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글, 리좀
ㅡ<나무와 리좀> 편 ①
소개글
나는 대학 밖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스무 살이다. 학교와 인연이 끊긴 지는 햇수로 벌써 4년째인데, 그후로 <남산강학원>에서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함께 쭉 공부하고 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현재 나의 목표는 글쓰기로 벌어먹고 사는 것과 그 벌이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다. 공부의 내공은 현저히 얕으나, 100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있을쏘냐 하는 심정으로 계속 엉덩이 붙이고 있는 중이다(ㅋ).
시작하기 전, 잠깐 이 코너를 소개해보겠다. <나의 삶, 나의 글, 리좀>에서 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통하여 “삶”이라는 것을 공부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컨셉이 진부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현재, 사방에서 ‘삶’을 말하는 게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넘쳐 쏟아지는 이 시대에 무엇이 진짜 ‘나’이고 ‘삶’인지 찾아 헤매는 것인데, 그 시도들이 더욱 과잉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공간을 빌려서 다시 한 번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게 진짜 삶이다’라고 그럴듯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삶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나의 방향이다. 그런데 왜 하필 『천 개의 고원』인가? 이 책은 문장이 몹시 화려하다. 자칫하다가는 삶의 그 소박함과 단단함에 다가가지 못하고 수사적으로 빠질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빛나는 통찰은 수사로 가려지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커다란 충격 속에서 지금까지 쥐고 있었던 ‘삶’이라는 무엇을 놓아 버렸던 것은 바로 이 고원들 위에서였다. 2011년 가을,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충격. 들뢰즈와 가타리는 삶이라는 게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15번 동안 집요하게 보여 주었다. ‘내’가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것. 오직 ‘살아 있다’는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어우러진다는 것을 보았던 순간, 나는 이 역동성이야말로 바로 ‘생명의 역량’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쓰게 될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관된 주제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삶’에서 ‘살아있음’으로 건너뛰는 비약”이다. ‘삶’이라는 내 안의 고정된 패턴을 벗어나서 운동과 역량과 떨림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번 편에서는 먼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경험적인 배경을 나무와 리좀으로 풀어 보겠다.
나무 : 책과 삶의 그 오묘한 관계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현재 나는 18과 1/6년만큼의 시간을 살았다. 한국의 나이계산법에 따르면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 아직 인생을 좀 살아 봤다거나 삶에 대해 말할 만한 자격을 갖춘 나이는 아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셈이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나는 책을 썼다. 그것도 내 ‘삶’에 대해서. 아직 책을 쓰기 전, 그러니까 학교를 이제 막 그만두었을 당시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캐묻듯 물었었다. 왜 학교를 나왔는가, 목적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건가….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핵심을 꿰뚫는 답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 이야기를 밑천 삼아 책을 쓰게 되었는데, 책을 쓰니 몇몇 사람들이 또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인터뷰 질문이 똑같았다. 왜 학교를 나왔습니까, 목적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겁니까, 다른 삶을 택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잃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에. 난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스무 살이란 말이다. 도대체 난 책에 뭐라고 썼던가?
책을 쓰면서 나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삶과 글, 이 두 가지 차원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거울이 된다. 팽팽한 줄다리기 게임인 셈이다. 그리고 책을 쓰면서 나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삶-글 게임에는 알게 모르게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1장 「서론 - 리좀」에서 책을 이렇게 분석한다. “실재의 영역인 세계, 재현의 영역인 책, 그리고 주체성의 영역인 저자라는 삼분법.” 그런데 이러한 삼분법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렇게 패러디 해보면 어떨까? “실재의 영역인 세계, 주체성의 영역인 나, 재현의 영역인 나의 삶.” 물론, 삶이란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판 위에서 뭔가 좋은 것을 일궈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그 ‘좋은 삶’을 ‘일궈내는’ 것에 ‘특수한 고정된 방법’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책과 삶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국어시간에 텍스트를 읽고 핵심내용, 주요형식, 저자의 의도를 딱딱 집어내는 것처럼 삶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으로부터 그것의 핵심적 의미(결과물)를, 그 의미를 발생시킨 결정적 한 방(계기)을, 그 한 방을 가능케 했던 필살기(법칙)를 찾으려는 시도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이런 패턴을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전체판을 하나의 점 혹은 하나의 질서로 고정시키려는 태도다. 그리고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종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체의 동일성, 대상의 동일성, 혹은 장(場)의 동일성 등등. 이를 통해서 나는 외부와 뚜렷한 경계를 가진 ‘나’로 존재하게 되고 삶은 ‘삶’이라는 알 수 없는 실체를 가지게 된다. 즉, 주체와 대상과 장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지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질서나 법칙이 탄생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도 그 동일성을 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했는가. 학교는 나의 삶을 억압하는 나쁜 족쇄였다고? 역시 인문학이 최고라고? 나는 앞으로 훌륭한 학자가 될 생각이라고? 말이 늘어날수록 삶은 근사해진다. 그러나 그 근사함이 말한 자의 것도 아니며, 듣는 자가 자기 삶에서 그 근사함을 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패턴을 ‘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의 특징은 ‘하나’의 뿌리 그리고 그로부터 두 개 혹은 세 개로 갈라지는 가지이다. 질서와 도식, 뚜렷한 테두리와 견고한 격자틀이 늘 나무와 함께한다. 나무는 모든 것에 있다.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나무형 사유, 경직된 나무형 시스템, 고정된 기관들로 구성되는 나무형 신체, 흐름을 통제하는 나무형 공간, 나와 일을 소외시키는 나무형 노동…….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삶에 대한 서사’들 또한 이 도식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분법적이거나 혹은 ‘나’라는 동일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삶’의 차원을 말하라. 현실(삶)―이론, 구체성(삶)―추상성, 유용성(삶)―무용성, 밥벌이(삶)-농땡이. ‘좋은 삶’을 구별하라. 위너-루저, 특별함-평범함, 자유로움-억압, 성공-실패, 행복-우울, 여유-바쁨. 특히 이러한 분법(分法)들이 집중적으로 투하되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다. 청소년이란 이 이분법을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숙지해야만 하는 정체성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청소년에 대한 문제가 주목받는 게 아닐까?) 다양한 말들이 떠돌아다니지만 그것들이 ‘나무형’이라는 관점에서는 모두가 차이 없는 반복일 뿐이다. 이제쯤 진절머리가 났을 법도 한데, 이것 외의 다른 ‘서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금 그 길로 되돌아간다.
삶과 글(책)의 오묘한 관계. 글은 언제나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길어 올려지지만, 삶은 글로서 적힐 때에만 흩어지지 않고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무형 삶과 나무형 글은 서로의 틈새로 갈마든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책’으로 쓰일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고. 책으로 쓰일 만한 삶은 훌륭하다. 단순히 훌륭하다는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들끓는 욕망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그것은 나의 삶이 서사로 구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사로 구성되지 않은 나의 일상은 권태롭고 폼 안 나고 비루한 하루하루일 뿐이다. 그러나 책 속의 ‘내러티브’(Narrative)는 다르다. 박진감 넘치면서 심오하거나 혹은 화려한 인생, 어쨌든 좀 그럴싸하다 싶은 일대기. 그러한 삶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무엇무엇을 한 누구누구 씨” 등등의 제목으로 출간된 수많은 책들이 증명해 주는 듯하다. 우리는 ‘나 또한’ 이 찌질한 일상에서 탈피하고픈 마음으로 훌륭한 책(삶)을 사서 읽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글 혹은 책)과 삶을 따로 분리시켜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앎과 삶의 일치란 앎을 실천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고 이념과 이론에 사로잡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충고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도대체 나는 내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건 다 물어도 이 질문은 잘 던지지 않는다. 위너일 때나 루저일 때나, 몸을 쓸 때나 머리를 쓸 때나, 사실 우리는 대부분 삶에서 미끄러지고 있다. 삶이란 뭐지? 아, 모르겠어, 무거운 질문은 제껴버려. 그러나 삶은 뚝딱뚝딱 혼자서도 잘도 움직인다. 삶은 모두가 별 생각 없이 쥐고 있는 나무형 패턴을 따라서 움직인다. 도처에서 범람하는 나무형 글(말)들이 우리가 꿈꾸는 유일무이한 ‘삶의 서사’가 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라는 주체가, 내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이, 달성해야 할 척도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네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아, 알겠어요. 폼 나는 직업을 가지고 돈깨나 벌면서 주말에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한 달에 한 번은 외식하고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제3세계 어린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부치란 소리죠?”
나무형,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이해한 ‘삶’이다.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던 수많은 말들과 책들이며, 나의 글과 사유가 그럴듯하게 풀어내려고 했던 ‘내 삶’의 초상이다. 딱딱한 나무가 되라는 주문. 어디에나 이 주문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동시에 또 한 가지를 이해했다. 이것과 ‘다른 삶’과 ‘다른 글’은 존재한다는 것. 땅에 뿌리박은 나무가 있다면 반대로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도처에 뿌리내리는 식물도 있을 것이다. 나무형 삶-글 속에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면, 이미 우리는 그로부터 도주를 시작한 것이다.
ㅡ<나무와 리좀> 편 ①
김해완(남산강학원 Q&?)
소개글
나는 대학 밖에서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스무 살이다. 학교와 인연이 끊긴 지는 햇수로 벌써 4년째인데, 그후로 <남산강학원>에서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함께 쭉 공부하고 있다. 뭐하는 사람이냐고? 현재 나의 목표는 글쓰기로 벌어먹고 사는 것과 그 벌이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다. 공부의 내공은 현저히 얕으나, 100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있을쏘냐 하는 심정으로 계속 엉덩이 붙이고 있는 중이다(ㅋ).
시작하기 전, 잠깐 이 코너를 소개해보겠다. <나의 삶, 나의 글, 리좀>에서 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통하여 “삶”이라는 것을 공부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 컨셉이 진부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현재, 사방에서 ‘삶’을 말하는 게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넘쳐 쏟아지는 이 시대에 무엇이 진짜 ‘나’이고 ‘삶’인지 찾아 헤매는 것인데, 그 시도들이 더욱 과잉을 만들어 내는 악순환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공간을 빌려서 다시 한 번 그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게 진짜 삶이다’라고 그럴듯하게 주장하기보다는 삶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나의 방향이다. 그런데 왜 하필 『천 개의 고원』인가? 이 책은 문장이 몹시 화려하다. 자칫하다가는 삶의 그 소박함과 단단함에 다가가지 못하고 수사적으로 빠질 위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빛나는 통찰은 수사로 가려지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내가 커다란 충격 속에서 지금까지 쥐고 있었던 ‘삶’이라는 무엇을 놓아 버렸던 것은 바로 이 고원들 위에서였다. 2011년 가을,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충격. 들뢰즈와 가타리는 삶이라는 게 생각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15번 동안 집요하게 보여 주었다. ‘내’가 ‘삶’을 ‘사는’ 게 아니라는 것. 오직 ‘살아 있다’는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모든 것이 어우러진다는 것을 보았던 순간, 나는 이 역동성이야말로 바로 ‘생명의 역량’이라는 것을 알았다.
파울 클레, <독수리와 함께>
무엇을 쓰게 될지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관된 주제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삶’에서 ‘살아있음’으로 건너뛰는 비약”이다. ‘삶’이라는 내 안의 고정된 패턴을 벗어나서 운동과 역량과 떨림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이번 편에서는 먼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경험적인 배경을 나무와 리좀으로 풀어 보겠다.
나무 : 책과 삶의 그 오묘한 관계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현재 나는 18과 1/6년만큼의 시간을 살았다. 한국의 나이계산법에 따르면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다. 아직 인생을 좀 살아 봤다거나 삶에 대해 말할 만한 자격을 갖춘 나이는 아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셈이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나는 책을 썼다. 그것도 내 ‘삶’에 대해서. 아직 책을 쓰기 전, 그러니까 학교를 이제 막 그만두었을 당시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게 캐묻듯 물었었다. 왜 학교를 나왔는가, 목적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건가….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핵심을 꿰뚫는 답은 내게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내 이야기를 밑천 삼아 책을 쓰게 되었는데, 책을 쓰니 몇몇 사람들이 또 내 이야기가 궁금하다고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인터뷰 질문이 똑같았다. 왜 학교를 나왔습니까, 목적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 겁니까, 다른 삶을 택해서 얻는 것은 무엇이었으며 잃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에. 난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스무 살이란 말이다. 도대체 난 책에 뭐라고 썼던가?
책을 쓰면서 나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삶과 글, 이 두 가지 차원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거울이 된다. 팽팽한 줄다리기 게임인 셈이다. 그리고 책을 쓰면서 나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는데, 바로 이 삶-글 게임에는 알게 모르게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1장 「서론 - 리좀」에서 책을 이렇게 분석한다. “실재의 영역인 세계, 재현의 영역인 책, 그리고 주체성의 영역인 저자라는 삼분법.” 그런데 이러한 삼분법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렇게 패러디 해보면 어떨까? “실재의 영역인 세계, 주체성의 영역인 나, 재현의 영역인 나의 삶.” 물론, 삶이란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판 위에서 뭔가 좋은 것을 일궈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그 ‘좋은 삶’을 ‘일궈내는’ 것에 ‘특수한 고정된 방법’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책과 삶이 오버랩된다. 우리는 국어시간에 텍스트를 읽고 핵심내용, 주요형식, 저자의 의도를 딱딱 집어내는 것처럼 삶 또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삶으로부터 그것의 핵심적 의미(결과물)를, 그 의미를 발생시킨 결정적 한 방(계기)을, 그 한 방을 가능케 했던 필살기(법칙)를 찾으려는 시도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이런 패턴을 뭐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전체판을 하나의 점 혹은 하나의 질서로 고정시키려는 태도다. 그리고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종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주체의 동일성, 대상의 동일성, 혹은 장(場)의 동일성 등등. 이를 통해서 나는 외부와 뚜렷한 경계를 가진 ‘나’로 존재하게 되고 삶은 ‘삶’이라는 알 수 없는 실체를 가지게 된다. 즉, 주체와 대상과 장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지는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질서나 법칙이 탄생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도 그 동일성을 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했는가. 학교는 나의 삶을 억압하는 나쁜 족쇄였다고? 역시 인문학이 최고라고? 나는 앞으로 훌륭한 학자가 될 생각이라고? 말이 늘어날수록 삶은 근사해진다. 그러나 그 근사함이 말한 자의 것도 아니며, 듣는 자가 자기 삶에서 그 근사함을 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야첵 예르카, <방>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패턴을 ‘나무’라고 부른다. 나무의 특징은 ‘하나’의 뿌리 그리고 그로부터 두 개 혹은 세 개로 갈라지는 가지이다. 질서와 도식, 뚜렷한 테두리와 견고한 격자틀이 늘 나무와 함께한다. 나무는 모든 것에 있다.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나무형 사유, 경직된 나무형 시스템, 고정된 기관들로 구성되는 나무형 신체, 흐름을 통제하는 나무형 공간, 나와 일을 소외시키는 나무형 노동…….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삶에 대한 서사’들 또한 이 도식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분법적이거나 혹은 ‘나’라는 동일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삶’의 차원을 말하라. 현실(삶)―이론, 구체성(삶)―추상성, 유용성(삶)―무용성, 밥벌이(삶)-농땡이. ‘좋은 삶’을 구별하라. 위너-루저, 특별함-평범함, 자유로움-억압, 성공-실패, 행복-우울, 여유-바쁨. 특히 이러한 분법(分法)들이 집중적으로 투하되는 시기가 바로 청소년기다. 청소년이란 이 이분법을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방법을 제대로 숙지해야만 하는 정체성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청소년에 대한 문제가 주목받는 게 아닐까?) 다양한 말들이 떠돌아다니지만 그것들이 ‘나무형’이라는 관점에서는 모두가 차이 없는 반복일 뿐이다. 이제쯤 진절머리가 났을 법도 한데, 이것 외의 다른 ‘서사’가 생각나지 않아서 우리는 다시금 그 길로 되돌아간다.
삶과 글(책)의 오묘한 관계. 글은 언제나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길어 올려지지만, 삶은 글로서 적힐 때에만 흩어지지 않고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나무형 삶과 나무형 글은 서로의 틈새로 갈마든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 모두는 ‘책’으로 쓰일 수 있는 ‘삶’을 지향한다고. 책으로 쓰일 만한 삶은 훌륭하다. 단순히 훌륭하다는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들끓는 욕망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그것은 나의 삶이 서사로 구성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사로 구성되지 않은 나의 일상은 권태롭고 폼 안 나고 비루한 하루하루일 뿐이다. 그러나 책 속의 ‘내러티브’(Narrative)는 다르다. 박진감 넘치면서 심오하거나 혹은 화려한 인생, 어쨌든 좀 그럴싸하다 싶은 일대기. 그러한 삶을 향한 우리의 욕망은 “무엇무엇을 한 누구누구 씨” 등등의 제목으로 출간된 수많은 책들이 증명해 주는 듯하다. 우리는 ‘나 또한’ 이 찌질한 일상에서 탈피하고픈 마음으로 훌륭한 책(삶)을 사서 읽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글 혹은 책)과 삶을 따로 분리시켜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앎과 삶의 일치란 앎을 실천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도 아니고 이념과 이론에 사로잡힌 지식인에게만 해당되는 충고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도대체 나는 내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는 다른 건 다 물어도 이 질문은 잘 던지지 않는다. 위너일 때나 루저일 때나, 몸을 쓸 때나 머리를 쓸 때나, 사실 우리는 대부분 삶에서 미끄러지고 있다. 삶이란 뭐지? 아, 모르겠어, 무거운 질문은 제껴버려. 그러나 삶은 뚝딱뚝딱 혼자서도 잘도 움직인다. 삶은 모두가 별 생각 없이 쥐고 있는 나무형 패턴을 따라서 움직인다. 도처에서 범람하는 나무형 글(말)들이 우리가 꿈꾸는 유일무이한 ‘삶의 서사’가 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나’라는 주체가, 내가 상대해야 하는 대상이, 달성해야 할 척도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네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아, 알겠어요. 폼 나는 직업을 가지고 돈깨나 벌면서 주말에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한 달에 한 번은 외식하고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제3세계 어린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부치란 소리죠?”
나무형,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보고 듣고 이해한 ‘삶’이다.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던 수많은 말들과 책들이며, 나의 글과 사유가 그럴듯하게 풀어내려고 했던 ‘내 삶’의 초상이다. 딱딱한 나무가 되라는 주문. 어디에나 이 주문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동시에 또 한 가지를 이해했다. 이것과 ‘다른 삶’과 ‘다른 글’은 존재한다는 것. 땅에 뿌리박은 나무가 있다면 반대로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도처에 뿌리내리는 식물도 있을 것이다. 나무형 삶-글 속에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면, 이미 우리는 그로부터 도주를 시작한 것이다.
조반니 세간티니, 「the evil mothers」
※ 다음에는 <리좀편>이 포스팅됩니다!
나의 삶, 나의 글, 리좀은 2주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
나의 삶, 나의 글, 리좀은 2주에 한 번씩 화요일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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