서 적당한 순응주의자를 일컬어 “독일인”이라고 부른다. 처음 보았을 때의 바그너는 낯설고도 반항적이었다. 그 의미에서 그는 “비-독일인”이었다. 그러나 트리브셴에 은거하다가 바이로이트로 가면서 바그너는 제국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니체가 바그너의 경쟁자인 브람스의 <승리의 찬가> 악보를 바그너의 음악실 피아노에 올려놓은 것은 니체의 바그너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그는 바그너가 독일인이 되고 말았다고 한탄하였다. 그는 그 즈음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동시에 떠났다.

  그러나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하면서 획득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힘에의 의지’ 철학이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바그너와 결별하던 시기에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그는 그 책에서 “선한 행위란 승화된 나쁜 행위이며, 나쁜 행위란 다듬어지지 않고 어리석은 선한 행위이다”(107절)[각주:3]라고 말한다. 선한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즉, 선과 악은 하나다. 오히려 사람들이 악이라고 부르는 파괴적인 힘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아는 ‘인간성’을 최초로 만든 것이다.[각주:4] 결국 악이란 “관습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각주:5]


그런데 사람들이 관습에 따라 움직이는 이유도 알고 보면 “힘에의 의지” 때문이다. 관습에 따라 도덕적 행위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에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힘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어 다른 관습을 만들어야 할 때도 있다.[각주:6] 사람들은 그런 자를 두고 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관습이 성공하고 안정된 사회가 되면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선한 인간으로 다시 불린다. 결국 훗날 선한 인간이라고 불리게 되는 자들은 모조리 악한 인간들이었다.[각주:7] 이 의미에서 선의 뿌리는 악이고, 악은 성장하여 선이 된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선이면서 악이다. 모든 힘은 선의 표면을 지나기도 하고, 악의 표면을 지나기도 한다. 두 개는 계속 번갈아 가면서 역사를 구성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힘의 모습일 뿐이다. 이것을 좀 더 끝까지 밀고 나가 보면, 도덕 그 자체도 힘에의 의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지에 이른다. 



“저마다의 민족 위에 가치를 기록해둔 서판이 걸려 있다.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극복해낸 것들을 기록해둔 서판이니. 보라, 그것은 저마다의 민족이 지닌 힘에의 의지의 음성이니...(중략) ‘선’과 ‘악’, 그것이 바로 그 창조물들의 이름이렷다.”[각주:8]

  

어떤 무리들이 그 힘을 자기 자신에게 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여 자기가 자기에게 부과한 명령을 스스로 복종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힘에의 의지를 잘 조절할 줄 알게 될 때, 그들 무리는 어떤 도덕들의 범위 안에 존재하면서 안정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집단적인 힘에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도덕은 자기 자신에게 행사된 힘에의 의지이다. 니체는 도덕을 자기극복의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기 극복의 결과도 끝없이 반복되면 어떤 질곡으로 우리들의 삶을 덮어 버린다. 안정된 공동체라는 허위 속에서 더 이상 바뀌지 않을 규범이 되면서 사람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다. 영원히 반복될 어떤 형상이 사람들의 심상에 자리 잡는 것이다. 캑캑거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어떤 젊은 양치기의 입에 시커멓고 묵직한 뱀 한 마리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각주:9] 물론 어떤 선지자들이 나와서 그런 규범을 무너뜨리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선지자가 손으로 뱀을 잡아당기고 또 잡아 당겨도 소용없는 일이다.[각주:10] 그것은 스스로 빼지 않으면 도무지 빼지지 않을 것이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 벗어나려 했으나 벗어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욱 허무주의에 빠진다. 


바로 그때 니체가 들고 나오는 카드가 바로 영원회귀의 철학이다. 영원회귀의 철학은 숨겨져 있는 힘에의 의지를 다시 불러들이는 철학이다. ‘힘에의 의지’는 통념적으로는 악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 정신의 밑에 흐르며 존재하고 있다. “너는 일찍이 너의 지하실에 사나운 들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도 결국 새가 되고 사랑스러운 가희로 변하고 말았지”[각주:11] 이 들개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삶을 사는데 중대한 문제가 된다. 그래야만 지금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사실 영원회귀의 철학은 그 들개들을 불러들이는 하나의 실험이자 시도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실험은 두 번 뛴다. 첫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고 불릴만한 사고 실험이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각주:12] 이렇게 질문하고 모든 삶을 대 긍정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실험. 그 실험을 우리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니체의 말대로 모든 요구를 내 던지기 위한 최종적이고 영원한 확인과 봉인이다.[각주:13] 그렇게 되어야 내 존재를 “이 순간”에 걸어 볼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는 전투적 정신의 구성.


두 번째 도움닫기는 ‘차이의 영원회귀’라는 실천 실험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통해 “순간”이라는 성문에 다다르면, 이제 더 이상 자기 이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 상황이 온다. 그 순간 발걸음을 내디딜 용기가 생기는데, 이를테면 어차피 똑같은 바에야 앞으로 한번 나가 보겠다는 실천의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앞만 보고 발을 내 딛는 전투적 실천의 실행. 이것은 모든 존재를 긍정하는 실천이다. 

두 개의 실험은 영원회귀의 양 바퀴이다. 모든 바퀴가 그렇듯 두 바퀴는 동시에 굴러간다. 그러지 않으면 반쪽짜리 영원회귀, 거짓 영원회귀가 되고 만다. 앞의 영원회귀 실험이 없으면, 뒤의 영원회귀 실험도 없다. 니체를 설명하는 모든 글들이 어느 한쪽만을 영원회귀로 상상함으로써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두 바퀴를 지녀야만 영원회귀는 제대로 구른다.


물론 이 두 바퀴의 실험이 성공할지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영원회귀는 실험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 점이 영원회귀의 묘미일 것이다. 그걸 앞서 안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헐벗은 반복, 도로 떨어진 초월론이 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신중한 시도이지(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언제나 항상 영원회귀 상태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적인 선택일 수 없다.


그것은 선불교의 행동방식과도 같다. 퇴로가 막힌 채 백척간두에 서 있는 나, 더 이상의 다른 구원은 없고, 이게 전부라고 명철하게 깨닫는 나, 그것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는 사고실험이다. 그러나 이 끔찍한 순간에, 모든 것이 무장 해제된 그 순간에, 어차피 이런 세상인 것을 무엇을 바라랴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고 낭떠러지의 심연에다 담담하게 첫 발을 내딛는 것. 그러나 바로 그때 뜻밖에도 반격의 거점이자, 완전히 새로운 길이 펼쳐진다. 그것이 차이의 영원회귀라는 실천실험이다. 이 두 가지 실험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구성한다. 나는 영원회귀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선과 악의 뫼비우스 띠인 힘에의 의지는 영원회귀를 통해 두 번 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지음, 『니체, 그의 삶과 철학』, 김기복·이원복 옮김, 이제이북스, 2004, 42쪽. [본문으로]
  2. 니체 지음, 『니체전집 15 ㅡ 이 사람을 보라』, 백승영 옮김, 책세상, 2002, 362~363쪽. [본문으로]
  3. 니체 지음, 『니체전집 7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119쪽. [본문으로]
  4. 니체 지음, 『니체전집 7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246쪽. [본문으로]
  5. 니체 지음, 『니체전집 7 ㅡ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106쪽. [본문으로]
  6. 니체 지음, 『니체전집 10 ㅡ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25쪽. [본문으로]
  7. 니체 지음, 『니체전집 10 ㅡ 아침놀』, 박찬국 옮김, 책세상, 2004, 38쪽. [본문으로]
  8. 니체 지음, 『니체전집 13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00, 96~99쪽. [본문으로]
  9. 니체 지음, 『니체전집 13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00, 264쪽. [본문으로]
  10. 니체 지음, 『니체전집 13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옮김, 책세상, 2000, 264쪽. [본문으로]
  11. 니체 지음, 『니체전집 13 ㅡ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000, 56쪽. [본문으로]
  12. 니체 지음, 『니체전집 12 ㅡ 즐거운 학문』, 안성찬·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315쪽. [본문으로]
  13. 니체 지음, 『니체전집 12 ㅡ 즐거운 학문』, 안성찬·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315쪽.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