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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들 -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by 북드라망 2017. 1. 17.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시경』의 「북산(北山)」이라는 시에 “넓은 하늘 밑은 임금님 땅 아닌 곳 없으며, 바다 안 땅 위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임금님 신하이거늘” “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각주:1]이라는 구절이 있다. 은대(殷代)까지는 땅 위의 왕들이 그들보다 높은 절대자로 상정된 제(帝, 대왕)의 명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는 관념이 확고했다. 그러나 『시경』의 저 문구처럼 주나라가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땅 위의 어떤 임금’이 다른 모든 것을 다스리는 천하가 되자, 상황이 약간 애매해졌다. 절대자인 제(帝)가 땅위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임금 위에 누군가 진정한 통치자가 있어야하는데, 땅 위의 임금 따위가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눈앞에 보이는 어떤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고 있어서, 그 위의 제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땅 위의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된다. 왜 내가 저 사람에게 통치 받아야 되는가. 나와 똑같은 사람 아닌가.


하늘은 원래 변화무쌍한 법!

그러자 통치자들은 그 정당성을 이론화하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다(受命)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주왕의 주지육림과 문황의 성덕은 주나라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즉 주왕이 주지육림에 빠졌기 때문에 하늘의 명을 잃었고, 그 천명이 덕 있는 자에게 옮겨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경』의 「문왕」이란 시가 말해주듯 하늘의 명은 일정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天命靡常].[각주:2] 그러므로 혁명[각주:3]

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동아시아에는 이런 혁명적인 행위와 사상을 가진 인물이 시대마다 출현했다. 모든 규범과 단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불세출의 반역자인 이지(李贄, 1527~1602).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경계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그를 중국철학자로 분류하지만, 사실 그는 중국 남동부의 교역도시인 복건성 천주에 살면서 이란·아랍 등과 해상무역을 하고 이슬람교를 믿던 회족(回族)의 일원이었다. 아마도 신앙적으로나 혈통적으로나 중동과 관련이 깊었기 때문에 이슬람 철학을 접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는 유불선은 물론 이슬람교와 서구 기독교까지 섭렵했으면서도 어느 종교나 사상에도 충성을 받치지 않았던 ‘이념적 아나키스트’였다. 자신과 부인 황씨의 묘지명에 관명이나 직급도 쓰지 않았다. 국가를 거부했던 벼슬아치였던 것이다. 퇴직 후에는 친구의 집에서 살다가 친구가 죽자 사찰에 들어가 머리를 깎았지만 끝까지 법명이나 계를 받지는 않았다. 유림이면서도 비승비속(非僧非俗)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마지막 거처는 ‘혹세무민’이라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간 베이징의 감옥이다. 통치자들을 두고 백성들에게 획일적인 도덕과 예의를 강요하려고 국가의 형벌을 남용하는 가짜 인자(仁者)무리라고 독설을 뿜어대는 그를 통치자들은 치를 떨었다. 아마 동아시아의 좌파라면 맨 첫 머리에 그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현대 한국의 유교는 ‘유교적 가족주의’로 전락하였다. 말이 좋아 가족주의이지, 그것의 본질은 학연·지연·혈연이라는 사적 네트워크, 그러니까 자기들끼리의 패거리 안에서 상생의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각주:4] 이것이 마치 ‘아시아적 가치’인양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라는 복합적인 담론을 관학의 성격으로 단순화시켜버리고, 급기야 자기들끼리의 상생으로 부패화되고 만다. 


‘유교적 좌파’의 거두 황종희(黃宗羲, 1610~1695)는 유교가 결코 ‘복종과 파벌의 논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황종희는 급진적인 단체라고 할 수 있을 ‘복사’(復社, 1629)에 들어가서 환관 정치에 대한 언론 투쟁을 벌인다. 이때 황종희는 중국의 역사와 명나라 실록을 독파한 끝에 명나라 위기의 근본 원인을 깨달았다고 한다. 역사공부를 통해서 좌파가 된 케이스. 


명明나라의 최대 판도


그러나 여러 투쟁을 거쳐서 명나라의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안 뒤, 1649년부터 고향에 칩거하면서 독서와 집필, 후진 양성에 몰두한다. 황종희는 통치자들이 천하를 자손들에게 넘기고 끝없이 이용할 사유재산으로 간주한다고 개탄해했다. 즉 군주는 천하(피지배민들)를 착취의 객체로 삼았다(『명이대방록』). 따라서 국가가 소수 지배자의 착취 도구로 변질했기에 군주를 미워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공(公)의 국가’를 주창하는데, 그의 ‘공(公)의 국가’에서는 관료들이란 군주가 아닌 천하의 인민을 섬기는 공복에 불과하다. 법은 억압의 도구가 아니라 공론에 입각한 ‘공(公)’을 지키는 보루이다. 황종희의 유교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중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모습에서 불교도 비껴갈 수는 없다. 불교와 도교사상이 결합하여 귀족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혜원(慧遠, 334~416)은 불교의 반(反)국가주의를 잘 보여주었던 승려다. 국가 권력이 승려들의 황제에 대한 경배를 의무화하려 하자, 그는 불멸의 명작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쓴다. 이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재가자는 왕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더라도, 속세를 벗어나 생사를 뛰어넘은 출가자는 자비심으로 황제 이상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제도할 수 있다. 더 이상 땅이나 하늘나라에서 태어나 살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고 모든 탐욕에서 벗어나 열반의 경지에 이른 구도자라면 이미 황제는 물론 천지만물과도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다....이러한 존재는 황제 못지않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하화중생(下化衆生)으로 세상에 은혜를 베푸는데 어찌 왕에게 절해야 하는가?”(『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각주:5] 


이런 혜원의 영향으로 혜원이 있던 동진에서는 승려들이 왕자를 경배할 의무가 없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작금의 상황을 보면서, 종교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정신적 해탈을 추구하는 종교인으로서 두려움 없이 세속의 통치자들에게 할 말은 하고, 싸울 건 싸우고 있는가?


이런 좌파적 전통은 근대 여명기에 와서 더욱 강렬해진다. 현실에서 자본주의적으로 강한 중국을 만들려고 하면서도 이상의 차원에서 야만적 자본주의와 국가를 부정했던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물론 그가 ‘유산계급의 개량주의“를 대표하고, 1898년 무술변법 이후 차차 보수화해 결국 복벽운동과 군벌 정치에 휘말리게 됐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하지만, 그의 책 『대동서』(大同書)에 집약된 유교사상은 당대의 사회주의를 뛰어넘는 급진성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는 28세 때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 전선에 남편을 보낸 한 부인의 울음소리를 엿듣고 국가 폭력으로 인한 고통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것을 개인적 득도의 차원이 아닌 ‘좀 더 나은 인류 만들기’의 차원으로 발전시켰다. 전 지구 시민의 결정으로 군대, 국경, 생산 시설에 대한 사유재산제도 등이 철폐되고 세계정부와 각 지역의 자치단체들은 공산적 방식으로 일체 세계인의 민생을 책임지게 된다는 것이다.[각주:6] 범죄도 줄어들게 되지만 유일하게 ‘국가’를 복원하려는 ‘반동적’ 중범자들은 격리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국가소멸을 세계정부가 강력하게 관리하는 형국이다. 강유위는 유교가 이야기할 수 있는 급진성의 결정판인 듯하다. 


역시 근대에 와서도 불교는 비껴갈 수 없었다. 어용화된 불교와 반종교운동에 골몰하는 사회주의 사이에서 붓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에 헌신한 일본 불교 사회주의의 대부 세노 기로(妹尾義郞, 1889~1961). 마르크스주의를 혐오했던 과거의 기로는 농촌의 소작쟁의를 중재하면서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마르크스와 붓다는 뿌리가 달라도 민중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휴머니즘은 같다.”[각주:7] 그래서 그는 ‘나’와 ‘남’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 하나인 불교의 가르침대로라면, ‘나의 정신적 해탈’의 전제조건은 ‘남의 물질적 해방’ 즉 착취의 철폐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붓다 생전의 ‘승려 공동체’야말로 사회주의의 이상인 것이다. 계급적 현실 앞에서 ‘나만의 깨달음’은 무의미하다.[각주:8] 어쩌면 세노 기로는 불교를 통해서 가장 좌파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근대에도 이런 인물은 많다. 그 중에서 요즘 전문가들도 잘 모르는 인물이 있다. 1920~1930년대 공산주의적 사상가 송산 김명식(松山 金明植, 1890~1943). 그의 ‘이광수 파시즘’에 대한 비판글은 너무도 강력하여, 70년 전 글이 지금까지도 시의성을 놓치지 않는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1922)에서 엘리트 지도자들이 이기적이고 나태한 조선 민중에게 집단에 대한 봉사정신을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고, 『우덕송』(1925)에서는 조선 민중을 무거운 멍에를 지고 밭을 갈다가 인간에게 살과 피, 가죽을 주면서 죽는 성인과 같은 소로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지도자론』(1931)에서는 ‘강력한 민족’을 만들기 위해서 대중이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춘원 이광수



김명식의 비판 논리는 명쾌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민족 전체를 계몽·지도하겠다”는 사람은 결국 지배자를 위해 절대 다수의 이익을 짓밟는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계몽·지도가 아니라 지배다. 그것도 극히 폭력적인 지배다. ‘민족’, ‘국민’을 들먹여봐야 그것은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 김명식의 판단인 것이다. 이광수가 숭배한 이순신에 대해서도 “과연 거북선 제조가 이순신의 천재성 덕분일까, 당대 조선의 기술적 수준의 반영이 아니었을까”라고 반문을 던지기도 한다.[각주:9] <명랑>이니 뭐니 하면서 이순신 띄우기에 열중이던 대중문화가 얼마나 허상인지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같아 보인다.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손문이 죽은 후, 국민당과 공산당은 혁명을 두고 끊임없이 싸운다. 모택동은 손문 후기의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를 기치로 내걸고 혁명은 민족 독립과 전 인민의 해방까지 이어지는 과정이라 했다. 훗날 이것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계급투쟁은 존재한다는 영구혁명론을 낳았다. 아마도 혁명은 좋은 것이라는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관념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사유이다. 


동중서는 “하가 무도(無道)했기 때문에 은이 그를 정벌했으며 은이 무도했기 때문에 주가 그를 정벌했으며 주가 무도했기 때문에 진이 그를 정벌하고 진이 무도했기 때문에 한이 그를 정벌했다. 유도(有道)가 무도(無道)를 정벌하는 것, 그것은 천리(天理)이며 그에 의거한 지 오래되었다”[각주:10]고 말한다. 아마도 오랫동안 이어져온 동아시아의 좌파는 끊임없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영구혁명론자들일 것이다. 그들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는 손문의 유명한 말은 무척이나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사유인 셈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시경』, 제2편 「소아(小雅)」 김학주 역주, 명문당, 2010, 607쪽. [본문으로]
  2. 『시경』, 제2편 「대아(大雅)」 김학주 역주, 명문당, 2010, 694쪽. [본문으로]
  3. 전통적으로는 이른바 ‘혁명’을 가리킬 때는 반정(反正)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후한의 하휴는 『춘추』를 ‘수명개제(受命改制)’(즉 혁명)의 책으로 파악하고 『춘추』를 쓴 목적을 두고 “난세를 정돈해서 그것을 바른 상태로 돌린다(撥亂反正)”고 하였다. 근대에 와서 최초로 혁명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손문의 런던 감금 사건과 관련된다. 손문과 친한 미야자키 도텐이 그 사건(“Kidnapped in London”)을 “청국혁명당영수손일선유수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함으로써 그 무렵부터 혁명이란 용어가 재일 중국인들 사이에 점차 정착해 간다. 또한 중국에서는 어법상 “oo의 명(命)을 바꾼다(革)‘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그대로 살아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革文化的命“이라는 문구를 썼는데, 이 말은 문화의 명을 바꾼다는 뜻으로서 문화계의 권위자들의 지배권을 박탁한다는 슬로건이었다.[미조구치 유조 외 엮음, 『중국사상문화사전』, 김석근·김용천·박규태 옮김, 책과함께, 2011, 315쪽.] [본문으로]
  4. 박노자 지음,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34쪽. [본문으로]
  5. 박노자 지음,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31~32쪽. [본문으로]
  6. 박노자 지음,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90쪽. [본문으로]
  7. 박노자 지음,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95쪽. [본문으로]
  8. 박노자 지음,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96쪽. [본문으로]
  9. 박노자 지음,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한겨레출판, 2007, 225쪽. [본문으로]
  10. 미조구치 유조 외 엮음, 『중국사상문화사전』, 김석근·김용천·박규태 옮김, 책과함께, 2011, 31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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