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라는 개념의 함정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임진왜란 연구에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그 산들은 높낮이가 서로 다르고, 모양도 제멋대로 이다. 경사도 제각각이고, 그리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얽혀 있는 사이로는 수많은 크고 작은 계곡들이 사방으로 흘러 내린다.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헤치는 것이 쉽지 않다.
전란은 6년 반이나 지속되었지만, 그 가운데 4년은 대규모 살육이 없었다. 왜적이 부산으로 후퇴하고 그리고 웅크리고 있으면서, 히데요시는 실패해 가는 침략을 어떻게 마무리 짓고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몰두했다. 대량 살육을 멈추니, 중국 명나라는 이를 받아 어떻게 하던 말려들고 만 전란을 끝내려 했다. 조선도 이를 위해 따라오라고 압력을 가했다. 4년여의 이런 과정을 흔히 종전을 위한 “외교”의 과정으로, “외교”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외교”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 “외교”라는 관점에서 이를 들여다 보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까? 길을 잘못 들어서면 실타래를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외교”라는 용어는 근대의 산물이다. 서구 제국은 우세한 군사력을 앞세워 동아시아에 밀고 들어오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마구잡이로 밀어붙였다. 이를 맞아 동아시아 각국은 처음에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야만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요구들은 위협적이고 굴욕적이었다. 이를 밀어붙이는 한 방법으로 서구 열강은 “외교”라는 무기를 휘둘렀고, 동아시아의 각국은 이를 새로운 시대의 “외교”로 이해하면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외교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다.

우리의 시대에는 외교는 모두의 상식이 되어 있다. 외교가 무엇인지 우리는 일상적으로 이를 접한다. 국가의 수반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고, 다른 나라의 국가 수반이 방문하여 온다. 그들은 때로는 대포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장엄한 표정을 짓고, 빳빳하게 도열한 군인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근엄한 표정으로 이들을 둘러보고, 그것이 끝나면 서로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답을 하고, 항상 만면에 웃음을 짓고, 우아한 식사를 하고,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하고는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외교에 있어 단골 메뉴는 안보와 무역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다고 보도가 나온다. 안보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고, 무언가 몇 마디 주고받은 것 같은데 이제는 안보가 굳어졌다는 뉴스가 흘러 나온다. 국익의 증진을 향해 상호의 경제가 더욱 긴밀해 졌다는 뉴스도 빠지지 않는다. 경제는 기업이 하는 만큼, 국가 수반들의 만남에는 경제계의 거물들이 항상 동행을 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 이 모두가 사실일 것이다. 믿지 않을 근거를 찾기 힘들다.
이렇게 해서 각 나라들은 열심히 살아가는데, 지구는 전쟁 없는 날이 없으니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래서 외교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정부 각료들의 순위를 보면 외무부 장관은 대부분 상석에 위치해 있다. 그만큼 외교가 중요하다는 의미이고, 그 산하의 외교관들은 각 나라에 파견되어 일을 한다. 각 나라에 파견된 외교관들은 아예 그곳에서 살면서 뛰어다니며 일을 한다. 해외 주재 외교관들은 엘리트 관료들이며, 누리는 특권도 이에 상응한다.
이러한 외교라는 용어가 뜻하는 의미 내용의 대강을 갖고, 그 의미 내용의 파생 개념들까지 동원하여, 우리는 종종 전근대의 “외교”를 이해하고 설명하려 한다. 전근대의 역사 연구물을 보면 국가간의 문제를 서술함에 있어 외교라는 용어는 넘쳐 흐르고, 독자들은 이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국가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이를 협상을 통해 교섭하여 해결했고 해결하려 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의 외교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두 가지가 도드라진다. 하나는 국가 수반이 상대국을 방문하여 협상을 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외교관이 상대국에 주재하면서 사무를 처리하고 협상을 하는 것이 있다. 외교라는 것의 이미지는 이 둘이 빚어내는 협상과 교섭으로 꽉 차 있다.
그러나, 전근대의 “외교” 맥락은 이와는 판이했다. 국가 수반이 상대국을 방문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른 나라를 방문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왕조의 존망이 좌우될 수도 있고, 무슨 수모라도 겪는다면 그것은 왕조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관료가 다른 나라에 가서 주재하는 경우도 없었다. 전근대 유럽에서는 15세기말부터는 상대국에 대사를 상주시키는 관행이 확산되고 있었지만, 동아시아에는 전무했다.
아무리 중국이 천자의 나라라고 해도 그 천자를 알현하러 조선의 왕이 중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중국의 황제가 국경을 넘어 다른 속방을 방문한다는 것도 있을 수가 없었고, 일본의 쇼군도 자기 국경을 넘은 적이 없었다. 때문에 국가 수반의 상호 방문과 직접 대면은 전무했다. “외교” 관료가 다른 나라에 주재하는 관행도 전무했을 뿐 아니라, 외교관이라는 특정의 전문관료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직책을 임시로 맡기는 것이 전부였다. 나라에 따라 있었던 것은 전문적 통역자 집단 정도로, 그러나 이들의 기능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국가 간의 접촉이나 소통이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접촉과 소통은 있었고, 빈도의 차이가 있지만 접촉과 소통은 연면히 이어졌다. 특히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조선과 중국 사이에는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일본은 바다 건너 있어 접촉이 불편했지만, 현안도 많지 않아 되도록이면 접촉을 피하고, 할 수 없는 경우에 한정해 마지 못해 소통하는 정도였다.
조선 전기에는 북쪽의 여진과 남쪽의 쓰시마 혹은 쓰시마의 통로를 통한 다른 집단들과 빈번한 접촉이 있었다. 청나라를 세우기 이전 여진은 조선에 있어 국경을 침탈하는 목의 가시와 같은 집단이었고, 쓰시마 등은 못 오게 하면 왜구가 되어 해적질을 하는 영원한 두통거리였다. 이들 두 집단은 독자적인 통일 국가를 이룬 정치체는 아니지만, 조선에 있어서는 대외 정책의 근간을 차지했던 최우선 관리 대상이었다.
조선과 중국, 조선과 일본의 현안 해결은 문서를 주고받고, 부수적으로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국가 수반의 편지였다. 때문에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 관료들에게는 자신들이 속한 국가 수반의 편지를 들고 가서, 상대국의 국가 수반에게 전달하고 그 회답을 받아 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국가 수반의 편지를 들고 가는 것 자체가 대사이므로 이들은 큰 행렬을 꾸려 국경을 넘었다.
이와 같은 국가 사이의 접촉에 있어, 외교의 중심이라고 이해되는 “협상” 혹은 “교섭”이 있었던 것일까? 만약 있었다면 그러한 협상과 교섭을 상대국에 파견되는 관료들이 했다는 의미인가? 전근대 국가 사이의 소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협상” 혹은 “교섭”의 실체를 파악하는 과제이다. 지금의 “외교”라는 개념이라면, 당연히 파견되는 관료가 집중하는 실무적인 “협상” 혹은 “교섭”이 중요한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다.
임진왜란 기간의 반 이상을 점하는 4년에 걸쳐 전개되었던 소위 종전을 염두에 두었던 접촉 과정이 국가 사이의 “협상” 혹은 “교섭”으로 읽혀질 수 있다면, 임진왜란을 이해하는데 있어 “외교”라는 개념은 연구의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조선, 명, 일본 사이에 협상 혹은 교섭이 있었던 것일까? 있었다면 무엇을 협상하고, 무엇을 어떻게 교섭했다는 것인가? 이 문제는 임진왜란 이해에 있어 절반 이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핵심적인 키이다.
만약 그러한 이해 틀이 맞다면, 일본이 다시 대대적인 침공을 자행한 1597년의 정유재란은, 종전을 위한 외교의 “협상과 교섭”이 결렬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 있을 것이고, 정유재란의 전개 과정도 이에 따라 술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했던가? 한 발 뒤로 물러나 생각해 볼 문제라 생각하면서, 오늘은 여기에서 일단 이야기를 멈추기로 한다.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되살아난 “천조국”의 망령 (0) | 2025.09.30 |
|---|---|
|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히데요시의 권력욕과 조선 침략 (1) | 2025.08.25 |
|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전란의 기아와 권력 (0) | 2025.07.28 |
|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권력과 폭력에 묻힌 침묵을 찾아 (2) | 2025.06.23 |
|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콩알과 거대한 바위 (2) | 2025.05.26 |
| [허남린 선생님의 임진왜란 이야기] 단조로움과 즐거움의 역설 (0) | 2025.04.25 |
댓글