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3680 인공인간으로서의 주권 - 下 인공인간으로서의 주권 - 下 주권자는 공공의 정신으로서국가의 원기 및 활동이 이로써 위탁[托]되는 바로서 그 위탁을 잃게 되면 국인(國人)은 그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어 흡사 정신을 이탈[脫離]한 사체[死屍]와 같게 된다.─불파사(拂波士), 「主權論」(1895) 사상의 수용과 ‘신체관’그렇다면 여기서 바디폴리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번역자들의 의도 속에서 홉스를 의도적으로 왜곡, 수용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을까? 홉스의 생각은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비판을 받을 만큼 그를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는 논쟁이 있어왔다. 이러한 난점은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인공 신체로서의 국가를 만들 때 이 ‘신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2018. 12. 20.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1. 중·고등학교 시절을 금욕적인(?) 기숙사 대안학교에서 보내면서 나는 별로 놀아본 적이 없었다. 착실하게 공부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때 시골구석에서 나와 친구들이 노는 법은 공놀이, 물놀이, 곶감 만들기, 눈싸움 등 전래놀이 수준이었다는 것. 기껏해야 한 달에 한 번 PC방에 가는 정도. 그래서 대학에 가면 뭐하고 노는지가 궁금했었다. 대학생이 되면 클럽과 술집을 전전하며 인사불성이 되어 방탕하게 놀게 되는 건가? 하는 은근한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대학생들이 노는 법은 꽤나 점잖았다. 술집에서 시작해 PC방, 당구장, 노래방으로 이어지는 놀이 문화는 지금 생각해보면 건전하다 못해 시시하다. 술집에 당당하게 들어간다는 것 외에 고등학생들이 보통 노는 방식과 .. 2018. 12. 19. 니체의 ‘아니오’ (3) 니체의 ‘아니오’ (3) 운명은 두 손을 가지고 있다. 한 손에는 사건이 들려 있으며, 다른 한 손은 우리와 맞잡고 있다. 사건들은 자신의 인과에 따라 자신의 길을 펼치고, 우리 역시 우리 삶의 경로를 따라 걸어간다. 운명은 이런 사건과 우리 자신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건은 운명을 굴리고, 그렇게 다가온 운명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다. 우리는 분명 닥쳐오는 운명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운명이 ‘어떤’ 운명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니체는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운명의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 그 자체로 행복한 사건은 없다, 오로지 우리 자신의 거울에 비친 사건의 얼굴에만 행복이 깃들여 있다, 라고. 우리는 운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오히.. 2018. 12. 18. 보르헤스, 『칠일 밤』-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보르헤스, 『칠일 밤』 -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약에 '열반에 이르기 위해 산다' 또는 '자유가 삶의 목적이다'라고 하면 어떨까? 어떻게 해야 '열반'에 이를 수 있는지, 궁극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저렇게 해서는 안 되리라는 확신이 있다. '~를 위해'라는 형식이나 '목적'에의 지향과 '열반', '자유'가 서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위해' 살면 열반에 이를 수 없고, 자유가 '목적'이 되면 자유로울 수가 없다.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 가장 쉽기 때문에 바로 생각이 나는 그 길은 그렇게 막혀버린다. 여기에서 '길'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는데, 이때의 '길'은 어딘가에 이르기 위한 길이 아닌 셈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길이랄까? 그래서 그 '길.. 2018. 12. 17. 이전 1 ··· 445 446 447 448 449 450 451 ··· 92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